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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법회] 전염병 3년은 경종, 전력을 다해 사람을 구하다

글/ 중국 동북 대법제자

[밍후이왕]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20년 중공 바이러스(우한폐렴) 전염병이 폭발하면서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이는 대법제자의 수련에도 거대한 경종을 울린 것으로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제한된 시간 내에 더욱 많은 중생을 구할 수 있을지는 저희 앞에 놓인 첫 번째 책임입니다.

아래에 저는 전염병이 폭발해 3년간 어떻게 자아를 돌파하고 사람 마음과 집착을 내려놓고 중생을 구했는지, 그 경과와 체득을 써서 사부님께 보고드리고 수련생과 교류하려 합니다.

1. 전염병 발생으로 처음과 같은 수련 상태를 되찾다

저는 동북의 농촌 현(縣)급 도시에 살고 있는데 이곳은 전국적으로 곡물과 수산물이 풍부한 지역으로 이름났습니다. 남편은 화물 운수업으로 늘 농촌에 화물을 운송합니다. 남편이 일하러 나갈 때 저는 늘 함께했습니다. 그 당시 들판에 줄줄이 늘어선 마을을 보면서 농촌 구석구석을 누비며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소원을 품었습니다.

전염병이 폭발하기 전 10여 년간, 우리 몇 명 수련생은 늘 큰길에서 대면해 진상을 알리는 일을 협력해왔습니다. 이곳의 농업무역 큰 시장, 보행로와 각 역은 우리가 늘 가는 곳으로 1년 사계절 내내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늘 큰길에서 진상을 알려왔기에 많은 사람이 우리를 알아봅니다. 진상에 명백해진 한 사람은 우리 몇 명을 ‘다섯 떨기 금화(金花)’(역주: 황샤오민 등 80년대 중국 수영계 5명 금메달리스트에 대한 별명)로 부릅니다.

2020년, 우리는 예전처럼 각자 착실히 세 가지 일을 했는데 전염병이 갑자기 폭발했습니다. 전염병이 놀라운 속도로 전파될 때 우리 지역에서도 여러 확진자가 나타나 정부는 신속히 도시를 봉쇄하고 관리해 모든 것이 정지됐으며 대법제자가 사람을 구하는 환경에도 큰 변화가 발생했습니다.

저는 시간이 매우 소중하다는 것을 느꼈으며 이 지역 중생을 구하지 못한 자신의 실책을 단번에 의식했습니다. 우리 지역 농촌에 대량의 중생이 아직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건 두려움과 안일함에 얽매여 우물쭈물하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기다리고 의지하는 상태에 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자신의 관념을 고수하면서 점으로 문제를 보고 면으로 문제를 보지 못했습니다. 어디서든지 사람만 구하면 된다고 여기면서 시간을 소중히 여겨 하루빨리 자신을 돌파하지 못했습니다.

전염병이 완화된 후 저는 더는 기다리고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농촌에 내려가 사람을 구하기로 작심했습니다. 이는 제가 다른 사람에 비해 강해서가 아니라 실제 상황은 우리 이곳에 수련생이 적으나 직면한 중생은 많기 때문입니다. 저와 협력하는 수련생들은 이미 70세에 들어섰고 저는 50세로 가장 젊었으니 제가 가지 않으면 누가 가야겠습니까? 사람 마음의 집착을 내려놓고 저는 수련을 처음과 같이하는 상태를 되찾았습니다. 막 법을 얻었을 때의 열정으로 전력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며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사람을 구했습니다.

2. 농촌에서 광범위하게 자료를 배포하고 진상을 널리 전하다

전염병으로 인한 도시봉쇄가 풀리자 진상을 전파하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저는 농촌에서 진상자료를 배포하기로 했으며 발걸음을 대체할 수 있는 도구는 오토바이였습니다. 저는 오토바이를 탈 줄 아는 수련생 A를 찾아가 오토바이를 타면 농촌에 내려가기 편하니 함께 가서 사람을 구하자고 교류했더니 그녀는 동의했습니다. 저희는 농민 같은 옷차림을 했는데 이렇게 해야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우선은 저희 현시 동쪽 농촌에 내려가 진상자료를 배포했습니다.

