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청(丹靑)의 도

– 중국화 ‘천인합일’ 정신의 연원

글/ 소가(蕭歌)

[명혜망] 중국은 예로부터 ‘단청(丹靑)’이라는 두 글자로 회화 예술을 일컬었으며, 중국화(中國畵)를 또 ‘단청’이라고도 부른다. 한(漢), 당(唐), 송(宋), 원(元), 명(明), 청(淸) 2천여 년을 거치며 매개체와 표현 형식에 변화가 있었지만, 단청의 내재적 정신인 ‘자연의 본성에서 비롯되어 조화의 공을 이룬다(肇自然之性,成造化之功)’는 천고에도 변치 않는 전통이다.

단청에서 ‘단(丹)’은 주사(朱砂, 빨강)를, ‘청(靑)’은 청확(靑雘, 남녹색 석청)을 가리킨다. 단청은 색채가 선명하고 화려하며 쉽게 퇴색하지 않기 때문에 고대에는 단책(丹冊)으로 공훈을 기록하고 청사(靑史)로 사실을 기록했다. 사학자들은 흔히 단청을 빌려 어떤 사람의 공훈이 탁월해 영원히 역사에 기록돼 지워지지 않음을 비유했다. 단청의 함의는 미술 자체를 훨씬 뛰어넘는다.

단청은 일찍이 예악에서 기원했다

선진(先秦) 및 한나라 시대에 색채는 예악(禮樂)에 속했고 회화와 배색에는 엄격한 예의 규정이 있어 장인이 임의로 기량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들은 백공(百工)의 하나로서 비단, 돌, 와당(瓦當) 등에 천계(天界)의 상서로운 징조와 신수(神獸) 문양을 엄격하게 새겨 넣었다.

한나라 벽화, 백화(帛畵) 및 화상석(畫像石)에는 서왕모(西王母), 동왕공(東王公), 우인(羽人), 청룡, 백호 등 신선 형상이 대량으로 등장한다. ‘한무내전(漢武內傳)’ 기록에 따르면, 서왕모는 한무제(漢武帝)에게 수련 전적(典籍)을 전수했고 아울러 그에게 ‘오악진형도(五嶽眞形圖)’를 주어 후세에 전하게 했다. 시안 비림(碑林)에 진열된 석각 중에도 ‘오악진형도’ 석각이 있다. 한나라 사회에서는 신선 방술에 대한 독실한 믿음과 숭상이 유행했다. 고인(古人)들은 바로 단청의 불후의 색채와 엄격한 규정을 빌려, 피안의 세계에 대한 깊은 동경과 우화등선(羽化登仙) 및 반본귀진(返本歸眞, 선천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의 정신적 추구를 불후의 이미지 기억 속에 진실하고 구체적으로 남겼다.

‘의관남도’ 이후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기, 특히 서진(西晉) 말년부터 동진(東晉) 시기에 이르기까지 단청은 예의 문화에서 독립해 새로운 예술 형식이 됐다. 이러한 변화에는 깊은 내적 요인이 있다. 서진 말년 북방에서 ‘영가(永嘉)의 난’이 발발했다. 호인(胡人)이 낙양과 장안을 함락시키며 서진은 멸망했다. 10만 진나라 군대와 사족(士族, 문벌 귀족)들은 공포 속에서 서로 짓밟혔다.

북방의 사족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종족을 이끌고 떼를 지어 남방으로 도망쳤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의관남도(衣冠南渡)’라 부르며 이들은 동진을 건국했다. 어떤 이는 중국 역사를 언급할 때마다 항상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져 서민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느냐고 말하는데, 이는 중국 문화에 대한 일종의 오독(誤讀)이다. 왜냐하면 어떤 큰 변화든 모두 천상의 변화 아래 이끌려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예언가들은 별자리를 관측해 서진이 멸망할 것을 이미 예언했다.

서진 이전 시대에 한무제가 비록 중국을 통일했지만 남방은 여전히 ‘야만적이고 장기(瘴氣)가 서린 땅’이었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강남을 ‘강남은 지대가 낮고 습해 남자들이 일찍 죽는다’고 묘사했다. 북방 중원 사람들의 눈에 그곳은 미개화된 ‘사람이 살 곳이 아닌 곳’이었다.

