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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25년 전, 파룬따파가 말기 암에서 내 생명을 구했다

글/ 중국 수련생 뤄산(若善)

[밍후이왕] 나는 태어날 때 탯줄이 목에 감겨서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지만 산소 부족으로 부분 마비가 되었다. 손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했으며, 거의 걸을 수 없었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정신과 지능은 손상되지 않아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말기 암 진단

대학 다닐 때 1년 이상 머리가 아팠다. 매일 진통제를 먹었지만, 증상이 나빠졌다. 얼굴의 절반이 자주 저리고 시력이 나빠져 대화 중인 사람의 얼굴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청력을 잃기 시작했고 선생님이나 친구들의 말을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가끔 의식을 잃었다. 극심한 통증이 공부를 방해했다.

졸업하기 몇 달 전에 나는 건강 잡지에서 내 증상과 일치하는 코 인후암의 말기 증상에 대한 글을 읽었다. 어머니께 연락해서 그 사실을 알려드렸다. 어머니는 당장 나를 병원에 데려갔다.

CT 촬영을 두 번 거친 후 전문가들은 내가 악성 뇌종양 말기이며 암세포가 이미 퍼졌다고 했다. 두개골을 가득 채운 종양 조직이 청각 및 시신경을 압박하여 손상된 것이었다.

나는 또 이비인후과에서 생체 검사를 두 번 받았고 의사는 내가 말기 비인두암에 걸렸다고 말했다. 삶이 길어야 3개월 남았고 23세에 인생이 끝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악성 뇌종양 진단 후, 의사는 그것을 제거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암세포가 이미 퍼져있어서 수술로 제거할 수 없었다. 나중에 그 의사가 의학적 사례 연구 논문을 위해 내 수술을 이용하려 했음이 밝혀졌다. 수술 전에 의사는 매일 젊은 의사들을 몇 명 데려와서 나를 보여줬다.

수술 전날 생리가 시작되어 수술이 연기되었다. 어머니가 내 CT 영상을 이비인후과 다른 전문가에게 가져갔다. 전문가는 수술 결정에 동의하지 않고 다른 의사를 비판했다. 아마도 내 인생이 끝나지 않으려고 그랬던 것 같다.

의사는 화학 요법과 방사선 요법으로 바꿨지만, 내 생명을 구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코피가 나기 시작했다. 때때로 피가 멈추지 않아 나는 피가 흐르는 동안 화장실에 있어야 했다. 얼굴이 붓기 시작했고 목의 피부가 방사선에 화상을 입어 곪아 터지기 시작했다. 입안이 부어오르고 먹는 것이 고문이었다. 엄마가 먹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면 나는 굶어 죽었을 것이다.

가엾은 어머니는 내게 희망을 주기 위해 미소를 보여야 하는 동시에 어린 딸을 잃게 될 엄청난 스트레스를 짊어져야 했다.

방사선 치료를 받고 집에 갔더니 곧 목에 달걀 크기의 종양이 생겼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눈물이 흘렀다. 비인두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났다. 부작용은 죽음을 앞당길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방사선과 화학 요법을 모두 포기하고 싶었다.

방사선 치료 첫날 머리가 너무 아파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우는 나를 위로했다. 다시는 엄마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종양이 목에서 얼굴로 퍼졌다. 얼굴이 평소의 두 배까지 부풀어 오르고 거의 눈을 뜰 수 없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의 아버지를 닮아가는 내 모습을 보고 눈물을 참지 못했다. 내가 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어머니와 할머니가 어떤 옷을 입혀 나를 묻어야 하는지 의논하는 것을 들었다.

나를 되살린 파룬따파(法輪大法)

어머니는 수년간 건강이 좋지 않았다. 심장병이 심했고 심장 박동수가 느렸다. 부비동 문제와 소화관 궤양, 오십견, 빈혈, 두통, 피부병, 요통도 있었다. 태극권과 온갖 기공을 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가 방사선 치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는 파룬따파에 대해 들었다. 어머니가 수련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병이 사라졌다. 얼굴은 장밋빛이 되었고 에너지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어머니는 내가 파룬따파를 수련하기를 바랐고 나에게 전법륜을 읽게 했다. 나는 어머니의 회복을 목격했고 정말 행복했다. 하지만 긴장을 풀지 못해 수련에 들어오지 못했다. 나는 파룬따파가 또 다른 기공 수련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매일 기계적으로 치료를 받았다.

