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을 잊지 않고 중생을 구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나는 1998년에 대법서적을 얻었지만 당시에는 불법(佛法) 수련인 줄 몰랐다. 친척은 내게 5장 공법을 가르쳐준 뒤 떠났다. 그때 나는 가끔 혼자 책을 보면서 다른 책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그저 훑어보기만 했다. 가끔 연공도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모르는 사이에 몸에 있던 그 많은 병이 다 사라졌다.

1999년 나와 친척은 우리 마을에서 사람들을 모아 함께 연공했고 가끔 함께 법공부도 했다. 하지만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중공 악당이 탄압을 시작하며 파룬궁을 연마하지 못하게 했다. 그때 우리 마을에는 이미 20~30명이 배워서 연공하고 있었다. 당시 악당의 기세가 사나워 사람들은 겁을 먹고 감히 연공장에 가지 못했다. 내가 연공장으로 쓰던 수련생 집을 찾아갔더니 그 집에서도 더는 오지 못하게 했다. 이후 30여 명 중 우리 둘만 포기하지 않고 남았다.

1.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다 박해당하다

친척이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가 불법적으로 구류소에 갇혔다. 나도 베이징에 가서 사부님과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법을 보호하고 싶었다. 당시에는 그런 생각뿐이었다. 나는 수련생 집으로 가서 청원하러 갈지 물었고 수련생은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2000년 설을 갓 쇠고 정월 초닷샛날 우리 둘은 기차역으로 갔다. 우리는 오후 내내 기다려도 기차를 타지 못했고 날이 곧 어두워지자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했다. 그때 날씨가 무척 추웠고 밤길도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큰길에는 내내 사람 한 명, 차 한 대 없었다. 내가 앞서서 자전거를 타고 수련생이 뒤따라왔다. 우리는 날이 밝을 때까지 자전거를 타서 어느 현(縣) 소재지에 도착했다. 우리집에서 여기까지는 적어도 100여 리(약 50km) 길이었다. 어떨 때는 자전거를 타면서 잠들었는데도 넘어지지 않았다.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나는 사부님께서 우리를 다른 공간에 두셨음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가는 길에 사람 한 명, 차 한 대도 없었겠는가. 몇 년간 참 이상하게 여겼다.

현 소재지에 도착한 우리는 자전거를 버스터미널에 놓아두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 외곽에 도착했을 때 수련생이 다른 사람에게 베이징에 청원하러 간다고 말하는 것을 버스 기사가 알게 됐다. 기사는 막무가내로 우리를 버스 밖으로 끌어내렸다. 되돌아가는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기사는 우리를 그 차 기사에게 넘겼고 우리는 다시 돌아오게 됐다.

돌아온 뒤 우리는 여전히 청원을 가고 싶어 친척을 찾아가 기차로 베이징에 가자고 상의했다. 기차역에 도착해 우리는 차표까지 샀다. 역에서 어떤 사람이 다가와 어디 가느냐고 묻기에 우리는 사실대로 말했는데 그가 현지 공안국에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안국에서 차가 와서 우리를 현지 구류소로 끌고 갔다. 우리는 13일 동안 구류됐다.

그 뒤 우리 둘은 세뇌반으로 보내져 불법 감금과 박해를 당했다. 세뇌반에는 60~70명이 있었는데 다들 매일 배불리 먹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서 있을 힘도 없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면서 매일 1인당 식비 20위안을 내야 했다. 세뇌반 직원들은 대법제자들에게 파룬궁을 연공하지 않겠다는 보증서를 쓰라고 했다. 쓰지 않으면 집에 보내주지 않았다. 한번은 내게 보증서를 쓰라 하기에 앉아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세뇌반 우두머리를 찾아갔다. 내가 “진실을 말할까요 거짓을 말할까요?”라고 묻자, 그는 생각하더니 “진실을 말해”라고 했다. 나는 “진실을 말하라면 쓸 수 없습니다. 하루라도 스승이면 평생 아버지인데 저는 쓰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그는 파룬궁수련생들을 모아놓고 회의할 때도 이 문제를 언급하며 ○○는 지금까지도 평생 스승으로 모신다며 누가 나가도 ○○는 못 나간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 아버지가 위독해지자 그가 나를 집으로 보내줬다. 나는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에 나는 세뇌반에서 4달 넘게 박해당했다.