‘의관남도’는 중원의 예악 문명을 남방으로 본격적으로 추진시켰고, 남방은 화하(華夏) 정통 문화를 맞이하게 됐다. 북방 이민자들은 나라와 가정이 부서지는 창상과 전례 없는 고통, 깊은 사색을 직접 겪었다. 강남의 푸른 산과 맑은 물, 아름다운 나무와 화려한 숲은 물질적 터전을 잃은 북방 문인들이 새로운 정신적 터전을 창조하도록 자극했다.

중국 역사상 첫 번째 예술적 찬란함은 바로 이러한 큰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서화동원

일반적으로 ‘서화동원(書畫同源)’이라고 하듯이 서예와 단청은 짝을 이뤄 생겨났다. 서예를 말하자면, 동진의 왕희지(王羲之)는 ‘천하 제일의 행서’인 ‘난정집서(蘭亭集序)’를 썼다. 그런데 왕희지는 바로 ‘의관남도’의 고난 속에서 지냈다. 그의 당숙이자 서진의 명신 왕연(王衍)이 고현(苦縣)에서 호인들에게 산채로 담장에 깔려 죽었을 때 왕희지는 대략 8세였고, 그 후 아버지 왕광(王曠)이 북방 전장에서 실종됐다(일설에는 전사했다고 함). 중원이 함락된 고통에 직면해, 그는 감정을 눈앞의 강남 산수에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왕희지가 ‘난정집서’에서 붓을 휘둘러 ‘죽고 사는 것 또한 큰일이니 어찌 통탄하지 않으리오(死生亦大矣,豈不痛哉)’라고 쓴 것은, 그가 생사의 큰 난을 겪은 후의 철저한 깨달음이었다.

여러 해 뒤, 남북조 화가 종병(宗炳)은 왕희지의 생활 방식을 추모하며 산수 사이에 마음을 기탁한 채 30여 년간 산수를 마음껏 유람하며 공명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종병은 수련 문화에 조예가 깊어 ‘명불론(明佛論)’을 지었고 ‘정신은 불멸하며 사람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등의 견해를 명확히 제시했다. 한편으로 그는 또한 예술가로서 ‘화산수서(畵山水序)’를 써서 중국 산수화론의 길을 연 작품이 되게 했다. ‘화산수서’에는 “이제 흰 비단을 펼쳐 멀리 비추어 보면, 곤(昆)과 낭(閬)의 형상을 사방 1촌 안에 가둘 수 있다. 세로로 세 촌(寸)을 그리면 천 길 높이에 해당하고, 가로로 몇 척(尺)의 먹을 칠하면 백 리의 멂을 체현한다”라고 쓰여 있다. 종병은 흰 비단에 산수를 그리는 것은 바로 ‘곤(곤륜산)’과 ‘낭(낭원, 전설 속 서왕모가 거주하는 선경)’을 그리는 것이라고 명확히 밝혔다. 사방 1촌의 비단에 청록 산수로 ‘신산(神山)의 심상’을 묘사한 것이다. ‘화산수서’에서 종병은 광성자(廣成子), 대외(大隗), 허유(許由), 고죽(孤竹) 등 도가(道家) 신선과 은일(隱逸)의 대표들을 손쉽게 인용했는데, 이를 통해 중국 산수화가 탄생할 때부터 신성(神性) 문화 위에 구축됐음을 족히 알 수 있다.

당나라 시대에 산수화의 ‘진면목’을 다지다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중국 단청 산수화가 전례 없이 번영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사마승정(司馬承禎)은 수도자인 동시에 화가였다. ‘태평광기(太平廣記)’에 따르면, 당현종은 사마승정을 여러 차례 장안으로 오게 해 매우 존경하며 내전에 머물게 하고 그에게 수련에 관한 일을 가르침 받았다. 그가 비교적 조심스럽게 말했고 현종 또한 외인에게 누설한 적이 없었다. 훗날 당현종은 사마승정을 위해 왕옥산(王屋山)에 양태궁(陽臺宮)을 지어 주었는데, 이곳은 마침내 대당(大唐)의 문화 성지가 됐다. 이곳에서 사마승정은 책을 저술하고 학설을 세우며 도학(道學)을 수련했다. 그는 신선은 결코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수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며 “그러므로 신선 역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촉(蜀)나라 여인 사자연(謝自然)이 그를 따라 도를 배웠고 마지막에 백일비승(白日飛升)해 떠났는데, 목격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있으며 역사상 유일한 사례이기도 하다.

