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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일재(無逸齋)’의 하루를 말하다

글/ 구위(穀雨)

[밍후이왕] 청나라 황자의 교육제도는 강희제 때 정해졌다. 황자와 황손은 6세 때부터 서재에서 공부했다. 황자들은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오후 6~7시까지 공부했다. 1년 중 휴가는 새해 첫날과 그 전 두 차례 반나절 뿐이었다. 춥든 덥든 매일 똑같았다.

황자와 황손들이 공부하는 서재는 창춘원(暢春園)의 ‘무일재(無逸齋)’에 있었다. 서재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곳에서는 안일이라는 것이 없었다. 강희제는 ‘정훈격언(庭訓格言)’에서 밝혔다. “무릇 사람의 수신양성은 모두 평소의 신중함에 있다. 짐은 6월 대서(大暑)에 부채를 쓰지 않고, 관(冠)을 벗지 않는데, 이는 모두 평소에 스스로 방종하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뜻이다. ‘무릇 수신양성은 평소의 일거일동에 나타나며, 일상의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 나는 한여름인 6월의 찌는 듯한 날에도 부채를 부치지 않고, 모자를 벗지 않는데, 이는 내가 평소에 자신을 엄격하게 단속하며 방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로소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무일재’의 하루

황자들은 학업에서 엄격한 요구가 있었다. 강희제는 늘 황자들의 학업 상황을 조사했고, 그들의 무예를 검사했다. ‘강희기거주책(康熙起居註冊)’ 등의 책에는 강희 26년(1687년) 6월 10일, 황자들이 서재인 ‘무일재’에서 하룻동안 공부한 상황이 기록돼 있다.

인시(03~05시), 황자가 서재에서 공부하는데, 전날의 공부를 복습하며 스승이 오기 전, 수업 준비를 한다.

묘시(5~7시), 스승(만주어 스승 달합탑, 중국어 스승 탕빈)이 교실에 와서 황자들의 숙제를 검사하고, 교과서 본문 외우기를 시작한다. 한 자도 틀리지 않으면 계속해서 다음 부분을 공부할 수 있고, 한 단락을 정해주면 계속해서 외운다. 다음날 또다시 검사를 한다.

진시(7~9시), 강희 황제가 조회를 마치고 곧바로 ‘무일재’에 와서 공부 검사를 시작한다. 주로 암기 검사를 하며, 현재 배우고 있는 부분과 같은지 보는데,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본문 암기 검사부터 한다.

사시(9~11시), 초복에다 해가 중천에 뜨니 뙤약볕이 불과 같다. 황자들이 공부할 때는 부채 사용을 금지하고 단정히 앉게 한다. 글쓰기 연습을 시작하면 모든 황자에게 100번을 쓰게 한다.

오시(11~13시), 점심 때가 된다. 점심식사 후, 계속 글쓰기를 자습한다.

미시(13~15시), 황자들이 무일재 앞 정원으로 이동해 체육을 시작한다. 그곳에는 활과 과녁이 있으며, 씨름과 무술 등도 배운다.

신시(15~17시), 강희 황제가 다시 무일재로 와서 책을 임의로 펼쳐 시험을 친다. 황자들은 순서대로 나아가 암송과 설명을 한다.

유시(17~19시), 무일재 앞에서 활쏘기 연습을 한다. 강희 황제가 모두에게 차례대로 쏘게 하니 각 황자의 성적이 서로 다르다. 다시 스승들에게 쏘게 한다. 이어서 강희 황제가 친히 활을 쏘니 백발백중이다.

강의가 끝나면 수업을 마친다. 이것이 바로 황자들의 하루다.

강희제가 60년을 하루같이 정무에 힘쓰다

강희 황제는 재위기간이 61년으로 중국 역사 기록 이래 가장 오래 집권한 군주다. 국력을 키우고 백성을 행복하게 해 ‘천고일제(千古一帝)’로 불린다. 강희제를 시작으로 청나라 황제들은 매일 어전에서 정무를 보았는데,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예외가 없었다. 강희 18년에 베이징에서 대지진이 발생했지만, 강희제는 아침 일찍 어전에서 정무를 처리했다.

어전에서 정무를 처리하는 시간은 원래 봄·여름에는 아침 6시(유시), 가을·겨울에는 아침 7시(진시)였다. 많은 연로한 신하들은 어전에서 정무에 참석하기 위해 매일 한밤중에 일어나 서둘러 궁궐로 향했다. 오래 되자 많은 사람이 견뎌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황제에게 조회 시간을 늦춰달라며 여러 차례 상서했다.

