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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절의 큰 축은 남녀유별, 관우가 촛불을 들고 책을 읽다

글/ 장야란(張雅蘭)

[밍후이왕] 춘추시대 노나라 정경(正卿, 재상에 해당하는 벼슬)인 계강자(季康子)의 숙모가 계강자를 찾아왔을 때 계강자가 인사했지만, 숙모는 대꾸하지 않았다. 계강자는 숙모를 따라 내실로 들어가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물었다. 숙모는 부녀자들이 내실의 일만 처리하지, 남자가 조정에서 하는 일은 따지지 않는다고 했다. 나중에 계강자가 숙모에게 문안을 드리러 가자 숙모는 문을 열고 계강자와 이야기를 나눌 뿐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공자는 그들이 남녀유별의 예절을 제대로 지켰다고 칭찬했다.

예절의 큰 축은 남녀유별

고대 중국 예절의 큰 축은 남녀에 분별이 있어야 하며 예절이 있으면 편안하고 무례하면 위태롭다는 것이었다. 예절은 가정을 다스릴 때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식생활과 일상생활에 예의가 있고 외모와 태도가 공손하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에도 절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군자는 선(善)을 논하면서 수양에 힘써야 했다.

‘예기(禮記)·곡례상(曲禮上)’에는 이런 규정이 있다. 남녀는 함께 있을 수 없고, 옷걸이, 수건, 빗을 공유할 수 없으며, 물건을 직접 건네거나 받을 수 없다. 형수와 시동생은 서로 왕래하며 안부를 물어서는 안 된다. 서모(첩)는 자신이 낳지 않은 아이의 옷을 빨 수 없다. 남자는 밖의 일을 집에 있는 여자에게 말할 수 없고, 여자도 집안일을 밖에서 말할 수 없다. 여자는 약혼 후 오색 띠를 착용해야 하며 다른 사람은 큰일이 없는 한 그 여자의 규방에 들어갈 수 없다. 고모, 자매, 딸이 출가 후 친정에 왔을 때 형제들과 같은 자리에 앉거나 같은 식기로 식사할 수 없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도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다.

남녀 사이에 중매인이 없다면 상대방의 이름을 물어서는 안 된다. 여자가 예물을 받기 전에는 양가가 서로 만날 수 없다. 남녀가 약혼한 후에는 길일을 택해 혼례를 올리고, 재계(齋戒)해 조상에게 고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야 하며 술자리를 마련해 이웃과 친지를 초대해야 한다.

‘예기(禮記)·내측(內側)’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남녀 사이에는 제사나 장례가 아니면 손으로 물건을 전할 수 없다. 전할 것이 있다면 대바구니로 받아야 하며 받을 도구가 없으면 넘겨줄 사람이 앉아서 물건을 땅에 내려놓은 후에 받을 사람이 앉아서 물건을 가져야 한다. 남녀는 같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는 안 되고, 같은 욕실을 쓸 수 없으며, 하나의 침상을 공유할 수 없고, 물건을 서로 빌릴 수 없고 서로 옷을 섞어 입을 수 없다. 규방 안에서 나온 말을 밖으로 전할 수 없고 규방 밖에서 나온 말을 안으로 전해서도 안 된다. 남자가 집 안에 들어오면 소곤거리거나 손가락질을 해서는 안 된다. 밤길을 갈 때는 남녀를 막론하고 반드시 횃불이나 초를 켜야 하며 횃불이나 초 없이 외출할 수 없다. 여자가 외출할 때는 물건으로 얼굴도 가려야 한다. 길을 갈 때 남자는 오른쪽으로 여자는 왼쪽으로 걸어야 한다.

또한 부인은 손님을 맞거나 배웅할 때도 문밖으로 나갈 수 없고 자기 형제를 만날 때도 문턱을 넘어갈 수 없다. 집안의 아이가 자라 일곱 살이 되면 남녀가 한자리에 앉아 밥을 먹거나 하나의 자리에서 잠을 잘 수 없다. 사내아이가 열 살이 되면 밖에 나가 스승을 모시며 공부해야 한다. 여자아이는 열 살이 되어도 공부를 위해 외출할 수 없다.

