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산둥성 통신원) 중국공산당(중공)이 파룬궁수련자를 상대로 벌인 소멸성 박해에서 약물을 사용해 파룬궁수련자를 잔혹하게 탄압한 수법은 매우 음험하고 독한데, 선량한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본문은 명혜망에 보도된 산둥성 파룬궁수련자 18명이 중공 파출소, 구치소, 노동수용소, 감옥, 일반병원, 정신병원 등에서 약물에 의해 독살되거나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사례만을 열거한 것이다. 실제 박해의 참혹한 정도는 폭로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1. 치루석화회사 컴퓨터 엔지니어 쑤강, 창러 정신병원에서 박해받아 사망
쑤강(蘇剛, 남)은 당시 32세로 산둥성 쯔보시 치루석화회사 컴퓨터 엔지니어였다. 2000년 4월 25일 쑤강은 베이징에 가서 파룬궁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5월 23일 경찰에 납치돼 웨이팡시 창러 정신병원으로 끌려갔으며, 매일 두 차례씩 중추신경을 파괴하는 약물을 주사당했다.

2000년 5월 31일 저녁 6시, 경찰이 쑤강을 그의 아버지 쑤더안(蘇德安)에게 넘겨줄 때 쑤강은 이미 눈빛이 멍하고 반응이 매우 둔했으며 사지가 경직되고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2000년 6월 10일 아침 사망했다.
2. 주청시 마옌팡, 주청시 정신병원에서 박해받아 사망

마옌팡(馬豔芳, 여)은 당시 33세로 산둥성 주청시 다런허향 싱스거우촌 출신의 주청 도자기공장 직원이었다. 2000년 4월 마옌팡이 다시 베이징에 가서 파룬궁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할 때 몸에는 10위안밖에 없었다. 길에서 노숙하며 목이 마르면 강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만두를 한 입 베어 먹으며 밤에 피곤하면 길가 밭에서 잠을 잤다. 나중에 부득이한 상황에서 긴 머리카락을 잘라 9위안에 팔았고, 이렇게 온갖 고생을 겪으며 17일간 걸어서 베이징에 도착했다.
2000년 6월 9일 마옌팡은 소속 직장에서 불법으로 작은 방에 감금당했고 전담 감시자가 배치됐다. 마옌팡이 단식으로 항의하자 직장에서 강제로 주청시 정신병원에 보냈다. 병원에서 의료진은 그녀에게 주사를 놓고 약을 먹였다. 두 달여 후인 2000년 8월 마옌팡은 주청시 정신병원에서 박해받아 사망했다.
3. 핑두시 장푸전, 핑두시 인민병원에서 독주사 한 방으로 살해당해

장푸전(張付珍, 여)은 당시 38세로 산둥성 핑두시 셴허공원 직원이었다. 2000년 11월 장푸전은 베이징에 가서 파룬궁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다 납치됐다. 돌아오는 길에 차에서 뛰어내리다가 엉덩이를 다쳤는데, 핑두시 인민병원 검사 결과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고 병원에서 치료받는 동안 의식이 또렷했으며 일어나서 앉아 연공하기도 했다. 경찰은 장푸전의 옷을 벗기고 머리카락을 밀어버린 후 강제로 ‘대(大)’자 형태로 침대에 묶어 오랫동안 고문하고 모욕했다. 그 후 그녀에게 주사 한 대를 놨는데, 주사를 맞고 나서 장푸전은 미친 사람처럼 괴로워하다가 고통과 몸부림 속에서 죽었다. 전 과정에서 610사무실(중공이 불법적으로 설립한 파룬궁 박해기구) 대소 관리들이 현장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4. 라이양시 리리, 옌타이시 정신병원에서 박해받아 사망
리리(李麗, 여)는 당시 44세로 산둥성 라이양시 청베이관 사람이었다. 2001년 현지 공안과 610에 불법 감금돼 옌타이시 정신병원에서 박해를 당했다.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온몸에 부종과 궤양이 나타났고 2001년 12월 9일 세상을 떠났다.
5. 룽커우시 정슈친, 옌타이시 정신병원에서 박해당해
정슈친(鄭淑芹, 여)은 당시 58세로 산둥성 룽커우시 룽커우개발구 베이자오첸촌 사람이었다. 1999년 7월 중공이 파룬궁을 미친 듯이 박해하기 시작한 후 정슈친은 베이징에 가서 파룬궁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했다가 불법 감금돼 옌타이시 정신병원에서 박해를 당했고, 정신이상으로 박해당해 2002년 6월 세상을 떠났다.
6. 멍인현 장더전, 독주사 한 방으로 살해당해

