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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수련생이 관(關)을 넘으며 실속있게 수련한 체험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2019년에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기 시작한 신 수련생이다. 비록 수련한 시간은 길지 않지만, 수련을 시작하고부터 늘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와 점오(點悟)를 느끼고 체득이 있었다.

1. 견정한 신념으로 병업관을 돌파하다

수련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첫 소업(消業)을 했다. 처음에는 설사하는 것처럼 계속 화장실에 달려갔고, 나오자마자 다시 화장실로 달려갔다. 당시 나는 이것이 사부님께서 나를 소업시켜 주시는 것임을 알았다. 저녁 8~9시부터 화장실에 들락거리기 시작하면 온 밤을 뛰어다녀야 했다.

나는 사부님 말씀을 생각했다. “우리는 그것을 모두 들춰내야 하고, 당신에게서 모두 쳐서 내보내야 하며, 뿌리부터 전부 없애버린다. 이렇게 되면 당신은 병이 또 재발했다고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업을 제거하는 것이므로, 당신은 반응이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국부적인 반응이 있을 것이며, 이렇게 괴롭고 저렇게 괴로우며 각종 괴로움이 모두 나올 것이지만, 모두 정상이다.”[1]

그러나 화장실로 달려갈수록 몸이 견디기 어려웠고, 지치고 피로한 데다 걸음걸이도 ‘비틀거렸고’, 나도 모르게 힘을 쓰다가 ‘치질’처럼 밀려 나올까 봐 걱정되기 시작했고, 머릿속에 속인의 ‘병’이라는 개념이 떠올랐다. 또 이렇게 구부리다 탈항이 되고, 다시 이렇게 힘을 쓰다 병원에 실려 갈 것 같아 어쩔 줄을 몰랐다. 아파서 두 손으로 힘껏 수도꼭지를 쥔 채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기를 쓰며 외웠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쩐싼런하오(真善忍好).” 아파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으며, 정신이 무너지려 했다.

그때 사부님의 법이 머리에 떠올랐다. “우리 신체가 갑자기 불편함을 느낄 것인데, 이는 업을 갚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여러 방면에서 체현될 것이다. 일정한 시기가 되면 당신에게 또 진짜도 아니고 가짜도 아니게 만들어 주어, 이 공이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 수련할 수 있는지 없는지, 도대체 수련하여 올라갈 수 있는지 없는지, 부처가 있는지 없는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당신으로 하여금 분간치 못하게 한다. 장래에 다시금 당신에게 이런 정황이 나타나게 할 것이며 당신에게 이런 착각을 조성해 주어, 당신으로 하여금 그가 마치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 가짜처럼 느끼게 하는데, 바로 당신이 견정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본다. 당신은, 당신이 꼭 견정불이(堅定不移)하다고 하는데, 이런 마음이라면 그때에 가서 당신은 정말로 견정불이할 수 있으며, 당신은 자연히 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의 心性(씬씽)이 이미 제고되어 올라갔기 때문이다.”[1]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내가 대법제자이고, 사부님의 제자인데, 너희가 감히 나를 건드리느냐! 나는 반드시 이 관을 넘길 것이다. 사부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바로 그때 자비로우신 사부님께서 나의 머리에 한마디 말씀으로 점화해주셨다. “통증을 태연하게 대하면 일체가 모두 사부에게 있다!” 순간, 나는 무너지기 직전에 정신을 차렸고, 마음속이 에너지로 가득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통증을 향해 소리쳤다. “네가 와도 나는 두렵지 않다. 나는 대법제자고, 나에게는 사부님께서 계신다!”

나는 약 이틀간 소업하면서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와 점오 덕분에 관을 넘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소업 경험을 통해 나는 미래의 시험과 소업을 수련자로서 대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또다시 ‘치질’ 형식의 두 번째 소업을 겪게 되었다. 이번에는 위로 토하고 아래로 설사를 동시에 했다.

설사하며 토하니 아래로 늘어진 ‘치질’이 심해져 거의 실신할 지경에 이르렀고, 이 ‘업’ 갚기를 언제나 마칠 수 있을지 암담했다. 지난번에 소업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침착하게 마음속으로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외웠다.