고대인들은 왜 남녀유별의 예절을 그토록 중시했을까? 현대의 젊은이들은 아마 이런 예절이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여길 것이다. 상관이 있는지 없는지 다음 이야기를 통해 함께 알아보자.

여동빈이 말하는 부귀공명과 장수의 관계

여동빈(呂洞賓)은 명이 암(岩)이요, 자가 동빈(洞賓)으로, 당나라 하중부(河中府) 영락현(永樂縣, 현재의 산시성 루이청현 융러진) 사람이다. 그는 원래 당나라 예부시랑(禮部侍郎) 여위(呂渭)의 손자였는데, 효렴(孝廉, 효행과 청렴함을 겸비한 사람)에 선발되고 진사에 합격했다. 나중에 여동빈은 종남산(終南山)에 은거하게 됐고 종리(鐘離) 조사를 만나 도를 닦는 법을 전수 받고 득도해 신선이 됐다.

여동빈은 제자에게 현세와 내세의 부귀, 관직, 복록은 모두 정절을 지키고 음욕을 갖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여동빈은 제자들에게 상세히 설명했다. “어떤 관계의 여자를 만나든 마음가짐을 포함해 남녀유별의 예절을 엄격히 준수해야 하며 사람을 사귐에도 엄격한 요구가 있어야 하느니라.”

여동빈이 말했다. “요염한 여자가 보여도 절대 음탕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나이가 조금 많으면 누나요, 조금 적으면 여동생이다. 아름다운 용모는 나의 짝이 아니니 일생의 명예와 절개를 더럽힐까 두렵다. 첫째 두려움은 자신의 음덕을 손상하는 것이요, 둘째 두려움은 하늘의 신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요, 셋째 두려움은 응보가 속히 도래하는 것이니 감히 음란의 죄를 소홀히 할 수 없다. 때로 안방의 이야기가 나오면 정색하며 그를 타일러야 한다. 가끔 길에서 여자를 만나도 감히 머리를 돌려 몸을 쳐다보지 않아야 한다. 가끔 의자매를 만나도 사사로운 정을 주고받아서는 안 된다. 가끔 사촌 누이를 만나도 마주 보며 웃어서는 안 된다. 가끔 숙모와 형수를 만나도 동석하거나 동행해서는 안 된다. 가끔 조카딸을 만나면 엄격하게 예의를 갖추고 친밀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가끔 삿된 그림이 보이면 즉시 찾아내 소각해야 한다. 가끔 음탕한 친구가 보여도 함께 해서는 안 된다. 마음이 정직하면 하늘이 알기에 금생에 과거에 급제할 것이다.”

여동빈이 제자들에게 지시한 것은 음란한 서화 등을 즉시 소각하는 것을 포함해 남녀 교제 중에 남녀유별의 예절을 엄격히 준수하고 음란한 친구와 어울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사람이 만약 공명과 부귀를 얻고 가문을 빛내려 한다면 반드시 친구를 가려 사귀고 스스로 처세와 행동거지를 반드시 단정하게, 곧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나라 남자가 순결을 지키다

춘추시대에 ‘유하혜(柳下惠)가 여인을 품고도 난잡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여기에 ‘유하혜를 따라 배울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공자 이야기 사례’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노나라에 혼자 사는 남자가 있었는데 한밤중에 이웃집 과부가 방이 무너지고 비가 새어 신세를 지러 왔지만, 그는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자가 “어찌하여 어질지 못하게 저를 받아주시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노나라 남자가 말했다. “제가 듣기로 남녀가 60이 되기 전에는 같이 기거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지금 그대가 젊고 저 또한 젊으니 감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부인이 말했다. “그대는 어찌 유하혜처럼 하시지 않나요? 유하혜는 문 앞에 온 여자를 받아들였지만, 백성들은 그것이 난잡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남자가 대답했다. “유하혜는 할 수 있지만 저는 못 합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없는 것으로 유하혜가 할 수 있는 것을 배우려 합니다.”

