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밍 의사 후진차오, 4년 억울한 옥살이 박해 경험 자술

[명혜망](윈난성 통신원) 중공(중국공산당)이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박해한 이후, 당시 30대였던 훌륭한 의사이자 파룬궁수련자인 후진차오(胡今朝)는 20여 년간 잔혹한 박해를 겪었다. 그의 꽃다운 시절은 중공 노동수용소와 감옥에서 유린당했으나, 대법을 수련하고 반본귀진(返本歸眞, 선천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하려는 그의 신념은 더욱 굳건해졌다. 이 글에서 후진차오는 2021년부터 2025년까지 다시 4년간 억울한 옥살이 박해를 당한 경험 일부를 직접 서술했다.

나는 후진차오라고 하며, 1968년 7월생 남성으로 올해 57세다. 전 윈난성 정신병원의 주치의였다. 나는 1998년부터 파룬따파 수련을 시작했는데 당시 29세였다. 수련 후 나는 진선인(眞·善·忍)을 종이에 적어 진료실 책상 유리판 밑에 넣어두고, 수시로 자신을 대조하며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다. 병원에서 성실하고 신중하게 업무에 임했고, 책임감이 강했으며, 환자로부터 어떤 선물이나 촌지도 받지 않았다. 환자에게는 늘 인내심을 갖고 세심하게 대했으며 온화하고 친절했다.

그러나 1999년 중공이 대법을 박해한 이래, 나는 여러 차례 구금되고 박해받았다. 인생의 황금기에 중공의 잔혹한 박해를 받아 34세 때 불법 구류를 당하고 의사직을 박탈당했다. 36세 때는 강제로 이혼당했고, 36~39세 때는 노동수용소에서 3년 40일간 박해받았다. 44~46세 때는 억울한 판결을 받고 3년간 감옥에 갇혔다. 2021년, 53세의 나이에 다시 억울한 형을 선고받고 4년간 박해를 당했다.

다음은 내가 2021년부터 2025년까지 겪은 억울한 감옥 박해의 실제 경험이다.

납치와 개인정보 강제 채취

2021년 4월 19일 낮 1시경, 병원 약제부에서 근무 중이었는데 과장이 창고 정리를 하라고 불렀다. 내가 간 지 몇 분 되지 않아 밖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병원의 악행을 돕는 보안요원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복 차림이었다. 그들은 기세등등하게 몇 사람이 양쪽에서 나를 제압했고, 한 명이 앞쪽 측면에서 신분증을 잠깐 흔들었는데 제대로 볼 수 없게 했다. 대략 내가 ‘파룬궁’ 혐의가 있다는 말과 함께 강제로 몸수색을 당했다. 그 후 몇 사람이 나를 부축하고 불법 가택수색을 했는데, 우두머리는 판룽(盤龍) 국보(국내안전보위대: 파룬궁 탄압 담당 공안기구)의 스루이린(史瑞林)이었고 나머지는 샤오바(小壩) 파출소 경찰이었다.

우리집 문을 연 후, 두 사람이 내 어깨 오목한 곳(견정혈이 있는 곳)을 좌우에서 눌렀는데, 눌린 후 몸이 매우 괴로웠다. 다른 사람들은 집안을 전면적으로 수색해 대법서적 수십 권, 수백 위안의 진상 지폐, 진상 CD 등 진상 자료를 가져갔고, 내 휴대전화, 컴퓨터, 녹화기 및 몸에 지니고 있던 500~600위안의 현금 등도 가져갔다. 이렇게 2시간 가까이 난동을 부렸다. 그 후 그들은 아래층에 세워둔 개인 승용차로 나를 쿤밍 판룽구 샤오바 파출소로 납치해 그곳에서 소위 ‘심문’을 했고, 밤에는 지하 1층 유치실 철제 의자에 수갑을 채워 밤새 앉혀놓았다.

