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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어머니를 돌려 주세요

[명혜망2006년7월26일]

아저씨, 아주머니, 안녕 하세요.

제 이름은 마텐죠이며 금년 17살이고 쟈무스 제8중학(원 철로 3중)고중2학년 학생입니다. 제가 필을 들어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순간, 이미 제 얼굴 가득히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원래 아빠와 엄마의 사랑을 당연하게 받고 있어야 할 제가 지금 이토록 힘겨운 마난을 당하고 있으니, 저는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까? 만약 사람마다 모두 그 부모가 낳은 것으로, 사람마다 모두 자식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모두가 자신의 양심을 바르게 놓을 수 있다면 제가 이토록 비통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엄마에게 유일한 자식입니다. 엄마는 결혼을 늦게 하여 저를 낳았을 때 이미 37살이었습니다. 엄마는 모든 사랑과 희망을 모두 저에게 쏟았습니다. 엄마는 제가 철들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장 많이 교육시킨 것이 바로 어떻게 좋은 아이가 되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유치원에 다닐 때 일인데, 저는 날마다 엄마에게 남에게 좋은 일을 행한 보고를 해야 했습니다. 한 번은 한 꼬마 친구가 저를 때려서 엄마에게 일러 바쳤습니다. 그런데 저를 두둔해서 아줌마에게 찾아갈 줄 알았던 엄마가 도리어 저에게 남한테 업신여김을 당해도 따지지 않아야 한다는 교육을 하였습니다. 엄마는 늘 착하고 진실되게 남을 대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저의 언행을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어린 마음속은 진실되고, 선량하며, 견인한 씨앗을 심어 주셨고, 오늘날 제가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데 도덕적 기초를 단단하게 다져 주었습니다.

저에게는 오직 순박한 생각 하나만 있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부모님께서 키워준 은혜에 보답함으로써 그들을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게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저의 학업 성적은 줄곧 앞자리에 있었고, 계속해서 몇 년동안 학비를 면제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 장학금까지 받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엄마의 교육과 갈라놓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매 번마다 저에게 이렇게 훌륭한 엄마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시급3호학생’ 영예증서를 받았을 때 저는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도리어 제가 이렇듯 좋은 아이, 좋은 학생으로 되지 않아야 하며, 제가 좋은 학생이 되어 장래에 무엇을 하겠는가 등등 의문점들이 생겼고 심지어 학교를 그만둘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일찌기 저에겐 행복이 있었고 따뜻한 가정이 있었으며 아빠와 엄마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불행은 우리집을 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엄마가 자궁암, 중증 빈혈에 걸려 늘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매 월 달거리 때마다 출혈을 많이 하게 되어 죽기보다 못한 삶에서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저에게 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엄마가 먼곳으로 가서 돌아오지 못하면 큰 이모한테 가거라” 큰 이모 집에는 오빠와 언니가 있기 때문에 저는 매 번 엄마의 그 말에 기뻐하면서 천진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엄마 일찍 돌아와, 큰 이모는 저에게 ‘금붕어’ 머리를 빗어줄 줄 모르거든, 그러니까 엄마 생각이 날거야”

후에서야 저는 점차 엄마가 그렇게 말했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얽혀있는 모녀의 정 때문에 엄마는 생명을 끊으려던 생각을 실행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당시 유년이던 저는 엄마의 고통스런 기색을 보기만 하면 언제나 소리도 내지 못한채 가만가만 행동을 했습니다.

어느 해인지 엄마가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엄마의 인생은 개변되었습니다. 아주 빨리 엄마의 신체는 건강을 회복하였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웃음이 엄마의 얼굴에 다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저도 엄마의 고통과 압제된 환경에서 벗어 날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제가 조그마한 물고기처럼 행복의 물속에서 노닐고 있을 때 저의 머리위에서 청천벽력이 터졌습니다. 2003년 5월 17일 아빠가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오던 중 뇌출혈로 사망했습니다. 엄마는 비통하다 못해 정신이 거의 무너질 듯하였고, 갑자기 들이닥친 흉보로 인해 저는 혈육과 헤어진 극심한 아픔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으며, 하루밤 새에 제가 많이 자랐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아빠 말을 꺼내면 저는 몹시 고통스러웠는데, 저는 이미 아빠없는 아이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매 번 이럴 때마다 제자신에게 위안을 했습니다. 마탠죠, 걱정하지 말어, 나에겐 훌륭한 어머니가 계시잖아. 저는 공부하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 어머니를 위안해 주었습니다. 저는 다시는 저에게 엄마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빠가 돌아 가신지 일년 뒤 외지에 살고 있던 큰 이모가 파룬궁 수련을 이유로 3년 불법 판결을 받고 쟈무스 노개소에 갇혔습니다. 엄마는 여러 번 이모를 보러 갔는데, 매 번 갈 때마다 쟈무스 노교소에서 불법적으로 제작한, 대법과 사부님을 욕한 ‘문답조사’를 읽지 않아 이모를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경찰의 위협을 받아 정신적으로 여러 번 자극을 받았습니다.