장더전(張德珍, 여)은 당시 38세로 산둥성 멍인현 제6중학교(구 자이중학교) 생물교사였다. 1999년 7월 20일 중공이 파룬궁을 미친 듯이 박해하기 시작한 후 장더전은 세 차례 베이징에 청원해 대법을 위해 공정함을 요구했고 두 차례 납치돼 불법 감금됐다.
2002년 9월 19일 장더전은 멍인현 다이구향에서 현 국보(국내안전보위대: 파룬궁 탄압 담당 공안기구) 경찰에게 또다시 납치돼 멍인현 구치소에 불법 감금됐다. 경찰 바오시퉁(鮑西同), 톈례강(田列剛) 등이 그녀를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며 고무봉으로 번갈아 가며 독하게 때렸다. 장더전이 단식으로 항의하자 여러 차례 멍인현 중의원에서 강제 음식 주입으로 박해했다. 마지막에 610 주임 레이옌청(類延成), 구치소장 쑨커하이(孫克海)와 중의원장 공범 궈싱바오(郭興寶)가 음모를 꾸민 가운데 구치소 의사 왕춘샤오(王春曉)와 중의원 의사가 강제로 장더전에게 정체불명의 독약을 주사해 그녀를 죽음 직전까지 박해했다. 2003년 1월 31일(음력 2002년 12월 29일) 독주사 한 방으로 사망했는데,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찰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또 하나가 끝났다.”

7. 핑두시 위구이전, 칭다오시 퉁허 정신병원에서 약물 박해로 사망
위구이전(於桂貞, 여)은 당시 55세로 산둥성 핑두시 청관진 사람이었다. 2003년 음력 8월 위구이전이 현지 시장에서 시민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렸는데 610 인원 다이위강(代玉剛)에게 납치돼 다시 쯔보 왕춘 노동수용소로 보내졌으나 노동수용소에서 수용을 거부했다. 610 인원들이 위구이전을 속여 퉁허 정신병원으로 보냈고, 매일 그녀를 ‘대’자 형태로 침대에 묶고 각종 정체불명의 약을 강제로 먹이며 중추신경을 파괴하는 주사를 놨다. 위구이전의 신경이 극심한 손상을 입어 몸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게 됐고 눈빛이 멍하며 입이 비뚤어지고 침을 계속 흘리며 하루 종일 졸면서 정신이 또렷하지 못했다.

