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후난 대법제자
[밍후이왕] 수천수만 명 파룬궁 수련생처럼 대법은 이기적인 나를 이타적으로 되도록 가르쳐 가정, 직장, 사회에 묵묵히 헌신하게 했다. 나는 마침내 삶의 진정한 가치란 자신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타인을 위해 배려하는 것임을 알게 됐다.
1. 당문화(黨文化)가 나를 기형적으로 망가뜨리다
나는 아명이 얼화퉈(二華佗: 두 번째 화타)이지만 명의인 화타가 아니라 보통 의사일 뿐이다. 나는 중국 남부 농촌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해 1968년 봄은 문화대혁명 시기였다. 집이 매우 가난해 초등학교를 입학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깁은 바지를 입었다. 고구마 밥을 먹거나 무채 밥을 먹었는데 정말 맛이 없었다. 붙어있는 쌀알 몇 톨은 이미 우리 아이들이 파먹었고 어른들은 고구마나 무채만 드셨다. 당시에는 부모님, 조부모님의 어려움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쌀알을 어른들께 양보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때는 당 문화 교육 때문에 우리는 사회주의를 추구할지언정 결코 자본주의를 원하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들도 우리에게 ‘공융양리(孔融讓梨-한나라 시기 유학자 공융이 네 살 때부터 형들에게 큰 배를 양보했다는 이야기)’를 배우라고 하지 않았고, ‘정문입설(程門立雪-제자가 스승 정이를 깨우지 않으려고 문밖에서 눈을 맞으며 기다렸다는 뜻, 스승에 대해 존경하는 자세를 비유)’는 전통 미담을 들려준 적이 없었다. ‘사람이 태어났을 때는 본성이 원래 선량하다(人之初,性本善)’라고 한 고대 계몽서 ‘삼자경(三字經)’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부모님은 초등학교 교육만 약간 받으셨고 자녀를 어떻게 교육해야 하실지 몰라 주로 거칠게 때리고 욕하는 방식을 사용하셨다.
내가 초등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지금도 기억난다. ‘나는 베이징 톈안먼(天安門)을 사랑한다.’, ‘마오쩌둥 만세’, ‘적을 대할 때는 추풍낙엽처럼 잔혹하고 무정해야 한다.’, ‘남이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남을 건드리지 않으며, 남이 나를 건드리면 나도 반드시 남을 건드린다.’ 등이다. 배운 것은 완전히 정치 구호와 사리사욕으로 남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후천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관념을 키웠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당 문화가 끊임없이 주입되면서 이런 나쁜 마음은 나날이 커졌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지갑을 하나 주웠는데 안에는 5자오(약 100원)가 있었다.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돈을 갖고 가 음식을 사 먹고 지갑은 선생님께 드렸다. 당시 5자오는 매우 값어치가 있어서 많은 것을 살 수 있었다. 그때는 돈을 잃어버린 사람의 고통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중에 학우가 일러바쳐 선생님은 어머니께 배상하라고 하셨다. 결국 어머니께 한바탕 맞았지만 나는 오래 기억하지 못하고 별생각도 없었는데 나중에 또 이웃의 복숭아, 토마토 등을 훔쳤다. 고등학교에 가서 밤에 수 차례 학우의 두꺼운 참고서 몇 권을 훔쳤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급성 복통으로 현(縣) 인민병원에 가서 수술했는데 그때는 응보인지 몰랐다. 중급전문의 과정을 졸업하기 직전에도 빌렸던 학우의 필기구가 고급스럽고 쓰기 좋아서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하고 내가 가졌다.
직장에 들어가 방탕하고 난잡한 세상에 뛰어들었다. 특히 덩샤오핑의 ‘고양이 이론’(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장쩌민의 ‘잠자코 큰돈을 벌자’에 따라 모든 것이 돈으로 보였다. 공산 체제는 사람들의 이기심과 각종 욕망을 더욱 방종하게 했고 나는 그 기간에 방종이 더욱 심해졌다. 1991년 나는 의료팀을 따라 시골에 내려갔다. 원래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마실 줄 알게 됐고,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온몸이 연기에 그을릴 정도로 피웠으며, 못 하던 도박도 배웠다. 월급이 140위안(약 2만 5천 원)이었는데 5위안짜리 마작으로 다 날려 한 달 생활비도 부족했다. 여자친구를 만날 때는 더더욱 선을 지키지 않고 한 사람을 만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을 만났다. 그때는 흥청망청 여자를 끼고 술을 마셨다. 회사를 차린 친한 친구가 나를 초대해 어디로 가는지 묻자 “가보면 알아.”라고 말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그를 따라 주점에 도착했는데 남자들이 여자들을 껴안고 먹고 마시며 놀고 있었다. 나는 보고 매우 짜릿해 그를 따라다니며 배웠다. 그 친구는 아예 그곳에서 먹고 자며 지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당시 나는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생각이 나를 더 이상 타락하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다. 그 친구는 이후에도 자주 유흥업소에 들락거리면서 방탕하게 지냈다.
