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 통신원 간수보도) 간수(甘肃)성 바이인(白银)스 징위안(靖远)현 파룬궁 수련생 바이싼위안(白三元)은 2010년 7월 12일 중공 법원에서 불법으로 6년 판결을 당한 후 란저우(兰州) 감옥 6구역에 감금되었다.
바이싼위안은 2000년 베이징으로 파룬궁에 대한 공정한 말을 하러 갔다가 이미 불법적으로 3년 판결을 당했었다. 이 기간에 고문으로 시달려 몇 번이나 생명이 위급했는데 두 차례 빈사(濒死) 상태였다. 그가 출옥할 때에는 온몸에 흉터투성이였다. 나중에 또 납치하려고 여러 번 수색을 왔기에 핍박으로 집을 떠나 떠돌아 다니다 현재 또 다시 감옥에 감금되었다.
바이싼위안은 2010년 5월 하순부터 지금까지 줄곧 단식하였다. 감시 구역에 보내어 신체를 검사하는 기간에 사악한 경찰(경찰번호:0333814)은 허리를 발로 7-8번 차고, 얼굴을 10몇 차례 때려서 바이싼위안으로 하여금 다리가 마비되고, 허리 척추뼈가 돌출되어 신체적으로 더욱 엄중한 고통을 안겼다. 바이싼위안의 얼굴은 창백했고, 온 몸은 야위어 가죽밖에 남지 않았는데 머리까지 삭발하여 완전히 몰골이 엉망이었다.
금방 단식에 들어갔을 때에는 일 주일에 한 번씩 음식을 주입하였는데, 코로 호스를 넣어 우유와 옥수수 가루를 섞어서 500g정도 주입하였다. 7월 28일 바이싼위안의 신체는 이미 극도로 허약하여 졸도했다. 그가 정신 차리기를 기다리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죄수’가 바이싼위안의 다리가 모두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고 알렸다. 최근 며칠은 하루에 한 번씩 음식과 물을 주입하였다.
8월 2일, 란저우 감옥 6구역의 성이 쉬(徐)씨인 지도원은 바이싼위안의 가족과 면회하기 전 몇 분 이야기 하였다. 이는 바이싼에게 선심을 베푸는 것처럼 가족들에게 잘 ‘협조’하여 바이싼위안으로 하여금 밥을 먹게 하고 ‘사서(4書, 파룬궁 수련을 포기한다는 각서 등을 말함)’, ‘감형(减刑)’등을 쓰도록 권고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또 밥도 먹지 않은 바이싼위안의 장부에 300위안의 액수가 적혀 있었다.
8월 3일, 조급한 가족은 간수(甘肃) 감옥 관리원을 찾아갔다. 성이 뉴(牛)씨인 처장이 그들을 만났는데 란저우 감옥에 전화를 하더니 사람을 때린 사실을 한사코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족에게 다른 유관 부문에 찾아가라고 밀어 붙이면서 감옥에서는 책임이 없다고 하였다.
바이싼위안, 남(47), 간수(甘肃)성 바이인스 징위안(靖远)현 핑바오(平堡)향 진샤(金峡)촌 농민이다. 1999년 ‘7.20’이후 그는 장기적으로 중국 공산당의 박해를 당했고 여러 번 납치되어 감금되었었다. 옥중에서 그는 여러 가지 고문에 시달려 몇 번이나 죽음에 직면했으며 온 몸은 상처 투성이였다.
베이징으로 청원 갔다 감금당하다
바이싼위안은 고등학교 졸업한 후 집에서 농사일에 종사했다. 10여 년을 하루 같이 농업 생산 및 농업기술을 배우고 연구하여 일찍이 여러 차례 성, 시급 농업 과학 연구 부문의 기술 영예 증서를 받았다. 핑바오향에서 제일 일찍 농업 기술 영예증서를 획득한 유일한 사람이다. 바이싼위안은 강직하고 아첨하지 않았으며, 열정적으로 남을 대하고, 남을 도와주는 것을 즐겼다.
1997년 가을, 바이싼위안은 기쁘게도 대법을 얻었다. 1999년 7월 20일부터 장쩌민 집단이 전면적으로 대법을 비방하고 모독하면서 대법과 대법제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핑바오향 정부 왕서기, 파출소 소장 중전위(种振宇)와 경찰 왕신청(王新成), 두신우(杜新武), 촌위원회 주임 바이밍쥔(白明军)등이 연이어 몇 번 바이싼위안 집으로 와서 그에게 수련을 포기하라고 권고했다. 바이싼위안은 그들에게 이치를 설명하고 근거를 내 놓으면서 많은 말을 하여 자신은 수련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표시했다. 이리하여 압박이 더 가해져서, 촌 주임 바이밍쥔은 상부의 협박 하에 억지로 바이싼위안의 집에서 몇 권의 대법책, 파룬따파를 소개한 프랭카드, 지난(济南) 설법 녹음테이프 한 세트와 연공음악테이프 한 세트 등을 가져갔는데 이것이면 그만 끝난 줄로 알았다.
2008년 8월, 향 정부의 류타오(刘涛), 우머우(吴某) 등이 대출금을 갚는 일과 농업 기술의 일로 바이싼위안의 집에 왔었다. 그들이 집 안 가운데 파룬궁 창시자 리훙쯔 선생님의 법상이 있는 것을 보고 파출소에 신고했다. 한 시간도 안되어 파출소 경찰 왕신청(王新成), 두신우(杜新武), 둘이 뛰어와 파룬궁 사부님의 법상을 빼앗아 갔다.
