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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룬따파가 대만을 비추다(제자회상편)

―2008년 ‘세계 파룬따파의 날’ 경축

글/ 이혜용(李慧容), 진정홍(陈正洪)

【명혜망 2008년 5월 12일】

파룬따파는 1995년 4월 대만에 전해졌는데 지금까지 이미 13년이 되었다. 지금 대만 수련생은 수십만 명으로 중국 대륙을 제외하면 수련자가 가장 많은 곳으로 해외 반박해(反迫害) 성원의 주력이기도 하다. 대만 수련생들은 대학교수, 의사, 변호사, 기술자, 공무원, 군인, 경찰, 사농공상(士農工商), 학생, 주부 등 각계각층에 두루 퍼져 있으며 대만 전역에는 약 1천여 개의 연공장이 있다. 연공을 배운 사람들은 신체가 건강하고 도덕이 승화해 정부 부문과 사회 각 계층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다.

1. 사존께서 친히 오시어 설법하고 몸으로 가르치시다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사부님’ 혹은 ‘스승님’이라 불리는 리훙쯔(李洪志) 선생은 일찍이 1997년 11월 대만에 오셔서 대북(臺北) 삼흥(三興) 초등학교와 대중(臺中)의 무봉(霧峰) 농공에서 설법하셨는데 2천여 명의 청중이 모였다. 당시에 아직 파룬궁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들 수련생들이 나중에 대법이 대만 각지에 널리 퍼지는데 주요역할을 하였다.

당시 학습반에 참여했던 수련생의 기억에 따르면 리 선생님은 자상하고 친절하시며 격의 없고 모든 사람에게 겸손하셨다고 한다. 수자원 공사에서 일하는 진(陳)여사는 당시 막 파룬궁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녀는 대북과 대중 두 차례 설법반에 참가한 후 이렇게 말한다. “그 장에 있는 동안 느낌이 매우 상화했고 아주 오랫동안 강의를 들어도 피곤하지 않았다. 내 기억에 리 선생님은 키가 크고 자비로운 느낌을 주며 5,6 시간을 강의하셔도 휴식하지 않으셨으며 물도 마시지 않으셨다. 당시 수련생들이 좀 휴식하실 것을 청했으나 필요없다고 하셨다.”


리훙쯔 선생님이 1997년 11월 대북 삼흥(三興) 초등학교에서 설법하시는 모습


리훙쯔 선생님이 1997 년 11월 대중 무봉 농공에서 설법하시는 모습

1997년 4월 대중에서 연공장을 설립했던 구(邱) 선생은 대만에서 초기에 파룬궁을 수련했던 사람 중 하나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당시 법을 들으러 간 사람의 절반 이상이 수련생의 친척, 친구였으며 아직 파룬궁을 배우기 전이었는데 이 사람들이 거의 다 수련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는 이것은 리 선생님이 강의하신 것이 고덕대법(高德大法)이며 선생님의 일언일행이 사람들을 감동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설법이 끝난 후 선생님은 대북에서 의란(宜蘭), 동부, 남부를 거쳐 대만 일대를 한 바퀴 도셨으며 아울러 일월담에서도 하룻밤 묵어 가셨다. 가는 도중에 교통과 숙식에서 수련생들에게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으셨다. 이리 선생님은 대만에 일주일동안 머무르셨는데 소수 수련생들만 동반해 조용히 다녀가셨다. 다른 수련생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시는 모습에 모두들 감탄했다. “리 선생님은 곳곳에서 남을 위해 생각하는 모범을 나타내셨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신교(身敎 몸으로 직접 보여주는 가르침)였습니다.”

리 선생님은 일월담을 떠나시기 전에 한 수의 시를 지으셨다.

“한 늪의 맑은 호수
노을빛 아름답게 비껴드누나
몸은 난세 중에 있거니
홀로 아름답기 참으로 어렵네”

이 시를 파룬궁 수련생은 거의 모두 낭랑하게 외우고 있고 일월담은 해외대법 수련생이 대만에 올 때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

2. ‘4.25’ 상방이 많은 사람들이 수련대열에 들어오도록 촉진

파룬궁이 대만에서 널리 전해진 역사를 돌아보면 1999년 4월 25일, 파룬궁 수련생들이 평화롭고 이성적으로 상방한 그날이 분계점이었다. 4.25 사건 때문에 대만 매체에서 대대적으로 파룬궁에 대한 보도를 했고 파룬궁의 지명도가 크게 제고되어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 수련대렬로 들어와 대법이 대만에서 널리 전해지는 기초가 되었다.