그 시절에 바로 기공 붐이 일었다. 바른 것과 삿된 것이 곳곳에 널려 있었는데 기공 그곳도 이미 정토(淨土)가 아니었으며 돈을 추구하는 기공사가 정말 많았다. 나는 분간할 수 없어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배운 후 나도 기공사로 유명해지고 돈을 벌고 싶었다. 공능이 있으면 출세할 수 있고 과시할 수 있으며 유명해질 수 있다는 환상을 품었다. 결국 많은 돈을 사기당했고 좋지 않은 것도 불러와 양미간 사이에 혼탁하고 짙은 안개 같은 것이 계속 피어올랐다. 그게 뭔지 몰랐지만 앞으로 튀어 나갔으며 땅에 닿으면 사라졌다. 매일 그랬다. 나중에 기공으로 기를 내보내 병을 고치는 것을 배웠는데 다른 사람의 병은 나았지만 나는 한번 크게 앓아서 많은 치료비를 썼다. 그런데도 계속 치료했으며 환자들은 나에게 적지 않은 돈을 주었다. 나는 거기서 그렇게 돈을 좀 벌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환자가 음식을 먹다가 목이 막혀 죽었는데 그때 이후로 다시는 아무도 나에게 기공 치료를 받으러 오지 않았다.
그 이후 나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막혀 뭐든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몸이 갈수록 나빠졌고 치질로 걸핏하면 피가 났으며 몇 년 지나자 관절 통증도 심해졌다. 이런저런 번거로운 일들도 많이 생겼다. 갈수록 짜증이 났고 문제가 많이 생겼는데 마치 인생이 좁은 골목에 들어간 것 같이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완전히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고 우매했으며, 무지하고 방종하고 사상이 변이돼, 물결치는 대로 표류하는 저속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2. 아득한 어둠 속을 가른 한 줄기 금빛
‘산 첩첩 물 겹겹이라 길 없을까 의심됐는데(山重水複疑無路), 버들 우거지고 꽃 만발한 마을 또 있구나(柳暗花明又一村).’(송나라 시인 육유의 시: 역주) 내가 친구를 따라 유흥업소에 다니는 것을 멈추고, 기공으로 병을 치료하다 벽에 부딪혔을 즈음, 치질로 여러 해 피가 나고 관절 통증이 있었을 무렵, 인생에서 갑자기 전환점이 발생했다.
1996년 여름, 재정국에서 퇴직한 한 간부가 나에게 ‘전법륜(轉法輪)’이라는 책을 보냈는데 그것은 파룬따파(파룬궁)의 주요 저서라고 했다. 그 책에서는 듣지 못했던 많은 우주와 시공관, 인생의 의의, 갈등을 고상하게 처리하는 처세관과 사람의 궁극적인 목적이 반본귀진(返本歸眞)이라는 것 등을 상세히 논술했다. 그때는 단지 아침에 몇 명의 파룬궁 수련생과 함께 광장에서 연공하고, 밤에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고 법을 들은 후 그들을 따라 가부좌를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연공한 지 몇 달이 되지 않아 신체에 변화가 생겼다. 치질과 관절병이 모두 사라졌으며 답답하고 이름 모를 번뇌로 수년간 답답했던 마음이 점점 편안해졌다. 그중에서 나는 일련의 믿기 힘든 신체적 변화를 실감했다. 이것은 일반 기공책이 아니라 기술된 데로 진정하게 체현되고 실현되는 좋은 책이며 과장이 없다고 느껴졌다. 끊임없이 법을 읽고, 듣고, 외움에 따라 대법은 여러 해 동안 당 문화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된 내 인생관과 가치관을 변화시켰고 내 뼛속의 이기적인 관념을 변화시켰다.