그 뒤로 우리집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파출소, 공안국에서 사흘이 멀다 하고 집에 찾아와 괴롭히며 아직 파룬궁을 연공하는지 물었다. 연공한다고 하면 곧바로 구류소, 구치소, 세뇌반으로 붙잡혀 갔고 박해를 받아 다 죽어갈 때쯤 되어야 집으로 풀어줬으며 몸이 나으면 또 잡아갔다.

한번은 악당이 수많은 대법제자를 붙잡아 구류소가 거의 대법제자로 꽉 찼다. 밤에 연공하다 신고당하는 바람에 직원들이 우리를 모두 밖으로 끌어냈다. 밖에는 땅에 눈이 가득 쌓여 있었는데 그들은 수련생들을 발로 차서 땅에 무릎 꿇게 했다. 나는 땅에 엎드려 얼굴을 바닥에 댔다. 이때 가슴이 너무 답답했고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나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제가 왜 이러죠? 이거 대법에 먹칠하는 거 아닌가요?’라고 여쭈었다. 이렇게 생각하자마자 실 같은 하얀 빛 한 줄기가 단숨에 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는데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돌았다. 잠시 뒤 이 하얀 빛이 단숨에 밖으로 빠져나가 날아갔다. 당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지만 나는 이 빛줄기를 아주 또렷하게 보았다. 그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났고 괴로운 증상이 모두 사라졌다. 나를 대신해 고통을 감당하셨고 나를 구해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렸다.

그 뒤 악당은 구류소에서 우리 수련생 4명을 곧바로 구치소로 보내 불법 감금하고 박해했다. 우리가 협조하지 않자 악당은 나와 다른 젊은 수련생을 ‘시체 침대’(고문 도구)에 묶었다. 한 번에 사흘 밤낮을 묶었는데 보름 동안 두 번이나 묶였다. 두 손은 침대 머리맡에 묶였고 두 발은 아래쪽에 고정돼 움직일 수 없었다. 몸 밑에는 앵글철이 있어서 온몸의 통증을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법을 외웠다. ‘홍음’, ‘논어’, ‘정진요지’를 외우다 보니 점차 아프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제자를 대신해 고통을 감당해주신 것이다.

2. 남편의 변화

내가 막 파룬궁을 연공했을 무렵에는 아직 박해를 당하기 전이어서 남편과 아이 모두 나를 아주 지지했다. 그들은 내가 연공한 뒤 크게 변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공하기 전 나는 성격이 무척 나빴고 온몸에 병을 달고 살아 머리부터 아래까지 병이 없는 곳이 없었다. 나는 약을 한 움큼씩 먹었고 아무리 돈이 없어도 약을 먹어야 했다. 게다가 전부 불치병이었다. 나는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게 살아 자주 극단적인 생각을 했으며 괴로워서 살고 싶지 않았다.

파룬궁을 배워 연공한 뒤 나는 병이 다 나아 몸이 가벼워졌고 이때부터 다른 사람에게 화도 내지 않으며 가족과 이웃과 화목하게 지냈고 늘 즐겁게 웃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악당이 1999년부터 사람을 잡아들이고 가택수색을 하며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었고 수시로 나를 잡아 구류소, 구치소, 세뇌반으로 보내는 바람에 그 2년 동안은 거의 집에 있지 못했다. 그때 아들은 겨우 10살이었는데 거리를 떠돌았고 다른 아이들에게 자주 괴롭힘을 당했으며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할 때가 많았다. 어떨 때는 마음씨 좋은 사람이 아이에게 밥을 먹이기도 했다. 남편은 남의 일을 해주며 수시로 나가 며칠씩 돌아오지 않았는데 갈 때 아이에게 찐빵을 좀 사주고 남겨 먹게 했다. 내가 집에 돌아온 뒤 아이가 내게 “엄마, 아빠가 사준 찐빵이 꽁꽁 얼어서 씹을 수가 없었어”라고 말했다. 친할머니는 새어머니라 아이를 챙기지 않았다. 그때 아이가 고생을 참 많이 했는데 이는 모두 장쩌민 일당의 깡패 집단이 초래한 것이었다.

