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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의 설법을 들으며 행복했던 날

[명혜망 2006년 5월 15일] 나는 사부님께서 초기에 설법하실 때와 관련된 동수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매번 감동하여 많은 눈물을 흘리곤 한다. 그러면서 사부님께서 설법 하시던 그때를 되살려 사부님과 함께 했던 행복했던 날들을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정진하지 못했던 나의 수련을 생각하면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죄송함을 극복하지 못해 지금까지 필을 들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 사부님께서 대법을 홍전(洪传)하신지 14주년을 맞이하여 용기를 내어 여러분들과 그 소중했던 기억들을 나누고자 한다.

1993년 먼저 대법을 얻었던 가족의 소개로 나는 연공장에 갔다. 5조 공법은 간단하면서 배우기가 쉬워 금방 동작을 익혔다. 연공장의 동수들도 매우 친절했고 가깝게 느껴져 마음이 아주 편했다.

드디어 사부님께서 설법하시러 오시는 날이 다가왔다. 7월 25일, 사부님께서는 공안대학의 큰 강당에서 제11기 학습반을 꾸렸다. 내 자리는 위층이었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 나의 눈길은 무대 위에만 가 있었고, 조급하게 기다리는 마음 뿐이었다. 강의가 시작되기전 사부님께서 정확한 시간에 강당으로 걸어 나오셨다. 몸체가 아주 크신 사부님의 모습이 내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 10일간의 강의 중 사부님께서는 박대정심한 법리를 심도 있으면서 알아듣기 쉽게 말씀하셨고, 유머러스한 언어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치 맑은 샘물 한 가닥이 내 마음에 흘러 들어와 혼탁한 마음을 씻어주고, 촉촉하게 만들어 놓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하나의 밝은 등불로 내가 전진해야할 방향을 비춰주는 듯 했다. 그 모든 것이 나를 큰 감동에 빠지게 했다. 그때 나는 바로 사부님을 큰 부처님으로 인정했으며,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심은 종래로 있어 본적이 없는 그리고 이후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공법을 가르쳐주실 때 사부님께서는 강단에 계시면서 가끔씩 내려와 수련생들의 동작을 시정해주시기도 하셨다. 나는 내자리에서 동작을 배우고 있었지만 눈은 사부님을 따라 움직였다. 위층에서 아래로 내려가기까지 사부님만 주목해서 뵈었다. 한 번은 위층에서 수련자의 동작을 시정해 주셨는데 비록 나와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사부님께서는 머리를 돌리시어 나를 한번 쳐다 보시곤 또 다시 동작을 가르쳐 주셨다. 그때 당시 정말 신기하기만 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 매 사람의 생각을 알고 계셨다.

사부님의 설법 기간동안 나는 ‘중국파룬궁(法輪功)’을 구입했다. 그때 가장 큰 소원은 사부님께서 싸인해 주시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부님의 설법 중에는 수련자에게 싸인해 주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었는데 그것은 수련생에게 집착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나는 집착이 얼마나 강했던지 오직 사부님의 싸인이 소중하다는 그 생각 뿐이었다. 그래서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고 싸인 받을 생각만 했다. 강의가 끝났을 때 나는 강단과 연결되는 문에서 사부님을 기다렸다. 그날 사부님께서는 일이 좀 있어 약간 늦게 나오셨는데 나는 격앙된 마음으로 계속 서서 기다렸다. 마침내 사부님께서 나오셨다. 나는 격동되다 못해 벅찬 마음이 목까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사부님께서는 천천히 걸어 나오셨다. 거리는 좀 떨어졌지만 어두움 속에서 나는 사부님께서 나를 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 (무성한 숲은 양쪽 가로등의 빛을 막았다.) 사부님께서는 무슨 일인줄 아시고는 아무 말씀없이 어두움 속에서 필기구를 꺼내 나에게 싸인 해주셨다. 그런데 나는 “감사합니다”라는 말밖에는 아무 말도 못했다. 입만 벌리면 격동된 정서를 겉잡을 수 없을까봐 그랬던 것이었다. 그리고 사부님께서 딸과 함께 차에 오르시는 것을 묵묵이 지켜봤다. 사부님이 탄 차가 떠나는걸 보면서 나는 큰소리로 울었다. 사부님께서는 나에게 있는 불성을 불러 일으켜 주셨고, 생명이 귀속해야 할 곳을 찾게 해주셨다. 나는 전혀 유감없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사부님의 싸인을 받아 들고 나는 스스로에게 “이것은 진리이다. 이후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의심치 않고, 오늘 이 소중한 시간을 꼭 되새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훗날 비바람 속에서, 큰 고비 때마다 나는 시종일관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 적이 없다. 이렇듯 변치 않은 마음은 내가 사부님을 만난 그 순간부터였다.

