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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날들을 회상

글/북경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5월 18일】

이 글을 삼가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존께 바치며 사존님의 즐거운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5월 13일 이 날은 우리 위대하신 사존께서 탄생하신 날로 온 천하가 축하하는 날이자 모든 우주 중생이 기다리는 날이다. 이 특별한 날에 내가 법을 얻은 초기 사부님을 따라 각지에 법을 들으러 다닌 행복한 경력을 써내어 사부님 은혜를 찬송함과 아울러 생신을 축하드린다.

1993년 11월 아주 평범했던 어느 날, 나는 한 친구의 집에서 《파룬궁》을 보았는데 당시 웬일인지 모르게 절박하게 보고 싶어 친구로부터 빼앗아 돌아와 당일 밤새 단숨에 다 읽고는 책을 머리맡에 두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몇 년간 잠을 잘 자지 못했던 잠을 깊이 푹 잔 것을 알았다(이전에 나는 불면증이 있었다). 나는 그 책을 들고 친구 집에 가서 물었다. “이 책에 무슨 에너지가 있니? 어디로 가면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을 찾을 수 있을까?” 그들은 내게 사부님께서 마침 북경에서 제14기 학습반을 연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나는 즉각 표를 구입했다. 그러나 몇 가지 원인으로 북경 제14기 학습반은 열리지 못했다.

1993년 12월, 북경 동방건강박람회에서 사부님께서 보고회를 여셨고 나도 가서 들었다. 당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저 좋다고 생각해 녹음기로 녹음한 다음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들려주었다. 보고회가 끝난 후 수련생들이 우르르 몰려나가 사부님께 서명을 요청했는데 사람들은 사부님 신변에서 이리저리 밀치면서 전혀 사부님을 고려하지 않았다.

나는 한편에서 이 모습을 보고 좀 불편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번거로워 하시지 않고 오히려 매 사람에게 서명해주셨다. 이는 내가 처음으로 사부님을 뵌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나는 오성이 너무 낮아 무슨 깊은 감수가 없었으며 머릿속에는 사람들이 사부님을 둘러싸고 서명을 요청하는 그 장면만 남았다.

그 며칠 동안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마음은 파룬궁에 이끌렸으며 늘 사부님을 찾고 싶었고 빨리 사부님 학습반에 참가하고 싶었다. 박람회 마지막 날 나는 다시 회의장을 찾아갔다. 지금도 똑똑히 기억나는데, 이날 북경에는 모래바람이 불어 온 하늘이 매우 지저분했고 길가는 사람들도 얼굴이 먼지투성이였다. 눈앞이 온통 뿌옇게 변했다.

파룬궁 전시대에 도착하니 사부님께서는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 서서 기다렸다. 갑자기 머리를 돌려보니 사부님께서 다른 수련생들과 함께 정문 밖에서 들어오고 계셨다. 사부님은 훤칠한 키에 짙은 남색 자켓을 입고 계셨는데 선명하고 깨끗했으며 사방에 빛이 나서 눈이 매우 부셨다. 사부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시자 나는 더 놀랍고 기이한 것을 보았다.

사부님은 훤칠하고 건장한 몸매에 얼굴은 어린이처럼 부드럽고 불그스름 하셨다. 주위의 더러운 환경 속에서 아주 특출하셨다. 나는 끊임없이 사부님을 바라보고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마음속으로 이상함을 느꼈다. ‘왜 사람들은 모두 시커멓고 더러운데 오직 사부님 한 분만 이렇게 깨끗하고 투명하며 사방으로 빛이 나실까?’ 나는 이번에 처음으로 사부님을 뵙고 심령의 진동이 매우 컸다. 나는 전시대에서 천진 학습반의 표를 샀다.