2005년 겨울 박해로 인해 뼈만 남은채 자립적으로 생활할 수 없게 된 이모(보석치료)를 노교소에서 우리집으로 데려 왔습니다. 이모는 병원에서 뇌혈전으로 진단 받았으며, 장기에도 모두 엄중한 병변이 있었습니다. 가장 엄중한 것은 암증세였습니다. 하지만 이모는 우리집에 있는 4달 동안 법공부, 연공, 거기에다 엄마의 살뜰한 간호로 건강이 아주 크게 호전되었습니다. 이모네 가족들이 이모를 데려간 다음에도 엄마는 이모가 다시 잡힐까봐 줄곧 긴장한 상태였습니다.

최근들어 엄마는 ‘중공 비밀 수용소 파룬궁 생체에서 장기를 적출 ‘이란 기사를 보더니 이같이 잔혹하고 참혹한 공포의 압력으로 인하여 엄마의 정신은 철저히 무너졌습니다. 엄마는 집에서 늘상 저에게 알려주기를 “오늘 경찰이 모모모를 잡아다가 장기를 적출한다” 거나, 혹은 “우리집이 경찰에게 감시 당하고 있다. 봐라 어디에나 감시기가 있어!” 엄마는 낮이면 하루종일 거리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 시기에 저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한 편으론 엄마 걱정을 하였습니다. 언제나 엄마가 보이지 않는 날이 있을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걱정했던 일이 끝내 발생하고야 말았는데, 이는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나빴습니다.

2006년 5월 30일 오전 엄마는 쟈무스 바이룽 시장부근에서 과일 파는 할머니를 보고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닌 상황에서 100위안으로 할머니의 가방을 사겠다고 했고, 할머니는 싫다고 하여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이 순라를 돌고 있던 안칭 파출소 구역 경찰 왕화청의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1시 전후로 안칭 파출소에 끌려 갔고 정상이 아닌 정신 상태인데도 경찰은 우리집을 수색하여 몇 권의 대법책과 녹음테이프를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또 친척이 저에게 학습용으로 사준 컴퓨터를 열어 조사했으며, 아무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는데도 경찰서에 들고가 연구해 보겠다면서 억지로 가져가 버렸습니다.

그날 밤에 엄마는 쟈무스시 구치소로 보내졌습니다. 소식에 의하면 구치소에서도 엄마를 수감하기 거부했다는데 파출소에서 사람을 찾아서 억지로 넣은 것이라고 합니다. 다음날 이모가 병든 몸으로 외지에서 와서는 저를 데리고 엄마를 보러 갔습니다. 엄마는 이미 가족도 알아보지 못한채 얼굴이 창백했으며 물과 음식을 먹지 않아 구치소에서는 사건처리 부문에서 증명을 내어 사람을 내보낼 수 있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런데도 파출소의 경찰은 이모더러 보증서에 서명을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보증서에는 “아무 때나 부르면 와야 하고, 당지를 떠나지 못한다”는 글이 쓰여져 있었는데 이렇게 체포한 것이 불법이므로 서명을 거부했더니 파출소는 이것을 구실로 석방을 거부했습니다.