농촌에서 진상자료를 배포할 때 심리적 압박이 정말로 매우 컸습니다. 우선 직면한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이 두려움은 예전에 농촌에 내려가 사람을 구할 때 붙잡힌 후에 생긴 것으로 사악은 육친의 정으로 저를 직간접적으로 박해했습니다. 비록 사부님의 보호로 어렵게 지나왔으나 그늘이 남았습니다. 저는 자신의 사상 깊은 곳에서 박해로 인해 생긴 사람 마음을 바로잡고 기점을 바로 하려 노력하면서 신사신법(信師信法)했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심성이 다소 향상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마을에서 걸어 다니며 진상자료를 배포했습니다. 두 번 이렇게 자료를 배포해보니 너무 느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자서 자료를 배포하니 느리고 힘들었는데 이래서야 언제 끝낼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지금은 사람마다 핸드폰이 있어 시시각각 신고당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사람 마음이 저를 틀 속에 갇히게 했고 지혜를 닦아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사부님의 법을 공부하다가 ‘무술기공’에서 더욱 좋은 자료 배포 방법을 깨우쳤습니다. 그건 바로 오토바이를 타고 표창을 날리듯이 자료를 배포하는 것입니다. 이는 손과 눈썰미가 빨라야 했고 뇌에서의 반응과 조율 능력이 일정한 수준에 올라야 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修在自己),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功在師父)”[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토바이를 타야겠다는 소원이 나온 뒤로 딱 한 번의 연습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진상자료를 배포할 수 있었고 한 개 마을을 아주 빠르게 배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사부님의 가지(加持)와 격려를 체득했습니다.

그 후 사부님께서는 꿈으로 저에게 진상을 널리 전할 것을 점화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저는 또 오토바이를 탈 줄 아는 수련생 B를 찾아냈습니다. A, B는 모두 여성 수련생으로 나이가 저보다 많았습니다. 저희 3명은 협력해 낮에는 농촌에서 자료를 배포했습니다. 수련생 A와는 중단거리에서 배포, B와는 장거리 지역과 편벽한 산간 지역, 시골에 진상자료를 배포했습니다. B는 운전기술은 아주 좋아서 젊은이들 같았으며 농촌 대부분 지역에서의 자료 배포는 대부분 B와 함께 했습니다.

먼 곳에 자료를 배포하려면 각 향진(鄕鎭)의 마을 노선을 파악해야 했습니다. 낯선 곳에 타지 사람이 두 명이나 오면 쉽게 주민들의 주의를 불러일으키기에 각 마을의 이름이 무엇인지 기억해야 했습니다. 만약 누군가 질문했을 때 바로 이웃 마을의 이름을 말하면 쉽게 의심을 사지 않게 됩니다. 노선에 익숙해지기 위해 저는 인터넷에서 저희 현시의 위성지도를 찾아 각 향진에 몇 개 마을이 있으며 이름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익숙할 정도로 마음에 기억했습니다. 나가서 진상자료를 배포할 때 핸드폰으로 방향을 안내할 필요가 전혀 없었고 오직 기억에 근거해 정확히 찾아다녔습니다. 수련생은 그런 저를 보고 살아있는 지도, 살아있는 나침판이라고 했습니다.

매번 자료를 배포하러 나갈 때마다 저는 자신을 신이라 생각합니다. 신은 무엇을 하든지 신속(神速)하며 사람 연령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저는 공능을 두 손에 집중하는데 눈으로 여섯 곳을 바라보고, 귀로는 팔방의 소리를 들으며 손놀림은 날렵합니다. 그 과정을 겪으며 저는 두 손이 좌우로 날아다니는 것을 연마해냈고 또 상하 전후로 진상자료를 날려 넣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오토바이가 빨리 달려 두 집을 놓쳤다면 저는 몸을 돌려 두 부의 진상자료를 표창을 날리듯이 집 마당 안에 ‘쌩쌩’ 던져 넣습니다.

저와 B는 편벽한 시골 마을에 다녀왔는데 매번 왕복 100~150km 거리였으며 매번 300~400부의 진상자료를 배포했습니다. 가장 많을 때는 7~8개 마을에 배포했습니다. 저희는 마치 준마를 탄 듯이 각 마을을 꿰뚫으며 질주했습니다. 그녀의 운전기술이 좋아 저를 태우고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 수 있어서 저는 거의 내리지 않고 배포할 수 있었고, 한 마을에서 몇 분이면 진상자료 배포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추구한 것은 바로 이런 효율이었습니다.

