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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은 다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다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사람에게는 대세에 순응하기 쉽다는 약점이 있다. 한 무리가 떠들썩하면 다른 사람의 표현을 보고 좋고 나쁨을 판단해 따라 하곤 한다. 이런 심리는 속인 중에서 매우 보편적이다.

수련 중에서 우리도 사람의 이런 약점을 갖고 들어오기 쉬운데, 신수련생 중에서 표현됨이 비교적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연마해 건강해진 것을 보면 따라서 연마한다. 또, 다른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을 보면 놀라서 감히 연마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잘하지 못하고 표현이 안 좋으며 법에 부합되지 않은 점이 있으면, 심지어 심각하게 법을 빗나간 언행을 보면 대법을 의심하고 동요하기 시작하는데, 심각하면 수련을 포기하고 대법에서 이탈하게 된다.

물론 신수련생을 탓할 수만은 없다. 속인이나 갓 입문한 신수련생이 완전히 법의 각도에서 문제를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노수련생의 표현을 통해 대법을 인식하고 감성적으로 대법을 인식한다. 대법제자가 잘하면 그 자체가 바로 진상이고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잘하는 대법제자에 대해 속인이 “당신을 보니 대법이 좋다는 걸 알겠네요”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노수련생이 법에 있지 않거나 언행이 법을 위배하면 세인이 대법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데 저해 작용을 일으킨다. 수련인의 표현이 나쁘면 속인은 곧 대법도 안 좋다고 오인하기에 수련인이 잘하지 못할 때는 확실히 사람을 해치는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다른 사람의 표현이 좋고 나쁜지 보고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는 것, 사람을 보고 표현을 보는 것은 속인으로서는 매우 보편적인 일이지만, 이런 심리는 수련에서 큰 해를 일으키거나 누락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수년간 수련한 노수련생 중에서도 이런 정황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사람을 숭배하거나 사람을 따르며 사람을 배우고 법을 배우지 않는다. 사람을 보는 사람은 늘 법이 아닌 인정(人情)으로 사람이나 일의 좋고 나쁨을 판단한다.

예를 들어, 정법 수련 시기에 안전 방면에서 주의하지 않는 것은 법에 부합되지 않음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요행을 바란다. 그런데 이런 행위가 법에 부합되지 않고 난법(亂法)임을 알면서도 제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흐리멍덩하게 따라 한다.

왜 이럴 수 있는가? 사실은 마음속에 대법의 위치를 아직 제대로 놓지 못하고 사람의 감정이 차지하는 비중이 법을 초과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나 일은 늘 자신의 마음에 드는데, 우리는 사이가 좋고, 이 사람은 내게 혜택을 주었으며, 이 사람은 내가 신임하는 가까운 가족이라는 등등이다. 그를 좋다고 여기면 정이 작용해 그가 무슨 일을 하든 그를 보호한다. 설령 그의 언행이 법에 부합되지 않음을 알지라도 반대하거나 제지하지 않고, 심지어는 그와 사이좋게 지낸다. 정과 대법이 충돌할 때, 정의 작용 하에 자신도 모르게 법이 아닌 정을 보호한다.

이것은 바로 마음속에 대법에 대해 근본적으로 이성적인 인식이 없어서 어떤 것을 판단할 때, 대법 진선인(真·善·忍)으로 가늠해내지 못하는 것인데, 심각하게 말하면 바로 마음속에 법이 없거나 아직 시시각각 대법으로 자신의 언행을 지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을 보고, 사람을 본보기로 삼으며, 늘 다른 사람이나 사람마음에 이끌린다.