양태궁에서 사마승정은 ‘상천지궁부도서(上天地宮府圖序)’를 써서 청록 산수에 대해 남조 종병의 ‘화산수서’보다 더욱 세밀하고 생동감 있는 지침을 부여했다. “무릇 천지의 자질이 기(氣)를 받은 초기에…… 그 명산 동부(洞府)는 각각 신선이 주재한다. 그 사이에는 영묘한 학이 길을 안내하고, 소나무와 덩굴이 그늘을 드리우며, 선초(仙草, 영지)가 죽지 않으니 모두 성진(聖眞)이 노니고 쉬는 곳이다.” 그는 ‘동천복지(洞天福地)’에서 도가 수련 동부의 분포 위치를 명확히 표시했지만, 일반인은 볼 수 없고 오직 수도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공간은 사실 바로 다른 공간이기 때문이다. 중국을 예로부터 ‘신주(神州)’라 불렀는데, 확실히 지리적 환경에 대응되며 명산대천에는 모두 유래가 있다. ‘산은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으면 이름나고, 물은 깊지 않아도 용이 있으면 영험하다’고 했듯이, 산과 물의 표면은 하나의 모습일 뿐 사실 보이지 않는 다른 공간에는 별천지가 있다.

사마승정은 이백(李白)과 평소 교류가 있었고, 맹호연(孟浩然), 왕유(王維), 하지장(賀知章), 진자앙(陳子昂), 송지문(宋之問) 등의 교류도 이끌어내어 세상에서는 이들을 왕옥산 양태궁의 ‘선종십우(仙宗十友)’라 불렀다. 사마승정은 양태궁에 거대한 산수 벽화를 남겼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이 벽화는 높이 16척, 길이 95척으로 산골짜기, 언덕과 골짜기, 떠도는 구름, 선학(仙鶴)이 그려져 있어 기세가 웅장했다. 이백은 이를 본 후 붓을 휘둘러 유명한 ‘상양태첩(上陽臺帖)’을 썼다. “산은 높고 물은 길며 물상은 천만 가지이니, 노련한 붓이 아니면 그 맑고 장엄함을 다 담아낼 수 없으리라. 18일, 양태에 올라 쓰다. 태백(太白).” 이것은 이백의 현재 유일하게 현존하는 묵적(墨迹)이다.

양태궁의 산수화는 이전의 아득하고 신비롭던 ‘곤륜’을 구름 기운, 송백, 청산, 녹수 등 구상적이고 실재적으로 변하게 했다. 사마승정의 산수화 논술 및 창작은 성당(盛唐) 시기 한 세대 문인들의 심미를 직접적으로 윤택하게 했고, 당나라 산수시(山水詩)와 산수화가 세상을 풍미하게 된 지혜의 원천이 됐다. 당현종이 총애했던 화가 오도자(吳道子), 이소도(李昭道)는 산수화 창작에 있어 모두 사마승정의 산수관(山水觀)에 깊이 물들었다.

당나라 이전 산수화는 동진 고개지(顧愷之)의 ‘낙신부도(洛神賦圖)’처럼 인물 이야기의 배경인 경우가 많았다. 산이 사람보다 작아 산수는 그저 인물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일 뿐이었다. 사마승정은 도가의 동천복지와 청정무위(淸靜無爲)의 우주관을 산수에 주입했고, 이백, 왕유 등 시인들은 이를 문자로 전환해 산수가 더 이상 차가운 돌이 아니라 기운과 호흡, 생명력이 충만한 정신적 매개체가 되게 했다. 산수화에 영성이 주입됐고, 이 이후의 중국 산수화는 산이 크고 사람이 작아졌다. 산수는 창우(蒼宇) 천지가 인간 세상에 투사되고 연결된 것이며, 사람은 속세에서 길을 잃은 생명이었다. ‘동천(洞天) 세계’ 앞에서 사람들은 그 동천 속의 순수함과 천진함을 갈망했다.

‘1제곱미터 수도원’

왕유의 산수시와 산수화는 1천여 년을 거쳤음에도 주워서 읽을 때마다 마음에 스며들게 하고 이목을 상쾌하게 한다. “사람이 한가로운데 계수나무 꽃이 떨어지고, 밤이 고요하니 봄 산이 텅 비었네. 달이 떠올라 산새를 놀라게 하니, 때때로 봄날 시냇물 속에서 우네.” 이 ‘조명간(鳥鳴澗)’이라는 시는 마치 봄날의 고요한 밤에 혼자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에서 달빛 속에 녹아들어 산새와 함께 날고 시냇물과 함께 흐르는 듯하다.