이튿날 아침, 경찰은 신원 정보(지문, 장문, 키, 몸무게 등)를 채취하려 했다. 내가 절대 협조하지 않자 4명 정도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강제로 채취했다. 그들은 피부와 살을 꼬집었는데(내 몸에서 통증에 비교적 민감한 부위의 피부와 살을 움켜쥐었는데, 더 고통스럽게 하려고 주로 피부를 꼬집고 힘껏 비틀었다), 뺨을 때리고 주먹으로 치며 혈자리를 꼬집고 비틀었다. 어디가 가장 아픈지 골라서 괴롭혔고 동시에 손가락을 하나하나 꺾었다. 그중 인타오(尹濤)라는 보조경찰이 줄곧 앞장섰으며 가장 악랄하게 오랫동안 손을 댔다.

정오 무렵, 다시 경찰차로 나를 판룽구 인민병원 안과로 끌고 가서 홍채 정보를 채취하려 했다. 내가 협조하지 않자 몇 사람이 나를 ‘세극등(안과 검사 장비)’ 앞에 무릎 꿇리고, 내 양옆에서 무릎으로 내 종아리 비복근을 눌러 매우 고통스러웠다. 위쪽에서는 내 머리를 눌러 ‘세극등’ 앞에 고정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파출소로 돌아와 계속 철제 의자에 수갑을 채워 해 질 녘까지 두었다. 저녁 9~10시경, 다시 경찰차로 나를 쿤밍 제2순환도로에 있는 ‘신화(新華) 병원’으로 끌고 가서 신체검사를 했다. 협조하지 않아 또다시 많은 고초를 겪었다. 심전도를 찍어야 하는데 옆에 있던 한 여자가 내게 ‘안정제’를 주사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왜 박해받는지 말하고 나도 의사라고 알리자 그제야 그만두었다. 이렇게 새벽 1~2시까지 시달리다 다시 파출소로 끌려와 원래 자리에 수갑이 채워졌다.

셋째 날 오전, 그들은 강제로 진행한 신체검사 보고서를 들고 나를 판룽구 제2구치소로 보냈으나, 각종 검사 결과가 비정상으로 나왔고 특히 심근효소 수치(CPK)가 정상보다 10배 가까이 높아 수감이 거부됐다. 나는 신화병원으로 이송돼 입원했다. 거의 두 달간 입원해 있는 동안 가족은 통지를 받지 못했고, 내가 실종된 것을 감지하고서야 신고하고 여러 파출소를 찾아다녔다. 결국 샤오바 파출소에서 내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면회는 거부됐다.

억울한 감옥 박해

구치소에 있는 동안 불법 재판을 받았다. 나는 이치에 근거해 스스로 변호하며 무죄 석방을 요구했으나 불법적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중급법원에 항소했으나 박해는 유지됐다.

2022년 4월 8일, 나는 윈난성 제1감옥 집단훈련대(처음에는 1감구라 불리다 9감구로 변경됨)로 이송돼 박해받았다. 당시 코로나 유행 기간이라 격리 감구에서 2주간 머물렀다. 집단훈련 감구에 도착한 후 파룬궁은 금기어가 됐는데, 경찰의 허락 없이 언급하면 법 집행 명목으로 두 번 경고하고, 세 번째는 고춧가루 스프레이를 눈에 뿌렸다. 이후 3년 동안 각종 박해 구실로 20~30번은 뿌려진 것 같다. 특히 처음 2년 동안은 강요된 죄명을 인정하지 않고 점호 때 “따오(到, 출석)”라고 대답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고춧가루 스프레이를 맞아야 했다.

2022년 5월부터는 매일 아침부터 밤에 잠들기 전까지 15~16시간 동안 서 있도록 강요받았다. 오후 1~2시에 집단훈련이 시작되면 나와 2~4명의 ‘감시자’는 태양 아래 있었다. 나는 서 있어야 했고 그들은 서거나 앉을 수 있었다. 시간이 길어지자 내 양쪽 발등, 종아리, 심지어 사타구니까지 부어올랐고 걸을 때 발바닥이 바늘로 찌르는 듯했다.