나중에 위구이전 가족이 경찰에게 1만 위안을 갈취당한 후 돈을 들여 관계를 써서 위구이전을 집으로 데려왔다. 위구이전은 집에 돌아온 후 온몸이 참을 수 없이 아팠고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하루 종일 괴로워서 침대에서 기어 다녔다. 경찰은 또 사흘에 한 번씩 그녀 집에 가서 괴롭히고 협박했으며, 그녀 남편은 무서워서 외부 사람들과 접촉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2003년 11월 13일 위구이전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 죽었다.
8. 웨이팡시 왕싱궈, 경찰이 눈 가리고 독주사 놔 사망
왕싱궈(王興國, 남)은 산둥성 웨이팡시 한팅구 허탄진 시둥포촌 주민이었다. 2010년 6월 20일 아침 7시 30분경 왕싱궈가 야간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창이시 국보와 두창 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돼 독주사를 맞았다. 2010년 6월 28일 오전 친척이 통지를 받고 허탄 민정소에 사람을 찾으러 가라고 했다. 왕싱궈를 형이 민정소에서 데려왔을 때 그는 눈빛이 멍하고 안색이 검푸르며 많이 마랐고 무엇을 물어봐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으며 창이에서 일했던 기간의 기억을 모두 잃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납치되기 전에는 기억력이 매우 좋았고 안색이 희고 붉었다.
왕싱궈가 독주사를 맞은 후 외출해도 자신의 집을 찾지 못했고 거의 생존능력을 잃어 안팎으로 모두 사람이 돌봐야 했다. 어느 날 왕싱궈가 갑자기 한 가지 일을 기억해내며 말했다. “경찰이 내 눈을 가리고 주사를 놨어.”
2011년 9월 15일 왕싱궈의 아내 위쑤즈(於素芝)가 현지 경찰 장창(張强) 등에게 납치돼 웨이팡 구치소로 끌려갔고 왕싱궈도 납치됐다. 7일 후 위쑤즈는 산둥제1여자노동수용소로 끌려가 1년간 불법 강제노동을 당했다. 글을 전혀 모르는 왕싱궈는 한팅난쑨 세뇌반에 6~7일간 갇혔는데, 세뇌반 우두머리 류쭤바오(劉作保)가 친척들에게 600위안을 갈취하고 그를 풀어줬다.
위쑤즈가 불법 강제노동을 당하는 기간 독주사를 맞은 왕싱궈는 한 끼 먹으면 다음 끼를 챙기지 못했고 배고픔과 배부름을 모르며 추위와 더위도 몰랐다. 위쑤즈가 노동수용소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남편이 이미 사람 꼴이 아님을 봤다. 1년여 후 왕싱궈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9. 우청현 왕샤오칭, 더저우시 정신병원에서 약물 박해로 사망
왕샤오칭(王少淸, 남)은 당시 42세로 원래 산둥성 더저우시 우청현 제2면방공장 어느 과의 과장이었다. 2001년 왕샤오칭은 산둥성제2노동수용소로 끌려가 2년간 불법 강제노동을 당했다. 노동수용소에서 왕샤오칭은 여러 차례 ‘엄격관리’를 당했고 경찰에게 수갑으로 평평하게 펴서 매달아 단독 구타당하고 격리돼 독방에 감금되는 등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2003년 왕샤오칭은 노동수용소에서 나온 후 시민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리고 진상 표어를 썼다가 더저우시 정신병원에 불법 감금돼 1년 동안 박해를 당해 정신이상과 멍한 상태가 됐으며 2005년 7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10. 짜오좡시 쉬더춘, 짜오좡시립병원 중환자실에서 살해당해
쉬더춘(徐德存, 여)은 당시 52세로 산둥성 짜오좡시 시중구 사람이었다. 2002년 4월 27일 쉬더춘이 집에서 제팡베이루 파출소로 납치됐다가 다음 날 아침 파출소에서 나온 후 8년간 유랑생활을 해야 했다. 2010년 4월 30일 쉬더춘이 아들과 연로한 시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집에 돌아왔다가 5월 2일 다시 납치돼 2년간 불법 강제노동을 당했다. 2012년 노동수용소에서 나올 때 그녀는 온몸에 힘이 없다고 느꼈는데 음식에 독을 탔다고 의심됐다.
2013년 9월 1일 쉬더춘의 몸 상태가 매우 나빠 가족들이 짜오좡시립병원에 보냈다. 병원에서 의료보험 정보를 조회한 후 처음에는 수용하기를 꺼려했는데 나중에 의사가 쉬더춘 가족에게 물었다. “환자가 신앙이 있습니까? 만약 파룬궁을 연마한다면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에게 쓰는 약을 줍니다.”

