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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을 잘하여 많은 사람을 구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그동안 많은 질병을 앓았고, 특히 1998년에 치명적인 암에 걸려 생명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1. 대법을 수련하다

이 결정적인 시기에 나는 운이 좋아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게 됐고 첫날 연공장에 가서 제1장과 제3장 두 가지 공법을 배웠다. 사부님께서 몸을 정화해주셔서 집에 돌아와 그날은 설사했고 이튿날은 또 감기 증세가 나타났다. 오성이 너무 좋지 못해 힘들어 병이 났다고 생각했다. 특히 사부님의 설법 “당신이 그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고, 당신이 그 병을 내려놓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당신을 어찌할 방도가 없다.”[1]를 본 후 내가 이렇게 큰 병에 걸려 언젠가는 재발해 죽을 수 있고 이 병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없기에 파룬궁(法輪功)을 연마하기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연마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1999년 1월, 암이 재발해 베이징(北京)의 큰 병원에 갔다. 마침 전에 처음 병원에 입원했을 때 나보다 병세가 더 심했던 환자와 한 병실에 입원했다. 그녀가 ‘전법륜(轉法輪)’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내 생각을 말하자 그녀는 사부님께서 단번에 그 병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것이 아니고 수련하면서 천천히 내려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녀가 수련하면서 나타난 기적을 말해줬다. 그녀의 이 몇 마디 말은 바로 나를 깨닫게 했다. 그때 꼭 파룬궁을 연마하겠다고 생각하고 수술받고 실을 뽑지 않은 채 2만 위안(약 380만 원)의 약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내 오성이 너무 좋지 못해 사부님께서 같은 병실 환자의 입을 통해 점화해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으로 돌아온 후 1999년 2월부터 수련을 시작해 두 달여 만인 5월 1일, 나의 모든 질병은 완쾌되어 어떤 병도 없이 몸이 가벼웠다. 대법이 신기하고 초상적이라는 것을 실증했다. 그때 나는 링거 주사를 더는 맞을 필요가 없다(5월 1일 전엔 줄곧 병원에 가서 암을 치료하는 링거 주사를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집에 아직 1만 위안(약 190만 원)의 약이 남아 있어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워 집으로 돌아가면 약을 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사촌 언니에게 줘서 다른 사람에게 사용하게 하려 했지만, 사촌 언니는 내가 약을 중단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어 나는 약을 집으로 가져왔고 다시 병원에 가서 링거 주사를 맞았다. 하지만 아무리 바늘을 찔러도 들어가지 않자 간호사는 매우 의아해했다. 바늘에 많이 찔린 나는 온몸이 떨렸고 사부님께서 더는 링거 주사를 맞지 말라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번 약값은 880위안(약 17만 원)이었다. 1999년에 880위안은 적은 돈이 아니고 약도 다 준비돼 있어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이후에는 다시 맞지 않을 것이니 이번에 바늘이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다른 간호사가 와서 내 손목 안쪽에 바늘을 찌르자 들어갔다. 하지만 조금 맞다가 링거 챔버에서 약이 밖으로 뿜어 나왔다. 간호사는 이상하다고 여겨 마지막에 조금 남은 것은 맞지 않았다. 돌아와 보니 링거 주사 맞은 팔의 혈관은 온통 검은색이었고 팔을 조금만 스쳐도 전기가 통하는 듯 저렸는데 반년이 지나서야 나았다.

사부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링거 주사를 맞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주셨으나, 제자의 오성이 너무 좋지 않아 나를 위해 사부님께서 애를 쓰시게 했다.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이미 재로 변했을 생명을 대법이 연장해 준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이미 내 것이 아닌 대법이 준 것이고 모든 세상 사물에 대해 더는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부님의 가없는 은혜에 감사드리는 제자의 마음은 인간 세상의 모든 언어를 사용해도 형언할 수 없다. 오직 대법 수련에서 용맹정진으로 사부님의 은혜에 보답할 것이다.