2000년 10월 26일, 바이싼위안은 베이징으로 파룬궁을 위하여 공정한 말을 하려고 청원하러 갔다가 경찰에게 납치되어 천안문 광장 파출소로 압송된 후 칭허진(清河镇) 쩐하이댄(镇海淀) 수감소로 이감되었다. 바이싼위안의 이름과 주소를 알아내기 위하여 감옥 경찰은 죄수들을 부추겨 바이싼위안을 자지 못하게 하면서 조금만 눈을 붙이면 손가락으로 눈, 머리, 얼굴을 눌러 놓았으며 또 원주 펜으로 얼굴에 동그라미를 그리는 등으로 몇 개의 팀으로 번갈아 당번을 섰다. 나중에 바이싼위안이 핍박으로 자기의 이름과 주소를 알려준 후에야 고문을 멈췄다. 바이싼위안이 불법으로 18일 감금된 후 칭위안현 공안국 정보과에 있는 마(马)씨와 중전위(种振宇)가 데리러 왔었는데 이들은 직접 칭위안현 공안국 구치소의 마약범 수감소(戒毒所)로 데려가 1 개월 구금시켰다. 구금된 기간에 감옥의 경찰은 또 그를 불러서 공안국 담장 안을 청소하게 하고, 보일러 있는 곳으로 석탄을 나르게 하는 잡일을 시켰다. 출옥 시에 또 가족을 협박하여 150위안의 돈을 요구했다.
바이싼위안이 집으로 돌아온 지 갓 20여 일이 지난 2001년 1월 7일, 바이싼위안의 부부가 란저우 모 버스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란저우 ‘610’에서 와서 납치하였다. 바이싼위안이 당시 납치에 대하여 저항한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머리, 얼굴을 때려 상처를 입히고, 오른손 엄지 손가락 뼈를 부러뜨렸으며, 코에서는 피가 흘렀는데도 나중에 또 머리를 강타하여 혼미 상태로 만든 후 그를 들어서 차에 실었다. 그날 밤 서과원(西果园)에 있는 란저우시 제1 간수소에 감금시켰다.
바이싼위안은 그날부터 금식으로 반(反) 박해에 항의하였다. 3일째 되는 날 사악한 경찰 대장 수성푸(苏生福)의 지시 하에 바이싼위안에게 수갑과 족쇄를 모두 채우고 8호 쇠줄로 손과 발을 함께 감아 묶어 놓는데 중간의 철사는 아주 짧게 한다. 이러한 혹형은 사람으로 하여금 설 수도 앉을 수도 없으며, 잘 때에도 옷을 벗을 수 없고, 허리는 더구나 펼 수 없으므로 몸을 움직이기가 아주 힘들었다. 혼자 스스로 대, 소변을 볼 수 없었으며, 손과 손목은 단번에 모두 부어 올랐다.
사악한 경찰들은 이러한 고문으로도 바이싼위안을 굴복 시키지 못하게 되자 또 다른 방법으로 농락하였다. 매일 저녁에는 자지 못하게 하였는데, 큰 마대에 바이싼위안을 발부터 넣어 목 밑까지 넣고는, 끈으로 두 다리를 묶고 목도 묶은 후 다만 머리만 남겨놓고 들어서 화장실 문 앞의 벽 구석에 앉혀놓고는 날이 밝으면 풀어 주었다. 이렇게 그는 화장실을 갈 수 없었으며 매번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대, 소변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매번 화장실을 가려면 고통스러운데 이들은 귀에 담을 수 없는 모욕과 우롱을 하였다. 이러한 박해는 12월 30일 오후에 바이싼위안이 핍박으로 단식을 포기한 뒤로 수갑과 족쇄를 풀어 주면서 일단락 되었다.
수감소에서의 강제노역
2001년 4월 중순, 서과원 수감소에서는 감금된 사람들에게 노예식으로, 대량의 해바라기씨의 껍질을 벗기는 일을 시켰다. 바이싼위안은 강제적으로 이런 일을 해서 5-6일도 되기 전 손가락 끝이 모두 부어 오르고 물집이 생기면서 염증이 오기 시작했다. 이런 손가락으로 매 하나의 껍집을 벗기는 것이 가슴을 송곳으로 지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나중에는 두 손의 엄지 손가락, 식지의 손톱 아래에서 고름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는데 손톱 밑은 거멓게 되었다. 이때면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몇 개의 손가락이 닿아서 짧아지는 감촉을 느낄 수 있다. 나중에 오랜 기간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천천히 정상으로 회복된다.