6일 후 이모가 구치소에 갔더니 간수가 알려주기를, 이미 통지가 내려 왔는데 멍씨의 정신에 문제가 있으므로 ‘강박조치를 바꿔서’ 석방시킬 것을 요구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파출소에 가서 석방을 요구하니 파출소 소장 롼사오레이는 구치소의 통지서를 들고는 공안국 보안대대 천완유를 전화를 걸어서 찾아서는 저와 이모가 보고있는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구치소)이 병이 위중하다고 받지 않겠다고 하더니 정말로 안 받는거야……등등

저와 이모가 공안국에 가서 엄마의 석방을 요구했을 때 천완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을 갖고 와서 사람을 데려가라, 그녀 같은 경우 일만 위안을 내야 하는데 두 모녀가 매우 어렵게 살므로 5천위안만 내라” 그러자 이모가 “집에는 고중 다니는 애밖에 없어요, 집도 세들어 사는데 돈이 어디에 있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천은 적어도 3천위안은 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모가 ” 그녀의 정신이 이상해 수감할 수 없어서 사람을 풀어 주는데 왜 돈을 받아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천은 “말로만 정신이 이상하다고 해선 안돼, 진단서 증명이 있어야 돼” 라고 했습니다. 이에 우리가 재삼 석방하길 요구하자 천은 전화로 롼사오레이에게 가족이 정신병원에 가서 증명을 떼오게 통지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이모가 정신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났더니 자신들은 개인을 상대하지 않는다면서 직업적 도덕으로 하여 롼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를 받은 경찰은 장궈프였는데 의사가 그에게 검사에 수요되는 자료는, 환자 가족의 증언, 이웃의 증언, 구치소 간수의 증언 등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장은 횡포하게 거절하면서 “이건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야, 몰라”라고 하여, 다시 천완유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천도 회피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이모가 다시 파출소에 가서 석방을 요구하고 있을 때, 안칭 파출소에서는 뜻밖에도 엄마의 형사 구류증을 내 놓으면서 이미 자료를 시 공안국에 넘겨 처리했다고 밀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불법적으로 노교 일년 반을 판결 받아 시꺼무 노교소에 가서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로 인하여 정상적으로 공부할 수 없게 되었으며 보살펴 줄 사람도 없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 선생님이 저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격려해 주셨습니다. “내년에 대학시험을 치는데 꼭 훌륭한 성적을 거두어야 해” 선생님의 관심은 엄마가 수감된 뒤 이모와 같이 각급 기관에 다니면서 엄마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접촉했던,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을 얻을 수 없었던 일부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도록 저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엄마는 중등 전문학교를 졸업한 지식분자라 할 수 있습니다. 엄마는 지금까지 남을 해쳐 자기 이득을 챙긴 일이 없습니다. 만약 엄마가 놀라서 정신이상에 걸리지만 않았어도 엄마가 과일파는 할머니의 가방을 사겠다고 다툴 수 있었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사실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죄명을 만들어 불법 수감하는 것입니까? 이런 ‘경찰 아저씨’들은 그래 무엇이 ‘집법 범법’인지도 모르고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진’ 단 말입니까? 무엇 때문에 돈을 주면 사람을 놓아주고 돈이 없으면 노교를 당해야 합니까? 저는 법률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그런 규정이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야채 파는 장사꾼처럼 석방하는 값을 흥정합니까?

나라의 공무원, 집법자로서 입만 벌리면 곧 이렇게 말합니다. “파룬궁이 좋지만 나도 방법이 없다, 공산당이 하라고 하니 나는 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공산당은 인민을 위해 행복을 도모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도록 하는 것입니까 ? 다시 말해서 공산당이 키워낸 간부들은 모두 머리도 없이 기계처럼 좋고 나쁨도 가려내지 못하고, 착오에 대해 그렇게도 이지적이 안 되는 것입니까?

공부를 열심히 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제가 만약 장래에 경찰이 된다면 저도 이렇게까지 무고한 백성을 압제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제가 열심히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만약 제가 배운 지식이 우리 나라를 건설하는데 쓸 수 없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선량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수 없다면, 외롭고 도움을 받지 못하는 그런 좋은 사람들을 위해 정의를 주장할 수 없다면, 도리어 폭정의 지휘아래 민심을 위배하고, 충신을 해치고, 국민의 재물을 빼앗아 자기 주머니를 채운다면, 저는 지금이라도 학업을 그만두는 이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있고, 양심이 있는 평범한 민중이 되려 합니다.

저는 엄마의 석방을 요구합니다 ! 저는 제 엄마를 집으로 모시고 가렵니다 ! ! !