나는 끝없이 밀려드는 고통을 참으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사부님, 제자는 오늘 저를 사부님께 바치겠습니다. 어느 정도로 아프든, 얼마나 오래 아프든, 모두 사부님의 배치에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갑자기 머리에서 한 덩이의 아주 미세한 검은 기운이 공중으로 흩어져 나오며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내가 체득한 것은 이러했다.

1) 신체에 어떤 ‘증상’이 나타나든지 사상을 느슨히 해서는 안 된다! 신체의 증상이 이전과 달라도 사상 속에 ‘병’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게 해서는 안 된다.

2) 소업 상황이 나타났을 때 즉시 소업에 대해 ‘첫 번째로 한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자신의 사상과 언행을 ‘조사’했다. 흔히 미리 대비하거나 일부러 꾸미지 않았을 때, 배후에 숨어있던 수많은 사람 마음과 관념이 ‘첫 번째 생각’으로 폭로되어 나왔지만, 많은 경우 자신이 각종 핑계로 덮어 감추어 발견하기 어려웠다.

3) 만약 자신이 늘 진정한 누락을 찾지 못한다면 사부님께 가지를 청하거나, 다른 수련생과 많은 토론을 거쳐 자신의 누락을 찾을 수 있다.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며, 사람 마음(체면을 추구하고, 망신을 두려워하고, 심지어 다른 수련생을 믿지 않는 등등)으로 인해 시간을 끌면서 더 큰 손실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

4) 소업은 수련과정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관이다. 각종 ‘병’의 변화를 통해 사부님과 법에 대한 대법제자의 믿음의 정도에 대해 시험을 보는 것이며, 깊이 숨어있는 사람 마음을 여전히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완고한 관념과 심지어 사당(邪黨) 문화가 사상 속에 달라붙어 있는 것은 아닌지, 수련 중의 대법제자들에게 ‘경고’를 하는 것이다. 또 장기간 하나의 층차에 머물면서 발전이 보이지 않는데……. 관을 넘고자 하는 끈기와 결심만 있다면 사부님께서는 반드시 자비로운 보호와 도움을 베푸신다.

2. 사람 마음을 찾고, 집착의 뿌리를 캐다

막 수련을 시작했을 때, 나는 ‘진선인(真·善·忍)’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는 것만 알았고, 날마다 머릿속으로 사부님의 설법만 생각했으며, 정신은 줄곧 고도의 긴장 상태에 처해 있었다. 내가 어떤 부분에서 잘하지 못했는지, 대법에 먹칠하지 않았는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날마다 시시각각 관을 넘길 준비를 하고 있었고, 결국 관을 넘을 때는 시작하자마자 법리의 요구에 따라 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더 악화하자 화를 내고 분노했으며, 마성의 일면이 우위를 차지해 결국 심성을 지킬 수 없었다.

한번은 아들(중학교 2학년)이 숙제하는 동안 휴대전화를 가지고 놀면서 한 번 쓰고, 한 번 놀기를 반복했다. 내가 결국 참지 못하고 빨리하라고 하자 아들이 말대꾸했다. 내가 질세라 다시 몇 마디를 하자 아들이 또다시 반박했다. 주고받다 말다툼이 일어났다. 아들은 이성을 잃고 욕을 하며 손으로 때렸다. 당시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이것은 관을 넘는 것이니 마음을 움직이고 화를 내면 안 된다. 나는 이치에 맞고 엄숙하게 자식의 도리를 언급하면서 이런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며 아들을 나무랐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법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나 흔히 모순이 생길 때, 사람의 심령(心靈)을 자극하지 않으면 소용없고 쓸모없으며 제고하지 못한다.”[1]