이러한 고통에 시달리는 상황에서도 사악한 경찰 대장은 생산량이 감소되면 자기의 임무를 완성하지 못한 사람은 밤에도 계속해야 하고, 날이 밝아도 완성하지 못하면 그 이튿날 계속 원래의 임무량에 더 증가하는데 그것도 완성하지 못하면 아예 밥을 주지 않으며 화장실 가는 것마저 모두 제한을 받는다. 일부 임무를 완성하지 못한 사람은 저녁에 또 감옥 대장의 여러 가지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고문을 당해야 하였다. 수감소에서 죽은 사례 중에서 대다수는 모두 이러한 장기적인 시달림에서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당시 서과원 수감소에는 아주 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고문과 노역에 시달려 신체가 극히 허약했다. 거기에서는 근본적으로 위생 조건을 논할 수 없다. 해바라기 씨앗의 껍질을 벗기는 일을 놓고 보더라도 큰 울 안의 시멘트 땅바닥에 뿌려놓고, 물을 뿌린 후 줄곧 손으로 젓는다. 이렇게 해바라기씨와 시멘트 땅바닥의 더러운 것들이 혼합되어 더러운 물이 흘러 나오는데 이 물이 없으면 껍질 벗기기 힘들다고 조금도 흘러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더러운 물이 스며든 매 한 알의 해바라기씨앗을 반드시 이빨로 벗겨야 했다. 이리하여 입안이 아래 위로 모두 염증이 생기는데 어떤 이는 장기적으로 설사를 하였다. 란저우 파룬숭 수련생 완꾸이푸(万贵福)는 바로 이렇게 시달리다 멀쩡하게 저 세상으로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이싼위안과 다른 한 파룬궁 수련생은 이러한 핍박에 항의하여 6월초에 이 노역을 면하게 되었다.
악독한 주입을 당하다
금식하는 과정에서 사악한 무리들은 미친 듯이 잔인한 심리 변태적 죄수, 중형을 선고받은 죄수들을 이용하여 바이싼위안을 악독하게 박해하였다. 사악한 경찰들은 형사범 런정챵(任正强)에게 대량의 식염을 용액에 넣어 여러 번 주입하였다.(이 죄수가 실내에서 폭행하는 중 이미 3명이 죽었는데 5살 어린이마저 놓아주지 않았다. 이들은 파룬궁 수련생들에 대한 박해를 쾌락으로 느끼면서 극단적인 변태 중에서 마음의 평형을 찾는것 같았다). 그 중 한 번은 한 작은 밥을 넣은 상자 안에 소금을 한 근 정도 넣은 것을 바이싼위안이 발견하고 즉각 그 밥 상자를 가지고 대장 사무실로 가서 항의하였다. 위생대 사악한 경찰 양린촨(杨临泉)은 무턱대고 폭력적으로 바이싼위안을 사무실로 끌고 가서 그에게 말하지 못하게 하고는 강제로 주입하여 괴롭혔는데 바이싼위안은 머리를 벽에 부딪쳐 졸도했다. 나중에 깨어난 후 중형범죄자 외쑹(岳嵩)이 큰 소리로 “당신이 대장한테 우리가 소금을 넣었다고 알렸는가?”고 외쳤다.
악경 양린쵄은 파룬궁 수련생에게 강제 주입하는 중 늘 파룬궁 수련생을 속여 입을 벌리고 잘 협조하라고 말한다. 사실 이 기회를 빌어 사람에게 제일 민감한 부위를 조준하여 손으로 호스를 쥐고 콧구멍으로 넣으면서 민감한 부위에서 멈추고 더 넣으려 하지 않고 아래위로 반복으로 당겼다 넣었다 하는 음험하고 악독한 수단으로 단식하는 매 파룬궁 수련생들을 극도의 고통에 시달리게 한다. 간혹 양린촨은 콧구멍 하나가 모자라 호스를 또 다른 한 콧구멍에도 넣어 동일한 방법으로 또 괴롭힌다. 때로는 한동안 이렇게 괴롭히고 또 부족하여 빼고는 또 다시 넣으면서 반복적으로 괴롭힌다.
위생대의 죄수 관사오만(关小满)은 사악한 경찰들의 협박으로 각 대대에 단식한 파룬궁 수련생에게 바로 상술한 방법으로 괴롭혔다. 이러한 악독하고 참혹한 박해는 정말로 말로 형용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 이 죄수는 바이싼위안의 한 콧구멍에 주입하는 호스를 당겼다 넣었다 하다가 한 손의 팔이 지쳤다. 또 다른 손을 바꾸어서 계속 그 동작을 하고는, 다시 다른 코 구멍을 향해 연속 괴롭히는데 눈물에, 피에, 콧물에 뒤엉켜 진득한 것이 온 얼굴을 덮었다. 주입할 때면 왕왕 모두 한 호실에 있는 7-8명의 죄수들을 동원하는데 심지어 10여 명이 참여한다. 파룬궁 수련생에 대하여 머리를 붙잡고, 머리를 누르고, 귀를 비틀고, 팔과 다리를 누르는데 아주 잔인하고 공포적이었다.
7월 17일 단식을 시작하여 바이싼위안은 이러한 강제 주입 고문을 5일 동안 하루에 두 번씩 당하였다. 7월 20일에 사악한 경찰의 대장 수성푸(苏生福)는 이러한 고통을 보고 더 오지 않았다. 이들은 바이싼위안을 또 해바라기씨 껍질 벗기는 일에 보냈다. 금방 물을 뿌렸던(금방 물을 뿌린 씨는 아주 미끄러워 근본적으로 잡기 힘들어 벗길 수 없음)것이었다. 바이싼위안은 거부하였다. 수성푸는 바로 바이싼위안을 무더운 날씨에 햇빛에 델 지경인 뜨거운 시멘트 위에 온 종일 앉혀 놓았다. 사악한 경찰은 또 고의로 아주 습한 감방에 감금시켰는데 땅바닥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그에게 먼저 온 몸에 습기를 받아 들이게 한 후 몸에 옴이 생기게 만들겠다고 외쳐댔다. 중형을 선고받은 죄수 외쑹(상해 살인범)은 또 바이싼위안을 협박하고, 유혹하여 단식을 포기하게 하려고 기도했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자 또 다른 죄수를 시켜 바이싼위안을 땅바닥에 엎어놓고 그가 평시의 기억에 따라 파룬따파(法輪大法)의 경문, 『홍음』등을 기록한 것을 억지로 빼앗아 불에 태웠다.
