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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산만수를 넘나들며

문장/리윈수(李雲舒)

【명혜망 2005년 12월 8일】다이즈전(戴志珍)은 17살 때 대학에 들어갔으며, 24살에는 호주에 가서 천하를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29살에는 단신으로 세계일주를 했고, 34살 때 법륜대법 수련의 길에 들어섰는데 그로부터 4년 뒤 그녀의 남편은 중국에서 중공에게 학살 당했다. 39살이 된 다이즈전(戴志珍)은 두살 된 딸을 데리고 파룬궁의 진압과 박해를 제지시키고 중공의 죄행을 천하에 알리기 위해 41개 나라를 돌면서 두 번째로 세계일주를 하고 있었다.


파두와 엄마 다이즈전(戴志珍)이 유엔 비정부 조직 회의에서

* 천애지각을 전전하다 대법을 만나는 행운을 얻다

다이즈전(戴志珍)은 60년대 광저우에서 출생하여 문화혁명을 겪으며 자랐다.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 오빠가 박해로 농촌으로 강제 이동하게 되었는데 오빠는 형제중 유일한 남자였다. 엄마는 오빠 때문에 날마다 집에서 눈물로 지새웠는데, 엄마는 농촌에서 왔기에 농촌이 얼마나 고생스러운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반드시 웃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왜냐하면 하향하는 것은 ‘제일 영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향가던 날, 사람들은 북치고 징을 울리면서 환송하였다. 오빠는 가슴에 붉은 꽃을 달고 ‘아주 기쁘게’ 가야 했다. 어린 다이즈전(戴志珍)은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은 왜 이렇게 억울하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자신은 미래에 엄마처럼 이렇게 살지 않고 떳떳이 살아야 겠따는 생각에 어릴적부터 노력하여 학습성적은 줄곧 앞자리를 다투었다. 그녀는 일정한 사회적 지위만 있으면 당당하게 살아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17살되던 해 그녀는 대학에 입학하여 졸업한 후 광저우시에서 가장 좋은 호텔—백운 호텔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줄곧 성공하리라는 욕망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뜨거운 열정으로 사업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사업을 하면서 그녀는 정계요원이나 연예계 유명 인사들 중 이미 명예와 재력을 다 가진 사람들이 한결같이 거짓말을 하면서 가면을 쓰고 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왔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1987년 그녀는 호주에 갔는데, 그녀는 백인 문화속에서 그 답안을 찾으려고 생각했다. 4년간 그녀는 수많은 책을 섭렵했지만 여전히 이에 대한 답안을 찾지 못했다. 5년째 되던 해 그녀는 친구와 함께 아르바이트로 돈을 좀 벌었는데 친구는 그 돈으로 집을 샀지만, 다이즈전(戴志珍)은 오랫동안 고심하다가 끝내 자신의 오랜 꿈을 실현하고 또 그녀가 찾으려던 답안을 찾기 위해 세계일주를 선택하였다.

1992년부터 93년 동안 그녀는 오스트레일리아 여권으로 세계의 유명한 예술관, 박물관을 다 돌았다. 그녀는 이스라엘에 갔으며, 예루살렘에도 가서 예수가 지나갔던 길을 따라 걷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답안을 찾지 못했다. 다이즈전(戴志珍)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년이나 헤매고 다녀도 답안을 찾지 못했어요. 당시 나는 너무나 상심했는데 마지막 종착지는 하와이였어요. 하와이의 아름다운 해변에서 나는 알수없는 고독감과 비애를 느끼게 되어 울었어요. 그곳에서 나는 서양 생활을 결속지어야 한다고 여겼어요.” 그 후 그녀는 중국으로 돌아왔다.

1997년 4월 18일, 다이즈전(戴志珍)은 친척 집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전법륜』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그때를 회억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3일간 이 책을 다 읽었고 미친듯이 기뻤어요. 내가 그렇게 고통스럽게 찾았었고, 세계각지를 오르내리면서 탐색하던 답안이 아무 준비도 하지않은 상태에서 나의 눈앞에 나타나다니! 이 책은 나의 일생을 개변시켰어요. 내가 세계일주를 할 때 나의 황갈색 피부와 검은 머리때문에 자괴감에 빠졌었죠. 그것은 내가 중국인이지만 오히려 호주의 여권을 가졌기 때문이었죠. 그러나『전법륜』을 본 후 나는 처음으로 내가 중국사람이라는데 자긍심을 가졌어요.”