2. 마난에 봉착해도 확고하게 행하다

내가 수련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사악은 미친 듯이 박해를 시작했고 다만 수련을 몇 개월만 했고 법공부를 많이 하지 못해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당은 모두 거짓말을 하고 요언을 날조하며 모함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2000년 10월 1일, 아이를 데리고 베이징 천안문광장에 가서 대법을 실증하고 사부님을 위해 공정하게 대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그날 나와 아이는 천안문광장에서 납치되어 구치소에 갇혔다. 나는 노동교양을 1년 당했고 미성년인 아이는 구치소에 9개월 넘게 감금당하며 전기봉 충격 등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 이후 나와 아이는 여러 차례 납치, 가택수색, 구치소, 노동교양소, 세뇌반에 감금되고 장기간 주거 감시를 당했다. 나에게는 출근하지 못하게 하고 아이는 학교에 가지 못하게 했다. 남편은 이런 큰 압력을 못 견뎌 나와 아이가 감금당하는 동안에 나와 이혼했다. 그때 직장에서 내 노임 지급을 중단했고 사당 당적을 박탈했으며 연로하고 병이 난 부모님은 내가 생명과 직장을 잃을까 봐 두려워 구치소와 노동교양소에 와서 내게 수련을 포기하라고 권했다. 전남편의 가족들은 나를 증오했고 내가 이기적이고 아이를 망쳤다고 나무랐다. 그때 온갖 압박이 겹쳤고 정말 사부님께서 홍음에서 말씀하신 “백 가지 고생 한꺼번에 내리거니”[2]와 같았다.

그런 사악의 공포로 인해 이웃 동료와 친구들이 모두 두려워했고 지인과 친구들에게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했다. 그들은 파룬궁 수련은 너무 두렵다고 여겼고 많은 사람은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 나를 보면 외면하고, 일부 착한 사람은 내가 가엾다며 만나기만 하면 울면서 선의로 연마하지 말라고 권했다. 지인들은 암 환자인 내가 이런 압력을 감당하지 못해 얼마 지나지 않으면 바로 죽을 거로 생각했다. 마귀의 소굴에서 혹형으로 박해당해 심각한 병업 가상이 몇 번 나타났지만, 신체에 어떤 상황이 나타났어도 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법을 의심하지도 않았다.

자비로우신 사부님께서 보호해주셔서 나는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점점 더 활력이 넘치게 살고 더 젊어져 동년배와 비하면 십여 살 젊어 보였다. 그동안 여러 가지 방법으로 끊임없이 진상을 알리자 사람들도 점차 나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 나중에 직장에서는 나를 복직시켰고 출근하지 못하게 했던 몇 년간의 노임도 지급해줬다. 전 남편도 돌아와서 현재 동료와 이웃들 모두는 내가 젊고 굳세다고 칭찬했다. 그래서 나는 이 기회에 대법을 실증하며 진상을 알렸고 일부 동료는 내가 진상을 알리려 하면 말하지 말라고 하며 사실은 웅변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하면서 나를 보면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3. 여러 방면으로 사람을 구하다

여러 방면으로 사람을 구하면서 직장과 생활에서 모두 행했다. 사악한 마귀의 소굴에서 모든 죄수와 경찰에게 진상을 알리며 삼퇴(三退, 중국공산당, 공청단원, 소선대 조직을 탈퇴)를 권했고 집에서 식사하면서 수련하지 않는 가족에게 진상과 전통문화를 설명하고 일부 신기한 사실을 알리며 속인들이 신을 믿는 바탕이 되게 했다. 밖에서 물건을 살 때 만나는 사람에게 진상을 알렸고 길거리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으면 나는 딸과 일부러 큰소리로 대화를 나누며 진상을 그들이 듣게 했다. 동료와 이웃, 직장 상사와 전남편의 여친 및 전 시댁 가족과 친척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전 시댁 사람들이 어려움에 부닥치면 나는 적극적으로 도와주면서 모든 기회를 이용해 진상을 알렸다.