남편은 처음에 지지하며 자주 세뇌반에 아이를 데리고 와서 나를 면회했다. 이후 시간이 길어지자 그도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고 이간질을 당해 화를 냈다. 한번은 그가 세뇌반에 와서 나를 사무실로 불렀다. 나는 침대에 앉았고 남편은 바닥에 서서 내게 파룬궁을 연공하지 않겠다는 보증을 쓰라고 했다. 나는 “안 써요”라고 말했다. 그는 다가와 내 뺨을 한 대 세게 때렸다. 힘이 어찌나 센지 단숨에 난 침대 위로 쓰러졌다. 내가 일어나 앉자 그는 반대쪽 뺨을 때려 또 나를 쓰러뜨렸고 나는 다시 일어나 앉았다. 나는 조금도 화나지 않았다. 나는 남편에게 “화내지 말고 집으로 가요. 가세요”라고 말했다. 이때 그는 매우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못했다. 그는 내가 이처럼 차분하게 말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내가 미친 듯이 그를 때리고 할퀴며 잡아먹을 듯이 덤벼들 줄 알았던 것이다. 연공하기 전이었다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내가 집에 돌아온 뒤 그는 “당신 지금 어떻게 이렇게 변한 거야? 책에 대체 뭐라고 쓰여 있는지 나도 좀 봐야겠어”라고 말했다. 그는 책을 보더니 단숨에 모든 것을 깨달았다. 알고 보니 책에는 전부 사람에게 선하도록 가르치고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할 뿐 나쁜 점이라곤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나를 대하는 태도가 크게 바뀌었다. 이후 2002년에 내 사람 마음이 무거워져 1년 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는데 남편이 나를 일깨워주었다. 이는 사부님께서 남편의 입을 빌려 날 일깨워주신 것이기도 했다. 그는 “대법만 배워. 대법은 우주 대법인데 누구도 비할 수 없어”라고 말했다. 이후부터 나는 줄곧 대법 안에서 수련하며 법공부 연공 진상 알리기를 한 번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모두 잘해내지는 못했다. 나는 아직도 많은 사람 마음을 깨끗이 없애지 못했기에 대법 속에서 이런 더러운 사람 마음을 씻어내고 자신을 순수하게 만들어 반드시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다.

3. 단식으로 박해에 저항

2001년 한번은 세뇌반에서 우리 수련생 4명이 한 방에 감금됐다. 하루는 우리가 연공하는 것을 들켰다. 그때 관리가 매우 엄격했는데 이 일이 세뇌반 우두머리 귀에 들어갔다. 어느 날 그가 갑자기 우리 방으로 오더니 한 수련생에게 “네가 다른 방에 대고 소리쳤지?”라고 물었다. 그러고는 수련생을 사무실로 끌고 갔다. 사실 트집을 잡아 우리를 위협하려는 것이었다.

그날은 마침 정월 대보름이었는데 그 수련생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고 우리도 점심을 먹지 않았다. 직원이 들어와서 왜 밥을 먹지 않느냐고 묻기에 우리는 그 수련생이 돌아오면 같이 먹겠다고 했다. 그는 금방 돌아올 거라고 했다. 우리가 기다려 그 수련생이 돌아왔을 때 보니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든 채 절뚝거리며 돌아왔다. 게다가 입술은 담뱃불에 지져져 톱니 모양이 돼 있었다. 그날부터 우리 넷은 박해에 항의하며 단식을 시작했다.