1999년 ‘4.25’ 사건


대만 매스컴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된 4.25와 7.20사건

‘4.25’ 사건 9년 후인 지금까지도 중공의 불법적인 박해는 파룬궁 수련생들을 타도하지 못했고 견정한 수련자들은 반박해중에 건강하게 성장했으며 활기차게 발전했다. 아래에서는 대만에서 당시 이미 법을 얻은 노수련생이 회고한 초기의 수련 정황이다.

3. 파룬궁이 대만에 뿌리를 내리다

1996년 9월말에 법을 얻은 서(徐) 여사는 대만 텔레비전공사의 조연출로 극본도 쓰고 드라마를 편집하기도 했다. 그녀의 남편은 영화제작자인데 법을 얻은 지 5년이 된다. 서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96년 대만 방송국에는 법을 얻은 수련생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당시 대만 전체에 90여 명의 수련생들이 있었는데 대만 텔레비전방송국 연공장에만 5,60명의 수련생이 있었으니 파룬궁의 본거지라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미 수십만 명의 수련생들이 있고 심지어 모 매스컴에서는 대만이 파룬궁의 부흥기지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1996년 11월과 1997년 2월, 수십 명의 대만 수련생들이 두 번에 걸쳐 단체로 북경 심득교류회에 참석했다. 북경 연구회에서는 북경 수련생들 중 엘리트를 엄선해 대만 수련생들과 9일간 법공부 교류를 하게 했고 많은 수련생들이 비로소 법공부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 대만에 돌아온 후 북경수련생들의 “조를 나누어 법공부하는” 방식에 따라 대북 국군 영웅관에서 제1차 보도원 훈련을 개최하여 모두들 많은 제고와 촉진을 얻었다.

이 후 3개월 간격으로 북부, 중부, 남부 각지에서 훈련활동을 거행했는데 사람 숫자도 수십 명에서 서서히 수백 명으로 증가했다. 나중에는 참가한 사람 수가 너무 많아 보도원 훈련과 일반 수련생의 단체법학습 교류 활동 두 종류로 나누었다. 이렇게 하여 파룬따파가 나중에 대만에서 활기차게 발전하는데 착실한 기초를 다졌다.

서 여사는 당시 중국 대륙에 가서 교류할 때 매우 기이한 일이 있었다고 했다. “대륙 수련생이 우리 대만수련생에게 ‘공안과 함께 있지 말고 공안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라.’ 라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 대만에서는 경찰을 경계하지 않습니다. 한번은 우리가 법공부할 때 어느 공안이 뛰어와 저더러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기뻐하며 대만에서 왔는데 파룬궁이 매우 좋아서 정말 파룬궁을 배우러 왔다고 했습니다. 당시 제 반응이 너무 직접적이어서 대륙수련생이 매우 긴장한 적이 있습니다.”

“3년 후 파룬궁이 박해 받을 때 저는 이 공법이 이렇게 좋은데 왜 이렇게 선량한 사람들을 탄압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4.25 사건 이후 저는 매우 바빠졌습니다. 매스컴 일을 했기 때문에 이런 편리한 조건을 이용해 진상을 알릴 수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중공에게 속아 파룬궁을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우리가 진상을 알려 세인들에게 알려야 했습니다.”

4. 두 차례 중국대륙에 건너가 수련생들과 교류

1996년 1월 법을 얻은 류(劉) 선생은 신문을 보고 4.25사건을 알았다고 했다. 그는 4.25 이전에 4,50명의 수련생이 중국에 가서 대륙 수련생들과 교류했는데 대륙 동수들을 보았을 때 마치 가족과 같은 느낌을 받았으며 파룬궁 수련생들은 모두 선량하고 아름다웠다고 했다. 4.25이후 느낌은 천지차이였는데 사실 중공은 수련생을 박해하려고 매우 일찍부터 함정을 설치했다.

류 선생은 4.25 이전 두 차례 중국대륙 수련생들과 법을 교류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처음에는 1996년부터 북경에 가서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대법은 이미 대륙 모든 지역에 퍼져 있었으나 대만 수련생은 95년에 와서야 비로소 이렇게 좋은 공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당시 연마한 지 1년이 안 되어 조급하게 대륙 수련생과 교류하려 했습니다. 『법륜대법의해』 이 책으로부터 대륙 수련생들의 법공부가 매우 좋음을 알게 되었고 많은 점이 우리가 귀감으로 삼아 공부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96년 10월 말부터 11월초를 마련하여 약 일주일간 북경에 가서 법공부를 했습니다.”