어머니는 1997년에 다시 나에게 전법륜을 읽으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어머니가 책 두 권을 권했는데 파룬따파 수련생들이 전법륜의 가르침을 따라서 어떻게 건강을 회복하고 성격이 좋아졌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책에 담긴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다. 그 수련은 암, 루푸스, 우울증, 신경 문제 등의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새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마약, 담배, 알코올 및 도박에 중독된 사람들을 짧은 시간에 회복시켰다. 그 가르침은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정화했다. 싸우고 도둑질하며, 약탈하던 사람들이 친절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이 되었다. 화목하지 못했던 가족은 이 가르침을 통해 서로 용서하고 화목해졌다.

아름다운 이야기에 내 마음이 바뀌었다. 나는 파룬따파를 수련해보고 싶었다. 이렇게 생각하자 몸에 열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1998년 2월에 어머니와 함께 연공했고 매일 전법륜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한 번 읽고 나서 목의 종양이 사라졌다.

며칠 후, 나는 꿈을 꿨는데 큰 손이 내 두개골에 들어가 무언가를 제거했다. 사부님께서 악성 종양을 제거하셨음을 알았다. 그것은 내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했다.

1년 후 나는 학교에서 괜찮은 직장을 얻었다. 파룬따파를 수련하고 가르침을 따르니 일을 더 잘할 수 있었다. 나는 마비된 왼손으로 컴퓨터를 조작하는 방법을 배웠고 맡은 일을 잘 해냈다.

좋은 사람 되기

사부님께서는 수련생들에게 가르침을 따르고 어디에 있든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 나는 일을 시작한 후 육체적으로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항상 반드시 정시에 회사에 도착했고 날씨와 관계없이 일찍 퇴근하지 않았다.

어느 비 오는 날, 출근길 미끄러운 길에 넘어졌다. 왼쪽 어깨를 땅에 부딪쳤고 몹시 아팠다.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괜찮아!” 팔뚝에 타박상을 입어 부어올라 일을 하기가 어려웠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쉬지도 않았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좋고 나쁨은 일념에서 나온다.”[1]

나는 다친 것을 개의치 않았고, 통증은 모르는 사이에 사라졌다.

교장이 나를 존경하다

나는 열심히 일했고 절대 불평하지 않았다. 1년 동안 학교는 어려움을 겪는 교직원들을 금전적으로 지원했다. 새 교장이 나를 선택했고 기금 신청 양식을 작성하라고 했다. 나는 거절했다. “저는 재정적으로 어렵지 않습니다. 저보다 더 필요한 사람에게 주십시오.” 교장 선생님은 뜻밖이라며 나를 존경한다고 했다.

이 일을 시작한 지 20년이 되었다. 내 직함은 그대로이고 급여도 마찬가지다. 나는 학교에서 정규직 신입 교사보다 급여가 적지만 불평하지 않았고 기꺼이 내 일을 해왔다.

교장은 2012년에 나를 승진시키려고 인사부에 갔는데 잘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내게 교사 증명서를 ‘마련’하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하려면 문서를 위조하고 일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야 한다. 나는 그의 제안에 감사를 표하며 거절했다. 교장이 나중에 내게 문자를 보냈다. “우리 선생님들이 당신의 절반만큼만 전문적이고 책임감 있는 자질을 갖췄다면 저는 일하기가 훨씬 쉬울 것입니다.”

“당신은 정말 친절해요!”