비밀리에 심사를 당하고 수감소에서 가족 면회를 하지 못하게 하다
초가을, 사악한 공산 악당은 바이싼위안과 다른 한 파룬궁 수련생 훠잰중(贺建中)을 5-6명의 죄수들을 시켜 중간에 가두어 놓고 란저우시 성관구역 법원으로 끌고 가게 하였다. 가족과 그 어떤 사람에게도 통지하지 않은 상황에서 슬그머니 불법으로 심리하였다. 두 명의 파룬궁 수련생은 법정에서 진상을 하였다. 첫째, 파룬따파는 좋은 것이다. 둘째,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다. 셋째, 우리의 사부님은 결백하다. 재판 과정에서 정의의 양심 있는 변호사들이 파룬궁 수련생을 위하여 죄가 없음을 변호했다. 법관은 대처할 이유가 없어서 휴정을 선포했다. 나중에 불법으로 바이싼위안에게 3년 선고를 내려, 그는 무기한으로 수감소에 감금되었다.
바이싼위안은 일찍이 여러 번 가족을 만나게 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모두 무리하게 거절당했다. 바이싼위안은 간수소 대장에게 당신들의 이러한 행동은 불법으로 파룬궁 수련생을 감금하고 박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파룬궁 수련생의 가족과 미성년의 어린이들마저 박해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 인권 조직에서는 중국의 헌법과 법률 상 모두 허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감옥의 사악한 경찰은 판결문이 없었으므로 여러 차례 가족 면회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바이싼위안의 끊임없는 항의로 2002년에 와서야 가족들이 겨우 만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어린 아이가 몇 백km 밖에서 2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한 아빠를 보러 왔는데 도리어 한 마디로 “소장이 없다”고 거절하고는 문밖에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당시 바이싼위안의 아내 왕건디(王根娣)도 2001년 5월에 불법으로 납치되어 2년 강제노동을 당했다. 두 어린 아이는 이렇게 참혹하고 무정하게 기만과 우롱을 당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아빠도 만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박해로 ‘산 표본’이 되었다
2002년 8월 17일, 여러 차례 무시당한 상황에서 바이싼위안은 다시 단식으로 항의했다. 불법으로 엄중하게 감금 기간을 초과한 데 대해 무죄 석방을 요구했다. 결과 며칠 후 법원에서 한 장의 황당한 3년 판결문을 보내왔다. 바이싼위안은 판결문을 아예 보지도 않고 대장 사무실 문 앞에서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법원에서 온 사람이 금방 간 후 수감소 경찰은 또 바이싼위안에게 단식 하지 말고 빨리 호소문을 쓰라고 유혹하면서 호소문의 결과를 기다려보자고 했다. 바이싼위안은 이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이들의 그 상투적인 방법을 듣지도 않고 다시 단식으로 박해를 반대했다.
이때는 바이싼위안이 이미 엄중한 박해를 당한지 이미 2년이 되었다. 신체는 극도로 허약했고, 심장 박동이 빨랐으며, 엄중한 빈혈에, 손발은 일찍이 이미 아팠으며, 얼굴, 혓바닥은 마비되기 시작했다. 사악한 무리들은 또 늘 쓰던 수단으로 그에게 악독한 강제 음식 주입을 실시했다. 죄악을 덮어 감추기 위하여 이들은 전 대대의 사람들에게 달고 다니는 번호를 모두 걷어 들이게 하였다. 설령 전체 사람들이 마침 일할 때라도 역시 이렇게 하라고 지시했다. 오직 주입할 때 면 바로 전부 번호를 걷어 들이라고 하였다. 처음으로 대량의 농도가 높은 소금물을 주입하였는데 나중에 바이싼위안은 바로 토하였다. 나중에 또 몇 번 토하였다. 며칠 동안 이렇게 하다 보니 사람은 이미 꼴이 말이 아니었다. 강제수용소 병원에 보내졌는데, 매번 주입을 한번 당하고 나서는 며칠 동안 링거를 놓았다. 대략 10일이 지나서 바이싼위안의 발, 다리, 팔이 갑자기 전부 굳어지면서 팽창되었다. 더욱이 다리가 여러 가지 감각으로 아프고, 끊임없이 가슴을 찌르는 듯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발, 다리, 더욱이 허벅지 안팍, 손등과 손바닥, 매 손가락 관절, 팔, 엉덩이, 허리, 하음부, 항문 등 여러 곳이 모두 곪았다. 아울러 주기적으로 발작(주기가 대략 20일 정도)하였다. 가장 엄중한 것은 항문이 쾌속으로 연속 수축되면서 통증이 심하였는데 연속 2일 동안 대변을 참지 못했다. 그 후부터 항문은 비정상적으로 마비되어 절반은 아래로 처져서 괴로웠다. 전신의 상태가 가중됨에 따라, 팔, 손가락은 이미 완전히 굳어져 버렸다. 다만 작은 손가락이 조금씩 능히 움직일 수 있을 뿐이었다. 당시 바이싼위안은 이미 완전히 다리, 손, 팔의 존재를 감각하지 못하여 생명의 위기의 경각에 놓여 있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산 표본’과 같다고 하였다. 온 몸에 뼈만 남았는데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는 병이 위급하다고 수감소에 통지하였다. 수감소에서는 바이싼위안의 생명이 수시로 위급한 것을 보고 그의 여동생을 찾아서 2,000위안의 돈을 바치면 사람을 데려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현지 정부와 공안국에 가서 수속을 밟으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녀가 그 지역의 촌, 향, 파출소, 현 공안국, 정법 위원회를 모두 찾아갔지만 어느 부문에서나 모두 수속을 해 주지 않았다. 이 역시 층층의 정부기관이 모두 죽는 것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모두 바이싼위안 박해에 구체적으로 참여한 것이었다.