화교호텔 회의실의 단체 법공부

“그때는 수련생 가정을 방문했고 또 대형교류회도 가졌는데 저는 매우 진감을 받았습니다. 어느 농촌 부인은 3개월간 문맹 퇴치반에 다니고 불과 몇 달만에 『전법륜』을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북경에 갔을 때는 나이 많은 어느 농촌 부인이 학교를 전혀 다니지 않았는데 불과 몇 개월만에 『전법륜』을 다 읽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대법서적을 외웠습니다. 이 할머니가 강단에서 수련심득을 말했을 때 우리는 듣고 대단히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교류회는 대만 수련생들에게 촉진이 아주 컸으며 돌아온 후 이어서 법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1996년 북경 파룬따파수련 국제교류회

5. 장춘 만 명 연공과 단체법학습 때 법암송

나중에 장춘에 갔는데 그때는 날씨가 매우 추워 영하 십여 도의 날씨였습니다. 인민광장에서 단체 연공을 하는데 새벽 5시에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늦어서 6시에 연공을 함께 했습니다. 그때 연공은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연공 장면을 모두 볼 수 없을 정도로 인원이 많았는데 우리는 장춘시 새벽 연공인원이 만 명이 넘을 거라고 추측했습니다. 대만 수련생으로는 처음 이런 추운 날씨에 연공을 했는데 연공이 끝난 후 얼굴이 모두 얼었고 서리까지 끼었습니다.

두 번째는 97년 말부터 98년 설까지 대만 수련생들이 장춘에 가서 교류한 적이 있습니다. 97년 11월 중순 사부님께서 대만에 오시어 설법하셨고 이 때문에 사부님의 고향인 장춘에 가기로 정한 것입니다. 대만 수련생들은 그날 밤 법공부 교류회에 갔는데 그들은 우리를 매우 우대해 30여 평방미터 가량 되는 중간에 매우 작은 의자를 놓고 우리를 앉게 했으며 그들은 평소처럼 1-2백 명이 빽빽이 앉았습니다. 안에는 난방을 틀어놓았는데 늦게 온 사람은 자리가 없어 바깥의 난간에 앉아야 했습니다.


장춘 법학습교류에 참가한 대만수련생들

대만 수련생들은 그 광경을 보고 매우 깊은 감촉이 있었습니다. 난로 옆에 앉은 수련생은 더워서 온 얼굴에 땀이 나서 옷을 벗어야 했지만 난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과 바깥 베란다에 앉은 수련생은 추워서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나와 옆에 있던 대만 수련생들은 의자에 앉았는데 무릎과 무릎을 맞대고 2 시간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2시간 동안 서 있었으며 어떤 사람은 밖에서 두 시간 동안 얼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총 7,8 권의 책이 출판되었는데 누구도 오늘 무슨 책을 읽을지 묻지 않았으며 사람마다 등에 작은 짐을 지고 있었는데 모든 책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류할 때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옮겨가며 읽었고 처음에 보도원이 마이크를 들고 ‘우리 오늘은 『전법륜』 제 1강을 외우겠습니다. 누가 외우겠습니까?’ 하자 단번에 4, 5명이 손을 들었고 보도원은 누가 먼저 몇 단락 외우고 이어서 누가 몇 단락 외울 것인지 정했다. 당시 우리는 이것을 보고 정말 입이 딱 벌어졌다. 정말 『법륜대법의해』에서 말씀하신 대로 장춘의 법공부는 특히 좋았으며 단체 법공부할 때 법을 암송했다.

6. 대법이 중국에 널리 전해져 성황을 이루다

우리가 갔을 때 장춘보도소 소장이 우리를 맞이하러 왔는데 많은 수련생들을 데리고 비행장으로 왔으며 작은 버스가 와서 짐을 받았습니다. 내 기억에 그날은 토요일이었는데 우리가 장춘 시로 가면서 버스 안에서 교류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습니다. 큰 로터리가 있었는데 현수막을 펴놓고 수백 명이 연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저건 당신들이 특별히 우리를 영접하는 것입니까?”하고 묻다 보도원은 아니라고 하면서 그들이 정상적으로 연공하는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오후 4,5시 경이었는데 10분도 지나지 않아 또 수백 명이 길 옆에서 연공하고 있었으며 얼마 안 되어 또 수 백명이 연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 잔디 위에서만 도처에서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잔디가 아닌 길에서도 역시 연마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파룬궁은 당시 대륙에서 매우 보편적이어서 우리는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비록 이렇게 오래되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감개가 무량합니다. 중공이 파룬궁을 탄압한 것은 정말 큰 잘못입니다.

