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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해 속에 덕정을 펼친 고대 관리들 이야기

글/ 춘추(春秋)

[밍후이왕] ‘국어·주어(國語·周語)’에 이르기를 “고대인은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고 했다.” ‘춘추좌전(春秋左傳)’에서 선공(宣公) 15년에 이르기를 “하늘이 때를 거스르는 것을 재(災)라 한다.”고 했고, 선공 16년에는 “사람이 불을 내는 것을 화(火)라 하고, 하늘이 불을 내는 것을 재(災)라 한다.”라고 쓰여 있다. ‘춘추번로(春秋繁露)’의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은 인간 세계의 군신과 왕도가 하늘의 도에 어긋나면 하늘의 이변을 초래하며, 하늘이 인간 세상에 재해를 내렸는데도 뉘우치지 않으면 더욱 큰 재난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 천재(天災)의 해를 만나기만 하면 고대의 관리는 모두 덕정(德政)을 시정의 중요한 위치에 놓았다.

밭갈이 소를 사들인 유환

송(宋)나라 영종(英宗) 치평(治平)년 간에 하북(河北)성에 큰 기근이 들었고, 이어서 큰 지진이 발생해 완전히 흉년이 들었다. 백성들의 집에는 일찍이 양식이 떨어졌고, 기근이 널리 퍼졌다. 어쩔 방법이 없자 사람들은 집안의 밭갈이 소를 끌어다 팔아 양식을 사서 연명했다.

당시 유환(劉渙)은 전주(澶州)의 지주(知州, 주를 다스리는 장관)였는데, 그는 곳간에 있던 모든 재산을 풀어 이재민의 밭갈이 소를 사들였다. 이듬해 지진이 완전히 잦아들자 사방으로 흩어졌던 이재민들이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집집마다 밭갈이 소가 없었고, 시장의 밭갈이 소는 값이 열 배로 뛰었다. 유환은 지주부에 있던 소를 일률적으로 원가에 팔았다. 그해 하북의 각 주(州) 중에서 전주의 백성들만 떠돌지 않아도 되었다.

재해년에 쌀값을 바로잡은 조청헌

송나라 신종(神宗) 희령(熙寧)년간에 절강동도(浙江东道)와 절강서도(浙江西道)에 가뭄과 메뚜기 재해가 크게 들이닥쳐 흉작이 들었고, 각 지역이 모두 식량 기근에 시달렸다. 쌀값이 크게 뛰어 배를 채우지 못한 백성이 굶어 죽었다. 각 주에서는 하급 관리들이 모두 나와 쌀값을 올린 자를 고발하면 상을 내린다는 방을 길에다 붙였다. 관청에서는 잡힌 자를 엄벌에 처했다.

조청헌은 월주(越州)의 지주로 있었는데, 그가 붙인 방은 달랐다. 내용은 관청에서 쌀을 고가에 매수한다며 천하의 쌀을 비축한 사람에게 알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각지의 쌀 상인이 모두 월주로 몰려와 쌀을 바치니 시장의 쌀이 단번에 풍족해졌고, 가격도 아주 빨리 떨어졌다.

사창법(社倉法)을 만든 주희

송나라 효종(孝宗) 건도(乾道) 4년에 각지에 기근이 들자 주희(朱熹)는 주(州)의 관청에서 상평미(常平米) 600석을 빌려 응급 구제를 했다. 양식이 떨어진 백성에게 여름에 사창(社倉, 기근 구제를 위해 지은 창고)의 쌀을 빌려주고, 겨울에 이자를 붙여 받았다. 흉년이 들면 이자의 절반을 면제했고 큰 흉년이 들면 완전히 면제했다. 14년 후, 600석의 양식을 모두 주에 돌려주고도 3100석이 남으니 더는 이자를 받지 않았다. 만약 흉작이나 기근이 든다고 해도 백성들은 양식이 떨어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효종은 전국 각지에 조서를 내려 사창법을 시행하게 했다.

이재민을 돌본 진제암

명(明)나라 신종(神宗) 만력(萬歷) 기사(己巳)년에 큰 수재(水災)가 발생했는데, 마침 진제암(陳霽岩)이 개주(開州)의 지부(知府, 주를 다스리는 장관)로 있었다. 그는 관리들과 함께 구제 방법을 의논했다. 진제암은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곡식 한 석을 주고, 다음으로 가난한 사람에게는 다섯 말을 주어 백성들이 진정으로 구제받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진제암은 아랫사람에게 명해 이재민에게 번호를 매겨 사람들이 번호에 따라 차례로 곡식을 받아가게 했다. 진제암은 직접 창고 입구의 작은 헛간에 앉아 출석을 부르며 그들의 옷차림새를 살폈고, 가장 가난한 사람을 특별히 기록했다. 비록 만 명이 넘는 이재민이 줄을 섰지만, 아무도 다투지 않았다.

이듬해인 경오(庚午)년 봄이 되어 상부에서 공문이 왔는데, 가장 가난한 사람을 재차 구제하되, 공고를 붙여 그런 사람을 찾으라고 했지만, 진제암에게는 필요가 없었다. 그는 지난번에 표시해 둔 명단을 꺼내어 사람들에게 직접 통지해 받으러 오게 했다. 주민들은 진제암이 민간의 실제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는 지난번에 구제 물품을 나누어 줄 때 사람들이 급히 통보를 받는 바람에 옷을 갖추어 입을 경황이 없어 옷과 얼굴만 봐도 가난한 사람을 알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력 기사년 말에 개주 창고의 양식이 모두 나가자 무태(撫台, 민정과 군정을 순시하던 대신)가 각 주의 현에 명해 관청의 창고에 있는 은자 2천 냥으로 곡식을 사들이게 했다. 그러나 이때는 곡식 가격이 이미 크게 뛰어 한 석에 은자 여섯 전을 주어야 했다. 관청에서는 부유한 집의 곡물을 내놓게 하면서 다섯 전을 주고, 운송과 저장 비용을 추가로 주었는데, 부자들은 한 석에 2전을 요구했다. 원래가 흉년이라 부자들의 손실이 아주 컸으므로 진제암은 부자들의 감당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고려해 소량의 곡물만 사서 창고에 넣었는데, 총 4천 석이었다.