거의 열흘쯤 됐을 때 현 인민대표대회 노인 무리가 세뇌반에 합동 조사를 하러 왔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알았다. 점심때가 되자 세뇌반 우두머리가 몇 명을 데리고 들어오더니 냄비 가장자리를 두드리며 “○○, 일어나서 밥 먹어라. 쌀밥에 당면 고기 찌개고 반찬이랑 국도 있다”라고 말했다. 나는 ‘저 사람이 또 악당을 돋보이게 하며 세상 사람을 속이려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목소리를 높여 큰 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오늘 웬일이래요? 쌀밥에 당면 고기 찌개라니. 여기 온 지 한 달이 다 돼가는데 쌀밥이나 당면 고기 찌개는 구경도 못 했어요.” 내가 이렇게 폭로하자 세뇌반 우두머리는 얼굴빛이 변하더니 씩씩거리며 밥을 든 채 부하들에게 “가자!”라고 말했다. 그는 욕을 내뱉으며 자리를 떴다. 내가 보니 창밖에 많은 사람이 모여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일로 그 관리는 단단히 화가 났다.

오후에 인민대표대회 사람들이 돌아가자 세뇌반 우두머리는 한 무리를 데리고 우리 방으로 왔다. 그는 윗옷을 벗고 나를 때릴 자세를 취하며 내게 큰 소리로 욕을 해댔다.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나는 대꾸하지 않고 정념을 발했다. 그때는 그것이 정념인 줄도 모르고 그저 ‘사악을 질식시켜라’, ‘사악을 질식시켜라’라며 사부님의 이 법 구절만 줄곧 외웠는데 수련생들도 내가 외우는 것을 들었다. 내가 한참을 외우자 그들은 나를 한 대도 때리지 못하고 도리어 내 옆에 누워있던 수련생의 뺨을 몇 번 때리더니 돌아갔다. 법의 위력은 정말 컸다. 사부님께서 늘 내 곁에서 나를 보호해주신 것이다.

한번은 현 구치소에서 박해에 항의하며 단식했을 때 악당 직원들이 우리 셋에게 매일 두 번씩 강제 음식 주입을 했는데 그야말로 생사의 고비였다. 구치소 측은 남자 죄수들을 풀어 우리를 박해하게 했다. 나를 철제의자에 묶고 두 손을 등 뒤로 수갑 채운 뒤 허벅지 위에 널빤지를 올려 꼼짝 못 하게 했다. 나는 있는 힘껏 이를 악물고 음식을 넣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쇠막대기로 치아를 비틀어 열고는 머리채를 잡아당겨 얼굴을 위로 향하게 한 뒤 컵으로 내 입에 무언가를 쏟아부었다. 나는 숨이 막혀 기절할 뻔했고 얼굴은 새카맣게 질렸다. 당시 법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 오성이 부족한 탓에 사부님을 불러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우리 사부님은 못 하실 일이 없으신데 내가 정말 바보 같았다.

4. 사명을 잊지 않고 중생을 구하다

장쩌민 깡패 집단이 파룬궁을 탄압한 이후 나는 불법 감금돼 자유를 잃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줄곧 중생을 구하는 일을 했다. 이후 나도 ‘작은 꽃’(가정 자료 제작소) 하나를 피웠는데 없는 게 없었다. 자료를 만들면 내가 직접 배포하러 가고 스티커를 붙이고 CD를 배포했다. 한번은 수련생과 다리 위에서 글씨를 스프레이로 뿌렸는데 큼직한 붉은 글씨가 눈에 아주 잘 띄었다. 거기에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 ‘우리 사부님은 결백하시다’, ‘전 세계가 장쩌민을 공개 재판하라’라고 뿌렸다. 한창 뿌리고 있는데 사람이 왔고 오토바이를 탄 사람이었다. 그가 우리 앞까지 와서 우리를 쳐다봤다. 수련생은 재빨리 도망쳐서 자취를 감췄다. 어쩌지? 잠시 뒤 그 사람이 가버리자 나는 뿌리다 만 글씨를 마저 다 뿌렸다. 그 뒤 나도 집으로 돌아갔다.