그때 친정아버지가 다른 방에서 나를 부르는 바람에 아이 ‘교육’이 중단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방으로 들어와 나를 끌어내면서 말을 하지 못하게 하셨다. 아들은 자기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오자 즉시 침대 위에 일어서서 나를 향해 기고만장하게 떠들어댔다. 하지만 그때 아버지는 외손자를 위로하면서 방에 있던 나를 밖으로 힘껏 끌어냈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눈물까지 흘리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손자가 어미를 때리는데, 손자는 놔두고 거꾸로 저를 끌어내시다뇨. 불효자식을 아직도 업고 계세요? 만약 제가 친정엄마를 때려도 놔두실 거예요? 어떻게 아이가 이렇게 기어오르게 하실 수 있어요? 이건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에요!” 그 순간, 나는 정말 억울함과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마성을 크게 폭발시켰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우리는 모순 앞에서 한 걸음만 물러서면 더없이 넓은 세상이라고 말하는데, 보증코 다른 광경이다.”[1]

냉정함을 되찾았다. 나는 수련인이다! 현재 나 자신의 어디에 수련인의 모습이 있는지 살폈다. 나는 수련인인데, 어떻게 속인과 같을 수 있는가? 바로 그 일념이 마음속의 모든 노여움과 억울함을 단번에 대부분 해체했다. 마음은 아주 고요해졌고, 마치 하나의 비할 바 없이 거대한 바위를 내 몸 위에서 치운 것처럼 가벼워졌다.

나는 냉정하게 안을 향해 찾기 시작했다. 나는 왜 억울한가? 나는 왜 분노했는가? 그것은 아버지가 나를 도와 아이를 혼내며 교육하지 않고, 반대로 나와 대립각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참음을 해내지 못한 것은 사상 깊은 곳에 여전히 보복심이 있기 때문이었다. 수련인은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아야”[1] 했다. 비록 아들이 욕하고 사람을 때린 것은 교육해야 했지만, 아들을 교육하면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아야 했으며, 방법을 강구해야 했고, 분별력이 있어야 했다.

비록 당시에 일부 원인을 찾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화내고 불평을 했다. 아직도 찾지 못한 집착심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왜 아들과 말다툼을 했을까? 왜냐하면, 나에게 정(情)이 있으므로 아들이 질질 끄는 나쁜 버릇을 키워 미래의 학교와 직장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받을까 봐 걱정한 것이었다. 일반인의 관점에서, 바로 이 작은 문제가 아들의 장래에 영향을 줄까 봐 걱정한 것이었다.

아들은 진심으로 대법을 인정했고, 가끔 나를 따라 진상 자료를 붙이기도 했다. 아들은 어린 대법제자였고, 사부님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조바심이 난 것은 사부님과 법에 대한 믿음을 느슨히 한 것이었다. 나는 최상을 추구하는 배후에 사당(邪黨) 문화의 농간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이 교육에서 이미 쇠뿔 끝을 파고 있었다. 완벽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겉모습 아래에 사당의 유령이 자라고 있어 사람 마음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전에는 아이를 교육하기 위해 가정 교육을 했는데, 법을 얻기 전에는 내가 아이를 잘 교육시켰지만, 오히려 수련 이후에는 아이를 어떻게 교육시켜야 할지를 몰랐다. 내 법 공부를 충분히 잘 하지 못했을 때는 이것을 파악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게다가 마음이 일어나기만 하면 화를 냈고, 화를 내면 반드시 아들과 말다툼을 벌여 씬씽을 지키기가 몹시 어려웠다. 이 아이를, 도대체 상관해야 하나 놔둬야 하나, 늘 모순에 부딪혔다. 상관만 하면 말다툼하게 되는데 어떻게 씬씽을 제고하지? 또 상관하지 않자니 부모가 책임지지 않는 것 같았다. 나중에 몇 가지를 깨달았다.

1) 아이를 가르쳐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을 수련인으로 여겨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이 늘 자비롭고 선(善)으로 남을 대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다른 사람을 고려하여 매번 문제와 마주칠 때마다 이 일을 다른 사람이 감당해 낼 수 있는가 없는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가 안 되는가를 우선 생각한다면 문제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1] 그렇다면 바로 ‘정(情)’으로 지도하는 데서 벗어나야 한다. ‘정’에서 벗어나면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운명은 출생 시에 이미 정해졌기 때문이다. ‘정’에서 벗어나면 평온한 마음과 온화한 태도로 아이의 관점에서 이해하게 될 것이며,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고, 소통하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칠 수 있다.

