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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학과 수련문화 (4)

신비한 재료학

글/ 아르노 H.

[밍후이왕] (전편에 이어) 앞에서 서양 문화에서 구체적 물질 성분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이야기했는데, 적지 않은 전문가가 연금술을 떠올릴 것이다. 자고이래 미술계의 재료 및 안료 역사학 고서적에는 항상 적지 않은 안료나 회화 재료가 연금술 실험에서 비롯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오늘날의 학술계는 그것이 현대 과학의 전신이며 그것이 역사상 과학의 발전을 촉진했다고 여긴다. 그러나 사실 원래 연금술은 오래된 비밀 수련 방법이었다.

그것이 비밀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연금술의 구체적인 수련 방법과 내용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고 그것이 미술 재료학에 미친 작용과 역사 속 사회문화에 미친 영향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겠다.

‘연금술(煉金術, Alchemia)’이라는 중문 명칭(한국, 일본 한자명 동일)은 그것이 하나의 기술 분야가 아니므로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라틴어로는 중문의 단도(丹道)도 ‘알케미아(Alchemia)’라고 하는데, 이는 이 단어의 개념이 중문 번역보다 훨씬 광범위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글에서는 여전히 대중에게 익숙한 명칭인 ‘연금술’로 부른다.

연금술과 중국 단도의 연관성은 절대 근거가 없지 않다. 둘 사이에 확실히 적지 않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대 중국 도가(道家)의 단술(丹術)과 황백술(黃白術)에서는 모두 수은, 유황, 납 등의 사용을 중시했고 이론적으로 음양 등등을 강구했다. 이들은 모두 아랍 및 유럽 연금술과 공통점이 있다.

동양 문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서양 세계의 연금술은 서양의 도가(道家)로 볼 수 있다. 물론 구체적인 세부 이론상 이런 수련 문파들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고, 커다란 구별이 있으며 각각의 특색이 있다.

알려진 연금술 문화와 관련해 대부분 사람은 연금술이 화학실험처럼 일부 비밀 전수된 재료와 방식을 이용하거나 일부 정신적인 비법을 더하므로 도가의 외단술(外丹術) 같은 수련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이런 수련도 여러 유파로 나뉘며 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유파에서는 인간을 그릇, 도가니, 또는 향로로 간주하며, 심성을 현자(賢者)의 경지로 승화시켜 체내에 현자의 돌(Lapis Philosophorum)을 육성하려 하는데 이는 중국 도가의 내단술(內丹術)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역사상 화가들에게 있어 연금술은 피할 수 없는 화제였다. 당시에는 현대의 공업화된 도료 생산업이 없었으므로 가장 기초적인 반제품을 제외하고 안료 제조, 매개 정제, 심지어 휘발성 오일 증류 등 일련의 모든 번거롭고 정밀한 작업을 화가 자신, 또는 화방의 조수, 견습생이 직접 해야 했다. 이와 관련한 각종 지식과 작업 테크닉은 모두 연금술사들이 발전시킨 연금술 이론을 바탕으로 구현한 것이었다. 화가들이 연금술사들로부터 배운 구체적인 작업 방법은 사실 연금술의 재료 이론을 계승한 재료학 이론이었다.

일부 기록은 미술 역사서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예를 들어 14세기의 미술 재료 및 기술 전문가 첸니노 첸니니(Cennino Cennini)는 그의 유명한 ‘예술의 서(Libro dell Arte)’에 “주사(Cinnabar)는 연금술로 만든 색이다.”라는 기록을 남겨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한 주사 안료를 설명했다. 그러니 만약 당시 화가가 주사 물감을 만들고자 했다면 자연스럽게 연금술의 해당 단계를 익혀야 했다. 일부 고대 화가도 본업을 완성하려면 유사한 기술을 최대한 숙달해야 했다. 그것이 재료과학 지식의 주요한 원천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연금술이 꼭 진정한 연금술은 아니다. 연금술은 아주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만, 사실 항상 비밀리에 단독 전수되는 방법이 존재했으며, 정화(精華)적인 것들은 공개되지 않았다. 따라서 진정한 연금술사가 극히 드물었으니, 사람들에게 알려진 관련 역사는 문화사(文化史)에 더 가깝다. 또한, 수많은 유파에서는 연금술사의 심성에 대한 요구가 대단히 엄격했고, 사상이 순수하고 단일한 데 도달할 수 있도록 세상과 단절된 환경에서 수련에 집중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에 뛰어들지 않았고 대단히 신비로워 보였다.