처음에 악당이 미친 듯이 파룬궁을 박해하며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파룬따파를 모독하고 비방하자 나는 몹시 화가 나고 기분이 언짢아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후 한 수련생이 내게 진상 전단 한 장을 주며 복사 가게에서 복사할 수 있다고 하기에 나는 복사 가게를 찾아냈다. 그때 악당의 통제가 아주 심했다. 나는 100장을 복사해달라고 했다. 점원은 아무 말도 안 했고 무엇인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복사기 두 대가 50장씩을 찍어내지 못했다. 기계가 너무 뜨거워져 종이가 엉겨 붙고 말려버렸다. 가게 주인이 잠시 식히자고 했다. 한창 식히고 있는데 경찰복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고 우리 몇 명이 서서 기계를 쳐다보는 것을 보더니 인쇄된 자료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가 막 보려고 하기에 나는 그의 손에서 자료를 빼앗아 보지 못하게 했다. 이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가버렸다. 사부님께서 제자를 보호하시어 경찰이 보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이후 수련생의 소개로 자료를 인쇄하는 수련생을 알게 됐는데 그가 내게 자료를 공급해 줬고 전부 낱장이었다. 나와 수련생은 그것을 두부 모양으로 네모나게 접어 작은 비닐봉지에 넣고 붉은 종이로 자료를 감쌌다. 한쪽에는 복(福), 한쪽에는 연(緣)이라고 적었는데 아주 예뻤다. 처음에는 사람들도 무엇인지 몰라 다들 주워서 봤다. 어떨 때 우리는 농촌에서 배포했는데 큰 자루 하나에 가득 담아 집집마다 나눠주었다. 우리는 자주 새벽 2~3시까지 배포했다. 농촌에는 개가 많아 나는 두꺼운 양말을 신고 신발을 든 채 배포했다. 나는 힘든 줄도 몰랐고 마음속으로 무척 기뻤다. 중생들이 진상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16년 수련생이 불법 감금되어 나와 수련생 몇 명이 찾아갔다. 우리가 진상을 알리며 사람을 풀어달라고 요구하자 구류소에서는 온갖 구실로 트집을 잡았다. 이후 그들은 우리마저 구류소에 불법 감금했다. 그 뒤 그들은 내가 우두머리라는 핑계로 나 혼자 구치소로 보내 박해했다. 구치소에서 그들은 내게 반드시 감방 규칙을 외우라고 했지만 나는 외우지 않았다. 이후 감방장도 내게 외우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방에는 30여 명이 있었고 침대가 두 줄로 놓여 밤이면 모두 침대에 누워 머리를 마주했다. 나는 감금된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그들에게 파룬궁은 사람에게 착해지도록 가르친다는 것과 공산당의 사악함, 천안문 분신자살 조작 사건, 선악에 응보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감방장도 들으면서 내게 뭐라 하지 않았고 늘 파룬궁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했다. 그 뒤 내가 감방장에게 연공해야겠다고 하자 그는 가부좌만 허락했다. 이후 내가 동공을 연공하는 것을 감옥경찰이 봐서 박해를 당해 강제 음식 주입을 당하고 10여 일간 족쇄를 찼다. 그 뒤 나는 감방을 바꿔달라고 요구했고 새로운 환경에서 또 진상을 알려 적지 않은 사람을 삼퇴시켰다. 그러고 나서 새로 들어온 젊은 수련생이 있었는데 어느 죄수에게 바지 지퍼를 뜯겨 속옷이 다 드러난 상태였다. 내가 그것을 보고 수련생에게 바지를 주고 또 옷 몇 벌을 줬다. 이후 감옥경찰이 내게 옷을 줬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그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사실 방 안의 감시 카메라에 다 찍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한번은 감방의 서열 3위인 죄수가 새로 온 수련생을 괴롭히고 모욕하며 사부님까지 비방하기에 나는 참지 못하고 그와 싸웠다. 그는 파룬궁이 만만한 줄 알고 감옥경찰에게 일러바치기까지 했다. 경찰이 다가와 내 이름을 부르며 “너는 왜 ××와 싸웠지?”라고 물었다. 나는 “그가 왜 우리 사부님을 비방하게 놔둡니까, 우리 사부님을 욕하면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감옥경찰이 “언론의 자유잖아”라고 하자, 나는 “그가 언론의 자유가 있다면 저도 언론의 자유가 있습니다”라고 대꾸했다. 감옥경찰은 웃더니 아무 말 없이 가버렸다. 그 후 나는 이 죄수에게 진상을 알려 ‘대법을 선하게 대하는 한 일념이 하늘이 내리는 행복과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것과 선악에 응보가 있다는 것은 천리임을 깨닫게 했다. 그 뒤로 우리 사이는 무척 좋아졌고 그는 감방에서 자주 나더러 사람들에게 ‘득도(得度)’ 노래를 부르게 했다. 나는 집에 돌아가기 전날에도 모두에게 ‘득도’를 불러주었다.