공자는 이 소식을 듣고 노나라 남자가 이미 지극한 선(善)에 도달했고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이라며 감탄했다. 또한 유하혜를 배우려는 자 가운데 이렇게 지혜로운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뽕 따는 여인이 예를 지키다

동한(東漢) 말기에 진라부(秦羅敷)라는 뽕 따는 여자가 있었는데 자태가 아름다워 현지에서 유명한 미인이었다! 진라부는 중국 음악사에 이름을 남긴 고쟁(古箏) 악사이기도 했다. 그녀가 뽕나무 숲에 나타날 때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태수(太守)가 고상하고 우아한 진라부를 발견하고 마차를 멈추어 진라부에게 함께 탈 것을 청했다. 진라부가 태수에게 “당신에게는 아내가 있고 저에게는 남편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태수가 달가워하지 않고 이 아름다운 여인을 다시 부르자 진라부는 악기를 연주하며 ‘맥상상(陌上桑)’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동쪽에 천을 넘는 군마가 있어 나의 남편이 앞에서 이끄네. 그는 백마를 탔고 꼬리에는 파란 끈이 달렸네. 말 머리에는 황금이 있고 허리에는 천만 금의 녹로검(鹿盧劍)을 차고 있네….”

‘시경(詩經)·주남(周南) 한광(漢廣)’ 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남쪽에 높은 나무 있으나 쉴 수 없고 한 수에 노니는 여인 있으나 구애할 수 없도다.”

대략적인 뜻은 산의 남쪽에 키 큰 나무가 있지만, 나무 아래에서 쉴 수 없고, 한수(漢水)에 배를 타고 노니는 여인이 있지만 쫓아가고 싶어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예를 알고 예를 지키는 여인에게 구애할 수 없음을 가리킨다.

관우의 충의와 예의

고전 소설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 관우(關羽)는 대단히 용맹해 적수가 없었다. 그는 술이 식기 전에 화웅(華雄)을 베어 유명해졌고 이후 안량(顏良)을 베고 문추(文醜)를 죽였으며, 오관(五關)을 돌파하며 육장(六將)을 베었다. 칼 한 자루만 쥔 채 적진의 회의에 참석했고 조조의 칠군(七軍)을 수장시켰으니 초나라의 다섯 장수 중 으뜸이었다. 관우는 의리를 중시했고 이익을 가볍게 여겼다. 관우가 조조의 계략에 말려든 후 조조가 3일에 작은 잔치, 5일에 큰 잔치를 벌이고, 옷과 말에다 황금과 미녀까지 주었으나 관우는 끝까지 재물과 여색에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만약 황숙께서 계신 곳을 안다면 불과 물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따라갈 것입니다.”

관우가 충의를 지킨 이야기는 오랜 세월 동안 전해졌는데 관우에게는 밤에 촛불을 들고 공부했다는 미담도 있다. ‘삼국연의 제15회’ ‘토산(土山)에 주둔한 관우가 세 가지를 약속하고 백마(白馬)에서 조조를 위해 포위망을 풀어주다’에서는 황금과 미녀로도 관우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본 조조가 관우를 불의에 빠뜨릴 계략을 짰다. 그는 군대를 돌려 허창(許昌)으로 돌아오는 길에 군신의 예를 어지럽히기 위해 고의로 관우와 두 명의 형수를 같은 방에 묵게 했다. 저녁이 되자 관우는 촛불을 들고 문밖에 서서 밤새 책을 읽었는데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호반(胡班)이라는 사람이 밤에 몰래 관우를 관찰하니 관우는 왼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등불 아래에 기대어 책을 보고 있었다. 호반이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진정 하늘이 내린 사람이로다!”

조조는 그런 충성과 절의(節義)를 보고 관우를 더욱 존경하게 됐다. 허창에 도착한 후 조조는 관우에게 저택을 할당하여 거주하게 했다. 관우는 집을 둘로 나누어 안채에는 두 형수를 머물게 하면서 늙은 병사 열 명을 보내 지키게 했고 자신은 바깥채에서 혼자 거처했다. 관우는 매번 방에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서 두 부인에게 문안을 드렸다.

후세에 어떤 사람이 시를 남겼다. “위엄으로 삼국을 평정한 영웅호걸, 한 집에서 별거하니 의기 또한 높구나.”

비록 오늘날 사람이 관우처럼 의리가 하늘을 찌르거나 촛불을 들고 책을 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남녀유별의 예를 지키며 대세에 따르지 말고 장래에 공명과 부귀를 얻을 수 있도록 복과 덕을 저축하자!

 

원문발표: 2021년 11월 5일
문장분류: 천인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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