처음 단체 법공부를 할 때 그녀는 천청융(陳承勇)을 만났다. 그는 1미터 80센티의 키에 영특할뿐 아니라 멋졌으며 정직하고 선량했다. 천청융의 아버지는 중의,서양의 모두가 사망선고를 내린 요도증 환자였는데 파룬궁을 수련하여 3개월 만에 나았다. 이 기적은 천청융의 가족과 그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수련의 길에 들어서게 했다. 다이즈전(戴志珍)은 천청융(陳承勇)을 만나자 마음이 서로 통하여 의견이 일치했으며, 그로부터 서로 사랑하게 되어 서로 이해하면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1999년부터 시작한 파룬궁 수련생에 대한 사악의 박해는 이 모든 것을 앗아갔다.

*지극한 사랑을 잃고 밤새 머리가 하얗게 세다

1999년 7월, 중공이 파룬궁을 전면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하자 수련중에서 이득을 본 수많은 서민들은 진상을 똑바로 알리기 위해 평화적으로 청원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 그속엔 천청융(陳承勇)도 있었다. 2000년 1월, 베이징 내신내방 사부국 앞에서 천청융은 붙잡힌 후 광저우 감옥에 불법감금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 있는 아들에게 겨울 솜옷을 가져다 주려 했지만 공안은 그들을 만나지 못하게 했다. 죄수들 모두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으나 유독 파룬궁 수련생만은 만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감옥에서 나온 후 천청융은 단위에서 제명되었다. 그리고 경찰은 집에 찾아와 끝없이 위협, 감시, 방해를 하면서 여러 번 납치당하거나 체포되었다. 수련으로 두 번째 생명을 얻은 칠순이 된 천청융의 아버지는 경찰에게 “당신들은 내가 수련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난 연공하지 않으면 죽는 길 밖에 없습니다.”라고 간청했으나 경찰은“안 돼, 우리는 명령을 집행하고 있어.”라는 대답만 했다.

2001년 1월 초, 천청융은 또 다시 경찰에 납치되었는데, 그 당시 다이즈전(戴志珍)은 중국 비자가 만기가 되어 비자연장 신청을 했다. 하지만 거부당해 하는 수 없이 한 살된 딸 파두를 데리고 호주로 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그 길로 남편과 사별할 줄이야.

호주에 돌아온 지 며칠 뒤에 다이즈전(戴志珍)은 싸이트에서 남편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실종된 6개월 동안 그는 악경으로부터 엄청난 고형과 시달림을 당했으며, 2001년 7월 그의 시체는 황야의 초가집에서 발견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34세였고 딸 파두는 15개월이 되어 있었다. 다이즈전(戴志珍)은 컴퓨터에서 남편 천청융의 시체가 이미 부패된 후에야 발견된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었다. 다이즈전(戴志珍)은 그때를 이렇게 고통스레 회고했다. “나는 남편의 시체를 보는 순간 멍해졌어요. 온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렸고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어요. 나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 했어요. 나는 온 종일 방에서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어요. 이튿날 아침, 나는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걸 보았어요…… 하루 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었어요. 그때의 고통은 정말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가 없어요.”

천청융의 시신을 찾은 언니는 바로 뒤에 노교소에 들어 갔고 연로했던 천청융의 아버지는 자식을 앞세운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 세상을 떴다. 중국정부에서 사증 발급을 거부하는 바람에 다이즈전(戴志珍)은 어린 딸은 안고 사처로 뛰어다녔으며, 여러 부처에 간절히 구원을 청한 끝에 8개월 뒤에서야 호주 정부의 도움으로 남편의 유골함을 받을 수 있었다.

*박해를 반대하여 어린 딸을 데리고 41개국을 돌다

지극한 사랑을 잃은 충격으로 다이즈전(戴志珍)은 파멸의 변두리에 헤메기도 했지만 파룬대법의 ‘선타후아’법리의 가르침대로 그녀는 끝내 넘어지지 않았다. 비록 마음 속의 분노와 상처를 여전히 가라앉힐 수 없었지만 그녀는‘중국에서는 수많은 가정이 우리처럼 불행을 당하고 있지만 그들은 말할 수 조차 없다. 나는 그래도 국외에 있기에 자유는 있지 않은가. 나는 그들을 위하여 용감히 나서야 한다. 중공의 모든 죄행을 천하에 알리고 그들의 가면을 벗겨야 하고 박해를 제지해야 한다.’

2003년 3월, 다이즈전(戴志珍)은 두 살된 딸 파두를 데리고 제네바에서 열린 인권회의 평화 청원 활동에 참가했다. 그녀는 남편의 유골함을 안고 시위행진대오의 제일 앞장에 섰다. 회의가 끝나자 다이즈전(戴志珍)은 두 번째로 세계일주의 길에 올랐다. 처음 세계를 일주한지 10년이 지난 뒤였다. 이번에 그녀는 2년 9개월 동안 걸었다.