5. 신기한 대법, 운반공

2018년, 중공 악당이 또 우리집에 와서 괴롭히고 가택수색을 하며 많은 물건을 빼앗아 갔는데 CD 몇 상자가 있었다. 사실 그때 또 나를 납치하려 했지만 나는 집에 없었다. 그 뒤로 나는 정처 없이 떠돌았다. 이후 집에 가보니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고 이 물건들, 특히 CD 6~7상자가 너무 아까웠다. 나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불법 신통이 떠올랐고 명혜망에서 수련생이 운반공을 사용한 글을 본 적이 있어 사부님께 도움을 청해 이 CD들을 모두 옮겨오게 해달라고 했다. 반년 뒤 집에 돌아가 장롱 밑을 보니 CD 몇 상자가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정말 신기했다! 대법 사부님은 정말 위대하시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6. 정처 없이 떠도는 기간 사람을 구하다

정처 없이 떠돈 7년이란 세월 동안 나는 가정부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매일 시간이 나면 나가서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했다. 지난 몇 년 전염병 기간에도 나는 쉬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문이 봉쇄됐을 때는 각 계단을 다니며 자료를 배포했다. 문만 열리면 나가서 사람을 구했다.

전염병 기간에 나는 백신도 맞지 않았고 핵산 검사도 받은 적이 없다. 그때 악당은 이 일을 아주 엄격하게 통제해 누구나 백신을 맞아야 했고 매일 모두가 검사를 받아야 했다. 어떨 때는 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방문 검사를 했다. 한번은 검사 직원이 내가 있는 집에 와서 문을 두드렸다. 나는 그 집 친척이 온 줄 알고 문을 열어줬다. 보니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이 우리를 검사하겠다며 신분증을 요구했다. 나는 “우리는 검사 안 받아요, 저는 아무것도 없고 몰라요”라고 말했다. 그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자녀에게 연락하도록 하세요”라고 했다. 내가 “노인은 안 받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라고 했다. 이때 그 남자가 여자를 한 번 밀치더니 그냥 가버렸다. 사부님께서 나를 보호해주신 것이다.

2022년에 나는 또 새로운 집에서 가정부 일을 하게 됐다. 할머니는 그해 85세였고 시 인민대표대회에서 은퇴한 간부였다. 할머니는 평생 파란만장하게 살아 12세부터 아동 노동자로 일하며 무척 고생했고 공산당의 사악함도 알고 있었다. 내가 처음 갔을 때 ‘9평 공산당’을 보여주었는데 처음 읽고는 몹시 흥분하며 “보니까 화가 나. 공산당은 원래 이래서 오늘은 이 사람을 투쟁하고 내일은 저 사람을 투쟁하며, 무대 위에서는 사람 같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면 사람 짓을 안 해”라고 말했다. 당시 나는 할머니에게 삼퇴(중국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를 시켜주었다. 이후 나는 할머니에게 연공을 가르쳤고 가끔 우리 둘이 법공부도 했다. 이후 눈이 잘 안 보인다고 하기에 내가 읽어주었다. 전염병 기간에도 할머니는 감염되지 않고 줄곧 건강했으며 대법제자가 출연한 드라마를 보여주니 아주 즐겨 보셨다.

