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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시 난닝 여교사 황위안란, 박해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남(사진)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광시 보도) 광시(廣西) 난닝(南寧) 민족사범학교 (후에 광시사범학원과 합병)의 여교사 황위안란(黃園然, 黃圓然. 40여세)은 직장에 의해 강제로 호구(戶口)를 옮기게 되었고, 불법적인 노동교양 박해를 당했으며, 2001년엔 유랑생활을 했다. 2012년 10월 30일 이른 아침 광시 윈산(靈山)에서 박해를 당한 뒤 2012년 12월 17일 광저우(廣州)에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뜨기 전 중공(중국공산당)의 ‘610’과 국가보안 등 요원들이 병원을 찾아가 상황을 파악하는 등 그대로 두지 않았다.

黄园然
황위안란 교사 생전의 모습

직장에 의해 해고 및 강제로 호구가 옮겨지다

황위안 교사는 광시 난닝 사람으로, 난닝 민족사범학교 (광시 사범학원과 합병한 뒤 사범학원 창강분원(長崗分院)으로 개칭)의 미술교사였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했는데 심각한 심장병으로 크게 움직이는 운동은 할 수가 없어서 학창시절에는 체육수업은 받을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심장병이 여러 차례 도져 수시로 병원에 입원했으며 세 차례는 생명이 위중하다는 의사의 판정을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1996년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한 뒤 그토록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히던 심장병은 씻은 듯이 나았으며 약을 쓰지 않고도 완쾌되었다. 이로부터 황위안란은 굳건하게 ‘파룬따파(法輪大法)’와 ‘진선인(眞善忍)’의 법리에 따라 자신을 요구했고 자신의 경지와 도덕을 제고했다. 학교의 동료 교사들과 학생들도 모두 그녀를 따르며 그녀와 함께 있기를 원했다.

1999년 7월, 중공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法輪功)에 대해 잔혹한 박해를 발동하고 신문과 방송 등 언론매체를 이용해 천지를 뒤엎을 듯이 요언을 날조하며 파룬궁을 먹칠하는 모함으로 무고를 자행했다. 그러나 황위안란은 대법에 대한 중공악당의 박해가 시작된 1999년 7월 20일 이후에도 대법수련을 굳게 견지했다. 파룬궁으로부터 이로움을 받은 그녀는 다른 수련생들이 파룬궁을 수련하여 이로움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 상황을 함께 주변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렸는데 파룬궁이 박해당하고 있는 진실한 상황도 분명히 알렸다. 그러므로 중공의 요언 날조와 그들 언론 매체의 거짓에 속고 있는 민중들이 불법(佛法)을 증오하여 받게 될 도태를 면하게 해 주었다. 더구나 1999년 10월에는 베이징으로 들어가 청원하며 진상을 알리고 법을 실증했다.

그러자 황위안란에게 중공이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는데, 광시 장족자치구(壯族自治區) 교육청에서 중앙정부의 지시 문건에 의해 황 교사를 부당해고 조치하고 동시에 그녀를 파출소로 넘겼다. 또한, 학교 측에서 배정했던 주택을 몰수하고 일시에 단전과 함께 전기계량기를 봉인 조치했다. 황위안란이 이주할 때 학교 책임자는 학교 측에 등록된 황위안란의 호구(戶口-도시와 농촌 거주 제한 주민등록 제도)의 잔류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그 담보금으로 2천 위안(약 35만 원)의 돈을 강제로 공제했다. 그런 다음 담당지역 경찰관 파출소에 황위안란을 인수하여 담당하도록 통지한 것이다. 황위안란은 경찰차에 실려 그렇게 자신이 근무하던 교정을 떠났다.

불법 노동교양 처분 및 유랑생활

황위안란은 2000년 하반기에 2년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했다. 노동교양소에 감금된 기간에 매일 사오한 유다(역주-수련을 포기하고 대법 사부님을 배반한 자)에 의해 강제로 ‘전향’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온갖 고문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대법수련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황위안란은 근 10년의 유랑생활로 고초를 겪다가 정상적으로 국민의 권리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2010년에 난닝 공안국을 찾아가서 제2대 신분증(二代身份證) 발급 절차를 밟았다. 당시 호적담당직원은 공안의 인터넷을 통해 황위안란의 이름을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이미 호적이 없는 주민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그 후 가족이 사람을 찾아 줄을 대고 많은 곡절을 겪어서 신분증 발급 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마침내 정상적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생활로 회복했다.

