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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족의 끔찍한 원한이 사라지다

[명혜망] 내 가족은 아주 특별한 가족이다. 나의 외조부모에 대한 일부 이야기로 시작하겠다.

1950년대, 나의 외할아버지는 중공이 씌운 ‘반-혁명’이란 죄명으로 처형되셨다. 외할머니는 겨우 30세셨으며, 작고 유연한 여인이었다. 그분은 살아남았지만 ‘반-혁명’ 남편과 선을 긋겠다고 발표한 후에야 가능했다. 그분은 눈물을 거두고 사치스런 생활습관을 끝내셨으며, 네 명의 어린 자녀를 데리고 그분의 가난한 가족과 함께 살면서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셨다. 그분과 그분의 네 자녀는 선량하고 정직했었다. 하지만 그들의 좋은 성품도 점차 세월이 지남에 따라 사라져버렸다. 가족 밖에서 그들은 절대 말썽을 부리지 않았는데, “불쑥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당을 따르며”, 그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반-혁명적’인 아버지와의 사이에 선을 그었다.

중공의 압제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강제로 포기했다. 그들은 생각하지도 않았고, 감히 옳고 그름, 선과 악의 차이를 판단하지 않도록 훈련되었다. 그들이 가진 것이란 오로지 중공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이 그들에게 말한 것을 정확하게 따라 행동하고, 당이 그들에게 말한 것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들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방법이었다. 비록 비도덕적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나온 결정은 옳은 것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내 가족의 비극은 진정 모든 중국인의 비극이다. ‘중공이 권력을 잡은’ 첫 날부터 시작해서, 이것은 그쳐본 적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이 비극은 다만 다른 내용으로 계속되었지 결코 중단된 적이 없다!

‘문화대혁명’ 이후, 어머니는 자진해서 당에 가입했고, 직장에서도 남부럽지 않은 직위를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차별대우를 하지 않고, 당에서도 더 이상 그녀를 밀어내지 않는다고 느꼈다. 어머니는 당이 마침내 자신을 받아들인 것을 고마워했다. 반평생 정치적으로 우익이었던 큰 삼촌과 일생을 사회의 최저층에서 고생스럽게 허우적거렸던 작은 삼촌과 큰 이모도 항상 당이 옳으며 무슨 잘못이 있다면 항상 자신들의 잘못이라고 믿었다.

이것이 어머니 가족의 이야기이다. 아버지 가족의 이야기도 비슷하다.

그래서 나의 남동생, 여동생, 나와 나의 사촌들은 모두가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우리가 성장했을 때도 우리 대부분은 가난한 생활조건을 견뎌내야 했다. 가난, 병, 싸움, 그리고 말다툼은 하나의 사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절망 속에서 발버둥 쳤다.

비록 내가 내 가족 중에서 가장 우수했고 내 사업이 성공했으며 나 자신의 조화로운 가족이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내게 조상과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고, 성격 중에도 그들의 특질이 있으며, 또한 나의 가족에 대한 그의 운명의 저주를 짊어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나는 내 주위의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했다. 나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갖고 태어났다. 밤에는 잠을 자지 못했고, 인생이 내게 불공평하다고 불평했다. 나는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나쁜 성질을 유전 받았다고 불평했다. 나는 온갖 종교서적들을 뒤지며 해결책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고해는 끝이 없었다. 어디서 해안을 찾을 것인가?

어느 날, 나는 파룬따파(法輪大法)를 발견했다. 손에 《전법륜》을 들고, 나는 그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다—-그의 박대정심한 법리가 내 인생의 의의를 말해주었다. 나는 점차 과거의 내 악몽에서 자유로워졌다. 나는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변했다. 나는 내 인생이 새롭게 시작된 것을 느꼈다!

1999년 7.20 이후, 나는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반복적으로 고문 받는 고통을 겪었다. 나는 한 시민으로서의 기본 권리를 박탈당했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반복적으로 체포되고 감금 되었으며, 파룬궁을 청원하고 진상을 했기 때문에 집은 샅샅이 수색 당했고 직장에서도 쫓겨났다. 더구나 당 특무들은 나를 위협해 그들이 원하는 정보를 얻으려 했고, 나의 가족을 파괴하기 위해 남편을 기만시킬 덫을 놓으려는 계획까지 했다.