내가 참가했던 학습반이 끝난 뒤 이어서 12기 학습반을 열었다. 하지만 그 당시 출근한지 얼마 안 되었고, 또 강의 장소와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는데다, 사전에 휴가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아쉽게도 12기 학습반은 참가하지 못했다. 그런 기연은 얻기 힘든 것인데 다시는 놓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급한 마음으로 13기 학습반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 다음 강의장소는 나의 직장과 더 멀리 떨어져 있는 펑타이구 27기계자동차 차량공장의 강당 이었다. 휴가를 얻은 나는 매일 가장 일찍 강당에 도착했다. 그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천목이 열려 사부님께서 내보내신 무지개 같은 빛을 보았다.

매번 학습반이 끝날 무렵 사부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심득체험을 쓰라고 하셨는데, 꼭 본인이 사부님께 가져다 줄 것을 요구하셨다. 내가 쓴 심득 글을 받아보신 사부님께서는 연이어 3번이나 “좋아요”하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내가 사부님께 쓴 유일한 한편의 심득 체험이었다. 그 후 학습반에서는 다시 쓰지 않았다. 그때 학습 반에 참가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것이 사부님께서 북경에서 하신 마지막 학습반이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세월이 빠르게 흘러 금방 연말이 다가왔다. 사부님께서는 제자를 데리고 국제 전람센타에서 ”전국건강박람회”에 참가하셨다. 그곳에서 사부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문을 해주셨고, 나도 매일 짬만 나면 전시대에 뭐 도울게 없나하는 마음으로 가보았다. 그러면서 가까이에서 사부님을 뵐 기회도 얻게 되어 좋았다. 아래는 내가 직접 겪은 일들이다.

92년에 사부님과 제자들은 이미 박람회에서 놀라운 기적을 선보였기에, 사부님의 대법이 1년 사이에 더욱 심도있고 넓게 전국각지에 전파되어, 조직위원회에서는 파룬궁의 출현으로 다른 기공사들의 존재가 희석 될까봐 특별히 우리를 왼쪽끝의 1호 자리에 배치했다. 하지만 박람회 문이 열리자 마자 전시대는 삽시간에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몰려들었다. 진행요원들도 바빠서 눈코 뜰새 없었고, 사람들에게 병을 치료해 주던 제자들도 물 한모금 마실 겨를이 없었다. 그들은 입술이 말라 껍질이 벗겨졌으며 점심도 돌아가면서 먹어야 했다.

사부님께서도 매일 오셨지만 누구에게나 손을 대어 병치료를 하시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직접 사부님의 신기한 공능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암에 시달려 몸체가 나무꼬챙이 만한 노인이 (생명이 2.3개월 밖에 부지하지 못한다고 들었다.) 사부님을 만나러 왔는데 사부님께서는 몇 번 움직이시더니 그 사람의 병을 다 치료해 주었다. 그 노인은 너무 격동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라하면서 사부님을 안으려고 했으나 그 허약한 몸으로는 안을 수 가 없었다. 사부님께서는 그저 웃으시면서 안아보라시며 가만히 계셨다.

지방에서 한 어머니가 딸을 데리고 병을 고치러 왔다. 4,5살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무거운 물건에 눌리는듯 도무지 똑바로 서지를 못했다. 사부님께서 치료해 주시자 그 아이는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께서는 그 아이를 일으키고는, 먼지를 툭툭 털어주면서 작은 소리로 아이에게 뭐라고 말씀을 해 주셨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힘을 주어 좋지 않은 것들을 청리하고는 아이의 엄마도 청리해 주셨다. 엄마는 너무 감동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면서 박수로 보답했다. 후에 들은 바로는 그 아이의 배후에 있던 엄청나게 큰 교란을 사부님께서 모두 해결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 기적은 매일 일어났다.