2) 아이를 가르칠 때, 시시각각 주이스(主意識)를 강하게 유지해야 하며, 사람 마음과 각종 관념에 교란받고 있는지 즉시 분별해야 한다.

많은 경우 내가 아이의 학업 성적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아이가 좋은 성적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선생님과 남편이 모두 내가 상하이에서 왔고, 교육에 종사하는 것을 아는데 내 아이조차 잘 지도하지 못하면 체면이 서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숙제를 질질 끄는 데에 신경 쓴 것은 숙제를 질질 끌면 나중에 업무를 보고 일을 할 때도 질질 끌게 되어 상관이나 윗사람의 미움을 받고, 승진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요컨대 아들을 교육하는 데 있어 모든 일의 배후에 정과 사람의 관념이 숨어있다. 바로 이런 물질이 내 마음과 결탁해 기분을 건드리고 정신을 괴롭혀 아들이 하는 일을 무엇이든 못마땅하게 보게 한 것이었다.

3) 내가 아들의 일로 다른 수련생을 찾아 교류하자 그 수련생이 말했다. “힘드시겠어요. (나는 홀어머니로, 아들과 친정 부모님과 살고 있다) 솔직히 저는 당신보다 아이가 불쌍해요. 이 일은 수련생의 정이 있어서 마음을 움직였고, 눈에 다른 것이 보이지 않은 거예요. 아이의 결점만 보니 빈틈이 있어 구세력이 틈을 타게 해서, 아이를 당신에게 대들게 한 것인데, 정말 아이에게 잘못이 있겠어요? 아이는 엄마를 도와 누락을 찾게 하고 수련을 도와준 거예요. 수련생은 아직도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데, 수련생이 옳게 한 건가요?”

수련생의 말을 듣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그랬다. 그것이 명백한 나의 문제였는데, 어째서 아들과 맞섰을까? 명백해진 순간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제야 아이와 부모님께 많은 미안한 일을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나는 즉시 일어나 수련생에게 고맙다고 하고 집으로 돌아가 아이와 부모님에게 사과했다.

4) 아이 교육에 애태운 것은 사부님과 법에 대한 믿음이 느슨해졌기 때문

법을 얻은 그날부터 주변의 육친은 불법(佛法)의 은혜에 젖게 된다. 나아가 아들이 대법제자의 집으로 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특별한 연분과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의 소임은 바로 아이의 일상생활을 잘 돌보며, 법을 실증하는 것이다. 시시각각 ‘쩐싼런(真·善·忍)’에 따라 말과 행동으로 아이를 가르쳐야 하며, 아이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이런 문제를 인식한 후 애초에 나에게 속하지 않았던 ‘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시시각각 자신을 일깨우며 사람 마음이 몰래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버려두지 않았고, 선(善)과 인(忍)으로써 아이의 모든 과실과 부족함을 포용했다. 아이와 함께 있을 때 ‘정’의 방해가 사라졌다. 항상 아이의 관점에서 문제를 고려하며, 아이가 받는 느낌까지 살필 수 있었고, 더는 조바심을 내지 않고, 끈기를 가지게 되었다. 아이도 이런 환경에서 조용한 변화가 있었는데,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내 이야기를 들으려 하고, 조바심을 내지 않는 등 적극적이며 낙관적으로 되어갔다.