장춘에 가서 교류하면서 가장 큰 감동을 받은 것은 그들이 모두 법을 외우려고 한 것이며 또 영하 십여 도의 날씨에도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새벽에 연공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만은 편안한 환경에 속하는데 수련생들이 이렇게 추운 날씨에 나와서 연공하는 것은 볼 수 없습니다.

7. 직접 이득을 보고 진상을 말하다

1999년 4월 26일 대만의 매스컴에서 4.25 사건을 폭로했고 그들 역시 파룬궁이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대륙의 부실한 보도만 옮겨 실었으므로 우리는 그때 옳지 못하다고 느꼈습니다. 대만 매체에서 대륙의 보도를 직접 전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사람들과 토론을 거쳐 우리는 매체를 통해 진상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직 우리 수련생들만 파룬궁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직접 이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파룬궁의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기자가 있기만 하면 우리는 인터뷰를 했습니다.

당시 처음 이런 일을 당했기 때문에 누구를 따라야 할지 몰랐으며 왜 중공이 이렇게 좋은 공법을 탄압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는데 나중에야 서서히 알게 되었습니다. 중공은 삼일 내에 파룬궁을 넘어뜨릴 수 있다고 했으나 중공은 수련인의 의지와 경지를 알지 못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거의 9년이 되었습니다.

‘4.25’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대만 수련생들이 대륙에 가서 진상을 알리려 했는데 나중에 점점 이성적으로 되었습니다. ‘4.25’ 이후 2000년, 2001년까지 대만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을 배우러 왔으며 그 때 사람 숫자가 단숨에 많이 증가했습니다.

8. ‘4.25’ 전후의 환경의 차이

1996년 7,8월 사이에 법을 얻은 양(楊)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4.25’ 이전에 사람들은 함께 법공부하고 교류하는 환경이 매우 순수해서 이 공법이 좋고 사람의 심성을 수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병을 고치기 위해 들어온 것이 아니며 나는 반본귀진 할 수 있다고 느껴 입문했으며 당시 환경이 매우 순수했습니다. 갑자기 ‘4.25’ 사건이 일어났고 처음부터 가서 진상을 알려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파룬궁은 중공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고 했다. 우리가 직접 이익을 보았는데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 대신 말하겠는가.

개인적인 느낌으로 ‘4.25’ 사건 전후의 최대의 차이는 바로 ‘4.25’ 사건 이후 진상을 알리고 사람들에게 진상을 명백히 알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4.25’ 이전 홍법은 이 좋은 공법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96년 10월 북경 교류회에 참가한 것이 가장 감수가 깊었습니다. 그때 대만에서 간 4,50명의 수련생들은 대부분 법을 얻은 지 몇 개월에서 길어야 겨우 일 년이었습니다.

9. 북경국제교류회에 참가

그들의 말에 따르면 북경 보도소 보도원은 모두 수련을 삼년 이상 했으며 이중 40명을 선발해 우리와 함께 법공부하고 교류했는데 그 때 우리는 8조로 나뉘었고 그들도 8조로 나뉘어 하루씩 방을 바꾸면서 돌아가며 교류했습니다. 우리는 나중에 대만에 돌아가서 법공부하고 교류할 때 이 방식에 비추어 법공부했습니다.