박해 초기에 나의 어머니가 내게 물으셨다. “너는 파룬궁 수련 후에 정말 정신적으로 잘못 되었니? 어떻게 이렇게 말썽만 찾아다니느냐?” 어머니의 눈은 두려움과 무기력으로 가득했다. 어머니는 마치 문화대혁명의 악몽이 돌아온 것처럼 통제하지 못하고 몸을 떠셨다.

어머니는 ‘누가 또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를 가지고 계셨다. 정부가 이것을 금지하면 우리는 정부의 뜻에 따르면 되며 우리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셨다. 정부가 우리에게 수련하지 못하게 하면, 그럼 우리는 수련을 중지하면 된다고 하셨다. 그처럼 단순한 논리지만, 나는 어머니께서 바라시는 대로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어머니는 매우 실망하시며 내게 화를 내셨다. 어머니는 내가 왜 나의 밝은 미래를, 밥과 물을 공급하지도 못하는 내 신념 때문에 위험하게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셨다. 어머니는 내게 “나는 늙었고, 나는 더 이상 놀라고 싶지 않다. 나는 평화로운 삶을 원한다.”고 하셨다. 우리 가족 수준에 맞는 정식 분가과정을 거쳐, 어머니는 나를 떠나셨고 다시는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나는 나의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어머니 역시 한 희생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마침내 다시 만났다. 내가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어머니를 방문했을 때 아주 놀라셨다. 어머니의 ‘과거 경험’에 따르면, 내가 파룬궁 수련을 견지하는 고집은 돌에 계란을 던지는 격이었다. 내가 고문으로 죽지 않은 것은 하늘의 자비다.

어머니는 나의 인내력을 통해 대법의 힘을 보셨다!

‘9평 공산당’을 읽은 후, 어머니는 며칠 동안 우셨다. 이 책은 어머니로 하여금 그녀의 전 인생의 고통과 그녀 가족 내의 한 세대 한 세대의 비극의 원천이 바로 공산당이었음을 인식하게 했다. 어머니는 박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를 미워했던 것을 후회하셨고, 이모와 삼촌들을 설득시켜 중공과 그것에 관련된 조직에서 탈퇴하게 했다. 하지만 큰 삼촌은 탈퇴를 거절했고, 우리가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작년 12월 29일, 큰 삼촌이 심하게 아팠다. 병원에서 그의 가족에게 두 번이나 위독한 상태를 통보했기 때문에, 그들은 장례 준비를 했다. 1월 3일, 어머니와 내가 그를 방문했다. 어머니는 그에게 그녀의 생각이 바뀐 것을 말씀하시며 그가 중공을 탈퇴하는 것만이 구도될 수 있다고 하셨다. 어머니께서 “너는 늙었다. 비록 네가 살아 있다 해도 아무도 네가 중공에 대항해 싸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너 자신을 위한 것이다. 우리 집 가족은 너무 고통을 많이 받았다. 우리는 친구를 원수로 잘못 알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큰 삼촌의 눈이 점차 반짝였다. 그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중공탈퇴에 동의했다. 그는 또한 “쩐싼런 (眞-善-忍)은 좋습니다” 그리고 “파룬따파 (法輪大法)는 좋습니다”를 암송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아침 11시였다.

오후 2시경, 큰 삼촌의 상태는 상당히 좋아졌고, 매일 조금씩 좋아졌다.

열흘 후, 큰 삼촌은 병원에서 퇴원했다.

우리 모든 가족이 놀랐다. 그들은 대법의 신기함과 아름다움을 목격한 것이다! 그 후 우리 가족 중 십여 명이 중공을 탈퇴했다.

여러 친척들이 파룬따파를 배우고자 했다.

중공을 탈퇴한 후, 어머니의 건강이 좋아졌다. 삼촌의 회복을 보시고는 더욱 확고하게 대법을 믿으신다. 지금 어머니는 수련생이 된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시며 매일 법공부와 연공을 하신다. 또한 종종 사람들에게 마침내 기나긴 고통 끝에 자신이 행복을 찾았다고 말하신다.

발표일자: 2009년 8월 5일

원문일자: 2009년 8월 5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영문위치: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9/8/5/109785.html

중문위치: http://minghui.ca/mh/articles/2009/7/24/20513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