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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께서 천쩌우에서 법을 전하시던 나날을 회억하여

[명혜망 2006년 7월 2일] 1994년 7월 15일, 위대하신 사부님께서 천쩌우에 오셨다. 사부님께서는 지난에서 창사로 가셨다가 오후에 천쩌우에 도착하신 것이었다. 사부님을 몹시 기다리고 있던 900여 명의 수련생들이 이미 모두 모여 있었다. 동풍 광장 체육관 입구와 여자 배구 훈련 기지 상공에 걸린 ‘리훙쯔 선생님께서 천쩌우에 오시어 공을 전하고 설법하심을 열렬히 환영합니다’라고 쓰여진 커다란 플래카드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사부님께서는 시간이 촉박하여 나흘 동안 전체 수업과정을 다 강의하실 예정이었는데, 베이징 대법제자에게 긴급 전보를 쳐서 대법책을 보내게 하셨다.

저녁 8시에 사부님께서는 미소를 띄우신 채 열렬한 박수 속에 장엄하게 강단에 오르셨다. 참으로 “사부님 찾아 몇 해더냐, 하루 아침에 만나 보았네”>였다. 나는 사부님께서 강의하실 때 “사부님의 목소리가 왜 다른 학습반에서처럼 우렁차지 못하실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생각을 하자마자 사부님께서는 즉각 물어 보시는 것이었다. “똑똑히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시면서 마이크를 몇 번 흔들었더니 목소리가 우렁차고도 똑똑하게 들려왔다. 사람들은 눈도 까딱하지 않은채 사부님만 바라 보았다.

사부님께서 병치료 문제를 말씀하실 때, 파룬궁은 병치료를 하지 않지만 정체적으로 수련생의 신체를 조절해 준다고 알려 주셨다. 많은 병들은 뿌리를 들추어내야만 없애 버릴 수 있다. 그날부터 나는 4~5차례나 혈변을 보았고, 길을 걸으면서도 토했는데 토한 것은 동글동글한 알맹이들이었다. 나는 온 몸이 병 투성이었는데 사부님께서 청리해 주셨다.

어느 하루는 귓전에 사부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너무 비관하지 마세요……” 사부님의 위안이셨다. 나는 93년도에 이혼을 했고 늙어서 가정이 파괴되고 온 몸은 병 뿐인데다 빚까지 가득 짊어지고 있었다…… 만일 진작에 대법의 지도가 내게 있었더라면 일마다 안으로 찾아 모순이 있어도 참을 수 있었을 것이며,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너그럽게 대할 수 있어서 오늘과 같은 이 지경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7월의 천쩌우는 너무도 무더워 부채질에 습관이 된 사람들이라 설법을 듣는데 영향을 주었다. 사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 부채를 내려 놓아 보십시오. 부채질은 할수록 더욱 덥습니다.” 그래서 부채를 내려 놓았더니 과연 서늘한 바람이 서서히 불어오면서 더운 감이없어졌다.

그 당시 사람들의 심성은 각양각색이어서 책을 가지고 가서 서명을 요구하는 사람, 차잎, 과자를 사다가 바닥에 펴 놓고 정보를 받아들이는 사람 등이 있었는데 지금 와 생각하니 우습기 그지없다.

7월 18일 사부님은 사업 일꾼들을 모아놓고 좌담회를 가지셨는데, 사부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평화롭고 친절하셨다. 한 수련생이 새 사진기로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사부님은 “찍지 마십시오, 찍히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도 그는 듣지 않고 그냥 찍었다. 과연 아무 것도 찍히지 않았는데 그는 사진기가 고장난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수련생들의 요구에 따라 사부님은 시간을 다그쳐 조를 나누어 수련생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부님 곁에 서고 싶어 했으나 나는 병업이 너무 크다고 느껴져 감히 사부님 곁에 다가 서지 못하였다.

사부님께서 쑤샌링을 방문하려 하셨을 때 함께 가게 된 사람들은 천쩌우와 광쩌우에서 온 수련생들이었다. 사부님은 쑤샌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고, 몇 백년 전의 천쩌우 상황도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천쩌우의 공간 마당도 청리하셨고, 산꼭대기의 한 공터에서 가부좌도 하셨다. 99년도 이전에 천쩌우 대법제자들은 해마다 그 곳에 찾아가서 연공을 하였는데 80여 세 되는 할머니도 뒤쳐지려고 하지 않았다. 천목이 열린 수련생이 보니 연공하는 그 곳에는 신, 불, 도, 그리고 용이며, 봉황도 있었다. 은회색 빛의 용의 발이 움찔움찔거리는 것이 보였고 용의 머리에는 신동이 앉아 있었는데 정말 이뻤다고 했다. 한 승려는 그 장면을 본 후 즉각 파룬궁을 배우려고 하였으며, 파룬궁은 그가 몇 년 동안이나 얻으려 해도 얻지 못했던 진경이라고 했다 !

18일 저녁 사업 일꾼들의 염원을 들어주시기 위해 사부님께서는 수련생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셨다. 후에 취사원이 칼국수를 또 가져오자 사부님께선 “폐를 끼칩니다 ! 감사합니다 ! ”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한 수련생이 사부님을 도와 광쩌우에 가는 기차표를 사오자 사부님께선 두 손으로 받으시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참으로 잘 되었습니다. 하룻밤만 타면 아침에 곧 도착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저녁 식사 후 사부님께서는 마지막 강의를 하신 뒤 정공을 복습하도록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친히 수련생들의 동작을 조절해 주셨고 또 대수인도 하셨다. 이 모든 것을 원만히 마무리 지은 후 즉시 광저우로 가셨는데 우리는 빈손으로 역까지 사부님을 배웅나갔다. 사부님께서는 먼저 노수련생들에게 악수를 하시며 작별하기 전 수박을 사다가 우리에게 주셨다. 그 수박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였는데 자르고 보니 많지도 적지도 않게 한 사람에게 한 조각씩 딱 알맞았다.

사부님께서 기차에 오르신 뒤 자리에 앉으시지 않고 차량이 연결된 곳에 서서 우리와 작별하셨다. 기차는 떠나갔지만 사부님께서는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계셨다.

학습반이 끝난 후 천쩌우에는 파룬궁 붐이 일어 수련인 수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99년 초반까지 천쩌우 시내만 해도 연공장이 42곳이 되었는데 가장 큰 곳에는 매일 1, 2백 명에서 많을 때에는 3백여 명이 함께 연공을 하였다. 전체 천쩌우 지역에는 3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연공을 하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좋은 사람이 되려 했고, 저마다 신체도 건강했으며, 사회의 인심이 보편적으로 선을 향하면서 도덕이 제고되었다. 그야말로 상화한 정경이었다!

문장발표 : 2006년 7월 2일

문장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6/7/2/131973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