황위안란이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아 감금되고 또 유랑생활을 한 기간에 중공의 악인들은 그의 가족에게 혹심한 교란행위로 극도의 불편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녀의 부모는 모두 80대로 그들로부터 받는 고통의 압박 때문에 생활은 어려워지고 건강상태는 급격히 저하되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만년의 안정을 위해 광시 난닝에서의 생활을 접고 광저우로 이사했으며, 2012년 새해에 황위안란은 마침내 부모와 상봉하여 잠시나마 안정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황위안란의 큰 오빠는 2009년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수십만 위안의 거금을 들여 치료를 받았으나 여의치 못했으며, 2012년 4월에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온 가족은 비통 속에 빠졌다. 할 수 없이 가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황위안란 부부가 병든 큰 오빠를 맡아 보살펴주기로 했다. 그러나 의료비가 워낙 비싸다 보니 가족들은 차츰 견디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모두 형편이 어렵게 되자 환자가 치료를 포기하려고 했다. 더구나 가족 모두가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어 돈 문제로 서로 모순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황위안란은 부모에게 자신의 집을 팔아 오빠의 병 치료를 하라고 했다. 그녀가 오빠를 맡아 보살펴 주며 또 집까지 내놓는 등 몇 달간의 나의 이런 긍정적인 태도를 목격하게 된 가족과 친척 친구들은 차츰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하게 되었고, 환자인 오빠도 수련을 시작하게 되었다. 오빠는 수련 후 얼마 되지 않아 몸 상태가 다소 호전되었다. 의사도 오빠에게 퇴원해 집에서 몸조리해도 좋다는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2012년 8월 중공 악도는 18기 인민대표대회를 연다는 이유로, 그들이 인정하는 이른바 ‘중점인원’(중점 감시대상)에 대한 사회적 격리조치를 시도했다. 난닝 공안국은 물론 직장에서조차 부모님 집과 그녀의 둘째 오빠의 집 등 친인척의 집까지 돌아다니며 황위안란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심지어 불법 전화도청까지 해대는 바람에 황위안란 부부는 부득이 중공사악의 박해를 피해 가족과 이별하고 정처 없이 유랑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거듭 납치되어 억울하게 사망

사악에게 중점적으로 추적되고 조사당하는 과정에서 셋집과 파룬궁수련생의 집 전화가 도청되어 악인들에게 결국 납치되었다. 2012년 10월 30일 이른 새벽 황위안란 부부는 광시 윈산에서 급습을 당해 노트북 두 대, CD 복사기, 카메라, 휴대폰 2대, 이동 하드 디스크, USB, 태블릿 PC, CD 수천 장 등 다수 물품을 강탈당했다. 알려진 바로는 난닝과 친저우(欽州), 윈산의 공안국, ‘610’ 등이 합동으로 자행한 일이라고 했다. 당시 황위안란의 몸에는 이미 심각한 병증세가 나타났다. 악인들은 들것을 이용해서 납치하려고 했다. 악인들이 집에 불법으로 난입했을 때 녹화를 하는 등 사진을 찍어 소위 위선적인 장면을 만들었는데 사후 책임이 두려워 중점 대상을 황위안란의 남편으로 지목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설정한 목표달성을 위해 남편에 대해 7시간 동안이나 불법심문을 감행했는데 다른 파룬궁수련생과 관련된 정보를 집중적으로 찾아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 결과 아무런 소득이 없자 그들은 시간적 지연 술책을 취했다. 말로는 “당신들은 잘 쉬시오. 별일 없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연이어 가버렸다. 그러나 건물 아래 입구에 이미 사람을 고정 배치하여 감시하고 있었다. 그 후 황위안란 부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 벗어났다. 중공 악도는 끊임없이 대량으로 경찰을 파견해 각급 거점 지역에서 검문하고 조사하고 수색했으며 심지어 현상금을 내걸고 찾았다. 그들은 동시에 윈산의 다른 파룬궁수련생의 집도 모두 감시했다.

