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적막’에 관한 몇 마디 말

글/ 서성(舒醒)

[밍후이왕] 사람들은 모두 적막이 인간의 최대 적이라고 말한다. 적막은 사람을 고독한 가운데 고통에 빠지게 하는데, 이런 고통은 물질적인 고통에 비할 수 없는 일종 정신적 결핍이다. ‘유주(幽州)의 누대에 올라’라는 시에서 시인은 이렇게 썼다. “앞으로는 옛 사람을 보지 못하고 뒤로는 올 사람을 보지 못하네. 천지의 아득함을 생각하매 홀로 슬퍼 눈물 흘리네.” 이 시가 나타내는 것은 바로 일종의 도움을 바랄 수 없는 적막의 고통이다. 게다가 보잘것없이 작은 개인이 우주의 까마득함 속에 몸을 둘 것인 바, 그런 돌아갈 곳이 보이지 않는 적막은 확실히 사람을 견디기 어렵게 한다.

한자를 해석해 봐도 적막의 뜻을 알 수 있다. 적(寂)은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막(寞)은 집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적(孤寂, 외롭고 쓸쓸함)의 괴로움도 참된 벗이 없고 하소연할 사람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낙막(落寞, 쓸쓸하고 적적함)의 괴로움은 돌아갈 집이 없고 일마다 실패한다는 것이다. 생명은 그 자체가 따뜻함을 갈망하며 더구나 사람은 무리를 지어 사는 생명이다. 그러므로 적막이 사람에게는 몹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온갖 방법으로 적막을 해결하려 하는데, 예를 들자면 애정을 찾고, 가정을 꾸리고, 각종 집단 오락, 타인과의 교류, 명예와 재물에 탐닉하는 등이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현재 사회가 발달해 적막을 해결하는 수많은 방법에 눈이 부실 지경이지만, 여전히 수많은 사람이 잠깐의 발산과 방종 후에는 피할 수 없이 적막의 괴로움에 빠진다는 것이다. 가정을 이룬 사람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비록 가족에 둘러싸여 있고 집안일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깊은 밤 사람들이 조용할 때만 되면 여전히 적막의 엄습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지 못한다. 가정이 없나, 숱한 사람이 내는 소리가 없나, 왜 그래도 적막을 느낄까? 집안이 따뜻하지 않을까? 주변 사람이 모두 친해질 수 없는 것인가? 사실 그것들이 전부는 아니다. 진실한 원인은 인간 세상이 곧 하나의 미혹된 사회이며, 사람들이 마치 꿈속에서 삶을 연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비록 오랫동안 물질생활에 본성이 가려졌지만 영혼 속의 진실한 자신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나의 진정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나의 진정한 가족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

회귀(回歸)는 매 한 생명이 세상에 올 때의 커다란 염원이다. 이런 생명의 참뜻을 진정하게 깨달은 사람이라야만 비로소 명확하고 진실한 목표를 갖고 살 것이며, 비로소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적막함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의 일생이 몸에 묻은 티끌과 얼룩을 깨끗이 씻고 자신의 진정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함임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원문발표: 2017년 3월 29일
문장분류: 시사평론>세도인정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3/29/34441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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