죽어가는 바이싼위안에 대하여 수감소 소장은 또 기만하면서 “며칠 있으면 여동생이 돈을 가지고 수속을 밟은 후 당신을 출소시켜 집으로 데려갈 것이다.”고 말했다. 10월 14일, 감옥 경찰은 또 바이싼위안을 속여 간수소 위생대에 데리고 가서 며칠 몸을 잘 조절한 후 집으로 보낸다고 말했다. 그 후 수감소 안팍에서 바이싼위안이 아직 수감소에 살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주 적었다. 밖에서는 또 바이싼위안이 흉악한 박해로 이미 세상을 뜬 줄로 알고 있었다.
이때의 바이싼위안은 완전히 생활 능력을 잃었으며 근본적으로 침대에서 내려 걸을 수 없었다. 당시 날씨는 아주 추웠는데 얼름장 같은 침대 위에 근본적으로 밤을 날 수 없는 얇은 것을 펴 놓았다. 밤이 되면 추워서 잠에서 깬 후 다시 잠들 수 없었다.
이 기간에 가족은 다만 2003년 설 이전에 한 번 방문을 왔었다. 나중에 수감소에서는 가족에게 “바이싼위안을 이미 집으로 보냈으므로 여기에 없다.”고 하였다.
줄곧 2003년 10월에야 바이싼위안이 죽음의 고비에서 회복되었다. 그러나 정상으로 걷지는 못했다.
장샤오둥(張曉東)은 박해로 사망했고, 바이싼위안은 병원으로 호송되어 응급치료
2003년 10월 16일, 불법으로 란저우시 제1 수감소(서과원 수감소)에 감금된 파룬궁 수련생 바이싼위안(白三元), 장샤오둥(張曉東), 양쉐꾸이(楊學貴), 왕윈버(王允波)등은 함께 발정념을 하였다. 왕윈버는 감옥은 죄수들이 있는 곳이라고 인정하고 파룬궁 수련생은 죄가 없으니 마땅히 정정당당하게 큰 문으로 나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이 몇 명의 파룬궁 수련생들은 의젓하게 대문으로 향했다. 경비는 경찰에게 막혀 되돌아 갔는데 수갑과 족쇄가 채워졌다. 장샤오둥, 바이싼위안 등은 단식으로 항의하면서 수갑과 족쇄를 풀어 줄 것을 요구했다. 단식한지 6일이 되는 날, 2003년 10월 21일부터 악도들은 비참한 주입을 진행하였다. 대장 창류웨이(长刘炜)、류룬칭(刘润庆)과 주관 대장 자오관후(赵关虎)의 부추김에 쉬웨팅(徐月婷)과 자오핑(赵萍)은 제조한 약을 넣었다. 감방 의사 관샤오만(关小满)은 주입을 강행하였다. 주입한 것은 고농도의 소금과 진정제였다. 동시에 사악한 경찰은 죄수를 시켜 파룬궁 수련생을 악독하게 때리게 하였다. 장샤오둥은 23일 이렇게 맞아서 사망한 것이다.
이때 바이싼위안도 박해로 생명이 위급하여 감옥의 경찰이 10월 24일 노동수용소 병원에 보내어 응급 치료를 하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바이싼위안이 병원으로 호송되기 2일전에 장샤오둥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그의 시체는 24일 수감소 사악한 경찰들이 노동수용소 병원으로 옮겨져 병원에서 가짜 병력을 만들어 장샤오둥은 병으로 죽었다고 거짓을 조작했던 것이다. 수감소에서는 위생대의 각 감방의 죄수들을 협박하여 가짜 증명서를 쓰게 하였다. 당시 병원과 수감소에서는 또 극히 엄밀히 봉쇄하여 소식이 나가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진실한 상황을 알아내기 힘들다. 두 번째로 바이싼위안이 죽었다고 잘못 전달되도록 했다.
바이싼위안이 응급치료를 받는 중에 병원의 담당자는 모 죄수와 함께 바이싼위안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작은 소책자에 경문을 적은 것을 빼앗아 갔다. 바이싼위안은 걸음이 불편하여 홀로 화장실에 갈 수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일부 흉악한 경찰들은 늘 고의적으로 괴롭히면서 옆에서 도와주지 못하게 격리시켰다.
바이싼위안이 병원에 있은 지 2개월 되었을 때, 아들이 이 소식을 듣고 병원에 왔는데 병원 측에서 상부에서 만나지 못하게 한다고 하면서 거절하며 괴롭혔다. 이들은 조그마한 인간성도 없이 3년이란 긴 시간 동안 바이싼위안과 그의 아들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심각한 고통을 주었다.
