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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무계한 다윈과 진화론 (상)

글/ 쭝핑(宗平)

[밍후이왕] 2022년 9월 30일, 중국 ‘신민주간(新民周刊)’은 중국과학원 주민(朱敏) 원사가 이끄는 과학연구팀이 지금으로부터 4억 3900만 년에서 4억 3600만 년 전의 어류 화석을 고정밀 CT, 형질 빅데이터 분석 등 방법으로 10년간 조사한 결과, 인류와 관련 있는 많은 해부학 구조가 4억 4000만 년 전 먼 고대 어류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발표했다. 과학자들은 이로써 물고기에서 사람으로 진화하는 과정이 5억 년 정도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발표 직후 많은 네티즌은 “한 잠 자고 깨어났더니 조상이 바뀌었네?”, “나는 왜 계속 수영을 배워야 하는가?”, “미안, 어제 막 조상을 먹어버렸어”라며 비꼬았다.

네티즌들의 이 같은 해학적인 메시지는 진화론에 대한 의구심과 이른바 중국공산당 전문가들을 경멸한 것이다. 사실 인류 과학사에서 진화론은 가장 논란이 많은 가설로, 종교계뿐만 아니라 과학계 자체도 회의적이다. 다윈이 처음 진화론을 주장했을 때도 과학계는 담담하고 관심이 없었다.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된 직후 마르크스는 “이 책은 역사적 계급투쟁의 자연과학적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윈 역시 진화론을 ‘마왕의 성경’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무신론 사설의 두 시조인 다윈과 마르크스는 모두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 그들은 젊었을 때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다가 결국 신을 반대하고 인류의 신앙을 파괴하는 마의 우두머리로 전락했다. 미얀마 멍라현의 한 사찰에서 출가한 윈난성 출신의 득도 승려는, 다윈은 실제로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마왕이 환생해 말법말겁(末法末劫) 시기에 인류를 혼란시키고 멸망시키기 위해 온 것이라고 했다.

1. 다윈의 황당무계한 일생

다윈은 1809년 영국 슈롭셔주 슈루즈베리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명의였으며, 조부는 의학계의 권위자였다. 외조부는 영국의 오래된 도자기 웨지우드(Wedgwood)의 창시자다. 다윈은 한 살 때 세례를 받고 어머니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은 다윈의 타고난 나쁜 성품을 바꾸지 못했다.

1)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잘하고 허영심 강해

다윈은 어려서부터 허영심이 강하고 종종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는 강렬한 욕망이 있었기에 자주 여동생과 어른의 관심을 놓고 다퉜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거짓말을 잘했다. 다윈은 ‘다윈 회고록-나의 사상과 성격의 발전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어린 시절 공을 들여 매우 많은 거짓말을 꾸며낸 적이 있다. 한번은 아버지의 나무에서 매우 귀한 열매를 많이 따서 덤불 속에 숨긴 뒤 필사적으로 뛰어가 도둑맞은 열매를 한가득 발견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다윈은 또 레이튼이라는 아이에게 “색깔이 있는 액체를 폴리안더스와 프리뮬라(둘 다 앵초꽃의 일종)에 뿌리면 여러 색깔의 폴리안더스와 프리뮬라를 만들 수 있어”라고 알려준 적이 있다. 사실 다윈은 이런 실험을 한 적이 없으며 사실을 무시하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함부로 말한 것이다.

이에 대해 다윈은 회고록에서 “이것은 물론 엄청난 거짓말이다 …… 나는 여기서 인정하는바, 어린 시절 매우 치밀한 많은 거짓말을 꾸며낸 적이 있는데 이유는 늘 과장하고 날조한 거짓말을 만들어 냄으로써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2) 지능이 평범하고 게으르며 급진적인 ‘재벌 2세’

다윈은 청소년 시절 슈루즈버리 학교, 에든버러대 의대, 케임브리지대 신학과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수업 시간에 거의 잠을 잤고 수업이 끝나면 사냥과 폭발물 터뜨리기 등을 일삼아 ‘가스’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기숙사에 있는 동안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목욕했는데 발 냄새가 진동하면 룸메이트에게 “인근 말 목장에서 나는 냄새”라고 거짓말을 했다. 다윈은 지능이 평범했으므로 연구대상에 대한 초보적인 관찰과 분석만 했으며 급진주의적 발언과 학술적 관점에 대한 발표를 좋아했다.

