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무엇이 제고를 가로막고 있을까? 

글/ 중국 허베이(河北)성 대법제자

1. 제고를 가로막는 근본 요소는 무신론, 진화론, 현대 관념 의식이다

나는 중공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어릴 때부터 왜곡된 무신론과 진화론을 주입받으며 자랐다. 수년간 수련하면서 무신론에 대한 것도 많이 깨달았고, 제거한 것도 적지 않지만 사부님의 ‘홍음6’이 발표된 후 반복해서 보고 나서야 사부님께서 ‘무신론’, ‘진화론’, ‘현대 관념 의식’을 여러 번 언급하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비로소 두뇌가 단번에 열린 느낌을 받았고, 사부님께서 모든 설법에서 하신 말씀이 진실하고 분명히 존재하며, 우주의 낮은 곳부터 끝없이 높은 곳까지 불도신(佛道神)이 허공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세상은 원래 불도신으로 가득 차 있었고, 사람이 있는 공간은 이 우주의 극히 미미한 일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중공의 무신론, 진화론의 영향에 현대 관념의 작용이 더해져 인간의 사고와 의식을 육안으로 본 가상으로 가득 찬 현실의 인류 공간에 맹목적으로 국한했다. 무신론 주입의 영향을 받은 데다 사람의 이 두 눈이 본 범위가 사람이 인정하는 우주 공간을 포함한 인간 세상에서 본 이 일체에만 국한되기 때문에 대다수 사람은 신불(神佛)을 믿지 않는다. 사람은 소위 현대 과학기술 설비의 도움으로 본 것 이외의 것을 포함하여 사람의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은 쉽게 믿지 않는다. 무신론 진화론과 현대 관념으로 형성된 걸림돌은 대법 수련자로서 사상과 이치에서부터 배제해야 한다.

사실 신이 보는 인간 세상은 우리가 보는 것보다 더 분명하다. 이론과 가설이 아니라 실제적 존재다. 오직 사람만이 자신과 남을 기만하면서 생존하고, 또 자신이 대단히 똑똑하다고 느낀다. 수련자를 말하자면 대법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도 대법에 동화하지 않은 표현이다. 우리는 사부님의 설법 중 백지와 검은 글자만 인정하고 대법의 진실을 이성적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정말로 이성적으로 대법의 의미를 깨달으면 천목이 열렸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은데, 법에서의 깨달음은 천목으로 보는 것보다 더 넓고 높기 때문이다. 수련하면서 천목으로 본 것은 역시 매우 제한적이지만 이성적으로 깨달은 진실함은 넓고 높기로 끝없다. 이성적인 깨달음의 진실은 자신의 수련을 더 이성적이면서 역동적으로 만들고, 마음도 더 평화롭게 하는데, 자신의 몸은 인간 세상에 있지만 사유 혹은 진실한 자신은 하늘에 있고, 심지어 신불(神佛)과 함께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미묘함은 일종의 확실한 구현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대법을 통해 우주와 통함을 스스로 느끼는 것은 대법에 동화한 후의 힘과 감각이다. 이런 힘과 감각은 자신을 해이하지 않고 더 정진하게 만든다.

2. 사람의 이치로 문제를 보지 말아야 한다

수련자는 문제를 거꾸로 보는 데 능해야지, 절대로 사람의 이치와 관념으로 문제를 보면 안 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 당신에게 도움을 주면, 당신은 기뻐하면서 고마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신의 덕을 바꾸어 가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이다. 누군가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당신을 다치게 하면 기분 나빠 한다. 그 사람이 당신에게 덕을 주고 업을 갚게 해주며 심성 제고를 도와 당신의 공이 자랄 수 있게 해줬는데도 당신이 기뻐하지 않으면, 이것도 사람의 사유이다. 문제를 거꾸로 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사람에서 벗어나 신으로 향한다. 우리는 인간의 이치와 고층공간의 이치가 반대임을 알고 있기에 습관적으로 거꾸로 된 이치로 문제를 보는 것이 끊임없이 제고하는 과정이다. 거꾸로 된 이치는 결코 인간 세상의 정통적인 사람 됨됨이의 이치와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3. 시비·득실·옳고 그름을 중시하지 말아야 한다

갈등 속에서 무조건 안으로 찾아보지 않거나 철저히 찾아내지 못할 때가 많다. 누구나 이런 상황을 겪었을 텐데, 갈등 속에서 늘 인간의 관념으로 사람의 시각과 기점에서 문제를 보는 것이 큰 원인이다. 늘 시시비비와 득실을 우선시하거나, 첫 일념이 대법 수련자임을 망각하고 한발 물러서서 문제를 보지 않고 자신의 문제를 먼저 보지 않는다면 수련이 아니다. 반대로 만약 갈등이 생겼을 때 그 속에서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거나 혹은 자기 관념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설령 어떤 관념과 사람의 마음을 바로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냉정하게 진정으로 안으로 찾는다면, 사실 승화할 기회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면 이미 속인에 빠져 관념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주의식이 반드시 또렷하고 주인 노릇을 해야 관념을 없애고 갈등 속에서 승화할 수 있다.