2002년 3월부터 2004년 12월까지, 엄동설한이나 삼복더위 속에서도 다이즈전(戴志珍)과 파두, 두 모녀의 가냘프고 약한 모습은 유럽, 미주, 아시아, 아프리카의 곳곳에 남겨졌고 그들은 41개국을 넘나들며 본지역의 의원, 매체와 민중들을 만났다. 모녀는 파룬다파의 아름다움을 전했고 세계인들에게 수련자들에 대한 중공의 폭행을 알렸다.

“진선인은 우리의 혈액속에 뿌리 내렸기에 어떤 외래의 힘도 파괴하지 못합니다.”라고 다이즈전(戴志珍)은 말했따. 그리고 또 “비록 제 남편은 먼저 갔지만 나는 딸을 데리고 세계를 돌면서 사람들에게 진선인은 말살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렵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300년동안 박해를 받았어도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습니까. 역사는 인류에게 신앙은 학살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린 딸을 데리고 세계일주를 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야 했으며 비행기 탑승 시간을 맞추려고 뛰어다니면서 모녀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2004년 3월, 그들은 세번째로 제네바에 도착했다. 인권회의 청원시간에 중국내에 있던 그녀의 어머니는 경찰의 장기간 계속되고 있는 공포와 교란 때문에, 딸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을 안고 인간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어머니의 가장 큰 마지막 소원은 외손녀를 한 번만이라도 안아보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이즈전(戴志珍) 모녀는 중국비자를 받을 수가 없어 어머니의 마지막 작은 소원도 들어주지 못했다……

* 불속에서 환생하여 호주로 돌아오다

한 번, 또 한 번 계속되는 생이별 중에서, 끊임없이 진상을 알리고 다니면서, 만수천산을 가로질러 넘나들면서, 다이즈전(戴志珍)은 끝내 아픔을 이겨냈다. 금년 초에 다이즈전(戴志珍)은 딸과 함께 세계일주를 마치고 다시 호주에 돌아왔다. 호주의 외무장관 태너는 중공으로부터 참혹한 박해를 받고 있는 파룬궁 수련생의 현실을 무시하고 38개월 동안이나 파룬궁 수련생들이 중국대사관앞에서 플래카드를 펼치고 확성 음악을 방송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행정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그녀는 원고의 한 사람으로 외무장관 태너의 기소를 결정하였다.

다이즈전(戴志珍)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이렇듯 많은 국가를 돌았어도 파룬궁 수련생들의 이런 평화적 항의 활동을 금지하는 곳은 유독 호주인 나의 조국밖에 없습니다. 호주 국민으로서 나는 가슴이 아픕니다. 나는 더욱 많은 호주 민중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려야 할 책임이 있으며, 우리의 외무장관이 민중을 대표하여 어떤 권리를 행사하는지 알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민중들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하게 해야 합니다.” 그녀는 딸을 데리고 호주를 한 바퀴 순회하고 있다. 맨 처음 모녀는 멜버른에 왔다.

눈앞에 있는 다이즈전(戴志珍)은 용모가 아름답게 뛰어나 광채가 났으며 눈길은 맑고 따뜻했다. 만약 그녀의 희끗희끗한 흰머리만 아니었다면 사람들은 그녀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왔는지 생각지 못 할 것이다. 그녀는 봉황새마냥 불속에서 환생한 것이다. 한 심리학자는 그녀와 허물없이 대화를 나눈 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일반적으로 거대한 상처로 오는 고통을 받은 사람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마음속에 꼭 상처가 남아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상처를 찾을 수 없군요.” 다이즈전의 다섯살 된 작은 딸 파두는 건강하고 활발했고, 대범하고 명랑하여 처음 만난 사람들은 아이가 홀어머니 가정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라는 것을 절대로 믿지 않는다.

다이즈전(戴志珍)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이것이 바로 파룬다파의 아름다움이예요. 4년 전의 그날 밤, 나는 내가 지금처럼 이렇게 마음이 평정하고 태연해 질 것이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어요. 이 어려운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전법륜』에 의지하면서 신념을 믿고 오다보니 길은 갈수록 넓어졌고 마음은 점차 순수해 졌어요. 나는 정말 생사이별의 마난을 넘었어요. 친인의 정을 타인에 대한 큰 사랑으로 바꾸었기에 마음 속엔 비분과 상처가 남지 않았어요. 파룬다파, 이곳은 정토예요.”

문장완성: 2005년 12월 7일

문장발표: 2005년 12월 8일
문장수정: 2005년 12월 8일 02:14:08

문장분류: 【해외 종합】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5/12/8/11610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