아저씨, 아주머니, 양지와 정의가 있는 청렴한 관리가 꼭 있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당신께서 정의의 손길을 보내어 훌륭하신 저의 어머니를 구해 주십시요. 우리 엄마처럼 그렇게 무고한 사람들이 하루 빨리 친인들 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루빨리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요. 저처럼 이렇게 고독한 여학생에게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며, 엄마와 서로 의지하여 살아갈 집이 없어서는 더더구나 안 됩니다 !

상소를 다니면서 저는 선량한 각급 지도자들을 직접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압력으로 인해 어쩔 수 없어 미안해 하면서 “우린 최대 한도로 이것 밖에 더 할 수 없으니 이해하길 바랍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권력 제한으로 근본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그러나 우린 너를 도와 줄 수는 있다.” 고 말하였으며, 특히 정의가 있는 그런 변호사들은 “위에서 파룬궁 변호를 못하게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당신들에게 법률적 조언을 해 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여러 아저씨, 아주머니에게 감사 드립니다. 비록 엄마가 잠시 제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지만 그러나 당신의 선념, 정의, 양지, 저에 대한 이해가 바로 저를 도와주는 것이며, 이미 엄마를 되찾으려는 저에게 신심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한 마음 한 뜻이 되면 견고한 성이 되어 허물어지지 않듯이, 저는 >속의 선샹처럼 제 엄마를 구해낼 것입니다.

저는 늘 밤하늘을 우러러 엄마에게 알려주고는 합니다. 저의 훌륭한 어머니, 꼭 견뎌내셔야 해요, 당신의 딸은 꼭 정의를 찾을 것입니다. 엄마가 하루라도 돌아오지 못하면 이 딸은 상소의 걸음발을 하루도 멈추지 않을 거예요. 정의가 있는 사람들은 당신을 위해 꼭 정의를 펼칠겁니다.

엄마를 주세요 ! 저는 엄마를 집으로 모시고 갈 것입니다! ! !

여기서 마칩니다.

멍샌잉의 딸, 마탠죠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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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탠죠의 이모가 상관들에게 보낸 상소신

당신들이 마탠죠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이 하소연을 보고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모인 나는 이 편지를 읽고 난 뒤 참으로 비통하기 그지없습니다. 엄마가 수감된지 한달 남짓한 동안 겨우 열 몇살 되는 이 아이에게 가해진 정신적 압력이, 내면세계에 이토록 거대한 변화를 생기게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이 아이가 성숙된 상징인지 아니면 위험한 징조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이가 당신들을 부모로 여기고 당신들에게 마음속의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엄마가 갇힌 뒤 어느 날 마텐죠는 손에 ‘시급 3호 학생’ 영예증서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문에 들어서자 나에게 ” 엄마가 보고 싶어요” 하고 말하는 사이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어요. 나는 그때의 텐죠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이렇게 좋은 성적 가운데는 그애 엄마의 심혈이 들어 있었고 탠죠의 노력도 들어 있었어요. 나는 아픔을 참으면서 그애를 위안해 주었어요. “날을 택해 우리 엄마의 석방을 요구하러 가자. 엄마는 곧 돌아올 수 있을 거다.”

이어진 것은 점차적으로 상소를 올리는 길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아이의 마음은 크나큰 상처를 입었어요. 후에 텐죠는 엄마가 불법 노교 당했다는 말을 듣고는 심정이 더욱 무거워 졌어요. 나는 그애를 위안해 주었지요. “나와 함께 엄마를 만나러 가자, 이 기쁜 소식을 엄마한테 알려주자” 아이를 데리고 엄마를 보러 갔으나 면회를 거부당했어요. 이제 한달 반이 지나도록 탠죠는 엄마를 보지 못하고 있어요.

탠죠는 건강하고 철이 든 아이입니다. 그 아이는 지금까지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없어요. 그러나 밤이면 나는 늘 그애의 가벼운 흐느낌 소리에 놀라 깨어나고는 합니다. 그 애는 줄곧 엄마와 한 침대에서 같이 잤기 때문에 지금은 함께 자던 엄마가 없을뿐더러 더구나 엄마 건강 때문에 더욱 더 걱정을 하게 되었어요. 엄마가 일단 정신 분열증에 걸리기만 하면 탠죠는 아버지 사랑을 잃은데다 엄마 사랑마저 잃은 고아가 될 것입니다.