대법 법리는 직접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直指人心). 정말 어두운 밤의 한줄기 금빛처럼 내 인생의 길을 밝게 비췄다.
3. 대법 기준에 따라 일할 때마다 타인을 배려하고 선하게 대하다
1998년 어느 날 오전, 나는 현(縣) 인민병원에서 외래 진료 당직을 서고 있었다. 서른 살 가까운 남자 환자가 고통으로 배를 움켜잡고 허리를 구부린 채 가족들의 부축을 받으며 진료실로 들어왔다. 검사를 통해 급성 맹장염이라고 진단하고 그에게 입원해 수술하라고 했다. 그는 자기 집이 농촌인데 돈이 없어서 입원할 수 없고 집에 두 아이도 있어서 정말 방법이 없다고 했다. 당시 나는 친척이 있으면 돈을 좀 빌리라고 하면서 배에 구멍이 뚫리면 어쩔 거냐고 했다. 그런데 환자와 가족 모두 친척이 없다고 했다. 바로 이때 나는 대법 중의 한 가지 문장이 떠올랐다. “당신이 늘 慈悲(츠뻬이)하고 선(善)으로 남을 대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다른 사람을 고려하여”[1]. 나는 대법 요구에 따라 즉시 은행에 가서 2천 위안(약 40만 원)을 찾아 그를 입원시켰다. 그는 일주일 후 완쾌돼 퇴원했고 2년 후에 나에게 돈을 갚았다.
환자 가족은 이 일을 그들 마을, 사회에 수시로 전해 한동안 지역 미담이 됐다. 그 일에서 대법은 나에게 일할 때 먼저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없앨 것을 가르쳐줬다. 내 사상 경지는 그 일을 통해 승화됐고 ‘진선인(真·善·忍)’ 대법 기준에 부합됐으며 직장과 사회에 유익한 일을 했다.
2001년이 되자 대법은 억울한 누명을 썼고 나도 미치광이라고 중상모략을 당했다. 정신병원에 납치돼 강제로 주사를 맞고 약을 먹어야 했다. 그때 주사를 맞은 후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웠으며 숨쉬기도 곤란했다. 새벽에는 날이 밝기를 기다릴 수 없었고, 초저녁에는 날이 저물기를 기다릴 수 없었는데 매우 괴로웠다. 어느 순간 또 갑자기 약물이 주입돼 나는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마음속에는 이전 같은 원망과 대항하려는 마음이 없었고, 마음속으로 대법을 명심하고 자비를 베풀어 진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항상 선하게 대하려 했다. 극히 어렵고 고통스러운 탄압 속에서도 선한 행동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해 그들이 범죄를 적게 저지르게 하려고 했다. 어느 날 나는 마음으로 쓴 진상 편지를 의무과장에게 보냈다. 제목은 ‘선량한 사람들은 파룬궁 진상을 알아보세요.’였는데 딱 초등학교 산수책 10장 분량 내용이었다. 나는 파룬따파(法輪大法) 소개, 파룬궁 수련 후 심신의 변화, 이전 차오스(喬石) 위원장과 국가 체육위원회 주임 우사오쭈(伍紹祖)가 내린 파룬궁에 대한 조사 결론, 즉 파룬따파는 국가와 국민에게 백 가지 이로운 점이 있을 뿐 한 가지 해로운 점도 없다는 등을 썼다. 또 장쩌민 일당과 중공(중국공산당)이 파룬궁에 죄를 뒤집어씌운 톈안먼(天安門) 분신자살 조작 사건의 여러 허점을 상식적인 관점과 의사들의 전문적 관점에서 본 분석, 예를 들면 심한 화상을 입은 환자들이 두꺼운 붕대를 감고 있다면 살이 모두 썩을 것이다, 기관지를 절단했다면서 어떻게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부르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가, 휘발유를 담은 플라스틱병이 불에 탔는데 망가지지 않을 수 있는가 등등을 쓰며 이것은 중공 역사상 또 한 번 세상을 속인 충격적인 거짓말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파룬궁이 중국에서 심각한 모독과 압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로 인해 오히려 국제사회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중공이 파룬궁을 탄압하기 위해 사용한 온갖 거짓말이 탄로 났으며, 결과적으로 파룬궁은 전 세계에서 널리 알려졌고 각국의 승인과 환영을 받았다. 이미 전 세계 널리 퍼졌고 인류에게 도덕적 승화를 가져왔으며 인류에게 전대미문의 복음을 가져왔다는 등을 썼다.