2013년 9월 6일 새벽 5시 쉬더춘은 중환자실로 보내졌는데 중환자실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쉬더춘은 계속 큰 소리로 외쳤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 1분여 후 의사가 나와서 쉬더춘이 ‘뇌사’했다고 선언했다.
11. 타이안시 쉬구이친, 산둥성 제1여자 노동수용소에서 약물 박해로 사망

쉬구이친(徐桂芹, 여)은 당시 38세로 산둥성 타이안시 사람이며 타이안다허 면방공장 직원이었다. 2001년 섣달 쉬구이친이 파룬궁 진상 자료를 배포했다가 산둥성 제1여자 노동수용소 1대대에 불법 감금돼 1년간 강제노동을 당했다. 기간 중 그녀는 여러 차례 구타당하고 벌서기를 당하며 잠을 재우지 않고 허리를 90도로 구부린 채 고문하는 등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쉬구이친이 풀려나기 이틀 전 왕씨 성을 가진 과장이 또 그녀에게 ‘보증서’를 쓰라고 강요했는데 그녀가 엄숙하게 거절하자 왕씨 과장이 또 그녀에게 다그쳐 물었다. “아직도 파룬궁을 연마하는가?” 쉬구이친이 말했다. “연마합니다.” 그 후 그녀는 몇 시간 동안 구타당했다.
쉬구이친이 풀려나기 전 차례로 중추신경을 파괴하는 약물 4병을 주사당했다. 쉬구이친이 집에 돌아온 지 9일째인 2002년 12월 10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12. 이난현 쉬광란, 독주사로 학살당해
쉬광란(徐光蘭, 여)은 당시 68세로 산둥성 린이시 이난현 솽허우진 둥쒀좡촌 주민이었다. 1999년 12월 쉬광란이 아들 류나이밍(劉乃明), 류나이옌(劉乃雁)과 딸 류나이즈(劉乃芝)를 데리고 다시 천안문에 가서 파룬궁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했는데 한 가족 4명이 사복경찰에게 납치돼 베이징공안국 어느 곳에 감금됐다.
쉬광란 가족이 베이징에 가서 파룬궁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난현 솽허우진 정법위서기 위허우핑(於厚平), 파출소장 가오훙빈(高洪斌)도 베이징에 와서 쉬광란 가족 4명을 구타하고 강제로 바닥에 앉혀 두 다리를 곧게 뻗고 허리를 곧추세운 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사흘째 되는 날 쉬광란 가족 4명에게 수갑을 채워 베이징에서 현지로 끌고 갔다.
차가 산둥성 타이안에 이르렀을 때 쉬광란이 대량으로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차가 이난에 돌아온 후 악인들이 쉬광란을 병원으로 끌고 가서 강제로 정체불명의 약물을 주사했는데 쉬광란은 집에 돌아온 지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다.

13. 쯔보시 왕신보, 산둥성 감옥에서 약물 주사로 사망

왕신보(王新博, 남)는 당시 48세로 산둥성 쯔보시 장뎬구 담배회사 직원이었다. 2000년 10월 15일 왕신보는 현지 경찰에게 가택수색당하고 납치돼 구치소에 불법 감금됐다. 2001년 왕신보는 진상 자료를 전달했다가 3년간 불법 강제노동을 당했다가 병보석으로 나온 후 계속 박해를 받아 유랑생활을 해야 했다.
2003년 왕신보는 진상 자료를 만들다가 불법 체포돼 쯔보시 장자뎬구 법원에서 13년형을 불법 선고받고 산둥성 감옥에서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2005년 10월 감옥에서 그를 ‘전향’시키기 위해 4일 4박 동안 연속으로 잠을 재우지 않았고 십여 명의 악인들이 번갈아 가며 구타하고 고문했다. 왕신보는 4일간 물 한 방울도 마시지 못했고 온몸이 부어 의식을 잃을 때까지 고문당한 후 경관병원으로 보내졌다. 왕신보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됐을 때 병원에서 강제로 정체불명의 약물 3병을 주사했고 2006년 음력 새해(1월 29일) 전야에 죽음 직전의 왕신보를 집으로 보냈다. 2006년 2월 10일 집에 돌아온 지 십여 일 만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14. 웨이팡시 왕진샹, 생전에 여러 차례 정체불명 약물 강제 주사