3. 대법을 원용해 다른 수련생이 관을 넘는 것을 돕다

얼마 전, 함께 법 공부를 하는 수련생도 정을 내려놓지 않아 관(關)을 지나가지 못하고 수련 상태에 문제가 생겼는데, 정신이 딴 데가 있었다. 그녀는 교류할 때도 늘 몰래 도망쳤고, 듣고도 잊어버렸으며, 심지어 병업 상태가 나타나 소리를 듣지 못해 모두가 마음을 졸였다. 당사자도 애를 태우면서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발정념을 부탁했다. 처음에는 모두가 그녀를 도와 발정념을 했지만, 나중에 보니 그녀 자신은 정념이 부족했고, 두려움과 자녀 정, 체면 등등 각종 사람 마음에 뒤엉켜 있었다. 그녀 자신도 그런 마음이 있음을 알지만, 그것들을 똑바로 보고 해체하지 못했다. 우리가 그녀에게 안으로 찾으라, 안으로 찾으라며 끊임없이 알려 주었지만, 전혀 효과가 없어 보였다.

하루는 동공(動功)을 연마하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한마디 말씀이 떠올랐다. “대법(大法)은 원용(圓容)한 것으로”[2] 왜 갑자기 이 말씀이 떠올랐는지 갑갑했지만, 곧 생각이 났다. ‘이것은 그 수련생 이야기가 아닐까? 대법이 원용한다면 한 사람의 수련생도 포기할 수 없다. 그 수련생에게 마난이 닥쳤으니 우리가 그녀에게만 안으로 찾으라고 하지 말고, 우리도 반드시 안을 향해 찾아야 한다.’

나는 그 수련생의 문제와 관련해 내가 사실상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와 모순이 발생해 관을 넘을 때 특별히 그녀를 찾아 교류했다. 나는 그녀의 사람 마음과 관념이 여전히 몹시 무겁고, 아주 많은 일에 대해 수련인의 기점에서 문제를 사고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또 그녀가 평소 실속있게 수련하지 않고, 법 공부가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당시 그런 문제를 분명히 발견하고도 제때 지적하지 않았고, 그 수련생이 듣기 싫어할지 모른다는 사람의 관념에 가로막혔다. 나는 신 수련생인데 수련을 오래 한 대법제자의 문제를 논하는 것은 분수를 모르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나는 그 수련생의 상태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바로 이기심이 아닌가?

그리고 이전에 그 수련생이 관을 넘을 때 눈앞의 성공과 이익에 급급하다는 말을 했는데, 오히려 나에게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은 인식하지 못했다. 수련생을 두 번 도와주고 나서 “너무 어렵다, 너무 어렵다”라며 겁을 먹었고, 두 번 교류하자마자 효과가 없다며 포기했다. 내가 언제 그 수련생을 이야기했나. 사실 나는 바로 내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그래서 정오에 발정념을 할 때, 계속 그 수련생을 위해 발정념을 했다. 수련생이 바른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가지(加持)하고, 수련생의 공간장에서 그녀를 박해하는 일체 사악한 생명과 요소를 제거했으며, 구세력이 배치한 일체 박해 기제를 모두 뿌리 뽑고 해체하고 제거했다. ‘우리는 정법시기 대법제자인데, 누가 감히 대법제자를 움직일 수 있는가? 대법제자의 어떠한 모순, 문제, 누락이든 모두 법 속에서 원용, 해체, 수정되며, 너희들 구세력의 간섭과 고험이 미칠 수 없다. 누구든 감히 움직이면 내가 그것을 소멸할 것이다.’

그런 염두를 내자마자 마치 감전된 것처럼 전신이 찌릿찌릿했고, 마음속은 에너지로 가득 찼다. 나는 정념을 제대로 발휘했다는 것을 알았다. 저녁에 퇴근해 집으로 가지 않고, 저녁도 먹지 않고 그 수련생의 집으로 갔다.