예를 들면, 중국에서는 행인이나 차량이 빨강 신호등에 지나가는 일이 보편적인 현상인데, 길을 가다가 빨간불이 켜져 있을 때, 건너는 사람이 없으면 다들 건너지 않고 기다린다.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건너가면 다른 사람이나 차도 우르르 건너간다. 중국 각지 대법제자는 이런 현상을 늘 목격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바로 사람에게 군중심리가 있는 것인데,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자신도 따라 하며, 나쁜 짓을 할 때 다 같이 잘못한 것이니 괜찮다는 등 심리가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바로 사람들 마음속에 교통법규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위법 행위를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준법정신이 강한 사람은 마땅히 자각적으로 이런 정상적인 법규를 준수해야 한다고 여기는데, 그것은 자신과 타인의 생명 안전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빨간불에 지나가면 자신이나 타인에게 생명 위험을 줄 수 있음을 알기에 쉽게 다른 사람을 따라 빨간불에 건너지 않거나 절대 건너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장기간 법공부를 하고 마음을 닦아 진정으로 법을 얻어 시시각각 법으로 사람과 일의 좋고 나쁨을 가늠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각종 인정이나 사람마음에 이끌려 법을 벗어나는 일, 심지어 난법하는 일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마음속에 심법의 단속이 있어야 그러한 정력(定力)이 있고, 사람에 의해 좌우되거나 이끌리지 않을 수 있다.

말세의 각종 난상(亂象) 속에서, 그리고 힘겨운 정법 수련의 길에서, 우리는 오직 대법의 기준을 따라야 무엇이 진정으로 좋고 진정으로 나쁜지 알 수 있다. 그래야 각종 가상과 혼란에 미혹되지 않고 줄곧 확고하게 수련의 길에서 최후까지 걸어 나갈 수 있다.

사부님께서 알려주셨다. “사실 우리는 누가 어떠하든 법은 오로지 하나이며, 오로지 이 대법(大法)에 따라 하는 것만이 비로소 진정한 표준이다.”[1] “真(쩐)ㆍ善(싼)ㆍ忍(런)은 좋고 나쁜 사람을 가늠하는 유일한 표준이다.”[1]

우리는 흔히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유일한’이라는 단어를 잊곤 한다. 우리는 장기간 형성된, 사물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한 세트 기준과 관념을 포함해 세간에서 많은 관념을 형성했다. 그러므로 때로는 자신의 관념, 인정, 사람 중의 경험을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표준으로 삼곤 한다. 진선인은 변한 적이 없으며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다. 바로 법은 영원불변하기에 생명이 그를 벗어났을 때 부패하는 것이다.

수련은 다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다. 늘 다른 사람을 본다면, 남도 해치고 자신도 해치며, 우리가 수련하는 길에서 교란을 증가시키고 미혹을 불러올 수 있다. 당신이 그를 좋다고 여겨 숭배심이 생기면 그를 해칠 수 있다. 당신이 그를 나쁘다고 여기면 수련생 사이에 간격이 생길 수 있으며, 심지어 이 때문에 대법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여겨 자신의 바른 믿음이 동요되어 자신도 해칠 수 있다. 노수련생의 잘 수련된 일면은 이미 분리되었기에 남은 것은 사람의 표현일 뿐인데, 사람 이쪽 면을 보면 대부분 가상이다. 대법제자의 진정한 진상은 누구도 볼 수 없고 오직 사부님만 보실 수 있기 때문이다.

대법 수련자로서 이성적으로 대법을 인식하려면, 마음속에 대법에 대해 근본적이고 확고한 신념을 건립하고, 늘 다른 사람을 보는 속인의 관념을 제거하는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근본적으로 법공부를 많이 하고 법이 마음에 들어가도록 배워야 하며, 실천 속에서 하나하나 법과 대조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바로잡아야만 근본적으로 자신을 개변해 마음속에 법이 있는 수련자, 시시각각 법을 운용할 수 있는 진정한 수련자가 될 수 있다.

신수련생은 매일 ‘전법륜’ 외에도 사부님의 ‘7.20’ 이전부터 지금까지의 각지 설법을 체계적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으며, 사부님의 ‘정진요지’, ‘홍음’ 등 경문도 보는 것이 좋다.

또한 명혜망 보는 것을 중시해야 하는데, 특히 신수련생은 더욱 그러하다. 사실 해외에 있든 국내에 있든, 노수련생이든 신수련생이든 명혜망을 꾸준히 보면 시시각각 수련의 개념을 유지할 수 있으며,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바른 믿음을 확고히 할 수 있고, 각종 환경에서도 정법 수련의 길을 바르게 걷고 빗나가지 않을 수 있다.