의무과장이 보고 이틀 후 나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너무 잘 썼네요. 저는 두 번이나 진지하게 봤는데 이렇게 심각한 박해 진상을 말하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이 약은 당신을 완전히 해치는 겁니다.” 그 후 주사를 놓고 약을 먹이는 박해가 사라졌다. 한 생명이 선하고 정의롭게 행동하고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것을 느꼈다. 이는 대법이 내게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타인을 배려하라고 가르친 결과가 아니겠는가? 이것은 대법 사부님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신 ‘자비는 천지에 봄이 오게 하고 정념은 세상 사람을 구하는도다’[2]라는 선행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비록 대법과 사부님께서 모욕과 비방을 당하셨고 제자는 억울한 누명을 썼지만 나는 당 문화처럼 이에는 이로 갚는 방식으로 대하지 않았다. 소란을 피우며 분노하거나 불평하지 않았고, 슬퍼서 울지도 않았으며 폭군을 도와 나쁜 짓을 하는 타협도 없었다. 우리가 거대한 감당으로(소극적인 감당이 아님) 이 전대미문의 시련을 완전히 선의 힘으로 해소하고 사람들에게 진상을 깨닫게 해 그들이 중공을 따라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지 않고 중공의 거짓말을 믿지 않으면 아름다운 미래를 가질 수 있다. 만약 내가 어려운 상황에서 그들을 위해 마음 쓰지 않고 구차하게 살아감으로써 그들이 대법을 박해하는 죄를 저지르게 하면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 남을 위해 배려하고 신의를 다하는 것이 마땅하다.
매사에 남을 배려해야 하는데 가족도 마찬가지다. 나는 아버지(85세), 장인어른(80세)과 큰이모를 똑같이 대해 그분들이 병이 나서 부르면 곧 달려갔다. 특히 지난해 들어 장인어른은 수년간 기관지염이 중증 폐심병(肺心病)이 되어 수시로 호흡곤란에 시달렸다. 저녁에 늘 침대에 앉아 헐떡이셨는데 똑바로 누울 수 없어 병원으로 이송하면 병원은 여러 차례 접수를 거절했다. 나와 아내가 장인댁에 몇 번이나 가서 주사를 놓았는지 모른다. 나중에 아내는 짜증이 나서 주사 놓으러 가지 않겠다며 나만 가라고 했다. 나는 두말없이 부르면 갔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24년간 수련한 파룬궁 수련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마음속으로는 항상 대법의 가르침을 생각하고 일할 때 늘 타인을 배려하며 마음을 닦고 선행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올해는 주사 맞는 횟수가 더욱 빈번해졌다. 아내는 “언젠가는 당신도 짜증이 날 거야.”라고 해서, “나는 연공인이야. 짜증이 나지 않는데 어떻게 짜증을 낼 수 있겠어?”라고 했다. 나중에 나는 거의 며칠 간격으로 가서 장인에게 관심을 기울였는데 필요하면 즉시 주사를 놓았다. 아내는 “며칠까지 버티는지 두고 보겠어.”라고 해서 나는 이건 작은 일이라고 했다. 비바람이 불든 덥고 춥든 거의 매일 밤늦게서야 나는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마음속으로 남을 위하며 원망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았다. 병원 동료들은 모두 내가 노인을 대하는 것이 효성스럽다는 것을 알게 됐고 간호장교는 동료들에게 내가 환자를 대하는 것도 그렇다고 했다. 장모는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날 칭찬하셨다.
나는 파룬따파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무량한 자비와 간곡한 가르침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세상 사람들, 특히 중국 사람들이 파룬따파를 진심으로 이해하기를 진정으로 기원한다. 모두가 하루빨리 진상을 깨닫고 중공 사당 테러 조직(공산당, 공청단, 소선대)에서 탈퇴해 행복하고 건강한 미래를 가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 사부님 시사(詩詞): ‘홍음2–법정건곤(法正乾坤)’
원문발표: 2022년 3월 2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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