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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대(大) 학자인가?

폰 라우에

글/ 린후이(林輝)

하이데거(Heidegger)는 독일의 가장 영향력이 있는 철학자이다. 그의 저서로는 『존재와 시간』등이 있다. 폰 라우에(Von Laue)는 독일의 유명한 물리학자이고 결정체의 X-선 회절을 발견하여 1914년에 노벨물리학을 수상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나치가 독일을 통치하는 시대에 살았으며 당시 모두 유명한 학자였다. 그러나 한 사람은 나치를 지지하여 자신의 생에 오점을 남겼고, 다른 한 사람은 공개적으로 나치의 유태인 과학자 박해를 질책했기에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수호했으며 아울러 후세에 존경을 받았다.

바덴 뷔르템베르그의 한 천주교 가정에서 태어난 하이데거는 17세부터 존재의 의의에 대한 문제에 흥미가 생겼는데, 후에 프라이 브르그(Freiburg)대학에 진학하여 계속해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1914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군에 입대하여 전쟁에 참가했다. 1918년 전쟁터에서 돌아온 후 그는 바덴 뷔르템베르크 대학 유태인 교수이자 당시 유명한 철학자 후설(Husserl)의 조교가 되었다.

1931년부터 하이데거는 독일 나치당과의 관계가 갈수록 가까워 졌으며 1933년 5월 그는 나치당에 가입하고 공개적으로 나치주의를 지지했다. 그 해 그는 프라이 브르그 대학의 학장으로 당선되었으며 취임 연설에서 그는 나치와 나치 선전에 어울리는 많은 말들을 했다. 예를 들어 그는 독일 대학의 목적은 “독일 국민의 운명(運命)인 지도자와 병사를 교육하고 훈련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 했다.

하이데거가 학장으로 있던 기간에 프라이 브르그 대학에서 후설(Husserl)을 대학 도서실에 진입하지 못하게 했으며, 후설이 비록 그의 은사(恩師)였으나 이것은 나치가 유태인에 대한 종족의 숙청과 한 계통으로 이어진 것이다. 하이데거의 은사에 대한 배반은 1941년 『존재와 시간』이란 책을 다시 출판할 때 더욱 체현 되었는데, 그는 후설이 책을 내는데 공헌했다는 말을 삭제해 버렸다.

하이데거와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한 폰 라우에는 1879년 10월 9일 겔젠키르헨의 인근 프파펜돌프에서 태어 났고, 1919년 베를린대학 물리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독일 물리학계 권위자가 되었다.

나치 통치기간에 폰 라우에는 양심에 따라 아인쉬타인을 포함한 유태계 후손의 과학자들을 보호하고 협조 했다. 그는 퇴역군관이었는데 퇴역군관협회에서 퇴역군관은 나치 관련 조직에 가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가입하지 않았다.

1920년 아인쉬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반대하는 공개 집회가 베를린에서 열렸다. 집회에 사람들을 소집한 사람은 1905년 노벨 물리학 수상자 레나르트 등 사람들이었다. 다음날 라우에와 이 사람들은 연명하여 『베를린 일보』에 공개 서신을 발표하여 반격했다. 아인쉬타인이 베를린과학원의 직무를 사직했을 때 라우에만 일어서서 아쉬움을 밝혔을 뿐 많은 사람들은 모두 침묵을 지켰다.

라우에는 많은 공개 장소에서 나치의 악행을 비평했다. 예를 들어 나치가 정권을 장악한 해 그는 물리학회 회장으로서 전 물리학자 연석회의에서 개막사를 연설했다. 그는 갈릴레오가 태양 중심설을 견지하여 교회의 박해를 당한 이 역사적 사실을 이용하여 간접적으로 나치당도들이 아인쉬타인 등 유태인 과학자들을 공격한 데 대하여 질책했다. 1934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 하버는 독일로부터 도주한 후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라우에는 또 공개적으로 애도사를 발표하고 하버의 품격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찬양하고 하버의 사망은 독일학계의 손실이라며 애도를 표했다.

나치당이 독일과학계를 통제하려고 할 때 라우에가 또 나서서 단호히 반대하자 결국 음모를 달성하지 못했다. 후에 노벨 물리학 수상자 스탈키 등 일부 독일 과학자들이 공개적으로 영합하고 히틀러를 지지할 때 라우에는 다시 일축했으며 그리고 스탈키가

프러시아(Prussia)과학원 원장으로 지명되는 것을 반대했다. 이는 자연적으로 나치의 심기를 건드렸다. 라우에는 이것으로 아주 빨리 대가를 치렀으며 그는 십여 년간 재임중인 국가연구소 고문 직무에서 해임 당했고, 베를린 대학으로부터 어쩔 수 없이 조기 퇴직 당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독일 정부는 하이데거가 나치당 배경이 있으므로 교단에 서는 것을 금지했다. 더욱이 1951년에 그가 영예교수의 퇴직 특권을 누리는 것에 대하여 모두 취소했다.

하지만 ‘대(大) 학자’ 라우에는 아인쉬타인 등 박해를 당한 과학자들의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세계 과학계의 명성을 얻었다. 1946년 영국황실학회에서 국제 결정학 회의를 열었다. 라우에는 유일하게 요청을 받은 독일 사람이고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를 “진정한 사람이고 진정한 과학자다.”라고 존경했다. 퇴직하여 14년 후 프랑스로부터 온 영예군단훈장이 이 노인의 앞가슴에 걸렸으며 그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수호’한 것을 표창했다.

오늘 하이데거와 라우에는 모두 다 땅속에서 잠이 들었으나 역사는 일찍이 공정한 평가를 했다. 하나는 남에게 책망을 받고 하나는 남에게 존경을 받았다. 애석한 것은 현재 세계적으로 특히 중국에 아직도 이렇게 완전히 다른 두 가지 같지 않은 유형의 지식인들이 있는데 양심을 상실했는지 알 수 없지만 사악한 무리들에게 굴복 당한 지식인들이 미래를 생각해 보았는지? 자신에게 어떤 오점을 남겼는지 생각해 보았는지? 어떻게 사람이 되어야 하는 답안은 일찍이 있지 않는가?

문장발표: 2010년 7월 23일
문장분류: [고금논담]
원문위치: http://zhoubao.minghui.org/mh/haizb/172/A05/70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