경오년 가을, 개주에 풍작이 들어 곡물값이 한 석에 3전을 조금 넘겼다. 진제암은 무태에게 보고하고 관청의 은자 2천 냥으로 양식을 사되, 수매가는 3전, 현금으로 결재할 것을 건의했다. 수매 기간에 곡물은 다시 2전 반으로 떨어졌다. 부호들은 애초에 수매를 강행하지 않았던 진제암에게 감사하면서 잇달아 반 전을 붙여주겠다고 했다. 진제암은 웃어넘기면서 여전히 한 석에 3전을 부호들에게 지불했다. 결국 개주에서는 정량을 채웠을 뿐 아니라 700석이 남았다. 진제암은 귀향하여 일자리로 돌아간 빈민들에게 남은 부분을 나누어 주었다.

해마다 홍수가 나서 개주 토성이 십여 곳이나 무너졌다. 관아에서 보수 공사를 논의하는데, 한 사람이 부역할 주민을 징집하자고 했다. 진제암은 백성들을 너무 힘들게 한다며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아랫사람에게 명해 성문 네 곳에 포고문을 붙이게 했다. 내용은 외지에서 떠도는 주민이 돌아와 농사를 지으면 농지세를 면제하고, 관아에서 구제할 곡식도 준다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열 사람에게 전하고, 열 사람이 백 사람에게 전해 수많은 사람이 돌아왔다.

귀향한 빈민들이 잇달아 자루를 가져와 양식을 받아가자 진제암은 사람을 시켜 작은 게시 패를 많이 매달게 했다. 내용인즉, 양식을 받는 사람에게 반드시 먼저 자루에 흙을 담아와 무너진 담장을 채우면 총관리인이 자루에 도장을 찍어줄 것이니 도장이 찍힌 자루를 가져와 곡식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구제하는 일이 완료되었을 때 성벽도 복구되었지만, 개주의 재정 지출은 늘어나지 않았다.

‘소공제(蘇公堤)’를 건설한 소식

소식(蘇軾, 소동파)이 항주(杭州) 태수로 있을 때 가뭄이 들어 작황이 아주 나빴는데, 전염병까지 유행했다. 소식이 조정에 아뢰어 공물의 3분의 1을 면제하도록 상주하자 쌀값이 단번에 떨어졌다. 소식은 또 조정에 주청을 올려 출가자에게 발급하는 승려 허가증 수백 장을 하사받아 쌀로 바꾼 다음, 굶주린 백성을 구제했다. 이는 승려에게는 국가에 대한 납세 의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 봄, 소식은 평소 창고에 있던 쌀을 백성에게 저가로 팔아 굶주림을 면하게 했다.

당나라 백거이(白居易) 시절에 항주 서호(西湖)의 물을 운하로 끌어들이고, 다시 운하의 물을 2000만 평의 농경지에 공급했는데, 서호의 물에 수초가 너무 많아 매년 막힌 것을 뚫어야 했고, 송나라 이후에는 폐기하여 관리하지 않았다. 운하에 서호의 물이 없으니 장강(長江)의 만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지만, 강물에는 진흙이 많아 선박이 시(市) 지역을 운항할 수 있도록 3년마다 한 번씩 인위적으로 뚫어야 했다. 이는 항주 시민에게 큰 고통이었다.

소식이 부임한 후, 사람을 파견해 마오산 운하와 염교하(鹽橋河)를 통하게 했다. 다시 수문을 설치해 서호 물의 비축과 배수를 통제했는데, 이렇게 하자 비로소 바다의 조수가 시 지역으로 유입되지 않았다.

그러나 서호 안의 수초와 쌓인 진흙은 어떻게 하겠는가? 소식은 공무 집행에 여유가 생길 때마다 서호변에 나와 문제점을 관찰했다. 나중에 그는 하나의 방법을 생각해 냈는데, 수초와 진흙을 서호 중간에 쌓으면 서호를 관통하는 긴 제방이 형성되고, 남북이 서로 통하게 되면 행인이 다니기에 편리하다는 것이었다. 호안의 땅을 밀밭으로 개간하면 얻은 이윤을 제방 건설 기금과 서호 관리 자금으로 쓸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가뭄을 구제한 후에 남은 돈과 양식에 백 장의 승려 허가증을 보태어 밀을 경작할 사람을 모집했다. 긴 제방이 완성된 후, 제방에 연꽃과 버드나무를 심으니 경치가 그림 같았고, 항주 사람들은 그것을 ‘소공제(蘇公堤)’로 불렀다.

고대인이 흉년에 펼친 덕정과 중공 관리들의 행위를 비교해 보자. 사람들은 관리들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탐오했는지를 영원히 모를 것이며, 나아가 법의 심판을 받은 탐관들의 훔친 돈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더욱 모를 것이다. 올해 전염병, 수재, 지진이 이처럼 심각한데, 중공이 한편으로는 여전히 경제가 전년 대비 얼마얼마 성장했다고 선동하면서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백성에게 기부를 요구하니 사상 최대의 부패 악정(惡政)이라 할 만하다.

 

원문발표: 2020년 7월 23일
문장분류: 천인사이
원문위치: http://minghui.org/mh/articles/2020/7/23/40937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