왕진샹(王金香, 여)은 당시 59세로 산둥성 웨이팡시 파룬궁수련자이며 국가 1급 배구 코치였다. 2005년 10월 왕진샹은 베이징 고층 주거용 건물에서 진상 자료를 배포하다가 경찰에게 납치돼 나중에 2년형을 불법 선고받고 2005년 말 탕산여자 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3개월 후 몸 상태가 갈수록 나빠져 언제든지 생명이 위험할 수 있어 병보석으로 나왔다. 왕진샹이 베이징조견처, 퇀허병원, 탕산여자 노동수용소에 불법 감금되는 동안 여러 차례 정체불명의 약물을 강제 주사당했다.
그녀가 명혜망에서 국내 파룬궁수련자들이 약물 박해를 받은 상황을 폭로하는 것을 본 후에야 자신의 몸에 나타난 증상이 약물 박해를 당한 반응과 부합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독약이 그녀 몸에서 여러 가지 상태로 정기적으로 반응했는데 그중 발과 다리의 심각한 궤양이 가장 심했고 자주 미열이 났다. 2011년 9월 왕진샹이 세상을 떠났다.
15. 톈스천, 독살 가능성 매우 높아 – 화장 후 뼈가 붉은색

톈스천(田世臣, 남)은 당시 31세로 산둥성 원덩시 장자찬진 둥취안 사람으로 2007년 중국농업대학을 졸업하고 베이징푸톈자동차 해외사업부에서 일했다. 아프리카에 상주하는 동안 접촉한 중국인들에게 파룬따파 진상을 알리고 차이나타운에 가서 진상 자료 CD를 배포하며 해외 이메일로 친구와 동료들에게 진상 편지를 보냈다. 2011년 11월 톈스천이 나이지리아 차이나타운에서 친구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렸는데 중국총영사관과 중공 안전국 등에서 비밀리에 조사하고 감시했다.
2011년 12월 29일 톈스천이 귀국한 당일 중공 당국이 직접 베이징푸톈회사로 납치했다. 3시간 반에서 4시간의 장시간 대화를 거친 후 중공 인원들이 톈스천에게 두 가지 선택권을 준다고 했다. (1) 수련을 포기하고 대법서적, 자료, 여권을 내놓으며 앞으로는 다른 일은 하지 말고 매일 중공 부문에 가서 사상 업무를 보고하고 점검서를 쓴다. (2) 사직하고 회사를 떠나 이후 회사와는 무관하며 회사는 톈스천과 선을 긋고 싶어 하고 24시간 내의 안전만 보장할 수 있으니 빨리 떠나라고 했다. 톈스천이 신앙 포기를 거부하자 사직서를 쓰도록 강요당했고 중국공산당(중공) 탈퇴를 선언했다. 2011년 12월 30일 정오 톈스천은 산둥 고향에 돌아왔다.
겨우 이틀 후인 2012년 1월 1일 오후 톈스천의 몸에 이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온몸에 열이 나고 사지에 힘이 없으며 구토와 설사를 했고 점차 심해졌다. 6일째 온몸 피부와 점막이 노랗게 되기 시작했고 소변도 노란색이었으며 16일째(2012년 1월 16일) 원인 모르게 사망했다. 화장 후 뼈가 붉은색을 띠어 중공 특무가 독을 탔을 것으로 의심된다.
16. 린이시 첸파쥔, 산둥성 제2남자 노동수용소에서 약물로 사망