다윈은 의학을 싫어해서 결국 학위를 받지 못했다. 케임브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식도락 클럽’에 가입해 독수리, 백로, 부엉이 등을 사냥해 먹었고 부모의 부에 의존하며 향락에 빠진 ‘재벌 2세’처럼 생활했다. 공부를 싫어해 책보다 신발을 많이 사고, 최고급 방에 머물면서 사람을 고용해 신발을 닦고, 이불을 개며, 석탄을 운반해 불을 지피게 하며 자신은 늘 빈둥거렸다.

영국 BBC는 2019년 보도에서, 다윈이 케임브리지 대학에 재학하는 3년간 636파운드(약 97만 원)을 썼는데,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5만 파운드(약 7천만 원)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그 돈에는 술, 담배, 말 사육비는 포함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다윈의 그런 행동 때문에 매우 골치 아파했다. 한번은 참지 못하고 다윈에게 “사냥하고 개를 기르며 쥐를 잡는 것 이외에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넌 걱정도 없구나. 앞으로 조상을 빛낼 수 있다고 말하지 말아라. 너 스스로나 집안을 망신시키지 않는다면 다행일 거다”라고 노발대발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급진주의자들과 기독교를 비평하는 토론회를 개최해 결국 신학도 50명의 신앙심을 동요시켰다. 다윈은 케임브리지에서 재학하는 3년간(1828-1831)이 “행복한 인생이었고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자평했다.

3) 진화론을 꾸며내 신을 비방하다

인간의 두뇌 발달, 인체의 신비, 그리고 우주 운행의 정밀성은 이미 수천 년 전 철학자와 신학자들의 광범위한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복잡한 자연 시스템에서 일부 현상은 무질서한 자연의 힘만으로는 충분히 해석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설계자가 있어야 하는데 지능이 있는 설계자로 귀결된다고 여겼다. 1802년 윌리엄 페일리는 ‘자연신학’이라는 책에서 “우주의 설계는 틀림없이 총명한 설계자의 손에서 탄생한 정밀한 시계처럼, 분명히 똑똑한 창조자가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고 말했다.

다윈은 진화론을 꾸며내기 전, 윌리엄 페일리의 ‘지능 설계’ 사상에 상당히 설득돼 있었다. 그러나 진화론이라는 가설을 제기한 후에는 “‘하느님의 세계 창조설’은 믿을 수 없고, ‘구약 성경’은 인도인의 성서나 야만인의 종교처럼 믿을 수 없다”며 “신을 폭군으로 묘사한 바벨탑, 무지개 언약 등 세계사는 명백히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다윈은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 수백만의 하급 동물들이 거의 무한대의 시간 동안 고통을 겪는 것은 신의 자비가 확실히 한계가 있기 때문이고, 이로 인해 신을 믿을 수 없다면서 모든 것은 다 자연이 선택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다윈의 ‘종의 기원’,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은 영국 종교계, 사회 각 계층, 심지어 정치계의 반대에 부딪혔다. 다윈은 이때부터 많은 사람의 눈에 났고 평판이 매우 좋지 않았다. 1871년 3월, 영국 범블비(Bumblebee) 잡지는 ‘존경스러운 대형 고릴라’라는 제목으로 유인원 몸에 다윈 얼굴을 그린 풍자화를 발표했다. 이 그림은 지금까지 세계를 휩쓸고 있으며 대중이 다윈의 진화론에 저항하는 상징이 됐다.