탠죠는 몇 번이나 학교를 그만두고 나와 함께 엄마를 구원하겠다고 말했어요. “전 이미 아버지 사랑을 잃었어요, 더는 유일한 엄마 사랑을 잃을 수 없어요. 저와 서로 믿고 살던 엄마를 잃을 수 없어요.” 나는 그애를 타일렀어요. “공부할 나이엔 공부를 잘해야 한다” 그애가 하는 말이, “큰 이모, 이 며칠동안 각급 조직을 찾아다니며 엄마의 석방을 요구한 일을 통하여 늘 생각해 봤어요, 제가 공부를 잘해선 도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 이건 제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는 일이예요, 정부 관리들은 모두 공산당이 키워낸 것이 아닌가요? 그들은 국민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법을 집행하면서 불법을 범하고 있어요.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고 있어요. 제가 장차 자라게 되면 그들과 같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저는 학교를 그만 두겠어요.” 이것이 바로 그애가 당신들에게 편지를 쓰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나는 정말로 더 이상 감히 아래로는 생각하기 싫어요.

여기에서 나는 여러 지도자들을 향해 큰 소리로 부탁하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양지’ 와 ‘정의’로써 인성을 말살하고 있는 파룬궁 탄압을 제지해 주십시오! 이는 절대로 하나의 탠죠, 한 아이만의 문제만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받고 있는 박해이며, 더 멀리 내다본다면 한 국가와 민족의 운명과 관계되는 일입니다. !

누가 나쁜일을 하면 모두 그의 나쁜 관념과 착오적인 결정으로 인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모두 자신에게 하는 것으로 선악에는 모두 보답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천리입니다. 절대로 쟈무스 공안국 국보대대 대장 천완유가 말한 것처럼 “공산당이 하라해서 한다”고 하여 일체 죄에 대한 책임을 밀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대혁명 시기 국민들의 변태적인 표현을 회상해 보면 지금 우리 국민들은 그것을 정신병이라고 말합니다. 직접 겪은 우리들마저 생각해 보면 감개가 적지 않습니다. 문화혁명이 결속된 후 때리고, 부수고, 빼앗던 조반패들 그 어느 누가 갇히고, 살해되고, 벼슬을 잃고 직장을 잃는 액운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까?

좋은 사람에 대한 이번 박해가 결속된 후 살인을 한 어느 흉수가 “공산당이 하라해서 했다”고 하여 살인죄를 벗어날 줄 아십니까? 나는 박해받은 대법제자의 모든 친인들은 관건적 시각에 누가 용감하게 정의를 주장하여 자신의 친인을 보호해 주었는가에 대해 잊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옛적부터 이르기를 “한 방울의 은혜를 샘물로 보답한다, 하늘엔 눈이 있고 신의 눈은 번개와도 같으니라”. 역사가 이 한페이지를 넘길 때 누가 감히 나는 정의를 부추켜 세운 정의지사라고, 정과 사의 앞에서 진실과 선량을 선택했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는지 봅시다. 미래는 이 일체를 증명해 줄 것입니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비극을 중복하지 않기 위해, 파룬궁 박해의 극이 빨리 막을 내리도록 하기 위해, 아직 양심이 있는 더욱 많은 세인들을 빨리 각성 시키기 위하여, 탠죠와 같은 더욱 많은 아이들에게 원만한 해답을 주기 위하여, 더구나 친인들을 위하여 정의를 찾기 위하여, 마탠죠에게 따뜻한 집에서 지내도록 하기 위하여 나는 여전히 이전과 마찬가지로 걸어갈 것입니다. 왜냐면 “한 사람이 일단 진리와 생명존재의 진정한 의의를 알게 되면 그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 조차 달가워”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각급 상관요원들은 마탠죠의 편지를 참답게 읽어보고, 당신들이 정의의 목소리를 보내어 선량한 지원의 손길을 뻗어 줄 것을 바랍니다. 마탠죠가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여기서부터 시작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천하의 좋은 사람들이 좋은 보답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마탠죠의 이모가

문장발표 : 2006년 7월 26일

문장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6/7/26/134038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