진상자료를 배포하는 과정에서 어떤 마을의 주민들이 문 앞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저희 둘이 오토바이를 타고 춤추듯이 두 손으로 집집마다 마당에 진상자료를 날려 넣는 것을 보고 그들은 즐겁게 웃었습니다. 이 수법이 매우 좋다고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놀라운 눈길로 저희가 쾌속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다가 다시 정신 차려 진상자료를 주워 보는데 우리는 이미 온데간데없었습니다. 또 어떤 농민은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진상자료가 마당 안에 날아들면 바로 주워들고 집에 들어가 읽었습니다. 또 어떤 마을 사람들은 저희가 이렇게 쾌속으로 진상자료를 배포하는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와! 붙잡힐 걱정을 덜었네요. 이게 바로 ‘쌩쌩쌩’이지!” 그들은 모두 우리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갈채를 보냈습니다.

농촌에서 여기저기 달리며 자료를 배포하는 일은 정말로 매우 힘듭니다. 2020년 며칠간 저는 정말로 매우 힘들어서 집에서 좀 쉬면서 법공부를 많이 하며 자신을 좀 추스르고 나서 다시 배포에 나서려 했습니다. 어느 날 점심, 낮잠을 자다 꿈을 꾸었습니다. 쇠로 된 큰 빨래 대야에 물이 가득 담겨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농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줄을 서서 저에게 다가왔는데 그중 한 명이 저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진상 하나 주세요.” 깨어나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는 사부님께서 저에게 가만히 있지 말고 계속해 진상자료를 배포하라는 점화였습니다. 사람을 구하는 것이 급했습니다! 전염병이 비록 완화됐으나 또 수시로 재발할 수 있으므로 반드시 시간 앞에서 달려야 했으며 해야 하는 일을 끝내야 했습니다. 이튿날 저는 수련생과 함께 다시 배포에 나섰습니다.

저는 B와 함께 2020년 마지막 한 차례 진상자료를 배포했는데 그날은 11월 14일이었습니다. 이미 초겨울이라 날씨가 매우 추웠습니다. 저희는 패딩을 입고 왕복 150km를 달렸습니다. 돌아오는 도중에 갑자기 하늘에 금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나타났는데 저희는 매우 감탄했습니다. 사부님의 격려였습니다!

지금 저와 수련생은 계속해 이런 방식으로 밍후이왕에서 발표되는 최신 진상자료를 배포하는데 중점지역은 편벽한 마을과 산간 지역입니다. 올해 봄, 저희 현시에 또 전염병이 폭발해 전국에서 고위험지역으로 됐습니다. 봉쇄가 풀린 후 저는 B와 함께 저희 지역에서 가장 남부에 있는 편벽한 산간 지역 마을에 자료를 배포했습니다. 비록 매일 왕복 50km를 달렸으나 저희는 조금도 힘든 줄을 몰랐고 중생이 진상에 명백해지는 것이야말로 저희의 소원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진상자료를 배포하는 날, 하늘이 가없이 푸르렀고 흰 구름에 맑은 바람이 불었으며 대지는 짙은 녹색으로 생기가 돌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먼 하늘에 무수한 층층의 흰 상서로운 구름이 나타났습니다. 저희는 가던 길을 멈추고 바라보면서 무한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이는 사부님께서 수련의 길에서 용맹정진하라고 격려하시는 것이었습니다.

3년간 저와 수련생은 협력해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저희 현시 동서남북을 다 돌았습니다. 저희는 산을 넘고 재를 넘으며 대량의 진상자료를 배포했습니다. 저희는 일부 편벽한 농촌의 공백 지역 구석구석을 누비며, 또 10여 호만 사는 지역에도 진상자료를 배포했습니다. 그들 모두 사부님의 가족으로서 빼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의 이런 자료 배포는 여러 사람의 인력을 감당한 것으로 인력과 물력을 아낄 수 있었습니다. 달리는 과정에 늘 까치가 나뭇가지에서 우는 소리를 들었고 때때로 무리 지은 까치가 앞 방향에서 날아다니며 울었습니다. 그들도 아마 중생이 파룬따파(法輪大法)의 제도를 얻어 환호하는 것 같았습니다. 수련생들도 모두 탄복했습니다. 두 명이 작은 오토바이로 어려웠던 농촌의 자료배포를 해결한 것입니다. 그녀들은 저희가 이렇게 진상자료를 배포하는 것은 ‘천녀산화(天女散花: 천녀가 꽃을 뿌리다)’라고 했으며, 저 또한 농촌 구석구석을 다니며 사람을 구하려던 소원을 실현했습니다.