첸파쥔(錢法君, 남)은 당시 44세로 산둥성 린이시 린강구 좡강진(원래 쥐난현 옌마향) 둥옌마촌 주민이었다. 2000년 말 첸파쥔은 베이징에 가서 파룬궁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쥐난기차역에서 납치됐다. 옌마향 파출소 경찰 쉬헝녠(徐恒年), 한진청(韓金城)이 그를 끌고 돌아온 후 머리채를 잡고 벽에 세게 부딪치고, 수갑을 채우며, 고무봉과 네모난 딱딱한 회나무로 때리고, 전기봉으로 전기 고문하며, 입을 때리고 뺨을 치고 눈 오는 날 바람을 맞혀 얼리는 등 잔혹한 고문을 가했다. 나중에 첸파쥔은 창문을 넘어 마굴에서 탈출했다.
2003년 2월 17일 첸파쥔은 경찰 쉬헝녠에게 납치됐다가 다음 날 산둥성 제2노동수용소로 끌려가 2년간 불법 강제노동을 당했다. 기간 중 첸파쥔은 구타당하고 매달리며 독수리 기르기, 작은 의자 앉기, 정체불명 약물 강제 주사, 독방 감금, 여러 개 전기봉 전기 고문, 야만적 관식, 노예 노동 등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2011년 9월 23일 첸파쥔이 린이시 세뇌반에 납치됐는데 세뇌반 우두머리 쑤웨이(蘇偉) 등이 그의 사지를 묶고 독성 약물을 강제 주입하며 구타했다. 첸파쥔은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박해를 당해 화장실에 갈 때도 사람이 부축해야 했다.
2011년 10월 28일 첸파쥔은 또 린이시 린강구 610 우두머리 마쫑타오(馬宗濤), 좡강 파출소장 펑쉐중(彭學忠) 등에게 산둥성 제2남자 노동수용소로 끌려가 1년간 불법 강제노동을 당했다. 노동수용소 7대대 대장 왕신쟝(王新江)이 죄수들에게 지시해 들것에 누워 있는 첸파쥔을 단칸 저장실로 옮겨 박해했다. 첸파쥔이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하자 오랫동안 야만적 관식 고문을 당했다. 기간 중 장씨(경찰번호: 3731063) 의사가 첸파쥔에게 관식용 튜브를 꽂을 때 일부러 관식 튜브를 위아래로 움직여 고문했다. 어느 날 첸파쥔은 경찰에게 관식용 튜브를 꽂히는 고문을 당해 쇼크 상태에 빠졌다.