천진 1기 학습반 첫날의 일이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사부님과 단체 사진을 찍는다는 이야기가 있어 나는 약 두 시간 전에 회의장에 도착했다. 뜻밖에도 많은 수련생들이 나보다 먼저 와 있었고 사부님께서도 일찍 오셔서 사람들과 사진을 찍고 계셨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급히 사진을 찍으려 하니 나는 갑자기 반발심리가 나와 사진을 찍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현장을 떠나고 싶지도 않아 내내 사부님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아직 법을 듣지 않았고 사부님께서 누구인지 이것이 얼마나 진귀한 기회인지 몰랐다. 수련생들은 한 무리 한 무리씩 섰고 그 후 사부님께서 중간에 서신 후 사진을 찍었는데 사부님께서는 여기서 한 번, 저기서 한 번씩 불려 다니시며 사진을 찍으셨다. 나 역시 사부님을 따라 이리저리 쫓아다니면서 보았다.

한참을 바라보니 줄을 선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이 나더러 먼저 저쪽에 가서 돈을 내고 와서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가지 않았다. 가장 중간에 서 있던 수련생이 내가 돈을 내기 싫어서 그러는 줄 알고 자신의 자리를 나에게 양보하면서 말했다. “이리 와서 찍으세요. 돈은 이미 냈어요.”

이 때 사부님께서도 나를 보고 계셨지만 나는 여전히 고개를 흔들었다. 바로 이렇게 나는 천진반에서 사부님과 단체 사진을 찍을 기회를 놓쳤다.

강당에 들어가 강의를 듣는데 내 자리는 왼쪽 네 번째 줄 중간이었다. 처음 강의를 들을 때는 제대로 알아 듣지 못했고 매우 마비된 듯 멍했다. 사부님께서 “불성(佛性)이 나오면 시방세계(十方世界)를 진동한다. 누가 보든 모두 다 그를 도와주려 하며 무조건적으로 그를 돕니다.”(《전법륜》제1강)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을 때 내 눈에서는 단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 나는 길 잃은 생명의 고통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으며 사부님의 이 한마디 말씀은 내게 희망을 보여주었다. 그 느낌은 마치 암흑 속에서 유랑하던 고아가 갑자기 원래 자신의 부모님이 살아계시고 또한 부모님이 내내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았다. 이 순간부터 나는 사부님은 내가 생각했던 일반적인 보통 기공사가 아니라 세상에 내려와 사람을 제도하는 위대한 대각자임을 알았다. 아울러 사부님께서 친히 설법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며 영광인가!

천진 학습반에 참가할 때 나는 직장에 휴가를 내지 않고 몰래 갔다. 사흘째 되는 날 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북경으로 돌아왔다. 신기한 것은 평소 같으면 상사들이 날마다 몇 차례씩 나를 찾곤 했는데 이번에는 내가 사흘이나 나타나지 않았지만 직장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날 오후 나는 다시 천진으로 법을 들으러 갔으며 사부님의 학습반이 끝난 후에야 직장에 출근했다. 하지만 아무도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나는 이 일체는 사부님께서 내가 법을 들을 수 있도 안배하신 것임을 안다.

천진에서 돌아온 후 법을 얻은 기쁨과 사부님께서 직접 설법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는 행복감 때문에 나는 인생이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는 또 아주 똑똑하고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는데 사부님께서는 바로 내 머리 앞 오른쪽 위에서 시시각각 나를 보호하고 계시며 내가 위험에 닥쳤을 때 나를 보호해주셨다. 내가 심성관을 넘기지 못할 때면 사부님께서 나를 격려해주셨고 내가 연공장으로 가는 어두운 길을 가면서 두려워할 때면 사부님께서 나와 함께 하셨다. 사부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나는 우주 중에서 가장 운좋고 행복한 생명이 되었다.

이어서 나는 북경에서 열린 사부님의 보고회를 두 차례 들었다. 매번 사부님께서 강단에 나타나실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남편은 내가 사부님만 뵈면 감동하여 울고 사부님을 언급하만해도 역시 감동하여 우는 것을 보고는 사부님은 분명 대단한 분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중경(重慶) 학습반에는 나와 함께 참석했다.