황위안란은 전전하며 광저우로 왔다. 정상적으로 숙박할 수 없었던 관계로 공공장소에서 밤을 새우며 지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압력을 받게 된 황위안란은 집에 연락하여 도움을 청했다. 중공의 악인들은 황위안란의 가족과 친인척에게 “만약 황위안란을 찾지 못하면 친척의 직업에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라고 협박했다. 그런 상황에서 압력을 받은 친척의 안내에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황위안란의 남편은 사당에게 지명수배를 당하고 있는 처지라 집으로 돌아와 황위안란을 보살펴줘야 하는 데 그러지 못하고 밖에서 떠돌이 유랑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광시 난닝의 경찰 등 관련 기관요원들은 황위안란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연락을 받고 사흘 동안이나 불법으로 수색하며 난동을 부리고 체포하지는 않았으나, 황위안란이 광저우로 온 몇 년 동안 박해를 하면서 취한 이른바 관련 증거자료 일체를 광저우 화두(花都) ‘610’과 국가보안 등 관련 부서로 이관시켰다. 그러자 광저우 화두 ‘610’과 국가보안 등 부서에서 황위안란의 집으로 찾아와 위선적인 표정으로 관심을 보였는데 배후에서는 그의 둘째 오빠와 주택단지의 보안에게 감시토록 조치를 한 것이다. 그들은 늘 전화를 걸며 황위안란의 동향과 남편의 행방을 물으며 감시 감독했다.

황윈란은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압박을 견딜 수 없어서 여러 차례 사악에게 갇힌 환경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했으나 심신의 괴로움과 어려운 상황에 둘러싸여 있어서 좀처럼 사악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건강상태는 나날이 악화되었다. 이제 어려운 고비를 맞게 되었는데 몸을 스스로 관리할 수 없는 지경이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가 되었다. 결국, 2012년 12월 1일경 가족에 의해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광저우 화두 ‘610’과 국가보안 등 관련 기관원들은 여전히 그녀를 가만두지 않고 병원을 찾아가 소란을 피우며 상황을 파악하며 감시활동을 폈다.

중공사악의 요원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황위안란 부부와 그들 가족에게 박해하고 위협한 그 악독한 상황에서 결국 황위안란은 2012년 12월 17일 오전에 광저우 화두 중서결합병원(中西結合醫院)에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큰 오빠도 비통 속에서 그달에 세상을 떠났다. 지금 집에는 연로한 부모님께서 매일 눈물로 나날을 보내며 젊은 자식들을 먼저 보낸 비탄 속에서 고통을 감당하고 있다.

파룬궁수련생은 13년 동안의 박해 속에서도 견인불굴(堅忍不屈)의 정신과 대선대인(大善大忍)한 도량으로 증오와 학대 그리고 학살을 대해왔다. 이들 수련생은 생명으로 진선인(眞善忍)을 실현했고 정의를 위호했다. 그러나 중공은 전국적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정의 비극을 만들어냈다. 얼마나 화목한 많은 가정을 핍박하여 혈육이 헤어졌으며, 얼마나 많은 연로한 부모들이 젊은 자식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냈으며, 얼마나 많은 어린이가 부모를 잃고 고아로 되었으며, 얼마나 많은 가족이 흩어져 유랑생활을 하는가? 이런 현상은 다만 파룬궁수련생이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사악한 중공에 의해 많고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이렇게 된 것이 아닌가? 그건 원래 사회의 안녕과 공정함을 보호해야 할 법 집행자(執法者)들의 책무이거늘 오히려 그들은 진선인(眞善忍)을 믿는 좋은 사람을 박해한 것이다. 어떤 경찰은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면서 “업보를 받는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왜 별일이 없는가?”라고 큰소리쳤는데, 그는 진정 선악에는 인과응보가 있다는 천리를 전혀 몰랐다. 업보를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만 시간이 되지 않았을 뿐이다.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고 악보를 받은 자는 부지기수다. 런창샤(任長霞)는 교통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왕리쥔은 죄인으로 전락하지 않았던가? 자신과 가족에게 재난이 왔을 때 후회하지 말고, 어서 공을 세워 속죄하라! 사실 양심이 아직 남아 있는 각계 인사들도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 누가 자기 신변에 사람을 괴롭히고 해치는 악도가 있기를 원하겠는가?

문장발표: 2013년 2월 4일
문장분류: 대륙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2/4/26875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