3. 정체(整體)로 협력해 장날에 사람을 구하다

제가 이전에 사람을 구하는 방식은 길에서 대면해 진상을 알리는 것으로 최근 몇 년간은 늘 농촌 장날에 진상을 알렸습니다. 왜냐하면 장날에는 사람이 많고 진상을 알릴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전염병이 폭발한 후 수련생들은 모두 사람을 구해야 하는 긴박성을 느꼈습니다. 한 남자 수련생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자가용으로 수련생들과 함께 농촌 장날에 사람을 구하자고 제안해, 여러 수련생이 협력해 장날마다 대면해 진상 알리기를 견지해왔습니다. 겨울에 자료 배포가 어려워지면 저는 혼자서 버스나 택시를 타고 장날에 사람을 구했습니다.

저의 현시에서 가장 남쪽은 큰 진(鎭)으로 절반이 산간 지역이며 130km 길입니다. 그곳 장날에는 아직 가보지 않았고 장날에 진상을 알리는 다른 여러 수련생도 가본 적이 없어서 저는 속으로 늘 그곳 중생이 염려돼 그곳 장날에 사람을 구하리라 결심했습니다.

농촌은 열흘에 한 번 장날입니다. 12월 초 장날에 저는 B와 함께 갔습니다. B는 현시의 남쪽 어느 진에 살고 있어서 저희 집과 25km 떨어졌으며 가장 남쪽 진으로 통하는 길목에 살았습니다. 전날 밤에 저는 그녀 집에서 묵었다가 이튿날 아침 택시로 장날에 가려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밖이 매우 추웠고 길 또한 멀어 속으로 장날에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 짐작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B의 진에서 오전 내내 진상을 알렸습니다.

돌아와서 며칠 후 길에서 진상을 알렸습니다. 또 그 진의 장날이 다가왔고 가보고 싶었으나 또 어려움을 느끼는 심리가 작용했습니다. ‘춥고 먼 길이고 또 시달려야 하는데, 어디에서 진상을 알리든 모두 사람을 구하는 게 아니겠는가?’ 제가 우유부단할 때 아침 6시 발정념 시간이 됐고 갑자기 천목으로 한 무리 닭이 보였습니다. 저를 보더니 선홍빛 닭 볏을 흔들며 기쁘게 뛰어왔습니다. 저는 단번에 깨달았습니다. 이는 사부님의 점화로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됐습니다. 그곳에서 진상을 알리는 대법제자가 없으므로 먼 길이라도 가야 했습니다!

발정념을 마친 후 저는 즉시 B에게 전화로 집에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저희는 택시로 그곳 진으로 갔습니다. 처음 이곳 장날에 와보니 사람이 꽤 많았으며 저는 한 명에게 진상을 알리고 나서는 대법 진상 호신부를 건네주며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 9자진언을 알려줬습니다. 중생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삼퇴했습니다.

저는 한 노인에게 삼퇴하면 평안을 지키는 일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알고 있어요.” “누군가 말씀드렸군요? 탈퇴하셨나요?” “안 했어요.” “그럼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배포한 (진상) 소책자에서 봤어요.” 다시 물어보니 그는 붉은 스카프(중국공산당 소년선봉대에 가입한 상징)를 맸었으며 삼퇴를 말하니 통쾌하게 탈퇴하겠다고 했습니다.

노인에게 진상을 알리고 나서 마음으로 위안이 됐습니다. 왜냐하면 저와 수련생이 전에 이곳에 진상자료를 배포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멀고 편벽해 한번 진상자료를 배포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저희는 사람 마음을 돌파해 이곳 마을과 삼림 농장에 모두 자료를 배포했습니다. 중생에게서 피드백을 받으니 정말로 기뻤습니다. 저와 수련생은 이곳에서 50여 명의 삼퇴 명단을 받았습니다.

이전에 저는 진상자료 배포를 중시하지 않았지만 전염병의 출현으로 제 원래 관념이 개변돼 농촌에 내려가 광범위하게 진상자료를 배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역시 사부님께서 세인의 입을 통해 저희에게 격려해주신 것으로 어떠한 사람을 구하는 방식이든지 빼놓아서는 안 되며 진상을 구석마다 전해야 합니다.