진상을 알릴 때 듣지 않으며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내가 화를 내지도, 초조해하지도 않고 선한 마음으로 천천히 이해시키자 그들은 점차 대법을 받아들이고 삼퇴를 했다. 설 기간에 편지와 연하장을 보내는 사람이 많아서 우리는 이 기회에 진상 편지를 발송했다. 고향에 부모님을 뵈러 가면서 도중에 마을만 있으면 들어가서 자료를 배포했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대면으로 자료를 건넸다. 고향에 한 번 다녀오면 500~600부의 진상 자료를 배포할 수 있었다. 사람을 구하는 편의를 위해 우리는 특별히 번호판을 부착하지 않은 자동차를 샀다.

나는 교사였고 학생들에게 수업하면서 진상을 알렸는데, 가끔 진상을 듣지 않고 반대하는 학생이 있으면 나는 급히 서두르지 않고 그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 칭찬하며 그렇게 생각하는 네가 좋다고 하며 수업이 끝난 후 남아서 천천히 이야기 나누자고 말해 그가 더는 교란하지 않도록 했다.

현재 나는 은퇴한 지 10년이 됐고 전적으로 세 가지 일을 하고 있다. 자료점인 우리 집에서 주로 자료를 제작하고 외출 시 사람을 만나면 진상을 알리며 삼퇴를 권하면서 최대한 인연이 있는 사람을 놓치지 않았다.

역병 상황이 심각해 자료를 전달하지 못하면 우리 세 사람(딸, 사위와 나)은 매일 저녁 집마다 다니며 문에 배포했다. 안전을 고려해 우리는 보통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을 걸어서 고층 건물에 배포했고 때로는 30여 층에 한 층에 4~5집 혹은 5~6집이 있고 한 동에 200여 가구가 있었다. 사부님께서 가지(加持) 해 주셔서 7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힘겹지 않았다. 비록 아파트단지마다 사람이 지키고 있어 카드를 찍어야만 들어갈 수 있지만, 우리는 거의 다 들어갈 수 있었는데 종종 카드를 가진 사람을 뒤따르거나 지하 차고를 통해 들어갈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 모든 것을 안배하셨기 때문에, 사람을 구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하룻밤에 우리 셋은 자료를 몇백 부 배포할 수 있었다. 이미 배포한 단지는 같은 내용의 자료를 더 배포하지 않게 표기를 했다. 안전을 고려해 한 곳에 지속해서 배포하지 않고 오늘은 서부, 내일은 동부, 그 후는 북부와 남부로 갔고 오늘은 가까운 곳, 내일은 먼 곳에 가면서 한 달 반에 한 번씩 돌았다.

며칠 전 고향에 있는 조카의 결혼식이 있어 나는 호신부를 일부 준비했다. 진상 차 걸이, 인터넷 방화벽 돌파 소프트웨어가 담긴 카드, 진상 자료 700부(가는 도중에 배포)를 준비했다. 또한, A4용지 4분의 1되는 카드를 만들었는데 정면은 예쁜 길상 아이 그림이고 뒷면은 사람들에게 향후 역병이 또 돌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리는 내용을 담아 코팅까지 하니 매우 정교했다.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에게 하나씩 주면서 나중에 역병이 다시 돌아 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으니 그들에게 어떻게 평안을 보장하는지 알려줬으며 마지막에 꼭 이 카드를 잘 간직해서 역병이 돌면 카드에 적힌 방법으로 주변의 사람과 친지들을 구하라고 당부하니, 그들은 매우 고맙게 받았고 많은 사람은 사의를 표했다.

돌아오기 전에 나는 금방 퇴직한 촌 서기를 찾아 진상을 알렸다. 전에 그가 이미 삼퇴를 해서 이번엔 주로 향후 역병이 다시 돌 수 있으니 그 시기에 어떻게 마을 사람들을 구해야 하는지 알렸다. 또 일부 자료를 건네자 서기는 이해하고 나서 매우 기뻐했고 나중에 또 오면 그의 집을 방문해 달라고 말했다.

