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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에 대한 집착을 없애야 할 때다

글/ 캐나다 수련생

[명혜망] 최근 명혜편집부의 글 ‘통고’가 중문으로 올라오기 전날, 한 수련생이 누군가가 인터넷에 올린 글을 읽었는데 그들이 파룬따파에 대해 말한 내용을 보고 머리가 혼란스럽다고 했다.

나는 그런 게시물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수련인으로서 우리는 이런 일에 직면하면 수련에서 누락을 찾아야 하며,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스스로 묻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는 이전 수련생에게 일어난 부정적 상황에 대한 게시물이 포함된다.

박해를 견딘 것이 대법을 훼손하는 이유 될 수 없어

‘통고’에서 언급한 인물은 중국의 명문대를 졸업했다. 그는 중국에서 감금됐기에 자신을 ‘영웅’, ‘피해자’라고 규정했다. 사부님께서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수련 중에 난이나 박해를 만나면, 우리는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업을 없애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사부님의 보호가 없었다면 난은 훨씬 더 심했을 것이다. 우리가 겪는 난과 박해에 대해 절대 대법이나 사부님을 비난해선 안 된다.

나 역시 중국에서 왔다. 어렸을 때 나는 반복해서 똑같은 악몽을 꿨는데 꿈에서 어떤 사람이 날 따라다니며 날 해치려 했다. 창밖의 그 사나운 얼굴을 보고 나는 겁이 났다. 어른이 되자 더는 그런 꿈이 없었고 잊어버렸다.

1997년에 대법 수련을 시작한 이후 나는 늘 정진하지 못했다. 2년 후 박해가 시작되자 나는 두려웠지만 계속 믿음을 지켰다. 사부님의 보호 덕분에 나는 파룬궁 자료를 배포할 때 전혀 위험에 빠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주거용 건물에서 자료를 배포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내게 거기서 뭘 하고 있는지 물었다. 나는 겁이 나서 친구를 만나러 왔다고 하면서 가짜 이름을 댔다. 그 사람은 날 의심스러운 눈길로 보며 망설였지만 결국 날 놓아줬다. 집에 돌아온 후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가 내가 어렸을 때 악몽에서 보았던 그 사람이 아니었을까?’

이 사건은 우연이 아니었다. 첫째, 내가 파룬따파를 수련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을 만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을까? 아니다. 사부님께서 날 보호해주시고 내 업을 감당하지 않으셨다면 나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둘째, 나는 많은 사람에게 전생의 빚이 있다. 그러므로 사부님께서 엄청난 양의 업을 감당하셨어도 나는 여전히 그 업을 갚으려면 고통을 겪어야 한다. 만약 내가 정념이 부족해 감금과 고문을 당한다면 나는 박해를 견뎌낸 영웅이 되는 건가? 혹은 대법이나 사부님을 함부로 멸시할 수 있다는 뜻인가? 아니다.

게다가 누군가 집착이 있어서 무책임하게 인터넷에 불평하면 구세력과 중국공산당만 기뻐할 것이다. 수련을 모르는 속인은 대법과 수련생을 오해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파룬궁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다면 그들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한 행동은 그 사람들에게 미래가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모든 수련생은 명혜편집부의 글을 읽고 따르며, 인터넷에서 해로운 내용을 듣지도 읽지도 말길 바란다. 이것은 남도 살리고 자신도 살리는 것이다. 클릭할 때마다 조회수가 올라가면 상황이 더욱 나빠진다. 이것은 대법제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여러 해 수련을 통해 우리는 ‘호기심’으로 우리를 오도하는 인터넷 콘텐츠를 멀리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수련은 신성하므로 이는 참으로 심각한 일이다.

집착심 제거에 대해

중국 전통문화는 신께서 우리에게 전수해주신 것이며 수련의 요소가 담겨 있다. 대표적인 것이 편작이 채나라 환공을 만난 이야기다. 편작은 환공에게 병세가 더욱 심해지니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러나 환공은 아프다는 사실을 거듭 부인하며 자신은 괜찮다고 했고, 결국 죽고 말았다.

우리가 수련에서 집착심을 제거하지 못하는 것과 환공이 병을 치료하지 못하는 것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많다.

사부님께서는 우리 사이에 생기는 갈등을 포함해 집착을 볼 기회를 여러 번 제공해 우리가 집착을 깨닫도록 도와주시지만, 집착을 제거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렸다.

집착은 제거되기를 원하지 않는 생명체이므로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밖으로 보도록 우리를 강요하며,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에 대해 남을 비난하게 만든다. 우리가 이 함정에 빠지면 집착은 살아남는다. 이것을 부정하려면 우리는 강한 정념으로 대법과 사부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며, 그래야만 사부님께서 우리의 집착을 제거해주실 수 있다. 우리가 집착심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을 제거할 방법이 없다. 집착을 갖는 건 우리의 선택이므로 사부님께서도 도와주실 수 없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것을 보거나 들으면 수련생은 안으로 찾아서 관련된 집착을 인식하고 우리가 왜 그 상황에 놓이게 됐는지 이유를 인식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 명혜망, 심지어 대법이나 사부님께 책임을 전가하는 대신 안으로 찾아야 한다. 항상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층차가 떨어지거나 반면으로 향할 것이다.

대법은 우리에게 정말 많은 복을 줬다. 어떤 수련생은 우리가 서로 화합해야 하며 갈등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인식한다. 사람마다 법공부를 잘하고 수련을 잘한다면 이런 화합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추구해서 이룰 수 있는 건 아니다.

이상 내용은 개인적인 인식이다. 부적절한 내용은 지적해주시길 바란다.

[편집자 주: 본문은 글쓴이 개인의 현재 인식에 따라 작성된 것이므로 수련생 여러분께서 서로 교류하고 ‘비학비수(比學比修)’ 하는 데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3년 9월 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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