2020년 12월 하순, 타지에서 일하는 남자 수련생이 돌아왔습니다. 자가용이 있어서 수련생이 그와의 교류를 통해 그도 농촌 장날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렇게 저희는 두 대의 전용 차량이 준비됐습니다. 저희는 4명 수련생이 한 팀으로 됐는데 어떨 때는 3명이 한 팀이 됐습니다. 차량 두 대가 서로 다른 장터로 내려갔으며 매번 대법 진상 호신부와 진상 USB 등 자료를 준비했습니다. 수련생도 진상 소책자를 준비해 사람들에게 여러 자료를 건넬 수 있었습니다. 기사 수련생이 차량을 밖에 세워두고 몇 시에 다시 만날지 정했으며 시간이 되면 서둘러 돌아왔습니다. 저희 네 명은 많을 때 백여 명을 탈퇴시켰고 적어도 수십 명은 탈퇴시켰으며 매번 안전하게 귀가했습니다.

2021년 1월 중순, 저희 성(省)에 또 새로 전염병이 폭발해 현시마다 다시 방역 통제를 했습니다. 저희가 쉴새 없이 여러 마을 장터에서 자료 배포를 끝내자 마을마다 봉쇄가 됐습니다. 저희가 시간 앞에서 달려 모든 장터를 다 돌 수 있었던 게 참으로 다행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도시에는 확진자가 없었으나 중공이 전염병에 대한 통제 관리를 실시해 사람들이 갇혀 집집마다 감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통제 관리가 막 시작됐을 때 저와 수련생은 여러 향진의 장날에 갔었는데 적은 노점상과 장날에 모인 농민들이 있었으나 이미 현지 파출소 경찰과 방역을 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쫓아내고 있었습니다. 저와 수련생은 기회를 이용해 진상을 조금 알릴 수 있었으나 이후에 농촌에 내려가 사람을 구하기는 어려워질 것 같았습니다.

섣달 칠팔일은 동북에서 일 년 중 가장 추운 날입니다. 섣달 칠일 저는 기사 수련생과 약속하고 B와 함께 저희 현시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진에 갔습니다. 그곳은 꽤 큰 진으로 사람이 매우 많았고 도시를 빠져나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도로가 있어 오가는 차량이 길을 내줘야 했습니다. 연말이 다가오므로 저는 그곳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꼭 새해맞이 물품을 사러 오는 사람이 있을 거로 생각했고 진상을 알릴 수 있으면 알리면 되고 알릴 수 없으면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농촌으로 통하는 도로를 달릴 때 길 양편 나뭇가지에 눈꽃이 가득 피어났습니다. 그날은 영하 29도로 특별히 추웠습니다. 마을은 이미 봉쇄된 상태였고 사람이 있다 해도 방역 인원이었으며 엄격하게 검사하고 낯선 사람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었습니다.

진에 도착하니 방역 선전 확성기에서 끊임없이 주의사항을 방송하고 있었고 경찰차와 방역 차량이 오가며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길거리에 사람이 조금 있어 기사 수련생이 차를 좀 먼 곳에 세워놓고 저희 둘을 기다렸습니다. 저와 수련생이 진에 들어가 인연 있는 사람을 찾아 진상을 알렸는데 둘이서 30여 명을 탈퇴시켰습니다. 늘 경찰차가 순찰하고 있어서 저희는 곧 떠났습니다. 중생이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을 때 다행히 저희가 왔고, 사부님께서 저희를 도우셨기에 아무리 어려워도 통하는 길이 있어 갈 수 있었습니다.

