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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 대(大) 청원이 없었다면

글/ 루전옌(陸振岩)

[명혜망 2010년 4월 21일] 1999년 4월 25일 파룬궁 수련자 1만 명이 중난하이(中南海) 인근 푸유가(府右街)에서 단체로 청원했던 사건이 11년이 지났다. 중공은 ‘4.25’ 이후 3개월 안에 파룬궁 수련자에 대한 대규모 박해 운동을 시작했다. 많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두 사건의 인과 관계를 연결했다. “만약 만 명이 베이징에 가지 않았더라면 중공의 탄압을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이럴까?

사진설명: 1999년 4월 25일 청원하러 간 파룬궁 수련자들이 국무원 민원처리 사무실에 상황을 반영하기 위해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청원을 막는 것과 청원 촉구

우리는 4.25 베이징 청원의 원인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4.25 청원의 원인은 톈진(天津)에서 파룬궁 수련자를 이유 없이 구타하고 45명을 체포했기 때문이다. 톈진 경찰은 청원하는 파룬궁 수련자에게 “우리는 베이징의 명령을 집행한 것이다. 당신들이 상황을 반영하려면 베이징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톈진 경찰은 파룬궁 수련자가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도록 촉구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중국에는 청원을 막는 중공의 특징적인 현상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사법 독립권이 부족해 각지 국민은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도 현지에서 해결하지 못해 부득이하게 베이징에 청원하러 간다. 중공은 이것을 ‘불안정 요소’라고 본다. 이런 일이 많을수록 지방당국의 ‘정치업적’도 영향 받는다. 이 때문에 각지에서 전문적으로 베이징에 사람을 파견해 청원하러 간 사람을 가로막고 현지로 잡아온다. 중국을 뒤흔든 안후이(安徽) 여 청원자 리루이루이(李蕊蕊)의 성폭행 사건은 그녀가 청원하러 가다가 잡혀서 여관에 갇혀있는 기간에 발생한 일이다.

11년 전에는 요즘처럼 이렇게 광기를 부리지는 않았지만, 지방 당국은 자신의 관직에 영향을 주는 것이 두려워 어떻게 ‘청원을 촉구’할 수 있었겠는가? 특히 1999년 4월말은 중공의 6.4천안문 살인사건 10주년 되는 민감한 시기로 톈진 경찰은 아무리 담이 배 밖으로 나왔어도 국민을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도록 종용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톈진 경찰은 확실히 베이징의 명령을 받고 수련자들을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것을 말한다. 파룬궁 수련자가 하룻밤 사이에 베이징에 나타나 중공이 기습을 당하자했고 그래서 크게 분노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선전의 필요에 따라 날조한 헛소문이다.

‘4.25’ 전의 정세

톈진 사건의 배경은 톈진 교육대학 잡지에서 정법위원회 뤄간(羅幹)의 동서 허쭤슈(何祚庥)의 허위 문장을 실었기 때문이다. 파룬궁 원칙에 어긴 표현을 파룬궁의 죄목으로 돌리고 파룬궁을 수련하면 큰 문제가 생기거나 망국을 초래한다고 독자에게 암시했다. 파룬궁은 ‘쩐싼런(眞善忍)’을 수련하는 불가수련대법이다. 많은 수련자는 사실을 밝혀내지 못하면 연공하는 권리가 위협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음모를 꾸민 정치가의 더러운 정치투쟁에 끌려들어 갈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출판과 언론 자유가 없는 중국에서 파룬궁 수련자는 자발적으로 편집부에 사실을 규명하러 갔다. 출판사에서 사실을 알고 정정 보도를 할 무렵인 4월 23일, 텐진시에서 갑자기 폭동 진압 경찰 300여 명을 출동시켜 파룬궁 수련생을 쫓아내고 구타하며 수련자 45명을 체포했다.

톈진 사건 전 1996년 중앙선전부 관할 신문출판서는 전국 각 성시 신문출판국에 “미신을 선전”한다는 이유로 당시 베이징의 10대 베스트셀러를 차지한 『전법륜』, 『중국 파룬궁』 등 파룬궁 서적의 발행을 금지했다. 1997년 초, 뤄간은 공안부를 지시해 전국에서 조사하여 물증을 수집해 파룬궁이 ‘사교’라고 규정하려 했다. 1998년 7월, 공안부 1부는 공정(公政)[1998] 제555호 『파룬궁 조사에 대한 통지』에서 우선 파룬궁을 ‘사교’라고 규정하고 또 활동 내막 상황을 장악하고 범죄의 증거를 발견하면 각지 공안정보국에서 철저하게 조사를 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전국에서 두 번이나 파룬궁을 조사했지만 파룬궁 ‘범죄 증거’를 한 가지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공안국은 단념하지 않았다. 랴오닝, 신장, 헤이룽장, 허베이, 푸젠성 등 지역 경찰은 연공하는 사람을 강제로 쫓아버리고 불법으로 재산을 몰수하며, 민가로 뛰어들어 개인 재산을 몰수했다.

‘좋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난처해진 중공

이로써 뤄간 일당이 일으킨 ‘파룬궁 사건’은 오래 전부터 준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25 청원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뤄간 일당은 다른 사건을 만들어 ‘파룬궁 사건’을 만들었을 것이다. 결국 1999년 4월 25일 만 명의 청원 사건이 발생한 후, 장쩌민(江澤民)은 끝내 앞으로 튀어나와 역사상 전례가 없는 대규모 박해를 발동했다.

박해 발생 7년 후에 출판한 『장쩌민 문선(文选)』에서 중공은 박해를 발동한 진정한 원인을 드러냈다. 장씨는 1999년 4월 25일 저녁 정치국에 쓴 편지(문선에서 제목은 ‘한 가지 새로운 신호’)에서 파룬궁의 신속한 발전과 민심의 응집력에 대해 걱정하며 파룬궁이 ‘당’과 민심을 쟁탈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는 물었다 “설마 우리 공산주의자가 구비한 마르크스주의 이론, 믿고 있는 유물론, 무신론이 파룬궁이 선양한 것에 승리할 수 없겠는가?”

파룬궁은 일종 불가수련법문으로서 누구와 민심을 다투거나 누구에게 승리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러나 현재 도덕이 소실되고 당 간부가 부패하고 음란한 사회에서 ‘쩐싼런’을 기본원칙으로 하는 수련은 마치 한줄기 맑은 샘물처럼 사람들의 이목을 새롭게 했다. 인심이 선으로 향하는 것은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위 ‘응집력’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박해의 발단은 4.25사건과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고 과학과 비과학, 약을 먹거나 먹지 않는 것과도 무슨 관계가 없다.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는 최종 원인을 솔직히 말하면 ‘수련자 수가 너무 많다’일 뿐만 아니라 ‘좋은 사람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많은 국민이 ‘쩐싼런’의 실천을 믿고 모든 바르지 않은 것을 폭로해냈다. 특히 거짓말, 폭력을 토대로 한 중공 정권은 안절부절하며 곧 나서서 큰 싸움을 걸었다. 이런 것일 뿐이다.

문장 발표: 2010년 4월 21일
문장 분류: 시사평론
원문 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4/21/22189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