박람회 때 꾸이저우(贵州)보도소 소장과 동수 한 분이 멀리서 왔다. 그들이 돌아가던 날 사부님께서는 대문까지 바래다 주셨다. 두 명은 눈물을 흘리며 서운해 하며 사부님과 작별 인사를 했다. 사부님께서는 그들이 멀어질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뒤로 돌아섰다.

현장에서도 사부님께서는 무척 바쁘셨다. 병을 치료해 주지 않으면 싸인을 하셨는데 싸인 받으러 줄을 선 사람들은 긴 꼬리를 이루었다. 구경하던 사람이 너무 고생하시는 사부님을 보고는 사이다 한 병을 따서 주었는데 사부님은 고맙다는 말은 하셨지만 마시지는 않으셨다. 그 사람이 너무 권하자 사부님께서는 사이다를 받아 들고는 손으로 병을 한번 감싸고 다시 되돌려 주셨다. 그 사람은 멍하니 병을 바라보며 연속 ”고맙다”는 말을 했다.

박람회 첫날 나는 어머니와 함께 갔다. 어머니는 사부님께 내가 밤 근무를 하고, 퇴근해서 바로 여기 왔다고 하셨는데 사부님께서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며 “이 나이가 딱 수련하기 좋을 때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대법이 널리 전해지는 이 시기에 사부님의 제자가 된 것이 몹시 기쁘고 너무 행복했다.

주최측에서는 매 한명의 기공사에게 한 차례 보고회를 할 수 있도록 안배했다. 많은 사람들의 강력한 요구로 인해 주최측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사부님께서 보고회를 할 수 있도록 2차례 늘렸다. 3번의 보고회 모두 만원이었다. 보고회는 또 다른 전시 홀에서도 열기로 안배했다. 매번 사부님께서는 오리털 모자를 쓰고 오셨는데 (평소에는 모자를 안 쓰신다.) 그것은 수련자들이 사부님을 알아 볼까봐 그랬던 것이었다. 한 번은 노년 수련자와 정문 입구에서 사부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원래는 사부님과 뒷문으로 따라 들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표를 구입한 상태였기에 그냥 앞문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사부님께서는 뒤로 보시면서 그러라고 하셨다. 들어가서 한참 기다려서야 사부님과 노년 제자가 회의장에 들어오셨다. ‘어! 이상해 사부님께서 먼저 들어오셨어야 하는데… ‘ 후에 그 노년제자가 하는 말이 내가 앞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다시 머리를 돌렸을 때 사부님께서 온데간데 없었다고 했다. 한참 기다렸더니 사부님께서는 걱정되셔서 다시 나타나 같이 들어왔다고 했다.

또 한번은 보고회가 끝날 무렵 먼저 입구에서 사부님을 기다렸다가 같이 전시장으로 이동하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다 빠져 나갔는데도 사부님께서는 보이지 않으셨다. 할 수 없이 혼자 전시장에 갔더니 사부님께서는 벌써 도착하신 것이었다.

또 기억에 남는 일은 어느 날 사부님께서는 전시장 2층에서 점심을 드시고 계셨다.(전시장은 2층 구조인데 1층은 전시본관이고 2층에는 의자 몇 개가 놓여 있는데 근무자들이 잠시 휴식하는 곳이었다. 점심밥은 현지 연공장의 수련생이 집에서 도시락을 싸서 왔다. (반찬은 아주 간단했다.) 그때 동수 한 명이 어떤 일처리를 잘하지 못해 다른 동수의 원망을 듣고 있는 것을 보고, 사부님께서는 “그리 큰일도 아닌데 그만하세요”하고 말씀하셨다. 옆에서 보고 있던 나는 그 일로 다시 한번 주불(主佛)의 자비와 넓은 마음을 견증했다.

박람회가 끝나는 마지막 날 오후에 박람회 조직위원회에서는 총결 발언을 하면서, 매 한 명의 기공사에게 상을 수여했다. 사부님께서는 대회에서 수여하는 금상 ”변연 과학진보상””제일 환영 받는 기공사”등 상을 받아 이번 박람회에서 제일 높은 상과 상을 제일 많이 받은 기공사가 되셨다. 사부님께서는 상을 받으시고는 그냥 평범하게 퇴장하셨지만 상을 받은 다른 기공사들은 기분이 좋아서 대오 앞에 끼여 들어 사진을 찍으며 떠들썩 거렸다.