하여튼 매일 매우 바삐 보냈고 사람을 구하는 많은 일을 해야 하며 시간적 여유가 없어 일을 다 할 수 없었다.

4. 전남편의 변화

이혼한 후 전남편은 다시 가정을 이루려고 모든 방법을 다해 배우자를 찾았고 이런저런 여성을 만나 며칠 혹은 몇 년 사귀면서 10여 년을 흐리멍덩하게 보내다가 마침내 외지에서 마음에 드는 여성을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이혼했고, 이혼할 때 그 여성은 전남편을 법원에 고소해 몇십만 위안(몇천만 원)을 사기당할뻔했는데 다행히 전남편의 한 친구가 법을 알고 있어 허점을 간파해 몇십만 위안의 손실을 면했다. 결국, 그 여성에게 5만 위안(약 950만 원)을 줬다. 전남편은 이 일로 인해 큰 타격을 받고 70세가 다 되어 우리 집에 다시 돌아왔다. 전 남편이 돌아온 후 우리는 한 마디 원망의 말도 하지 않고 마음을 너그럽게 먹으라고 위안해주고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는 도리를 알려줬으며 여러모로 보살피면서 성심성의로 대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든 남을 생각해야 하고 일에 봉착하면 무조건 안으로 찾으며 표면적인 사람의 이치로 옳고 그름을 가늠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또한, 사부님께서 수련인에게 어떤 우연한 일이란 없고 봉착하는 일은 모두 우리의 수련과 연관된다고 알려주셨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또 알려주셨다. “수련인은 반대로 문제를 보아야 한다.”[3] 그래서 나는 전남편을 원망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매우 가엾게 여기고 큰 가책을 느꼈다. 만약 내가 수련을 잘하고 누락이 없이 그렇게 정을 중히 여기지 않았더라면 사악에 박해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도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렇게 큰 업도 짓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으로 보면, 전남편은 나와 아이에 대해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실은 전남편이 자신을 해치면서 우리의 심성 제고를 도와준 것이다. 이 일이, 전남편에 대한 정을 버리고 많은 업력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줬다. 그래서 나는 전남편을 원망하기보다는 오히려 마땅히 감사드려야 했다. 나는 정말 뼛속까지 스며드는 상심과 원망하는 과정을 겪었다. 위대한 파룬따파가 나를 변하게 하고 전남편에 대한 정을 버리고 자비심을 갖게 했다.

우리가 진심으로 대했기에 그는 매우 큰 변화를 가져왔다. 대법을 매우 인정하고 정념이 강해 그도 수련하려고 했다. 그는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항상 먼저 사부님께 올리려 했고 내가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것을 돕고 기회가 되면 스스로 진상도 알렸다. 또한, 차를 운전해 인쇄 소모품을 구매하거나 잔돈을 바꿔 진상 지폐를 만드는 등 대법 관련 일을 도왔다. 전 시댁 친척들은 우리가 전남편을 잘 대해주니 모두 감동했고 대법을 더욱 인정했다. 전 시누이는 우리가 대법을 수련해 그들이 혜택을 받았다고 하면서 나와 함께 사부님께 과일을 사서 올리며 감사를 표했다. 전 아주버님은 내가 정말 위대하다고 말했다.

어느새 20여 년이 지났다. 돌이켜 보면 나는 정말 20여 년을 곤두박질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고 매우 유감스럽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기에 지난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오직 향후의 제한된 시간에 자신을 잘 파악하고 수련을 잘해야 하며 사람을 많이 구해 유감을 남기지 말고, 더는 사부님께 상심을 끼쳐서는 안 된다.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 시사: ‘홍음-마음 고생’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2018년 워싱턴DC 설법’

 

원문발표: 2022년 1월 3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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