바이싼위안은 불법적으로 받은 판결의 만기를 약 일주일 앞두고 큰 목소리로 대법의 구호를 외쳤다. 성이 마 가라는 흉악한 경찰이 침대에 있는 바이싼위안의 옷을 틀어 잡고 당겨 땅바닥에 매쳤다. 그리고 손으로 목을 조였다. 이리하여 바이싼위안의 두 무릎에는 몇몇 곳이 상하여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도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바이싼위안은 만기를 2일이나 넘겨 풀려났다.
이 3년 박해에서 바이싼위안은 온 몸이 장애가 되어 기본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수용소 병원에서는 장애를 몇 번 검사만 했을 뿐이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온 몸이 굳어져, 마비 상태로 통증이 심했다. 더욱이 손, 발, 팔은 부은데다 굳어졌는데 줄곧 아픈 것이 모두 정상이 아니었다. 엄중할 때에는 온 몸을 움직이기 힘들었으며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는 바이싸위안에게 담낭염, 담결석, 엄중한 빈혈, 근육 수축, 좌측 흉막염, 좌골부가 늘 붓는 등 병들이 있다고 하였다.
출옥 후 여러 번 납치되고 체포 당하다
바이싼위안이 출옥 후 현지의 파출소, 향 정부에서는 여전히 바이싼위안의 가족을 계속 박해 하였다. 줄곧 2004년까지 이들은 7차례나 박해하고 괴롭혔다. 그 중 몇 번은 파출소 왕딩안(王定安), 왕신청(王新成)이 집에 와서 마구 수색을 하였다.
5월 상순, 바이싼위안의 아내가 난핑(南坪)에서 밭일을 하고 있는데 파출소 왕신청, 숭지주(宋积祖)가 향 사법소의 장궈왕(张国旺) 등 사람들과 함께 차를 몰고 밭으로 찾아와 그녀에게 소란을 피워댔다.
8월 15일 추석날, 바이싼위안과 아내가 함께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고 있는데 현지 파출소 왕신청, 핑바오(平堡)촌 서기 푸쥔원(甫俊文)이 한 무리의 사복 경찰들을 이끌고 왔는데 바이인(白银) 공안국(그 중 하나는 옌위칭(阎余庆))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과수원에서 바이싸위안을 납치하여 핑바오 파출소로 압송했다. 차 안에서 흉악한 경찰들은 고의적으로 자신들의 몸으로 바이싼위안의 수갑을 눌러 수갑이 손목으로 깊이 재워지게 하였는데 두 손목은 바로 부었다. 이들은 이렇게 몇 시간 바이싼위안을 괴롭혔다. 집으로 온 후에야 바이싼위안은 악의 무리들이 집에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문을 비틀어 열고 들어가 집 안팍을 모두 뒤집어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반 과정에서 사악한 무리들은 또 핑바오 향 사법소의 양팡팡(杨芳芳)을 이용하여 바이싼위안의 집에 비밀리에 가서 수색하여 전단지를 찾아 보려고 시도했다. 당시 바이싼위안의 남동생이 잠시 집 안에 머물고 있었다. 마침 유치원 준비 중이었다. 양팡팡은 그와 유치원 선생 모두 동창생인 것을 이용하여 가만히 바이싼위안의 집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게 되자 바로 바이싼위안의 장모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노인들에게 바이싼위안이 전단지 한 무더기를 가지고 왔는데 핑바오에서 어찌하려고 한다면서 노인을 위협했다. 노인은 놀란 나머지 바이싼위안의 집으로 달려가 울부짖었다. 바이싼위안의 장모는 몇 년 전 직장 절단 수술을 하여 모든 자식들의 노력으로 몇 년을 더 살고 있다. 무슨 일이든지 되도록이면 노인이 근심할까 봐 모두 알리지 않았다. 특히 이 몇 년 동안 바이싼위안과 아내가 박해 받은 것으로 두 노인과 가족이 아주 큰 고통을 감당했다. 이리하여 언제나 노인이 무어라고 하든지 바이싼위안은 늘 노인에게 웃는 얼굴로 너그럽게 대하면서 두 노인에게 다시는 근심을 끼치는 일을 피하려고 노력하였다. 게다가 바이싼위안의 장모는 양팡팡의 친 고모였다.
2005년 봄, 바이싼위안의 아내가 과수 나무에 비료를 주고 있는데 향 과학 기술과 부 향장 천궈쥔(陈国钧)이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면서 핑계로 감시하고 미행하였다. 9월 25일이 지난 어느 날 저녁, 날이 금방 어두워지자 바이싼위안은 저녁 준비를 하려고 하는데 향 부서기 왕씨를 위시로 한 일행이 갑자기 뛰어 들어 바이싼위안의 손에 몇 장의 「밍후이주보」가 있는 것을 보고 달라고 해서 보고, 수량을 세더니 즉각 파출소, 사법소의 장궈왕 등에게 오라고 전화하였다. 이들은 다짜고짜 바이싼위안을 보고 파출소로 가자고 하면서 마구 묶으려고 하였다. 바이싼위안과 아내는 단호히 거부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악도는 강렬한 질책을 당했다. 악도는 하는 수 없이 가 버렸다. 2006년 4월말, 양팡팡은 몇 명의 신분이 불분명한 (근거에 의하면 시, 현에서 온 사람)사람들을 이끌고 와서 찾았다. 몇 번 불러도 동정이 없자 양팡팡은 온 사람들에게 “가요, 이 집은 담장이 또 있는데 가서 찾아 봅시다.”하고 말했다. 그 결과 또 이 무리들은 바이싼위안의 남동생의 집 울타리로 갔다. 이때부터 바이싼위안의 남동생도 늘 이러한 사람들의 교란을 당했다.