9월 이후 집단훈련 감구의 감구장이 바뀐 후에야 비로소 무조건 앉아 있게 해줬다. 그 기간 사진 촬영과 명찰 착용 등을 거부해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곳에서 받은 심신의 압박은 정말 용광로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많은 옛 수련자가 소위 ‘전향’되었는지 모른다. 그해 몇 달간은 매달 한 번씩 ‘비판 대회’가 열렸는데, 강제로 전향된 자가 ‘교육과’가 있는 건물의 강당 단상에 올라가 ‘비판’을 받았다. 아래에는 집단훈련대 인원 절반 이상이 듣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그곳에 보내지 않았는데, 내가 가면 반드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런 짓은 반드시 하늘과 사람의 분노를 사서 필히 응보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12월에 이르자 며칠 만에 코로나가 감옥 전체에 퍼졌다. 코로나 때문에 감옥은 방역을 대폭 강화했다. 몇 달 후 코로나가 완화되자 감옥에서는 분기마다 ‘봄철 XX행동’, ‘여름철 XX행동’ 등 구호를 내세워 관리를 강화했다. 매번 살벌한 분위기였고, 나중에는 새로 들어온 죄수들마다 단체로 ‘선서’하고 ‘죄를 인정하고 법에 복종하며 관리를 받겠다’고 하게 했다. 선서할 때는 단체로 기립해 오른주먹을 쥐고 그럴싸하게 폼을 잡는데 마치 공산당 입당 선서 같았다. 나는 이를 거부해 고초를 겪었다. 때로는 매우 음흉하고 악독해서 당사자 몇 명 외에는 다른 사람은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당사자가 일단 발설하면 또 다른 박해 방식에 빠질 가능성이 컸다.

2023년 7월 내 생일날, 감옥 측에서 접견이 있다고 했다. 이전에 경찰이 어머니가 여러 번 면회를 왔었지만 신앙 문제로 감옥 측에서 면회를 불허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누가 왔을까? 접견실에 도착해서야 직장 노조 위원장과 재무과 여직원 한 명이 와서 내가 직장에서 ‘파면’됐음을 통보하러 온 것을 알게 됐다.

2023년 8월부터 9월까지 감옥 측은 나를 감방에 남겨두고 소위 ‘전향반’을 시작해 이듬해 5월부터 6월까지 지속했다. ‘전향반’은 전향 대상자를 위해 따로 마련한 감방으로 6~7명의 감시자가 있었고, 1~2명이 주된 감시자였으며 나머지 인원은 일정 기간마다 교체됐다. 처음 들어갔을 때 감시자 침대 맞은편 벽, 화장실 세면대 벽, 문 입구 양쪽 벽에 대법과 사부님을 모욕하는 말이 인쇄된 A4 용지가 붙어 있었는데, 내가 떼어냈다. 그러자 그들은 높은 곳과 천장에 붙였다. 처음에는 그들 몇 명이 말로 했으나, 내가 말하지 않거나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대법을 모욕하는 책, 소위 ‘반사교 수첩’ 등을 읽기 시작했다. 또 사부님 설법 중 몇 구절이나 한 단락을 떼어낸 뒤 맥락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해석하며 “이것은 X책에 있는 내용이다”라고 했다. 그것을 읽는 자는 마치 마귀가 들린 듯 스스로 터무니없는 말을 지어내거나 입에 담지 못할 음담패설로 대법과 사부님을 공격했다. 하루하루, 해를 거듭하며 정사(正邪)의 대전이 이어졌다. 몇 달 후 그들은 1999년 7월 20일 이후 텔레비전에서 나오던 모함 내용과 같은 비방 비디오를 틀어놓고 낮 동안 계속 반복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바른 믿음(正信)을 흔들 수 없었고, 더 많은 사람이 사악한 깨달음을 따르게 하지도 못했으며,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발전해 그 존재 의미가 없어지게 했다.