수련생은 나를 보고 몹시 반가워했다. 그녀의 정신 상태가 아주 좋아 보여 오늘은 어떠냐고 물었다. 그녀는 오늘 느낌이 특별히 좋다면서 ‘전법륜(轉法輪)’을 공부했을 뿐 아니라 사부님의 기타 설법도 공부했다고 말했다. 정신에 힘이 있었고, 정념도 강해 보였다. 나는 참 이상하다며, 지난번에 교류할 때는 법 공부가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정념이 부족한 문제가 있었는데 달라졌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정말로 사부님의 기타 설법을 보았는지 묻고 싶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중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체면도 있고 사람 마음도 있어 쭈뼛거리며 말했다. “만약 당시에 제가 지적을 하고, 함께 법 공부를 더 많이 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예요. 제가 안을 향해 많이 찾으라는 말만 했는데, 저 또한 안을 향해 찾았어야 했어요. 저 자신의 부족한 점과 제고가 필요한 부분을 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여사님, 관을 넘는 것도 우리의 사람 마음과 누락을 반영해 낼 수 있는 좋은 일이잖아요. 우리는 우주의 고층에서 떨어져 내려왔고, 천만년의 윤회와 기다림을 겪었어요. 금세에 인연이 있어 인체를 얻고, 정법을 얻었는데, 또 이미 정법 수련의 최후 단계에 와 있어요. 다시는 인간 세상의 더럽고 불결한 물질에 매달리지 마세요. 여사님께서 20여 년을 수련해오신 것도 쉽지 않잖아요. 우리에 대한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도와 우리 배후의 중생을 저버리지 마세요.” 수련생은 크게 감동하여 반드시 다그쳐 법 공부를 잘 해 따라잡고, 집착을 내려놓고,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의 깨달음은 이렇다.

1) 신변의 수련생에게 어떠한 마난이나, 병업, 박해, 그리고 수련 상태에서 벗어난 각종 현상이 나타나면 모두 그것이 존재하는 원인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당사자의 주의를 끌 뿐 아니라, 집착과 문제를 다시 주의 깊게 살피고 수련해 버리게 하며, 나아가 신변의 수련생들이 안을 향해 수련 중의 누락을 잘 찾아내게 한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마땅히 이 일 속에서 자기에게 있는 사람 마음이나 사람의 관념 등등을 움직여 문제의 발생과 악화를 초래하지 않았는지 잘 찾아야 한다. 정체 속에서 지내는 가운데 자신에게서 집착, 사람의 마음, 누락 등을 찾아내야 당사자가 함께 노력하고, 대법을 원용하고, 세인을 향해 대법을 실증할 수 있다.

가끔 ‘당사자’가 ‘비정상적인 상태’를 보이면 주변 수련생들이 각종 사람 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고 화를 내며, 어떤 사람은 몹시 자기중심적으로 왜 “내 말을 안 들었느냐”고 한다. 어떤 사람은 속인처럼 일의 자초지종에 대해 한바탕 논하고……. 그러나 이런 사람의 표현은 전혀 타인의 중시를 받지 못하며, 심지어 각종 사람 마음을 스스로 덮어 감추게 된다. (예: 수련생이 잘 되기 바라서예요, 제가 한 말 중요한 것도 아니에요, 정신을 차릴 수 있겠어요? 등등)

2) 사람의 관념으로 분석하고 심사하며, 각종 집착과 사람의 마음을 품고 직시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런 사람의 마음과 집착을 느끼지도 못한다면 절대로 정체의 발전은 없다. 어떤 수련생은 사람 마음 때문에 부정확한 상태가 나타난 수련생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으려 하고, 문제를 보고도 사람 마음 때문에 즉시 깨어나지 못해 더욱 큰 문제를 초래한다. 간혹 체면을 중시하거나, 사상 속 사당 문화의 교란을 받아 수련생을 나누어 팀끼리 간격을 조성하며, 심지어 팀 혹은 구역 간에 깊은 간격을 만드는 등등의 일을 벌인다.

3) 법 공부가 마음에 들어가지 않는다. 어떤 수련생은 그저 매일 임무를 완수하듯 법 공부를 한다. 양만 추구하고 질은 따지지 않는다. 각 지역에 모두 법 공부 팀이 있으니 각 법 공부 팀마다 마땅히 착실한 법 공부, 진지한 교류, 상호 토론을 해야 하며, 이로써 모든 지역의 법 공부와 실속 있게 수련하는 상태를 이끌어야 한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선을 알기 쉽게 해설(淺說善)’

 

원문발표: 2021년 3월 2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big5.minghui.org/mh/articles/2021/3/20/4210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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