왕유는 중국 문인 수묵화의 비조(鼻祖)로 존경받는다. 왕유는 화론(畵論)인 ‘산수결(山水訣)’에서 “자연의 본성에서 비롯되어 조화의 공을 이룬다”라고 말했다. 왕유의 산수는 원림(園林)과 궁정에 의존하지 않고 도시와 시골을 모두 화폭에 담을 수 있었으며, 자연물의 움직임과 고요함을 가볍게 윤곽을 그리고, 천지 조화를 그림 바닥에 깊이 묻어두었다. 송나라 전설에 따르면 대문학가 진관(秦觀)이 하루는 위장병에 걸렸는데, 어떤 친구가 왕유의 명화 ‘망천도(輞川圖)’를 받쳐 들고 그에게 보여주었다. 뜻밖에도 그가 며칠 동안 그것을 보았더니 마치 울창한 산곡에 와서 상쾌한 공기를 마신 듯 오장육부가 모두 깨끗하게 씻긴 것 같았다. 이에 기분이 매우 좋아졌고 위장병도 약 없이 나았다.

5:長江積雪圖-王維(局部)

(전) 왕유 ‘장강적설도’(일부),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미술관 소장(퍼블릭 도메인)

당나라 시대부터 산수화는 고인들의 생활 속에서 ‘이동하는 도화원(桃花源)’이 됐다. 송·원·명·청에 이르기까지 중국 산수화는 끊임없이 이어져 대청에 세외(世外)의 그윽한 화권을 걸어두고 세속의 번잡한 일에 얽매일 때면 사람이 그림 속에서 ‘거닐 수 있고, 바라볼 수 있고, 머물 수 있고, 유람할 수’ 있었다.

안사(安史)의 난, 황소(黃巢)의 난 및 오대(五代)의 수백 년 전화(戰火) 속에서 한·당의 예악 전통은 많이 실전되고 단절됐으며, 정통 예의는 점차 퇴색됐다. 송·원·명·청 시기에 이르러 과거(科擧) 제도가 크게 유행했고 ‘팔고문(八股文)’이 교조화, 제도화되면서 도덕 교화를 담고 있던 예악이 세속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명나라 이지(李贄)가 통렬하게 진술했듯이 진정한 성인의 마음은 경직된 경서 문자 속에서 죽어갔다.

산수화는 마치 세속을 벗어난 한 줄기 청류(淸流)처럼 수많은 선비와 군자의 내면에 졸졸 흘렀다. 현재의 세속적인 인륜(人倫) 세계는 타락하고 어질지 못하지만, 산수는 깨끗하다. 현실에서 벼슬길이 험난하고 사회가 격동하는 것에 직면해, 집안에 걸어둔 산수화는 마치 마음이 머무는 한 공간과 같았다. 그림 속 그 초당, 산골짜기 시냇가에 홀로 앉아 있는 그 작디작은 은사는 사실 세인 자신의 영성이 화신한 것이다. 한 폭의 석 자짜리 산수화는 바로 ‘1제곱미터 수도원’이다.

圖:千里江山圖(局部)

송나라 왕희맹(王希孟) ‘천리강산도’ 일부(퍼블릭 도메인)

화가라는 신분 때문에 이데올로기를 건드리지 않고 권력과 얽히지 않았기에, 화가는 한 장의 화선지와 척독(尺牘) 사이에서 산수로 영원함을 표현하고 단청으로 마음을 기탁할 수 있었다. 송나라 이후 중국화의 세속화 경향에 따라 인생을 소일하고 세상을 희롱하며 화조어충(花鳥魚蟲)이 크게 유행했지만, 산수화는 시종일관 세속을 벗어난 맑은 연꽃처럼 역대로 전해지며 오랜 시간이 지나도 쇠퇴하지 않았다.