2007년 설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저녁, 바이싼위안의 마누라가 마침 발을 씻고 자려고 준비하는데 핑바오향 사법소의 양팡팡, 핑바오향 서기 양후청, 파출소 웨이톈쿤(韦天坤), 일행 3명이 갑자기 집안에 뛰어 들었다. 금방 안정된 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은 가족에게 또 교란을 기도했다. 바이싼위안의 아내가 문을 열고 보니 그 주변에 몇 명의 신분이 분명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집으로 들어오지 않고 지나쳐 갔다. 금방 2시간도 되기 전 또 문을 두드렸다. 바이싼위안의 아내가 문을 열었을 때 장궈왕이었다. 마누라는 바로 “당신들 다시는 나를 괴롭히지 말라.”고 말하면서 문을 닫았다. 장궈왕이 한편 그녀의 말을 따라 하고는 머리를 돌려 가버렸다.
2008년 4월 22일 오후 5시, 바이싼위안이 집에 없을 때 장밍루이(张明瑞), 판쳰루이(潘千瑞), 등 7-8명이 집에 뛰어 들어 바이싼위안의 아내를 때려 땅에 넘어뜨려 놓고 수갑을 채우고 집안 한쪽에 밀어놓고는 불법적으로 집을 마구 수색하여 노트북과 텔레비전 수신기, 대법책 등 물품들을 가지고 갔는데 4시간 동안 집안을 전부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그 이튿날 아침 아직 날도 채 밝지 않았는데 악경들은 또 와서 재차 불법으로 방마다 물건을 마구 뒤집었다. 3일째 되는 날 아침, 또 난핑(南坪)은 과수원을 포위한 후 밭에서 집까지 가져다 놓은 들깨를 모두 짓밟아 놓았다. 그 후로 바이싼위안은 핍박으로 집을 떠나 떠돌아 다니게 되었다.
6월에, 사악한 경찰 난핑은 온 밤 집을 수색하였다. 당시 촌민들이 모두 바이싼위안을 납치하려는 것을 알게 되었다. 7월에 장밍루이와 판쳰루이 등 8명의 악도들이 또 닝샤(宁夏)에 있는 바이싼위안의 누나, 형들의 집에 마구 뛰어들어 그들에게 바이싼위안을 내놓으라고 핍박했다. 같은 달에 또 란저우 바이싼위안의 남동생 회사와 바이싼위안의 처남 회사에도 찾아 가서 사람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2009년 11월, 판쳰루이(潘千瑞)는 또 바이싼위안의 처남 회사에 가서 사람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그리고 자기의 교통경찰복(바이싼위안 처남 교통경찰)을 달라고 해서 가지고 갔다고 떠벌렸다.
불법으로 6년 판결을 당하고 재차 감옥에 감금
2010년 4월 하순, 밖에서 떠돌아 다니던 바이싼위안은 아내가 혼자서 고생하는 것이 가슴 아파서 집으로 갔는데 뜻밖에 5월 16일 7시경에 징위안(靖远)현 공안국 부소장 장밍루이, 국보대대 대장 파쳰루이 등 8명이 사복하고 두 대의 승용차로 바이싼 위안의 집을 포위하였다. 3명의 경찰은 담벽에 기어 올라 집안을 감시하고, 다른 경찰들은 대문을 부수고 집으로 들어갔다. 바이싼위안은 피할 방법이 없어 집 안의 양식 창고에 숨었다. 사악한 무리들은 바이인(白银) 공안국, 핑바오 파출소, 핑바오향 간부, 의사 등 30명 이었다. 10시 경 흉악한 경찰은 양식 창고에 독탄가스를 뿌려 바이싼위안을 혼미하게 한 후 그를 납치하여 경찰차에 실어 징위안 현 수감소에 감금했다.
바이싼위안 아내 왕건디(王根娣)
바이싼위안의 아내는 핍박으로 집 문 위에 올라갔다. 인간성이 없는 경찰은 “당신은 거기서 뛰어 내려요, 뛰어 내리면 바로 죄가 두려워 자살한 것으로 할 것이다.”고 떠벌렸다. 나중에 경찰은 문 위로 올라가 바이싼위안의 아내를 덮쳐 전화선으로 그 녀를 꽁꽁 묶은 후 들어서 집 마당 안에 들어다 놓았다. 이때 그 녀의 앞니가 부딪쳐 빠졌다. 5월 20일 징위안 현 공안국에서 두 명이 바이싼위안의 집으로 뛰어와서 그녀에게 자기들의 모든 ‘자료’ 서명하라고 요구하였는데 그녀에게 거절 당했다.
불법으로 6년 판결을 당하다
징위안 현 수감소에서는 바이싼위안을 연이어 두 차례나 ‘호랑이 걸상’에 앉혔다. 처음에는 2박3일 간 고문을 당했는데 주관 대장은 장훙중(张宏中)이였다. 바이싼위안은 박해를 반대하여 단식했다. 단식한 지 19일 되었을 때 바이싼위안의 입술 색은 검은 색이었으며 얼굴의 볼은 홈이 패였고 다리는 경련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징위안 현 병원에 호송되어 링거를 맞았다. 장밍루이는 바이싼위안의 처남과 친구들을 병원으로 데려와서 온 하루 동안 이들에게 바이싼위안에게 밥을 먹이게끔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5월 26일, 판쳰루이, 중롄룽(种连荣)이 전문 란저우 감옥으로 가서 불법으로 감금된 란저우 감옥 7감시 구역인 징위안현의 파룬궁 수련생 바이위쥔(白玉君)과 11감시구역에 감금된 징위안현의 파룬궁 수련생 천팡화(陈方华)에게 바이싼위안의 모든 ‘증거’를 찾게 하려는 모함을 시도했다.