중경 학습반에서 사부님께서는 강의시간을 이용해 수련생들과 단체사진을 찍으셨다. 나는 천진에서 기회를 놓친 후 나중에 법리를 알고나서 매우 후회했다. 이번에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분주하게 수련생들과 사진을 찍으시는 것을 보고 또 나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한쪽 시원한 곳에서 몇 명의 수련생과 한담을 나누며 더는 사진 찍는 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십여 분이 지나 막 강의가 시작될 찰라 사부님께서 “또 찍을 사람이 있나요?”라고 물으셨다. 최후의 한 장이이었다. 나는 머리를 돌려 사부님께서 멀지 않은 곳에 계신 것을 보고 얼른 뛰어가 사부님 옆에 섰고 몇 명의 동수들도 따라왔다. 우리는 마침내 사부님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사부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뜨거운 날씨에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휴식을 포기하시면서 우리의 소망을 들어주셨음을 알기에 마음속으로 흥분하고 또 감격했다.

중경에서 우리는 또 한 차례 노점에서 우연히 사부님을 만난 경험이 있다. 그 광경은 어느 수련생이 사이트에 쓴 제남의 작은 음식점에서 국수를 먹던 일과 비슷하다. 이 일은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써낸다.

그날 강의가 끝난 후 나와 남편은 길옆에 있는 작은 노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주인은 30대 여자였는데 당시 노점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막 먹고 있는데 갑자기 사부님의 음성이 들렸다. “국수 한 그릇에 얼마입니까?” 내가 머리를 들어보니 정말로 사부님이셨다.

나는 얼른 일어나서 소리쳤다. “리 선생님!” 사부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우리더러 앉으라고 손짓하셨다. 주인 아줌마는 “국수는 한 그릇에 일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사부님께서는 값을 깎지 않고 곧장 일원을 내셨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아 국수를 기다리셨다. 잠시 후 설군(雪軍)이 사부니을 따라 들어왔는데 그는 볶음밥을 주문했고 주인은 2원5십전이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너무 하네요. 이렇게 비싸다니.” 사부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그를 가리키셨다. 당시 나는 사부님께서 그에게 영향에 주의하라고 일깨워주신 것이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新)수련생이었기 때문이다.

국수가 나왔고 사부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그런데 주인이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어째서 소금을 안 주냐고요? 당신이 맛도 보지 않고 어떻게 소금을 치지 않았는지 아는가?” 사부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고 평소처럼 국수를 드셨다. 당시 나는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사부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는데 주인이 왜 갑자기 떠들썩했을까?’

내가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사부님께서는 벌써 국수를 다 드셨다. 고개를 돌려 우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으시며 떠나셨다. 주인은 사부님의 뒤에 대고 쉴 새 없이 지껄였는데 나는 참을 수 없어서 그녀에게 말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저 분이 누군지 아세요?” 주인은 내가 권고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돌려 사부님을 찾아보았으니 이미 보이시지 않았다. 여관으로 돌아온 후 우리가 사부님을 만난 경험을 동수들에게 말하자 동수들은 사부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어떻게 심성을 수련하는지 시범을 보여주신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 내가 주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했다. 나 역시 확실히 이렇다고 여겼는데 이 ‘우연한 일’을 곧 잊어버렸다.