섣달 팔일, 저는 북쪽에 있는 큰 진으로 가보기로 했습니다. 그곳에 수련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곳에 사람이 많을 것이라 단정했고 도착하면 진상을 많이 알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진 정부에서 이미 방역 카드를 사용했으나 농민들이 물건을 사러 들어가게 했으며 우리는 기회를 타 따라 들어갔습니다. 이날은 기사 수련생이 저희 수련생 세 명을 태워 갔습니다. 저와 B, 그리고 출근하는 수련생이었습니다.(그날은 그녀가 휴가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진은 동서로 도로가 뚫렸고 저희는 동쪽에서 들어갔습니다. 입구에 이미 방역 카드 검사가 있었으나 당직원이 저희에게 묻지 않아 그냥 차를 몰고 들어갔습니다. 저는 기사 수련생에게 차를 가장 서쪽으로 나가 진 밖에서 저희를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저희는 안에서 밖으로 나가면서 진상을 알렸는데 서쪽에서 동쪽 끝까지 진상을 알리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제 예상처럼 여기저기서 물건을 사러 온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이날은 눈바람이 부는 날로 매우 추웠고 바람에 눈이 섞여 얼굴을 때렸습니다. 잠깐 사이에 눈썹에 성에가 맺혔고 모자에도 전부 눈과 성에가 피었습니다. 저와 B는 남쪽과 북쪽으로 나눠 맡은 후 안에서 밖으로 그물을 당기는 식으로 진상을 알렸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막고 하나의 기회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전염병이 거듭 나타나면서 저는 중생이 구원받을 기회가 갈수록 적어진다는 느낌이 들어서 한 명을 만나면 구원에 나서야 했습니다. 한 사람에게 진상을 알리고 나면 곧바로 다음 목표를 찾아갔습니다. 시간제한이 있어 사람을 빼앗아내듯이 해야 했고 저는 거의 달리듯이 진상을 알렸습니다. 또한 때때로 오가며 순찰하는 경찰차와 방역 순찰차를 지켜봐야 했는데 조금도 마음을 소홀히 할 수 없었습니다.

저희와 함께 나선 출근하는 수련생은 평소에 시간이 없었기에 진상을 알릴 기회가 적어 조금은 대담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제가 달리듯이 하나의 기회라도 놓칠새라 진상을 알리는 것을 보고 이끌림을 받아 만나는 사람마다 진상을 알렸습니다. 차에 앉아 돌아올 때 그녀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을 따라 배워야겠어요. 당신처럼 자발적으로 사람을 구해야겠어요.” 저는 그녀를 보며 웃었습니다.

섣달 팔일, 이날은 날씨가 좋지 않았으나 저와 수련생은 눈바람과 엄동설한, 전염병 통제를 극복하며 이곳의 안에서부터 밖으로 한번 훑어 셋이서 60명을 탈퇴시켰습니다.

이튿날 기사 수련생은 또 저희 네 명을 태워 이 진으로 왔으며 저희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안에서부터 밖으로 진상을 알려 이번에는 80명을 탈퇴시켰습니다.

이렇게 세 차례 전염병 통제 관리 기간에 농촌에 내려가 사람을 구했는데 정말로 뜻밖의 수확을 얻었습니다. 원래는 나가는 게 어렵고 나가서도 진상을 알리기 어려울 거로 생각됐으나 수련은 바로 이렇게 신기했습니다. 실천하는 과정에 저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해내어야 수련이로다”[2]라는 법의 한층 내포를 체득했습니다.

4. 심성을 제고한 후 신체적 변화

2021년 우리 지역에서 제작하는 밍후이 탁상 달력이 성에 두 차례 전염병이 폭발하는 사이에 완성됐습니다. 돌이켜보면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이는 여러 명이 협력해야 완성할 수 있는 항목이었습니다. 또 현지에서 ‘제로화 행동’ 소란과 전염병 통제 관리로 수련생은 밤낮 압력을 받으며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협력해 완성한 것입니다.

제가 밍후이 달력 제작에 참여했기에 전반 과정을 목격했으며 달력 하나마다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볼 수 있었고 수련생의 노고와 대가가 담겨 있어서 배로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배포할 때 더욱 엄숙히 대했습니다. 수련생이 사전에 주문한 달력 외에 남은 달력을 저와 수련생은 상의를 거쳐 편벽한 농촌 마을에 배포하면서 삼퇴 명단을 많이 받아오기로 협의했습니다. 달력을 한번 만드는 일은 쉽지 않기에 너무 마음대로 배포할 수 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구함에 있어서 마땅히 일으켜야 할 효과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마을에서 달력을 배포하며 삼퇴를 권하는 일은 집집마다 대면해 진상을 알리는 것과 같은데 이 방면에서 저는 아직 돌파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두려움이 있었고 누군가 고발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수련은 현실을 마주하고 끊임없이 돌파해야 하는 것으로 어려워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저는 끊임없이 자신을 조정해 부정적 사유를 억제하고 정념이 강대하게 했습니다. 저와 B는 오토바이를 타고 매번 수십여 개의 달력을 지니고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집에 사람이 있으면 마당에 들어가 달력 하나를 주고 삼퇴를 권했습니다. 저희가 간 곳은 다른 수련생이 가지 않았던 곳으로 진상자료는 저희가 이전에 이미 배포했었습니다. 대법 진상 달력이라고 소개하자 사람들은 즐겁게 받아들였고 기쁜 마음으로 삼퇴하면서 거듭 고맙다고 인사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파룬따파라는 소리를 듣고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파룬따파는 하여간 좋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희는 매일 나가서 수십 명을 탈퇴시켰습니다.

