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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응을 받은 ‘톈진 사건’의 주모자들

글/ 어우양페이(歐陽非)

[밍후이왕] ‘선악(善惡)에 보응이 있다는 것은 천리(天理)이다’. 하지만 나쁜 사람이 법망을 벗어나는 것을 자주 보게 되면 천리에 대해 실망을 좀 갖기도 한다. 보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때가 오지 않은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사실 보응을 받는 것과 받지 않는 사이는 바로 당사자와 방관자에게 주어진 기회이다. 당사자는 뉘우치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방관자는 거울로 삼을 수 있다. 보응을 받을 때 마치 우연처럼 보일 수 있다. 병들어 죽고, 자살하고, 부정부패로 감방에 가고, 가족의 자녀가 불행하고, 벼슬길에서 좌절하고, 권력투쟁에서 실패하고, 추문에 휩싸이고 또 죽지도 못하고 살아서 고생하게 하는 것 등이 있다. 처음에 사람을 해칠 때는 피해자가 매우 두려워했는데 지금은 자신이 응징될까 봐 두려워하면 이 또한 일종의 보응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마치 불가사의한 것 같다. 바로 미혹이 있기에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고 또 명백한 천리 앞에서 누가 양심의 선택을 할 수 있는지 볼 수 있다.

1999년 4월 11일, 허쭤슈(何祚庥)는 톈진(天津)교육학원의 ‘청소년 과학기술박람회’ 잡지에 “나는 청소년들의 기공 연마를 찬성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는데 사실과 맞지 않는 사례를 인용해 파룬궁을 비방했다. 톈진 수련생들이 잇달아 교육학원에 도착하여 상황을 반영했다. 4월 23일과 24일, 톈진시 공안국은 300여 명의 폭동 방지 경찰을 동원해 상황을 반영하러 온 파룬궁 수련생들은 쫓아내고 45명을 체포했다. 그런 후 수련생들이 시 정부로 가서 경찰이 사람을 체포한 일을 반영하자 톈진에서 관여할 수 없으니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라고 통지했다. 이로 인해 4월 25일 베이징에서 1만 명 대규모 청원이 이어졌다. ‘4·25’ 당일 총리가 직접 나서서 청원하러 온 파룬궁 수련생들을 접대하고, 톈진 측이 체포한 수련생들을 석방하도록 해서 청원은 평화롭게 막을 내렸다.

‘톈진 사건’에서 경찰을 출동시켜 고의로 갈등을 격화시키고, 시 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며 수련생들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이도록 부추겼는데, 이것은 당연히 톈진 지방정부가 감히 주관해서 한 것이 아니다. 현재 모두 아시다시피 이것은 전 중공 중앙정법위 서기 뤄간(羅幹)의 일당이 장쩌민의 파룬궁 탄압을 위해 빌미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톈진 사건의 직접적 책임은 역시 톈진시 제1인자와 톈진시 정법(政法) 그리고 공안 계통이다. 당시의 시위원회 서기 장리창(張立昌)과 정법위 서기이자 공안국 국장인 쑹핑순(宋平順), 또 공안국 부국장 우창순(武長順) 등 세 사람이 연관돼 있다.

죄가 두려워 자살한 쑹핑순

쑹핑순은 톈진 정법계통을 20년 동안 독차지했다. 당시 톈진 정법위원회 서기이자 시 공안국장인 그는 ‘톈진 사건’을 기획한 인물이다.

2007년 6월 3일, 그는 톈진시위원회 사무청사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중공 정부 측의 소식에 따르면 그가 ‘죄가 두려워 자살’한 주요 원인은 도덕이 부패하고, 내연녀를 두고 권력을 남용해 내연녀에게 막대한 부당이득을 취하게 하는 등 사안이 심각해 영향이 아주 나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근심과 걱정으로 병들어 죽은 장리창(張立昌)

소식통에 따르면 ‘톈진 사건’에서 당시 장리창이 주관한 톈진시위원회는 “파룬궁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단호한 조치를 견지해 사태를 수습했다”라고 말했다. 파룬궁 수련생 수십 명을 체포한 이 같은 ‘단호한 조치’는 나중에 ‘4·25’ 청원으로 이어졌다.

톈진시 위원회와 시 정부에서 20여 년간 재임한 장리창은 톈진 관가에서 구설에 올라, 톈진 시민들이 늘 비꼬는 말로 그를 조롱했다. 현지에서는 ‘톈진의 4대장’ 즉 궈런장(果仁張, 전통식품), 니런장(泥人張, 점토인형), 펑정장(風箏張, 독특한 예술형식의 연), 샤화장(瞎話張, 입만 열면 거짓말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떠돌고 있었는데 샤화장은 바로 장리창을 가리킨다. 2004년 장리창이 톈진시 당서기에서 물러난 뒤 톈진 시민들은 장리창의 퇴임에 박수를 보냈다. 2007년 쑹핑순 사건이 터지자 장리창은 벼슬길도 막바지에 이르러 정치국 위원을 그만두고 2선으로 물러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2008년 1월 10일, 장리창은 병으로 68세의 나이에 죽었다. 소식이 전해진 이 날 톈진시 거리 곳곳에서 또다시 폭죽이 터졌고, 많은 시민이 잔치국수를 먹으면서 축하했다. 시민들이 장례를 경사로 치르는 것은 장리창의 또 다른 보응이다.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들어간 우창순(武長順)

보응을 말하자면 예전에 사람을 붙잡던 사람이 오늘 자기가 붙잡힌다면 자업자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 톈진시 공안국 당위원회 부서기이자 부국장인 우창순은 ‘4·25’ 사건의 실무자였다.

2007년 톈진 공안국 국장 쑹핑순의 죄악이 폭로된 후 우창순이 ‘쌍규(雙規, 당원을 구금 상태에서 조사하는 것)’ 처분을 받았다는 소식이 톈진에서 급속히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 후 몇 년 동안 위기를 안전하게 극복하고 벼락출세하여 쑹핑순의 뒤를 전면적으로 이을 수 있었던 것은 저우융캉의 보호와 갈라놓을 수 없다. ‘보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때가 오지 않은 것이다’. 7년 뒤인 2014년 7월 20일, 우창순이 60세가 되던 해에 마침내 낙마했다. 우창순은 부도덕하고 생활이 문란하며 횡령, 뇌물수수, 공금 유용, 직권남용 등의 혐의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과응보라고 하면 충신을 해친 간신 진회(秦檜)를 떠올리게 한다. 백성들이 진회를 죽도록 원망했지만, 진회는 1142년에 악비를 죽이고, 1155년 병으로 죽을 때까지 10여 년 동안 기고만장하게 국정을 독점하며 자기와 견해가 다른 사람을 배제했다. ‘보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때가 오지 않은 것이다’. 나중에 악비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등 만민의 욕설을 받아 보응을 받았는데 중국 역사에서 보응을 받은 또 한 차례의 생생한 연출이었다.

천리는 명백하여 보응은 전혀 빗나가지 않는다. 18층 지옥은 이미 준비가 다 됐다. 박해에 가담하고 진선인(真·善·忍)을 비방한 모든 죄악의 무리들이 수명이 다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원문발표: 2021년 12월 9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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