대법제자가 어디에 있든 단체 법공부를 해서 서로 정진을 촉진할 수 있는 환경이 있다면 가장 좋다. 하지만 이런 환경이 없을 때는 명혜망 보기를 중시하면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 명혜망은 사부님께서 거듭 긍정하신, 전 세계 대법제자가 교류하고 서로 촉진하는 플랫폼이기 때문이다.

20여 년 정법 수련의 경험 속에서 명혜망을 중시하는 대법제자는 모두 매우 큰 수혜를 입었음을 깊이 체험했다. 명혜망의 중요성, 명혜망의 철저함과 순수함, 대법제자에 대한 명혜망의 수련 촉진은 다른 어느 매체와 비교가 되지 않으며, 다른 매체는 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사악이 모든 수법과 수단을 동원하고, 각종 배역의 사람을 시켜 목숨을 걸고 명혜망을 공격하는데, 명혜망을 헐뜯고 비방해 얼떨떨한 수련인에게 명혜망을 멀리하게 한다. 그것들은 더 많은 대법제자가 명혜망이 이끄는 대로 정진하면 자신들이 더 빨리 소멸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확실히 많은 대법제자가 명혜망을 중시하지 않음을 보았다. 해외에 갈 수 있는 수련생과 접촉하면서 피드백을 받았는데, 해외 대법제자는 중국 대법제자보다 명혜망을 중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많은 해외 수련생은 자아 등 사람마음의 방해로 거의 명혜망을 보지 않아 사부님께서 우리의 제고를 빠르게 촉진할 수 있도록 안배하신 기회와 교류의 장을 잃었다. 이렇게 엄혹한 박해를 당하는 중국에서, 사악이 목숨을 걸고 인터넷을 봉쇄하는 환경에서, 중국 대법제자는 봉쇄를 돌파해 모두 명혜망을 보려 한다. 그런데 느슨한 환경에서 명혜망을 볼 수 있는 해외에서는 적지 않은 수련생이 명혜망을 보는 기회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중국에서 명혜망을 중시하고 스스로 명혜망에 접속할 수 있는 대법제자가 많은 지역은 수련생이 정체(整體)를 이루는 상태가 비교적 좋고, 법에 부합된 주견 있는 대법제자가 많으며, 각종 난법과 법을 파괴하는 현상도 비교적 적다. 있다고 해도 세력을 형성하기가 어려우며 빠르게 폭로돼 적시에 제거된다. 나는 해외에도 분명 이런 정황이 있다고 생각한다. 명혜망은 이곳에 순수한 하나의 장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니 우리가 매일 명혜망을 보면 바로 대법의 순수하고 강대한 에너지를 받아들여 수련의 길을 바르게 걸으려는 것을 방해하는 업력과 사악을 깨끗이 제거할 수 있다. 한 수련인이 명혜망을 중시하지 않고 보지 않으면 사악이 가장 기뻐한다.

국내와 해외 수련생 중 참여하는 항목이 많고 일이 바빠서 매일 명혜망을 볼 수 없다면, 최소한 ‘명혜주간’이라도 보는 것이 좋다. 겉으로 보면 ‘명혜주간’은 인터넷에 접속하지 못하는 중국 대법제자를 위해 준비한 것이지만, 나는 명혜망 글 중에서 좋은 교류문장, 보편성이 있고 두드러진 문제를 다루는 교류문장이 ‘명혜주간’에 선별되어 게재되는 것을 보았다. 시기적절하게 이러한 교류문장을 볼 수 있다면 수련에 대해 큰 촉진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매주 금요일 ‘명혜주간’은 읽기용과 듣기용이 발표되므로 다운로드해 보거나 들으면 된다.

수련생들이여, 사부님께서 우리의 빠른 제고와 승화를 위해 제공해주신 기연을 정말 잃지 말자!

마음속에 법이 있고, 명혜망을 중시하고 꾸준히 보는 대법제자는 다른 사람을 보거나 따르지 않고, 사람을 배우고 법을 배우지 않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며, 법에 부합하는 주견을 갖고 정법수련의 길을 바르게 잘 걸을 것이다.

개인의 인식으로서 참고로 제공하오니,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길 바랍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편집자 주: 본문은 글쓴이 개인의 현재 인식에 따라 작성된 것이므로 수련생 여러분께서 서로 교류하고 ‘비학비수(比學比修)’ 하는 데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3년 8월 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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