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랴오닝성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1995년 3월 다행히 대법을 얻었고, 대법 수련 속에서 꼬박 30년을 걸어왔습니다. 끊임없이 법공부를 하고 법을 외우는 과정에서 정념은 갈수록 강해졌고 부정적인 사고방식은 갈수록 약해졌습니다. 정념으로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점차 해체해 나가는 이 과정이 바로 사람에서 신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1. ‘박해받는 자’라는 사고방식(두려움) 해체
저는 일찍이 대법에 대한 신앙을 견지했다는 이유로 불법 판결을 받았고, 감옥에 불법 구금된 기간 심신에 잔혹한 박해를 겪었습니다. 동시에 원래 다니던 번듯한 직장을 잃었고, 이후 남편과도 강제로 이혼당하면서 사업에 성공하고 가정이 화목했던 ‘성공한 사람’에서 단숨에 인생의 밑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막 집에 돌아왔을 무렵, 파출소와 주민센터 직원도 수시로 찾아와 괴롭혔습니다. 박해는 제 마음에 거대한 그늘을 남겼고, 구세력(舊勢力)은 제게 매우 무거운 두려움을 강요했습니다. 2년여의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천천히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기간 대량으로 법공부를 하고 법을 외우며, 법 속에서 끊임없이 정념을 강화해 박해를 두려워하는 사고방식을 조금씩 타파했습니다.
1) 일반인 법률의 측면에서 박해를 두려워하는 사고방식 타파
대법제자로서 중생을 구하기 위해 하는 일이 모두 가장 바르고 가장 좋은 일이며, 박해받는 것은 억울한 일이라는 점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자신을 ‘박해받는 자’의 위치에 놓고, 사악에게 ‘약점’을 잡히면 박해받을 것이라고만 여겼습니다. 사건 담당 직원이 제게 집에서 연줄을 찾아 놓았으니 수련하지 않겠다는 보증서만 쓰면 집에 갈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판결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도 제 머릿속엔 ‘설령 판결을 받더라도 보증서는 쓰지 않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위법한 일을 한 적이 없으니 보증서를 쓰지 않더라도 애초에 판결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점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중국의 현행 법률 테두리 안에서도 파룬궁을 수련하고 중생을 구하는 일이 모두 합법이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막 집에 돌아왔을 때 파출소와 주민센터 직원이 수시로 찾아와 괴롭혔지만, 그저 사람의 방법으로만 대처했을 뿐입니다. 그들의 괴롭힘이 불법이므로 마땅히 당당하게 물리쳐야 한다는 점을 몰랐습니다. 이후 관련 법률과 문건 등을 읽고 현재 중국 법률로도 파룬궁 수련이 합법이며, 파룬궁 서적과 인쇄물이 모두 합법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게 됐습니다. 다시 괴롭힘을 당했을 때 저는 그들에게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파룬궁 수련은 합법이고 저는 법을 준수하는 공민이며, 당신들의 행위가 오히려 불법으로서 저를 괴롭히고 저의 합법적인 인신 권리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할 말을 잃었고 점차 더는 저를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2) 정법수련의 각도에서 박해를 두려워하는 사고방식 타파
진상을 알리다 박해받았던 짙은 그늘 때문에, 한동안 진상을 알리고 자료를 배포할 때마다 두려운 마음이 솟구쳤습니다. 예전에는 개인 수련의 기점에 서 있었기에 늘 자신에게 두려운 마음이 있다고 여겨 항상 그 마음에 휩쓸렸고 마음이 불안정했습니다. ‘구세력이 내게 두려운 마음을 강요한 것은 바로 빈틈을 노리기 위한 것이 아닌가? 두려운 마음은 내가 아니니 나는 그저 정법을 책임지며 발정념으로 제거하면 된다!’ 저는 처음에 두려운 마음에 휘둘리던 상태에서 벗어나 그것이 제가 아님을 분간해 냈고, 나아가 그것을 붙잡아 제거하기에 이르면서 정념이 갈수록 강해졌습니다. 지금도 두려운 마음이 수시로 올라오지만 갈수록 약해지고 있으며, 제거하는 속도도 갈수록 빨라지고 있습니다.
법리상으로도 박해에 대해 더욱 분명한 인식이 생겼습니다. 만약 개인 수련의 기점에서 본다면, 자신의 집착이 박해를 초래했기에 집착을 닦아버려야만 박해받지 않을 수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 이는 즉 박해를 ‘사람이 사람을 박해하는 것’으로 보는 셈입니다. 그러면 공안, 검찰, 법원 직원과 자신은 ‘박해하는 자’와 ‘박해받는 자’의 관계가 되며, 자신이 피동적으로 박해를 감당하는 동시에 박해에 가담한 사람들 역시 대법에 죄를 짓게 만들어 구원받을 기회를 잃게 합니다. 반면 정법수련의 기점에서 본다면, 본성의 일면은 신우주(新宇宙)의 신으로서 애초에 집착이 없고 가장 순수합니다. 모든 집착은 구세력이 강요한 것입니다. 사람 표면에 설령 집착이 반영돼 나온다 해도 구세력은 저를 시험할 자격이 없고, 중생을 조종해 저를 박해할 자격도 없습니다. 안으로 찾아 집착을 제거하는 동시에 발정념을 해 중생 배후에서 그들을 조종하는 사악한 요소를 제거한다면, 자신과 공안, 검찰, 법원 직원은 ‘구원하는 자’와 ‘구원받는 자’의 관계가 됩니다. 능동적으로 박해를 해체하는 동시에 그들도 구하는 것입니다.