학교에서 보낸 첫 7년 동안 나는 컴퓨터에 대해 전혀 모르는 회계사가 업무용 문서를 편집 인쇄하고 재무 도표의 숫자를 채우는 일을 종종 도왔다. 어느 해에 학교는 뛰어난 업무 성과로 현(縣)에서 상을 받았다. 몇 년 동안 도움을 준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회계사가 내게 100위안을 줬다. 나는 거절하며 그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며 내 일의 일부라고 말했다. 그가 거듭 말했다. “당신은 정말 친절해요!” 그가 은퇴하고 나서 가끔 마주쳤는데 그는 여전히 말했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2]

학생들 돌보기

한 학기에 두 학생의 학부모가 방과 후에 아이를 데리러 오지 못했다. 교무부장이 방과 후 두 아이를 집으로 데려다줄 수 있는지 내게 물었다. 나는 바로 동의했다. 매일 오후 나는 집에 가기 전에 최소 30분 시간을 내서 학생들을 집에 데려다줬다. 몸 상태 때문에 너무 많이 걸으면 오른쪽 발목이 아팠다. 학부모에게는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알기에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주기는 쉽지 않았다. 한 아이는 장난꾸러기였고 보도가 아닌 번화한 거리 한가운데를 걷기 좋아했다. 나는 그 아이가 거리로 달려가 웃을 때 화가 났고 걱정되었다. 나는 화를 참아야 했고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인도로 돌아오라고 부탁했다. 한번은 그가 내 지시를 따르지 않고 길 한복판에서 춤을 췄다. 그 순간 나는 그 일을 그만두고 싶었다. 그때 나는 그의 어머니가 버스 정류장에서 힘들게 구두를 닦으며 적은 돈을 버는 것을 생각했다. 나는 그만둘 수 없었다. 그 이후로 그 소년이 번화한 거리로 달려갈 때마다 교통량이 줄어들었고 차는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다. 나는 사부님께서 그 소년을 돌보는 나를 도와주고 계심을 알았다. 그 아이를 어머니에게 데려다주고 어머니가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할 때마다 나는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학생의 부모는 집까지 데려다준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학기 말까지 100위안을 주겠다고 했다. 그들이 돈을 받으라고 고집해서 나는 그렇게 했다. 그들이 딸의 등록금을 내기 위해 맞벌이하는 것을 알기에 나는 다음날 그 어머니 직장에 가서 돈을 돌려드렸다.

선량함에 감동한 택시 기사

10년 전 나는 퇴근 후 택시를 잡았다. 내가 타기도 전에 기사는 출발했고 나는 넘어져 기절했다. 내가 깨어난 후 기사가 나를 도와줬다. 그는 죄책감으로 긴장했다. 살펴보니 나는 흙투성이가 되었고 재킷이 찢어졌다. 기사는 조용히 나를 집으로 데려다줬다. 그는 천천히 운전했고 손님을 더 태우려고 하지 않았다. 처음에 나는 속상했고 내가 빨리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기사가 좀 더 조심했어야 했다고 속으로 불평했다. 그때 생각이 바뀌었다. “그 사람 잘못이 아니다. 그는 손님을 더 많이 태우고 싶었고 더 잘 살고 싶었을 뿐이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손을 뻗어 지갑을 찾았지만, 그는 안 받겠다며 막았다. 나는 자리에 돈을 놓고 내렸다. 사고 후 며칠 동안 갈비뼈가 아팠지만 치료하지 않고 통증이 사라졌다. 버스에서 사람이 넘어져 기사가 수천 위안을 배상해야 하는 사건이 있었다.

택시 기사는 문제가 생기는 것을 피하려고 보통 나 같은 사람을 태워주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는 내가 사고 후에 보여준 친절한 태도와 용서에 감동했다. 내가 택시를 기다리는 것을 볼 때마다 그는 나를 태워줬다.

고마움

나는 연공할 때 움직임이 항상 정확하지 않고 때로는 긴장을 풀지 못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기적이 일어난다. 25년 전 파룬따파가 죽음에서 나를 건져낸 이후로 단 한 번도 아프거나 약을 먹을 필요가 없었다. 지난 25년 동안 나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았다. 자비로운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부님의 가르침을 따르자 내 삶은 축복받았고 더는 이기적이지 않다. 더 많은 사람이 파룬따파를 수련하여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

 

원문발표: 2022년 5월 1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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