할머니는 자기 과거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할머니는 무척 예뻐서 젊은 시절 하마터면 악당의 마수에 걸릴 뻔했다. 젊었던 그 시절 중앙당 우두머리가 베이다이허로 요양을 갈 때면 매년 전국에서 미인을 뽑았는데 어느 해 할머니도 뽑혀 집결지에 가게 됐고 그곳에서는 외부와 연락을 끊어야 했으며 가족과 만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할머니는 부모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어느 날 할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집결지 대문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 경비병도 있었는데 뜻밖에 빠져나온 것이다. 두 번째 미인 선발 때 또 뽑혔다. 이번에는 이미 기차에 올랐다. 기차 안에서 차장이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차에 탄 게 어떤 사람들인데, 미녀를 뽑아서 뭘 어쩌고저쩌고…” 그 말을 듣고 할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때 기차가 역에 도착했고 할머니는 또 기적처럼 기차에서 내렸다. 그 뒤 기차는 떠났고 할머니는 또 한 차례 위기를 모면했다.

우리는 아주 잘 지냈는데 할머니가 먹고 싶다는 건 다 만들어드렸고 모든 걸 할머니에게 맞췄다. 나는 자주 남은 밥과 반찬을 먹었다. 할머니는 자주 한밤중에 배고파하셨는데 그럴 때면 계란찜이나 우유와 계란을 만들어드렸다. 어떨 때 게나 새우 같은 걸 먹을 때면 내가 다 껍질을 까서 드렸고 할머니는 아주 만족해하시며 우리는 친척처럼 지냈다.

이후 할머니는 바지에 소변이나 대변을 자주 지렸지만 나는 더럽다고 여기지 않았다. 한밤중에 자주 나를 깨워 바지를 갈아입혀 달라고 했다. 어떨 때는 하룻밤에 두 번이나 갈아입혔다. 어떨 때는 일어나기 싫기도 했지만 그럴 때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정진요지-불성무루)가 떠올라 흔쾌히 옷을 갈아입혀 드렸다.

7. 사부님께서 또 한 번 내 목숨을 구해주시다

2024년 어느 날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스쿠터를 타고 직진하는데 청신호였고 거의 다 지났을 무렵 갑자기 옆에서 승합차 한 대가 곧장 달려왔다. 내 스쿠터가 승합차 옆면에 ‘쾅’ 부딪혀 나는 3미터 넘게 튕겨 나갔다. 당시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속이 너무 불편해 가볍게 끙끙 소리를 두 번 냈더니 단숨에 숨이 트였다. 내가 깨어난 것이다. 사부님께서 내 목숨을 구해주신 것이다. 당시 나는 줄곧 마음속으로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외웠다. 내 머리에는 부딪혀서 달걀만 한 큰 혈종이 생겼다. 5~6시간 뒤 큰 혈종이 사라졌고 머리도 어지럽지 않았다. 아이들은 모두 믿기 어렵다고 여겼다. 정말 신기했다.

2024년 12월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나는 딸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아이 방학이라 딸이 손자를 데려와 학원에 보냈다. 나는 시간이 생겨 매일 아이를 등하교시켰다. 하루는 오후에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와서 아파트 계단 입구에 막 도착했을 때 어떤 사람이 내게 “당신 ××죠?”라고 물었다. 나는 그를 쳐다보며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 맞잖아, 안 틀렸어”라고 했다. 알고 보니 악당이 줄곧 딸네 아파트 단지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공안국으로 끌려갔다. 가는 길 내내 그들에게 대법 진상을 알리며 대재앙이 닥치기 전에 진상을 밝히 알고 구원받기를 바랐고, 선에는 선한 응보가 따르고 악에는 악한 응보가 따른다는 것과 파룬따파는 불법(佛法)이며 사람을 선한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고 사람을 구하는 것임을 이야기했다.