방택헌(方泽轩) 레스토랑 밖 빈터에서 단체 법공부와 교류(96년 북경국제교류회)

사실 그 때 나는 법을 막 얻었을 때이며 책을 본 후 대법이 내게 아주 적합하다고 느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출가하지 않고 속인 중에서 수련하며 가정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내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책을 구하기가 어려워 늘 녹음테이프를 들었습니다. 북경에 가려고 했을 때 『시드니 설법』이 막 출판되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전법륜』을 한번 보면 이것이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책이구나 하고 느끼며 두 번째 책을 볼 때는 사람에게 어떻게 수련하라고 가르치는 책이구나 하며 세 번째 볼 때에는 내려놓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에 대해 매우 상상하기 힘들었다. 어려서 클 때까지 독서하면서 어떤 책도 이렇게 내려놓지 못한 것이 없었으므로 무슨 책이기에 이렇게 내려놓지 못하는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996년 북경 파룬따파국제교류회

북경에 가서 교류하는데 매번 법공부할 때마다 새로운 법리를 깨달았습니다. 다음날 한 강의를 읽으면 또 새로운 법리를 깨달았고 마치 스승님께서 저를 직접 이끌어 올리시는 것 같았는데 그때는 정말 불가사의 했습니다. 다음날 제4강이 또 그런 느낌이었으며 그때 감촉이 더욱 컸습니다. 삼일 째 되는 밤 침대에 누워 사부님의 법상을 보았을 때 매우 격동된 것처럼 몸 전체가 내내 요동쳤습니다. 나는 너무 높이 끌려올라가서 감당하기 힘든 그런 느낌과도 같았습니다.

10. 책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를 체험

내가 제6강을 읽을 때 갑자기 하나의 염두가 있었는데 빨리 돌아가서 다시 제1강을 읽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앞의 것을 완전히 읽지 못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야 나는 무엇이 책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인지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 한차례는 내가 법을 얻은 이후 정말로 대법이 마음속에 뿌리 내림을 느끼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게는 그 한차례의 감촉이 가장 컸습니다.

막 법을 얻었을 때 어느 수련생이 대호(大湖)공원에 가서 연공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 때는 새벽 6시부터 연공을 시작했는데 나는 출근해야 하니 너무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는데 아침 8시가 되어야 겨우 일어났으며 6시에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북경에 가서 교류했을 때 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출근하는데 일찍 일어나 연공하고 출근하며 매일 6시간을 법공부하며 수시로 시간을 다그쳐 공부를 하는 것을 보고 나니 차이가 너무나 크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북경에서 돌아온 후 다음날 바로 대호공원에 갔더니 본래 평상시에 나오지 않던 사람들이 모두 나왔는데 교류가 촉진 작용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11. 수련생수가 가장 빨리 증가한 시기

‘4.25’ 사건 이후 나는 중공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우리가 말을 하지 않으면 누가 말을 할 것인가? 그러니 우리는 자기가 나서서 말해야 한다! 그 때 무슨 활동이 있으면 사람들은 곧 나갔는데 각지에 무슨 활동이 있으면 다른 지역에 가서 성원했으며 정부에 가서 진상을 말하는 그런 일 등이었습니다.

‘4.25’ 이튿 날, 대만 신문에서는 대대적으로 이 사건을 보도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연공장을 찾아왔고 많은 사람들이 그 때 법을 얻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중공이 나쁘다고 하면 그건 좋은 일이다”라고 여겼으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 때 법을 얻었습니다. 97년에 사부님께서 대만에 오셨을 때 겨우 20 여 개의 연공장(독서회 포함)이 있었고 각 현과 시에 퍼져 있었습니다. ‘4.25’ 전에 아마 100개의 연공장이 있었을 것입니다. ‘4.25’ 동안에 수련생 수가 가장 빨리 증가해서 현재는 이미 일천여 개의 연공장이 있습니다.

내 기억에 95년 《광명일보》 사건 때도 조사와 탄압이 있었는데 그리 전면적이진 않았고 계속 이렇게 조사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북경교류회에 참가했을 때 그들(중공) 역시 매우 난처해 했습니다. ‘4.25’ 이후 ‘7.20’까지 많은 사람이 가서 진상을 알렸습니다. 예를 들면 매달 고정적으로 중정 기념당(대만 대북에 있는 장개석 기념관)에 가서 홍법을 했는데 파룬궁은 합리적인 것이며 탄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12. 사부님 은혜를 회고하며 정진하고 착실히 수련

파룬따파가 대만에 전해온 지 13년, 수십만 명의 수련생들이 심신의 수익을 얻었고 ‘진선인’ 법광에 푹 빠졌다. 대만 제자들은 사존에 대한 존경과 감격의 마음을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으며 오직 세 가지 일-“법공부, 발정념, 진상알림”을 잘하고 끊임없이 정진하여 사존의 성덕(盛德)과 넓은 은혜에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장발표 : 2008년 5월 12일
문장분류 : 해외소식>종합보도
문장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08/5/12/17823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