천인합일: 어디에나 있는 일상생활

명·청 근대에 이르러 사회 도덕 수준은 한·당 시기와 이미 큰 변화가 생겨, 신명(神明)에 대한 사람들의 경외는 이익화, 표면화됐다. 사찰에 가서 부처에게 구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불도장(佛跳牆)’을 먹었다. 하지만 ‘하늘(天)’은 결코 중국인의 정신세계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민간 전통 예악이 길상(吉祥) 문양, 별자리 천도(天圖), 복록수희(福祿壽禧)로 화할 때 누구도 ‘하느님(老天爺)’을 언급하며 불경스럽게 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산수화도 이러한 상서로운 문화에 주입돼 도자기, 가구, 부채, 연화(年畫), 건축 조각, 복식 자수 등, 푸른 산 하나, 정자 하나, 기러기 몇 마리가 나는 모습이 지척 사이에 생활 속에 고정돼 무형 중에 사람들의 심미 관념에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문화대혁명 기간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천인합일’ 부호는 말살되지 않았고 무의식중에 다방면에 스며들었다. 예를 들어 혁명 모범극인 ‘사가병(沙家浜)’의 한 막에서 무대 정중앙에 팔선탁자(八仙桌), 긴 의자, 자사호(紫砂壺)가 놓여 있고 주인공 아칭(阿慶) 아주머니 몸의 남색 꽃무늬 천은 가장 본고장의 강남 민간 전통 부호를 간직하고 있었다. 이러한 ‘천인(天人) 질서’를 암시하는 상서로운 부호는 ‘사구(四舊)’를 전면적으로 박살 내는 붉은 바다 속에서도 무대 위에서 버젓이 상연됐다.

독일의 저명한 한학자 로타어 레더조제(Lothar Ledderose)는 저서 ‘만물(Ten Thousand Things)’에서 한자가 유한한 획수를 통해 편방 부수(모듈)를 구성하고 다시 수만 개의 다른 단일 글자(단위)로 조립된다고 보았다. 중국의 전통 기물 문양, 회화 모티프, 예를 들어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의 산, 물, 소나무, 학은 본질적으로 모두 한자와 같이 모듈화, 부호화됐기에 도자기, 목조 건축 및 문인 산수화는 놀랍고도 규모화된 대량 생산을 실현할 수 있었다. 예악 정신이 주류 의식 속에서 경직되고 폐쇄될 때, 민간 공예는 우주 천도의 질서가 만물을 적시며 소리 없이 중국인의 의식주행(衣食住行) 속에 스며들게 해 사람들의 내적 정신세계를 자양했다.

중화 전통문화에는 일종의 강인함이 있어 물이 흐르듯 무형이고 큰 소리(大音)는 소리가 없는 것(希聲)과 같으며, ‘천인합일’은 시종일관 관철되는 주제다. 하늘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하늘에 오를 수 있는가? ‘한무내전’에서 한무제가 서왕모 및 함께 온 고인(高人)에게 사람이 어떻게 천국으로 다시 올라갈 수 있는지 가르침을 청하자, 다음과 같은 대답을 얻었다. “명과(明科)에 이르기를, 장생(長生)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도를 듣기(聞道)가 어렵고, 도를 듣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行)가 어려우며, 행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끝마치기(終)가 어렵다고 했다.” 수련계에서는 수련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진정한 정도(正道)를 듣기가 매우 어렵다고 본다. 하지만 듣는 것만으로는 어려운 일이 아니며 그대로 따라 수행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우며, 수행을 시작했다고 해서 가장 어려운 것도 아니고 사람의 각종 욕망을 벗어버리고 종점까지 견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것이라고 여긴다.

예로부터 말하기를 중토(中土)에 태어나기 어렵고, 인신(人身)을 얻기 어려우며, 정법(正法)을 만나기 어렵다고 했다. 정법이 널리 전해질 때, 역사상 두터운 안배와 다채로운 문화, 예를 들어 중국 산수화 및 여기서 파생된 허다한 부호 요소들은 바로 우리 생명 속에 심어진 선연(善緣)이다. 명리의 홍진(紅塵) 속에서 이러한 중화 전통문화의 잔잔한 흐름은 매 순간 우리 내면의 선념(善念)을 일깨우고 있다.

인용 서목:
1. ‘진규재조: 무홍 미술사 문집·제3권(陳規再造:巫鴻美術史文集·卷三)’, 세기문경(世紀文景), 2018년
2. ‘중국사화·사회풍속(中國史話·社會風俗)’, 사회과학문헌출판사(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11년
3. ‘미학 20강(美學二十講)’, 주저우출판사(九州出版社), 2021년
4. ‘중국미학통사(中國美學通史)’, 장쑤인민출판사(江蘇人民出版社) 출판, 2014년

 

원문발표: 2026년 7월 24일
문장분류: 천인사이(天人之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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