图1:令人“尊敬”的大猩猩
‘존경스러운’ 대형 고릴라

독실한 기독교인인 다윈의 아내 엠마는 진화론의 폐해를 잘 알고 있었고 다윈에게 ‘종의 기원’을 수정하고 신앙으로 돌아가라고 여러 차례 권하며 “사람들이 신에 대한 신앙을 잃어버리면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게 될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윈은 아내의 권유를 못 들은 척하며 상관하지 않았다. 마성이 크게 폭발한 다윈은 허영심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신과 대립 면에 서는 것을 고집했다. ‘종의 기원’을 날조하는 과정에서 다윈은 괴질에 시달렸고 저서 발표 후 사회적 지탄을 받았는데, 절친한 친구인 생물학자 월리스조차 사람의 대뇌가 진화해 온 것이라는 다윈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다윈은 평생 질책받고 의심받는 과정에서 살았으며 말년에는 종교에 대한 태도를 물어보는 사람이 끊이지 않자 결국 어쩔 수 없이 “이것은 사람의 지혜가 넘볼 수 없는 큰 난제”라고 말하며 자신의 신앙은 ‘불가지론(不可知論)’에 속한다고 말했다.

4) 괴질에 시달리고 자녀가 요절

1839년 1월 다윈은 사촌 누나인 엠마와 결혼해 6남 4녀 총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자녀들의 상황은 모두 좋지 않았다. 맏아들 윌리엄(1839년생)은 생식능력이 없었고, 둘째 아들 조지(1845년생)는 신경질적이었고 남의 고통을 이야기하기 즐겼으며, 셋째 아들 프란시스(1848년생)는 우울증을 앓았고, 넷째 아들 레너드(1850년생)도 생식능력이 없고, 다섯째 아들 레러시(1851년생)는 늘 병치레를 했으며, 여섯째 아들 찰리(1856년생)는 두 살 때 사망했다. 장녀 앤(1841년생)은 10살 때 홍역으로 사망하고, 차녀 메리(1842년생)는 출생 직후 사망했으며, 셋째 딸 헨리에타(1843년생)는 불임이었고, 넷째 딸 엘리자베스(1847년생)는 평생 독신이었다.

다윈은 말년에 근친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선천적인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원망과 자책이 극에 달했지만, 아내 엠마는 남편이 신을 모독해 업보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근친결혼은 당시 유럽에서는 흔한 일이었지만 다윈처럼 자녀마다 전부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다윈은 ‘종의 기원’을 쓴 지 3년 만에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일반인처럼 건강한 삶을 하루도 지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잦은 메스꺼움, 구토, 두근거림, 피부 염증, 불면증, 복통, 구강궤양 등으로 고통스러워했고 하루에 3시간만 일할 수 있었다.

신기하게 의사가 오면 모든 증상이 사라져 무슨 병인지, 무슨 원인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다윈의 아버지도 현지에서 명의였으나 아들의 병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다윈은 40년 넘게 괴질에 시달리면서 20여 명의 명의를 불러 치료를 받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윈은 병이 발발했을 때 두려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자주 찬물에 몸을 담그거나 냉하고 습한 이불 속에서 반나절 몸을 감쌌으며, 때때로 식초에 담근 구리철사, 아연사 등을 몸에 감아 육체적 고통으로 정신적 고통을 이겨내려 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다윈은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1882년 어느 날, 다윈은 심장이 두근거리며 죽어갔다. 훗날 진화론 지지자들에 의해 과학계 거두로 추앙받기도 했지만 사실 다윈의 일생은 비열한 거짓말, 파렴치한 조작, 배신, 저열함과 옹졸함, 그리고 병고 속에서 평생을 보냈다. 이러하다면 다윈의 괴질은 바로 업보가 아니겠는가?

(계속)

 

원문발표: 2023년 2월 9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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