2024년 이후 나는 다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작업장에 나가기 시작했지만 박해는 멈추지 않았다. 내가 작업장에 가면 그들은 대법을 모욕하는 책을 작업장으로 가져와 평소 대법 모욕을 일삼는 죄수에게 읽게 했다. 그가 자기 멋대로 말을 보태 읽는 소리는 차마 귀담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그들이 방심한 틈을 타 책을 찢어버렸다. 이 일로 마(馬) 씨 성을 가진 감옥경찰이 고춧가루 물을 아주 많이 뿌렸다. 물로 눈을 씻은 후에도 30분 동안 눈을 뜨기 어려웠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음 날 아침 세수할 때도 여전히 얼얼한 느낌이 있었다. 그 후로는 대법을 모욕하는 책을 다시 읽지는 않았지만, 실제 환경과 억압된 심경은 나를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했다. 당시 감옥 관리는 물 한 모금, 밥 한 술, 몇 걸음 걷는 것까지 그들의 요구에 맞춰야 통제될 정도였다. 그들이 사악하고 음흉하게 굴면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아마 격리 ‘전향’ 때였을 것이다), 밥을 먹거나 물을 마신 후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때로는 반응이 둔해지며, 때로는 기면 증세가 나타났다. 때로는 감각 통합 실조 느낌이 들고 방향 감각 시스템에 문제가 생긴 듯 물건을 집을 때 자꾸 빗나갔으며, 심장 박동 가속, 양쪽 눈 충혈, 조급증이 동반됐다. 특히 마지막 증상이 나타날 때 제때 구토하면 증상이 완화됐는데, 나중에 경찰이 내가 이 방법을 쓴다는 것을 알고 감시자에게 나를 잘 감시해 물을 많이 마시거나 구토하지 못하게 하고, 발견되면 즉시 제지하고 보고하여 병원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 후 나는 기본 에너지 필요량 외에는 음식 섭취를 최대한 줄이는 등으로 대처했다. 법에서 닦아낸 정념(正念)과 사부님의 보호, 정념 하에 각자에게 남아있는 선한 마음, 여러 차례 인과응보의 충격에 의지해 출소하기 2~3개월 전까지 버텼고, 그제야 비교적 정상적인 식사를 할 수 있었다.

2025년 1월, 출소를 3~4개월 앞둔 어느 날 저녁 7시 전, 다 같이 줄을 서서 ‘뉴스’를 봐야 했다. 감방 문을 막 나서는데 오른쪽 귀에서 갑자기 윙 소리가 나더니 맵고 아픈 통증이 동반됐다. 뉴스가 끝난 후 물로 씻었으나 환경의 제약으로 깨끗이 씻지 못했고, 귓바퀴와 주위에 물이 닿자 오히려 더 맵고 아팠다. 나중에 밤에 잠을 자는데 귀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외이도로 흘러나왔다. 휴지로 막았는데 담황색 진물이 흘러나와 귀를 막은 종이 여러 장이 젖었다.

3일 후 감시자가 경찰에게 보고했다. 감옥 병원에 가니 의사는 고막 천공일 수 있다며 외부 병원에서 검사해야 한다고 했다. 하루가 더 지나 감옥 측은 나를 옌안(延安) 병원 이비인후과로 데려가 검사했다. 며칠 사이 오른쪽 청력이 많이 떨어져 큰 소리도 듣기 어려웠다. 검사 결과 귀 내부 사진에는 고막 위에 2~3개의 피물집이 보였고, 고막 근처 귓구멍도 충혈되어 피딱지가 있었으나 천공은 보이지 않았다. 왼쪽 고막에는 상처가 아문 흉터 두 줄이 있었다(이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노동수용소에서 박해받을 때 양훙X(楊洪X)라는 감독관이 내가 연공할 때 뺨을 때려서 생긴 것이다). 검사 때 의사는 중이염이라고 했다. 나는 중이염이 아니라 이전에 노동수용소에서 두 차례 맞아서 생긴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어쨌든 증상은 중이염이라며 내 진술을 듣지 않았다.

2025년 4월 20일 아침 출소하는데 지역사회와 파출소에서 6~7명이 와서 가족에게 각종 서명과 사진 촬영을 요구했다. 나는 그들에게 가족이 나에 대해 서명한 모든 것과 강요된 죄명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후 지역사회와 파출소 인원들은 나를 목적지까지 계속 호송했고, 내가 거주할 곳을 명확히 한 후에야 떠났다. 이렇게 복잡한 출소 절차를 거쳤다.

 

원문발표: 2026년 2월 22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2/22/507097.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6/2/22/50709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