십 수 년 후 내가 넘어졌을 때 극도의 자괴감이 나로 하여금 자신의 생명에 대해 완전히 신심을 잃게 했다. 내가 어떻게 해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이 일이 떠올랐다. 매 하나의 일이 모두 눈앞에 역력했는데 특히 사존의 미소는 거의 매 시각 내 눈앞에 있었다. 나는 왜 내가 이렇게 뚜렷하게 이런 것이 기억나는 지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사존의 설법을 들을 때 갑자기 알게 되었다. 사존께서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나를 격려해주셨던 것이다. 그 말씀은 내가 본질적으로 나쁜 것이 아니고 구도할 수 없는 생명이 아니며, 아직 희망이 있다고 알려주셨다. 사존의 고심(苦心)을 알게 된 그 순간 나는 물이 샘물처럼 솟았다. 알고 보니 십 수 년 전 내가 겪었던 경험은 십 수 년 후 오늘날 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경 학습반이 끝난 후 우리는 사부님을 따라 성도(成都)로 갔는데 운 좋게도 사부님을 따라 같은 기차를 타게 되었다. 객실에서 나는 사부님께서 크고 무거운 등짐을 지고 계신 것을 보았다. 그것은 성도 수련생들에게 줄 《파룬궁(수정본)》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기차를 기다리는 줄에 서 계셨다. 검표가 시작되어 들어갈 때 어느 남자 수련생이 의자를 펼쳐 앞쪽에 놓고는 사부님께 손짓하여 먼저 지나가시게 했다. 사부님께서 지나가시자 사부님의 주위의 수련생들도 따라서 지나갔다. 하지만 잠시 후 사부님께서는 이들 수련생을 데리고 다시 돌아와 맨 뒷줄로 가셨다. 알고 보니 사부님께서는 그 수련생에게 되돌아가 줄을 서라고 하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법리만 가르치신 것이 하니라 실천 중에서 몸소 모범을 보여 우리에게 어떻게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가르쳐주셨다.

1994년 1월의 천진반부터 12월 광주반까지 나는 모두 합해 8차례 학습반에 참가했다. 그때는 단지 법을 들으러 가기만 하면 내가 가고 싶은 곳의 기차표를 순조롭게 살 수 있었다. 보통좌석이든 침대칸이든 내가 원하는 대로 다 살 수 있었다. 가는 곳마다 순조로웠고 깨끗한 숙소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 숙소는 또 사부님께서 강의하시는 강당과도 가까웠다.

직장에서 휴가를 청하는 것도 내내 쉬워 아무런 장애도 없었다. 내 기억에 제남 학습반이 끝난 후 나는 휴가를 모두 써버려 달리 쉴 수 있는 구실이 없었다. 8월 하얼빈 학습반에 매우 가고 싶었으나 더는 주임에게 휴가를 청할 구실이 없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얼빈에 갈 방법이 없었다. 나는 괴로워하며 생각했다. ‘너무 유감스럽긴 하지만 이번에는 갈 수 없겠다.’ 다음 날 출근하자 뜻밖에도 상사가 내가 책임진 일과 함께 새로운 부문으로 전근가야 한다고 통지했다.

당시 나는 너무 기뻐서 펄쩍 뛸 뻔 했다. “사부님께서는 너무나 위대하시다! 그렇다면 나는 또 휴가를 신청할 수 있겠구나.” 새 주임을 찾아간 후 휴가를 신청했는데 역시 이상했다. 그는 내가 휴가를 신청한 이유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나더러 반드시 연차를 써야 한다고 했다(나는 원래 있던 부문에서 이미 연차를 다 썼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떠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부득이 일년 휴가를 신청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뒤이은 연길 학습반은 휴가를 청할 필요가 없었다. 나중에 광주반에서는 휴가를 청하기가 매우 쉬웠다. 광주반에서 돌아온 후 나는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당시에 가서 법을 듣는데 어떤 일도 마음만 먹으면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누가 알 수 있으랴! 우리 모든 일이 순조로웠던 배경에는 얼마나 많은 사부님의 노심초사와 감당이 있었을지.

1994년, 나는 1년의 사분의 일을 사부님의 학습반을 따라다니는데 썼다. 학습반을 따라다니던 기간은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아이처럼 행복했는데 이는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사존의 감당과 지불에 감사드리며 고심한 구도에 감사드립니다!

문장발표 : 2008년 5월 18일

문장분류 : 중국소식>온고명금
문장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08/5/18/17864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