4. 진정으로 사부님과 법을 믿어야 한다

‘믿음’은 생각이나 이념에 국한되지 않는다. 진정한 믿음은 일종 진실한 체현이자, 사상 중 현실의 확고한 표현이다. 속인의 사람과 사물의 이치에 대한 믿음은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거나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눈으로 직접 봐야 믿을 수 있는 믿음이다. 수련자의 믿음은 사부님과 법에 대한 믿음인 바, 그 믿음은 우리의 제고와 승화의 보장이며, 관념에 대한 타파와 부정이며, 법을 굳게 믿는 체현이다. 그 조건 없는 믿음은 진아(眞我)가 마음 깊숙한 곳에서 법과 공감하는 것이고, 내면의 상승과 깨달음은 심지어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확실하고 진실한 느낌은 결코 눈으로 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모든 친척과 친지들이 매일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면, 갈등과 불만에 부딪힐 때 우리는 상대에게 화를 내지도 성깔을 부리며 불평 등을 하지도 않을 것인데, 사람 표면의 이성이 자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년간 수련하면서 법공부를 통해 우리는 서로 다른 천체 차원에 있는 무량한 불도신(佛道神)들이 모두 우리의 일사일념(一思一念),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두고 지켜보고 있으며, 특히 정법 시기에 무량한 신들이 높은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알고 있는데, 이것을 정말 믿는가?!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만 자신의 관념을 차츰 타파할 수 있고, 사상 속 층층에서 더러운 것들을 벗겨 버리듯이 사상이 명확해질 수 있으며, 인식도 점점 진실해질 수 있다. 이로써 사부님께서 법에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진실임을 자연스레 인정하고, 수련에서 승화할 수 있다.

5. 구세력과 중공 사당(邪黨)을 정확하게 보아야 한다

1999년 중공이 대법과 대법제자에 대한 박해를 시작한 이후, 중국 전역은 붉은 공포에 휩싸였고, 20여 년 동안 중공 사당은 구세력의 지배하에 끊임없이 박해를 일으켰다. 그뿐 아니라 ‘공산주의의 최종 목적’ ‘공산주의 유령은 어떻게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가?’ 등 책을 통해 우리는 공산 사령이 전 세계에 파괴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애초 구세력이 어떻게 배치했든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의 배치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 층차마다 우리에 대한 법의 요구가 다른데, 평상시에 우리가 한 모든 행동이 법에 부합한다면, 구세력의 배치는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고, 인간 세상의 중공 사당도 진열품에 불과할 것이다. 사실상 구세력의 배치가 확실히 엄청난 박해의 작용을 일으킨 것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현실 속에서 우리의 수련 상태, 각지의 사정을 해당 지역의 수련생들은 모두 알고 있다. 중공 사당 관계자라 하더라도 구도 받아야 하며, 구도 받을 수 없는 생명은 자연히 대법의 배치가 있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사람의 생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단지 착실히 수련하며 향상하는 가운데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6. 쉽게 이유를 찾아 자신을 봐주지 말아야 한다

갈등이나 향상해야 할 일련의 일들에서 심성을 높이고 집착을 제거해 큰 승화가 있어야 함은 알면서 왜 많은 경우 잘 제고하지 못할까? 아니면 제고가 너무 느린 걸까? 우리가 무심코 무의식적으로 자신에 대한 기준을 낮추고 ‘나’를 회피하려는 것이 하나의 큰 이유이다. 사실 그때 그 회피하려는 ‘나’는 진아가 아니라 죽고 싶지 않은 가짜 나였다. 그러므로 법공부를 잘해 시시각각 주의식이 주도하게 해야 자기 자신과 수련을 엄격히 요구하고 사람 마음을 완전히 없앨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수련이다. 법에 부합되는 마음가짐으로 법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상은 나의 현재 인식의 일부이다.

[편집자 주: 본문은 글쓴이 개인의 현재 인식에 따라 작성된 것이므로, 수련생들이 서로 교류하고 ‘비학비수(比學比修)’ 하는 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2년 7월 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2/7/6/445846.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2/7/6/44584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