그런데 연금술의 이런 신비함과 일부 심오한 이론은 세간에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고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7세기 이전에 유럽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연금술에 대한 개략적인 이해가 있었다는 것을 많은 문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미 사회에 확산된 하나의 문화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의 개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바로, 진정한 연금술과 사회에 전해진 연금술 문화는 별개라는 것이다. 이는 어떤 일이 하나의 문화로 형성되면, 대중 속에 흡수되어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되기 쉽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오늘날 많은 사람이 연말에 서양의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1월 1일에 새해를 맞이하고, 머지않아 설을 쇠고, 다음에는 대보름을 쇠는 것과 같다. 즉, 명절이라는 개념에 대해 크게 따지지 않으며 어떤 국가나 어떤 유형의 명절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수련 법문에서는 이런 것을 허용하지 않는데, 뭐든 바꾸거나 움직이면 수련에 실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수련계에서는 비밀리에 또는 단독 전수되는 내용을 함부로 책으로 만들거나 사회에 배포해 대중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렇게 했다면 어떻게 그것을 ‘비전(秘傳)’이라고 하겠는가? 설령 소수의 정통 연금술사들이 일부를 기록한다고 해도 그 한 문(門)의 수련문화를 남기려는 목적이었을 뿐, 핵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흔히 얼버무리거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진짜 연금술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대중이 들은 것은 일부 단편적인 모습과 문화적인 것들의 모음에 불과했다. 그래서 사회에 전해진 책에는 자연히 진짜와 가짜가 섞이고, 각종 사이비 내용이 다 들어 있어, 그로 인한 결과와 사회에 미친 영향도 잘잘못이 뒤섞일 수밖에 없었다. 마치 고대 중국에서 연마해낸 외단(外丹)처럼, 어떤 수련자가 먹고 신선이 됐다는 기록이 역사서에 있지만 일반인이 먹고 중독된 사례도 적지 않아, 당나라 이후 세인의 마음속에서 외단술(外丹術)의 이미지는 심각하게 손상됐고, 명나라에 와서야 조금 회복됐다. 물론 필자는 사회의 표면 현상만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깊게 보면 이것이 각 조대(朝代)의 기원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수련은 대단히 엄숙한 일이며 진전(眞傳)을 얻지 못하면 난잡해질 수밖에 없다. 골자를 득하지 못한 일부 독학자들은 줄곧 실험에 실패한 후, 귀신을 초대하는 방법으로 다른 차원의 존재와 결탁해 연금술 공식을 얻으려고 시도했다. 서양의 소환술(召喚術)은 성격에 따라 신을 청하는 테우르기아(Theurgia)와 마귀를 청하는 게티아(Goetia)로 나뉘지만, 강렬한 욕망으로 불러온 영체는 모두 너무나 좋지 않았다. 특히 기독교 통치 기간에 그런 방법을 쓴 사람은 교회의 강렬한 불만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고 처벌을 받게 됐다.

역사가 발전함에 따라 사회에서 출판되는 각종 연금술 서적도 점차 변했고, 대부분 심법(心法)을 다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실험 외의 것을 구하는 경향을 조장함으로써, 원래 형성했어야 할 수련문화를 과학 보급 문화로 변질시켰다. 근대 화학이 연금술 문화에서 태어난 후 물질과 정신 사이의 연계가 이론상 단절됐고, 화학자들은 실수를 범한 서투른 연금술사들을 협잡꾼이라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 과학세력의 전통문화 부정은 더욱 강렬해졌고 연금술의 명성도 곤두박질쳤다.

또한, 일부 화학 경험이 풍부한 연금술사는 자아를 승화시키고 만병통치약을 제련하거나 장생불로에 도달하는 류의 것을 전혀 믿지 않았고, 기술적 수단으로 싸구려 금속의 표면 색깔을 바꾸어 돈을 갈취하는 데 열을 올렸다. 이런 일들도 당시 사회에서 연금술의 명성에 많은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유럽에서 연금술이 번성하던 시기가 마침 유화 재료와 기법이 등장해 점차 형태를 갖추던 시기였다. 그래서, 일부 미술 고서적에 기록되어 있듯이 유화는 일정 정도 연금술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초기 플랑드르 화파(Flemish Primitives)의 대표 인물인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가 한때 미술사에서 유화의 창시자로 여겨졌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모두 그 이전에 이미 소수의 사람이 오일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반 에이크는 여전히 유화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그리고 그의 형 휴버트 반 에이크(Hubert van Eyck)] 유화 재료의 개량과 회화 기법의 기초를 닦아 그 시대 예술 대가들이 경쟁적으로 유화를 착수하게 했고, 아주 빨리 유화가 서양 회화 영역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됐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미술 견습생은 작업장에서 수년간의 전수와 훈련을 거쳐 자립할 수준에 도달한 후 그가 지닌 경험을 이용해 창작하며, 대량의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여 새로운 유형의 그림을 연구 개발할 필요가 전혀 없다. 많은 감당을 하더라도 성공 여부를 알 수 없다는 것은 분명 부담스러운 일이다. 이런 일을 위해 많은 힘을 쏟으려 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재료 실험 자체에 더 높은 가치와 사상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당시 재료 자체에 관심을 가졌던 많은 사람은 연금술사인 얀 반 에이크가 바로 그런 연구자라고 생각했다.

르네상스 미술사학자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는 그의 ‘예술가 열전(Le vite de’ più eccellenti pittori, scultori e architettori)’에 반 에이크가 “연금술을 대단히 좋아했다.”라고 썼다. 반세기 후 플랑드르 역사학자 카를 판 만더르(Karel van Mander)도 그의 책에서 이점을 재차 언급했다. 사실 유화 재료 개량에서의 성공은 확률적 관점에서 이해하면 쉬워진다. 끊임없이 반복 실험을 하면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필요한 결과를 얻을 확률이 더욱 높을 것이다.

유화의 기초를 닦은 사람 외에 적지 않은 화가들도 유화 재료와 기법이 점점 형태를 갖추는 과정에서 연금술을 연구했다. 르네상스 시기의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와 파르미자니노(Parmigianino) 등 일부 유명 화가도 연금술에 대한 열정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그 시대 신비주의가 예술 창작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교회는 연금술에 비교적 관대했다. 또, 관심을 두는 상류사회 애호가의 재정적 지원과 도움이 더해졌고, 종교적 금기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많은 실험이 자연적인 연구와 인지로 간주됐다. 이것도 유화 재료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완벽한 모습을 갖추게 했다.

(계속)

 

원문발표: 2021년 10월 8일
문장분류: 문화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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