잔혹한 박해로 첸파쥔은 자주 경련을 일으키고 침대에서 떨어지며 요실금 증상을 보였다. 그는 생명이 위험할 때 83병원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정체불명의 약물을 수혈받았다.
2012년 1월 14일(음력 12월 21일) 자립능력을 잃은 첸파쥔이 집으로 보내졌다. 첸파쥔은 집에 돌아온 후 몸 상태가 나날이 나빠졌고 밤에는 온몸이 참을 수 없이 아팠으며 83병원에서 오른발 부위에 정체불명 약물을 수혈한 부위가 심하게 궤양돼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다가 2013년 4월 17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17. 자오저우시 왕웨이허, 자오저우시 정신병원에서 약물 박해 받아
왕웨이허(王維和, 남)는 산둥성 자오저우시 마뎬진 루자촌 사람이었다. 2000년 2월 10일(정월 초6) 왕웨이허 가족이 다시 베이징에 가서 파룬궁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했다가 끌려와 촌위회에 감금됐다. 진당위부서기 왕쉐하오(王學浩)가 차를 몰고 그 마을에 와서 촌지부서기 둥펑강(董鳳崗)과 함께 먼저 그의 딸 왕핑(王蘋)을 옆방으로 끌고 가서 문을 닫고 그녀를 심하게 때렸다. 그 후 부녀는 마뎬 파출소로 끌려가 각각 두 개 방에 갇혀 구타당했다. 왕웨이허는 왕쉐하오에게 맞아 의식을 잃자 촌위회로 끌려가 감금됐는데 6일간 음식을 먹을 수 없었고 호흡도 곤란했다. 7일 후 왕웨이허는 또 마뎬 파출소로 끌려가 계속 감금됐다. 3개월 후 왕웨이허는 아내 파슈팡(法秀芳)과 딸 왕핑과 함께 자오저우시 정신병원으로 끌려가 더욱 잔혹한 박해를 받았다.
왕웨이허는 정신병원에 감금돼 먼저 주사 한 대를 맞았고 그의 아내는 1층에, 딸은 3층에 감금됐다. 왕웨이허가 연공하는 것을 의사 양청차오(楊成超)가 보고 양청차오가 발로 차서 그를 바닥에 넘어뜨린 후 계속 바닥에서 발로 차고, 그 다음 왕웨이허의 다리를 잡아끌어 방에서 로비로, 로비에서 다시 돌아와 오마분시식으로 철침대에 묶고 그를 한동안 때린 후 주사 한 대(정체불명 약물)를 놓고 또 한동안 때린 후 다시 주사 한 대를 놨다. 하룻밤에 왕웨이허에게 주사 7대를 놨다. 사흘째 되는 날 왕웨이허가 깨어났을 때 움직일 수 없었고, 입에서 거품을 토하며, 말이 분명하지 않고, 이불도 덮을 줄 모르며, 바지에 소변을 봤다… 나중에 왕웨이허는 정신이상이 돼 몇 년 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18. 지난시 류빙환, 광둥 칭위안 정신병원에서 약물 박해로 사망
류빙환(劉兵歡, 여)은 당시 38세로 산둥성 지난시 파룬궁수련자였다. 2021년 12월 30일 류빙환은 지난시중분국 웨이자좡 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돼 형신고문을 당했다. 뒷수갑을 채우고 구타를 당했으며 귀까지 한 겹 껍질이 뜯겨 나갔다. 2021년 12월 31일 밤 류빙환은 파출소에서 나온 후 다시 박해를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광둥성 칭위안시에 갔다. 그 결과 류빙환은 칭위안시 양산현공안국 국보(국내안전보위대: 파룬궁 탄압 담당 공안기구)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됐다.
2022년 6월 14일 오전 류빙환은 칭위안시 양산현공안국 국보대대, 청베이 파출소 경찰이 문을 부수고 들어와 납치됐다. 류빙환은 파출소에 불법 감금된 지 이틀 후 또 5일간 불법 구류됐는데 그녀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구류소에서 수용을 거부해 당일 석방됐다.
2024년 9월 29일 밤 류빙환은 또 칭위안시 양산현공안국 국보대대와 파출소 경찰이 연합해 문을 비집고 들어와 납치됐다. 그녀는 강제로 양산정신병의원에 보내져 묶인 채 여러 차례 소위 ‘진정제’를 맞았다. 양산현공안국이 가짜 진술을 만들어 그녀를 칭위안칭신 구치소로 끌고 갔는데 류빙환의 혈압을 재니 200mmHg를 넘어 또 강제로 칭위안시제3인민병원(정신병원)으로 보내 주사와 수액을 맞혔다. 류빙환은 여러 차례 정체불명의 약물을 맞아 당시 단기간 기억을 잃고 정신이 멍해지며 표정이 멍해졌다.

2024년 10월 3일 밤 11시 류빙환의 남동생 류빙레이(劉兵磊)가 누나와 지난공안에게서 전화를 받고 가서 누나의 퇴원 수속을 밟아달라고 했다. 그가 칭위안시제3병원에 도착했을 때 류빙환이 박해로 초췌해지고 몸이 허약해진 모습을 봤다. 지난경찰이 말하기를 류빙환의 현재 몸 상태를 고려해 류빙레이가 보증인이 돼 그의 누나를 위해 ‘처분보류’나 ‘거주지 감시’를 신청하라고 했는데 류빙환 남매가 거절했다. 그들은 강제로 류빙환에게 ‘거주지 감시’를 처리해주고 큰소리쳤다. “당신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나중에 또 찾을 거야.”
류빙환은 정신병원에 납치돼 강제 주사를 맞은 후부터 몸 상태가 갈수록 나빠졌는데 그녀는 정신병원에서 독주사를 맞았다고 말했다. 나중에 류빙환은 점차 생활을 스스로 돌볼 수 없게 됐고 2025년 7월 28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맺음말
본 글은 명혜망에 보도된 산둥성 파룬궁수련자들이 약물 박해로 사망한 일부 실례만을 나열한 것으로 실제 박해의 참혹한 정도는 폭로된 이것들보다 훨씬 심하다. 중공이 약물을 이용해 파룬궁수련자들을 박해하는 것은 2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중공은 반체제인사와 자신들의 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수법을 사용하고 있고 그 수단은 더욱 잔혹해지고 있다.
원문발표: 2025년 9월 5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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