공안국 안에 간부처럼 보이는 사람이 “파룬궁은 사교야”라고 말했다. 나는 말했다. “파룬따파는 정법이고 사람에게 선을 향해 좋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며 중공 중앙, 국무원, 공안부가 두 차례 사교를 지정할 때도 파룬궁은 없었습니다.” 나는 말했다. “중공 악당은 못 하는 짓이 없어서 수년간 파룬궁수련생의 장기를 생체적출해 비싼 값에 팔아먹고 외국 부자들이 중국에 와서 장기이식을 받고 있습니다.”

이후 그들은 현지 파출소에 연락해 나를 데려가게 했다. 파출소에서도 나는 내내 악당의 사악함을 이야기했다. 늘 토사구팽한다는 것, 3반, 5반, 4청, 문화대혁명, 89년 6·4(천안문 사태) 때 대학생들을 총살하고 탱크로 학생들을 깔아뭉개 피가 강물을 이룬 것을 이야기했다. 문혁 이후 800명이 넘는 경찰을 윈난성으로 끌고 가 비밀리에 총살하고는 유족에게 종이 한 장 주며 공무 중 순직했다고 얼버무려 희생양으로 삼은 것을 이야기했다. 파룬궁을 박해해 응보를 받은 사례를 이야기하며 런창샤(任長霞, 허난성 덩펑시 공안국장), 화하이잉(滑海英, 허베이성 짠황현 기율검사위 상임위원)이 파룬궁을 박해해 가족에게까지 재앙이 미쳤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 뒤 나는 파출소에서 연공하고 정념을 발하며 진상을 알렸다.

이튿날 출근 시간이 되자 키가 큰 남자가 왔다. 그가 “당신이 ××요?”라고 묻기에, 나는 “누구시죠? 소장인가 보네요”라고 했다. 그가 그렇다고 했다. 나는 말했다. “젊은이, 파룬궁 박해에 가담하지 마세요. 파룬궁은 불법이고 인과응보가 있다는 것은 천리인데,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당신네 파출소는 헌법을 어기며 수시로 우리집에 와서 가택수색하고 사람을 잡아가며 사적인 민가에 침입했어요. 가택수색할 때 수색영장도 없었고 사람 잡을 때 체포영장도 없었죠.” 소장은 “아주머니, 그건 제가 한 게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말했다. “소장이 한 게 아니란 건 알아요. 하지만 이런 짓은 이 파출소에서 한 것이고 윗선에서 지시한 것이며 거짓말에 속은 겁니다. 우리 사부님께서 세상 사람은 모두 사부님의 가족이라고 하셨어요. 사부님의 가족이면 내 가족이기도 해요, 나는 대법제자니까요. 그래서 여태껏 그들을 고발하지 않았고 이 사람들이 잘못을 고치고 파룬궁 진상을 알아 대법의 제도를 받기 바랄 뿐입니다.” 소장은 “이건 저희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말했다. “내가 이야기 하나 해줄게요. 뉘른베르크 대재판 알죠? 어떤 경비병이 총을 쏴서 도망가려던 시민을 죽였어요. 대재판 때 판사가 사람을 죽였으니 형을 선고해야 한다고 했어요. 경비병의 변호사는 이건 그의 책임이 아니고 그는 그저 명령을 집행했을 뿐이라고 했죠. 판사는 명령을 집행하지 않을 수는 없었겠지만 정의와 양심이 사람됨의 준칙이니 총구를 1센티미터만 위로 올려 맞히지 않을 수 있었다고 했어요.” 소장은 “음” 하고 대답했다.

사부님의 도움 아래 정사대전(正邪大戰) 속에서 이 젊은이들(경찰)은 그래도 정의를 선택했다. 마지막으로 파출소는 내 자녀에게 전화해 나를 집으로 데려가게 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사부님의 안배임을 깨달았다. 자비롭고 위대하신 은사님, 시시각각 제자를 보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자는 사부님께 머리를 조아려 절을 올립니다.

 

원문발표: 2026년 9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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