대신들이 거듭 간청하자 강희제는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 폭우나 대설, 또는 혹서와 혹한이 닥쳤을 때, 아뢸 일이 명확하게 없다면 일시적으로 조회 중지 주청을 올릴 수 있게 했다. 60세가 넘은 연로한 중신은 날마다 오지 않아도 되며, 2~3일마다 와서 상주하게 했다. 그러나 강희제 본인은 “이미 30년 동안 정무를 보는 것이 규칙이 되어 날마다 어전에서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불안을 느꼈고, 3~4일만 쉬어도 권태에 빠질 것이 두려워 끝내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일 정무를 보는 것을 견지했다.

긴급한 일이 생기면 강희제는 항상 밤새워 지시를 내렸고, 절대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는 천하의 가장 중요한 일에만 관여하며, 일부 작은 일에는 반드시 관여할 필요가 없다’는 말에 반대해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황제가 일을 처리하면서 잠시 부주의하면 천하에 번거로움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잠시 부주의하면 후세에 재난을 남길 수 있다. 작은 일에 부주의하면 큰일에 해를 끼친다.”

강희 15년(1676년) 여름, 황하의 제방 수리를 소홀히 해 범람이 잦았다. 황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파악하기 위해 강희제는 여러 차례 직접 현장을 살폈고, 열심히 연구했다. 그는 배를 타고 하류의 맹진(孟津), 서주(徐州), 숙천(宿遷), 비주(邳州), 도원(桃源), 청구(清口) 등지를 조사했다. 또한 직접 중류의 산서(山西), 섬서(陝西), 내몽고(內蒙古), 영하(寧夏) 등지를 시찰했다. 또 횡성보(橫城堡, 현재의 닝샤 인촨시 둥난)에서 배를 타고 황하의 중류까지 22일 동안 수천 리를 항해하며 “이르는 곳마다 자세히 살피지 않는 것이 없었다.”

중국 역사상 수리 건설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그 뿐은 아니었으나, 직접 여러 차례 수리를 실천하며 자세한 상황을 연구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사람은 많지 않다.

학자는 매일 반드시 한 걸음 나아간다

강희제는 후세 사람들에게 정진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조금도 태만하지 말라며 누차 훈계했다. 그는 말했다. “‘역(易)’에 이르기를 ‘나날이 새로워지는 것을 훌륭한 덕이라 한다’고 했으니 학자는 날마다 반드시 한 걸음 나아가야 하며,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된다.” ‘역경(易經)’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매일 새로워지는 것은 아주 아름다운 일, 혹은 일종의 지극히 고상한 품성이라 할 수 있다.”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마땅히 날마다 진보가 있을 것이며, 그래야만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게 된다.

‘강희교자정훈격언(康熙教子庭訓格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세인이 모두 안일을 추구하고 일을 싫어하나, 짐은 항상 일을 하면 편안했도다. 만약 안일함에 빠져 있었다면 안일하다는 것을 모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이 생겼을 때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자고로 ‘역(易)’에 이런 말이 있다. ‘하늘의 운행은 강하며, 군자는 쉬지 않고 스스로 강하게 한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성인(聖人)은 수고를 복으로 여기고, 안일을 화(禍)로 여기노라.” 뜻인즉 이렇다. ‘세인이 모두 안일함을 좋아하고 고생을 싫어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늘 멈추지 않고 열심히 일해야 무엇이 안일인지 안다고 생각한다. 만약 안일만 탐낸다면 사실상 무엇이 안일인지를 전혀 체득할 수 없고, 고생을 해야 할 때는 오히려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성인들이 모두 힘든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일종의 복으로 간주했고, 안일을 화로 간주했다고 생각했다.

강희제는 일생을 이렇게 스스로 격려했고, 직접 정무를 돌보는 데 있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질병, 3대 명절, 중대 변고 발생 시 외에는 거의 하루도 빠진 적이 없었다. 그는 만년에 인생을 회고하면서 감개무량하게 재위 61년을 이야기했다. “부지런히 애쓰며, 주의깊고 신중했다. 조석으로 겨를이 없었고, 일찍이 조금도 느슨한 적이 없었으며, 수십 년을 하루같이 몸과 마음을 다했다.”

강희제의 일생을 개괄하면 이 말은 꼭 맞으며 허튼 곳이 없다.

강희제는 자신의 일언일행으로써 수신(修身)하고 덕으로 다스려 후세에 모범을 보였다. 그는 중화 전통문화의 보물 중에서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고귀한 정신적 자산이다.

 

원문발표: 2021년 4월 21일
문장분류: 문화채널
원문위치: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1/4/21/42356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