산속에 편벽한 두 개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그중 한 마을에 열두 집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평소에 진상을 볼 수 없었기에 저희는 지지난해에 진상자료를 배포했었습니다. 이번에 저희 둘은 특별히 밍후이 달력을 들고 갔습니다. 먼 길이고 작은 마을이나 중생은 모두 사부님의 가족으로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빠뜨릴 수 없는 것으로 책임과 소임을 다해야 합니다. 먼 길이라 오토바이에 갖고 갈 수 있는 탁상 달력이 적었습니다. 저희는 기사 수련생과 협력해 차를 몰고 두 번이나 먼 길에 있는 마을에 가서 탁상 달력을 배포했습니다. 네 명이 두 팀으로 나뉘어 수백 개 달력을 배포했으며 두 번에 모두 200여 명을 탈퇴시켰습니다.

달력을 다 배포하지 못했을 때 성에 또 전염병이 폭발해 저희 현시에서 다시 통제 관리를 했습니다. 저는 B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농민 옷차림으로 꾸민 후 농촌에 내려가 남은 달력 배포를 마쳤습니다. 전염병으로 긴장한 분위기가 되자 농촌 마을의 길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 적었습니다. 냉랭한 길거리는 사람에게 처량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추수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관리가 아직 그다지 엄하지 않았습니다.

저희 둘은 안전에 매우 주의하며 방역 카드 검사를 하는 곳은 비켜서 다녔습니다. 사람이 보이면 저는 차에서 내렸습니다. 한 노인이 길옆 밭에서 볏짚을 묶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를 불렀더니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제가 그에게 달력을 주자 받은 후 공경한 태도로 손에 받들고 “명백하게 앎은 복이로다”라고 진지하게 읽었습니다. 그의 이런 모습을 보며 저는 크게 감동했습니다. 중생은 정말로 저희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구나! 저는 순조롭게 그를 도와 삼퇴시켰습니다.

남쪽 진 서쪽 끝에 네 명의 어린이가 길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전염병으로 학교도 방학했습니다. 저희 둘은 얼른 차에서 내려 그들을 불러 진상을 알린 후 소선대에서 탈퇴시키고 진상 USB를 건네줬습니다. 마지막에 그들에게 9자진언을 기억하라고 하자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대답했습니다. “기억했어요. 이미 다 외웠어요.” 그날 저희 둘은 수십 명의 탈퇴명단을 갖고 귀가했습니다.

전염병 통제 관리도 저희가 농촌에 내려가 진상 달력을 배포하며 사람을 구하는 일을 막을 수 없었고 제일 마지막으로 배포를 끝낼 때는 11월 2일이었습니다. 날씨는 이미 매우 추웠고 저희의 이 항목도 원만하게 마무리됐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돌파했기에 심성이 제고됐고 처음 달력을 배포한 후 저에게 일종 초범적인 상태가 나타났습니다. 신체가 특별히 가벼워 일종 꿰뚫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걸음도 갈수록 빨라지고 힘들지 않았습니다. 밤에 자지 않아도 졸리지 않았으며 특별히 정신이 또렷했습니다. 이에 수련생은 “당신의 심성이 승화됐기에 신체에 비로소 상응한 변화가 나타난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맺음말

이는 3년간의 일부 수련 경험과 체득입니다. 이 3년은 저에게 있어서 자아를 돌파하고 걸음을 내디뎌 사람을 구하며 위로 승화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사람을 구해야 하는 긴박감은 제가 길에서 계속 달리는 느낌을 받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참기 어려운 것도 참을 수 있고, 행하기 어려운 것도 행할 수 있다(難忍能忍, 難行能行).”[1], “만약 당신이 정말로 해낼 수 있다면, 당신은 정말로 고난 속에 광명이 있음(柳暗花明又一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1]라는 말씀을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여전히 저희를 위해 시간을 연장하며 거대한 감당을 하고 계십니다. 저희는 얼마 남지 않은 정법수련 기연(機緣)을 소중히 여겨 세 가지 일을 잘해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어긋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 사부님의 시사: ‘홍음-착실한 수련’

(밍후이왕 제19회 중국 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

 

원문발표: 2022년 11월 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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