박람회가 끝난 뒤 사부님께서는 고생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이어서 천진에서의 94년도 제1기 전법반(传法班)을 꾸렸다. 그리고 3월에는 제2기 학습반을 꾸렸는데 두 차례 모두 만원이었다. 우리 북경의 제자들도 차를 하나 대절하여 매일 왕복하면서 설법을 들었다. 첫날부터 우리 차는 처음 가는 길이라 제일 번화한 거리를 택해 가게 되었는데 장장 1시간이나 늦게 되었다. 함께 차를 탄 사람들 중에는 신수련생들도 많아 나는 무척 조급했다. 거의 강의장소에 돌진해 가다시피 했다. 사부님께서는 늦게 들어온 우리를 보시고는 바로 새로운 내용을 바꾸어 설법하셨다. 사부님께서는 우리가 교란 받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한쪽으로는 교란을 제거하면서 우리를 위해 강의의 진도도 천천히 나가면서 반복해서 예를 들어 설법하셨다. 우리가 설법장에 들어갈 때 “기공은 사전문화이다”의 내용을 말씀하시고 계셨다. 그래도 빠듯한 시간에 1강의를 끝내시고 또 동작을 가르쳐 주셨다. 자비스러운 사부님은 줄곧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데 사부님께서는 한 명의 제자도 떨어지지 않게 하시려 한다. 한 글자만 빠뜨려도 우리에게는 큰 손실이고, 채울 수 없는 아쉬움이다.

설법하신지 3,4일이 지나 사부님께서는 동작을 가르쳐주시려고 의자에서 이동하시면서 나를 한번 보셨다. 그날은 제2조 공법 ”法輪장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포룬하고 있을 때 사부님께서 강단 좌측에서 내려와 수련자의 동작을 수정해주시면서 우측 첫째 줄에 서있던 나를 보고 걸어오셨다. 복부 포룬(腹前抱轮)구령을 하실 때 사부님께서는 조용히 내 앞에 서 계셨다. 동작을 하고 있던 나는 감히 머리를 들고 사부님을 뵙지 못했다. 아랫배에서 法輪을 4번 돌릴 때 갑자기 내 손에는 어떤 물건이 많아진 것 같았는데 마치 반지를 낀 느낌이었다. 지금까지도 나는 사부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셨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미혹이 밝혀질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학습반을 꾸리는 동안 제자들은 언제나 각종 기회를 이용하여 사부님과 사진을 찍으려 했다. 한번은 어떤 수련자가 딱 한번만 찍겠다는 요구에 사부님께서 응했다. 하지만 한 장 찍고 나서 또 한 장 찍겠다고 하자 사진기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나면서 등도 켜지지 않았다. 사부님은 웃으시며 ”한장만 찍게해요.”하고 말씀하셨다.

생활 속의 사부님은 언제나 단정하고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 옷차림과 신발은 모두 평범했지만 아주 보기가 좋았다. 그리고 사부님께서는 아무리 추운 날씨에도 모자나 목도리, 장갑을 착용하시는 법이 없었다.

나는 이 회억록을 쓸 때 사부님과 같이 있던 순간순간, 한 장면, 한 장면이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십 몇 년이 지났어도 아직 뚜렷하게 남아있어 마침 어제 일처럼 느껴진다. 다시 한번 부처님의 은덕에 목욕하는 듯한 감동스런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없다. 사부님의 일언일행, 일거일동, 그리고 평범하지 않은 기개는 곳곳에서 각자의 자비가 체현되었다. 그러면서도 그토록 친절하고 쉽게 다가설 수 있는 분이시다. 비록 지금 대륙의 제자들이 사부님을 직접 뵙지 못하지만 진수제자는 언제나 사부님께서 옆에 계시고,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신 14주년을 맞아, 정법의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 모두 공동정진하자. 영원히 사부님의 말씀을 따르며, 공동으로 우리의 위대하신 사부님과 상봉하는 그날을 영접하자!

적절치 못한 부분의 여러 동수들의 자비로운 지적을 바란다.

문장완서:2006년 5월 14일

문장발표:2006년 5월 15일
문장갱신:2006년 5월 14일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6/5/15/127788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