6월 17일 저녁, 장밍루이는 바이싼위안의 처남을 데려 오고, 또 바이싼위안의 아들을 인촨(銀川)에서 데려왔다. 6월 18일, 징위안 현 법원에서는 불법으로 재판을 하려고 소위 변호사라고 자칭하는 사람을 파견했다. 법정에서 바이싼위안은 이 변호사에게 “당신은 나가시오, 나는 당신의 ‘변호’가 필요 없어요.”하고 말했다.
징위안 현 검찰원에서는 6월 22일에 불법으로 심사하고 바이싼위안을 소송했다. 소송 기한은 오직 10일 이었다. 6월 23일에 바이싼위안 본인이 출정(出庭)하지 않은 상황에서 불법으로 판결했다. 이번의 불법 판결에 참가한 인원은 심판장 예성왕(叶生旺), 대리심판원 쑤번루(苏本录), 리춘핑(李春萍), 서기 두즈쩌(杜智泽), 바이인(白银)의 공정한 변호사 사무소의 지정변호사 자오챠이샤(赵彩霞), 모든 증인은 징위안 현 핑바오향 인대주석 량시중(梁希忠), 웨이리궈(魏立果)였다.
6월 28일, 단식한 지 이미 35일이 지난 바이싼위안은 좌측 반신이 마비되고, 오른쪽 다리는 철 침대에 묶여져 있었고, 왼쪽 다리는 이미 근육이 위축되었으며, 얼굴에는 수염이 아주 길게 자랐다. 징위안현 인민 병원 원장은 법원과 유관 부문에 바이싼위안은 이미 사람이 잘못된 상태라고 분명히 통지하였다.
병상에서도 수갑 족쇄가 채워졌다
6월 28일, 바이인스 중급 법원 형사 재판장은 8명의 사람을 데리고 징위안 현 인민 병원에 가서 황급히 안건을 마무리 지으려고 기도했다. 바이싼위안은 재판장에게 “소송 기간이 아직 남았는데 왜 지금 마무리 하려고 서두르는가?”고 질문했다. 재판장은 “징위안 현 법원에서는 이미 당신에 대한 모든 자료를 우리에게 넘겨 주었다. 당신은 다만 입으로 소송하였지 소송장이 없지 않는가? 때문에 우리는 사법 절차에 따르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사실 소송장은 이미 올려 보냈는데 이 ‘재판장’은 입만 벌리면 거짓말이다
바이싼위안은 하는 수 없이 다리 하나가 철 침대에 묶여 있는 상태에서 한 손으로 ‘소송장’을 썼다. 진일보 조사하여 확인할 것을 요구하고, 이것은 진실한 사실이므로 즉각 무죄 석방을 요구했다. 바이싼위안은 소송서에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렇게 좋은 공법은 누구에게나 모두 유익한 것이고 해가 전혀 없는데 왜 지금 이렇게 나에게 죄를 만들어 죄수 취급을 하는가?” 하고 말했다. 바이싼위안은 소송에서 바로 이 안건에 대해 자신이 일부 이해한 것을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법원의 유관 인원들에게 선악과 좋고 나쁨을 잘 식별하여 변호하기를 희망한다고 하였다.
상소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이싼위안은 재차 자신의 관점을 거듭 설명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죄가 없고, 진선인(眞善忍)도 죄가 없으며, 수련함에 죄가 없다.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닦아 선한 마음으로 마땅히 사람이 갖추어야 할 도덕을 갖추게끔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더욱 좋은 사람으로 하여금 반본귀진(反本歸眞)의 길로 가게 하며, 헌법에 규정한 법에 따라 합법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반대로 어떠한 조직, 어떠한 회사. 어떠한 사람이나 우리에 대한 국민의 권리를 교란하고 파괴하고 탄압하는 이런 행위야 말고 진정으로 법을 위반하는 범죄 행위이다. 99년 ‘7.20’부터 지금까지 장쩌민을 우두머리로 한 사악한 폭력집단의 행위야말로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고 국가의 법률을 파괴한 죄수이다. 마땅히 이 법률의 책임을 철저히 추궁하여, 헌법과 법률의 존엄을 수호하고 국민의 합법적인 권익이 침해 받지 않게끔 보호해야 한다.
바이싼위안의 가족은 두 번째 심사 중에서 란저우에서 변호사를 선임하였다. 변호사는 현 병원에서 바이싼위안을 만났다. 간쑤(甘肃)성 ‘610’에서 이 일을 알고, 변호사가 란저우로 돌아간 그 이튿날 시의 ‘610’에서는 이 변호사를 반나절이나 협박하여 바이싼위안에 대한 무죄석방을 포기하게 하였다. 핍박에 의하여 변호사는 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7월 12일, 징위안 현 공안국의 4명의 경찰이 차로 직접 바이싼위안을 란저우 감옥 6감시구역으로 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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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발표: 2010년 8월 13일
문장분류: 박해 진상(톱기사)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8/13/22827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