3) 신사신법(信師信法)으로 박해를 두려워하는 사고방식 타파
법을 통해 우리는 대법제자에 대한 박해가 구세력이 안배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사부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면 우리도 인정하지 않으며,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박해를 안배하지 않으셨으므로 우리는 구세력이 안배한 박해를 전면 부정해야 합니다. 박해는 애초에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박해를 피할까 피동적으로 고민할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박해를 부정하고 해체해야 합니다.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머릿속에는 애초에 ‘박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해선 안 되며, 우리는 오직 자신을 잘 수련하는 동시에 중생을 구하고 정법하는 것만 책임지면 됩니다!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는 전체 무량한 천체 대궁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부님의 제자인 우리는 오직 사부님의 관할만 받을 뿐, 그 누구도 우리를 관할할 자격이 없습니다! 구세력은 애초에 우리를 박해할 자격이 없습니다! 진정한 우리는 신우주의 신이며, 구세력은 이미 구우주(舊宇宙)에서 정법을 파괴하는 마(魔)로 정해졌기에 우리 새끼손가락 하나로 비벼 없애기에도 부족합니다. 한 수련생의 교류 글에 대략 이런 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불법신통(佛法神通)을 하사하셨는데, 우리는 금밥그릇을 들고 구걸하고 여의봉을 들고 매를 맞고 있다.” 그렇습니다. 언제까지나 관념과 집착에 얽매여 사람 속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되며, 자신이 사람에서 걸어 나와 신의 상태가 돼야 합니다!
박해받을까 두려워하는 사고방식은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하는 강도와 효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세 가지 일 중에서 제가 가장 부족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대면으로 진상을 알리고 자료를 배포하는 일 등을 하기는 했지만 매일 하지는 못했고 전력을 다해 하지도 않았으며, 효과도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이는 향후 수련에서 가장 큰 힘을 들여 정성껏 잘해야 할 부분입니다. 두려운 마음이 점차 제거됨에 따라,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하는 일도 틀림없이 갈수록 더 잘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2.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방식(질투심) 해체
타인과 지낼 때 제게는 이미 습관화된 부정적인 사고방식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타인의 의도를 악의적으로 추측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역시 공산당 당문화(黨文化)의 한 가지 표현입니다. 저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식할 수 있었지만, 줄곧 그 뿌리가 무엇인지는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부님께서 제게 일깨움을 주셨는데, 바로 악의 뿌리가 질투심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남과 비교하는 것은 질투심을 키우는 토양입니다. 남과 비교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똑같다’고 느껴야만 비로소 마음이 평형을 이룹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남보다 높다거나 낮다, 혹은 얻은 것이 많거나 적다고 여기게 되면 불균형해져 질투심이 생겨납니다. 자신이 남을 질투하거나 남이 자신을 질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질투심이라는 이 뿌리가 있으면 오만함, 남을 깔보는 마음, 원망심, 분노, 쟁투심, 불균형, 과시심, 환희심 등 수많은 사람 마음이 생겨납니다.
1) 자신이 남보다 뛰어나다 여겨 오만하고 남을 깔보다
원래는 편협하게 ‘남이 나를 뛰어넘으면 질투하게 된다’고만 여겼지, 오만하거나 남을 깔보는 것 역시 질투심의 표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질투심은 심리적 불균형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높고 낮음의 구별을 두면 곧 마음이 불균형해지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너무 높게 평가해 자신의 재능이나 능력 등이 남을 뛰어넘는다고 여겨 오만해지면,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당연히 깔보고 무시하게 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자랄 때까지 제가 처한 환경에서 줄곧 비교적 우수하게 나타났기에 ‘당연한 듯’ 오만함에 익숙해져 스스로 깨닫지 못했고, 저의 경솔하고 거만한 태도가 타인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은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자신의 능력과 재능은 모두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마땅히 감사하는 마음을 품어야지, 애초에 오만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2) 남이 자신을 뛰어넘으려 할 때 다투려 하고 승복하지 않다
과거에 제 성격은 비교적 강한 편이라 무엇을 하든 1등을 다투려 했고 남이 저를 뛰어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누군가 저를 뛰어넘으면 질투심이 생겨 승복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능력이 제게 미치지 못하는 사람의 직위가 저를 넘어서면 더욱 억울하고 불만을 품었습니다. 사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기예에는 끝이 없듯, 스스로 아무리 우수하다고 여겨도 항상 저보다 높은 곳에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능력이 뛰어나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높은 지위에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 운명에 있는 것입니다. 수련 과정에서 저는 점차 타인의 장점을 발견하고 남을 위해 박수 쳐주는 법을 배웠습니다.
3) 자신이 얻은 것이 많아 과시하고 기뻐하다
예전에는 남에게 지기 싫어했기에 당연히 명리(명예와 이익)를 좇았습니다. 심지어 때로는 그 명리 자체가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음에도 애써 쟁취하려 했는데, 오직 획득한 명리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자신이 남보다 많은 명리를 쟁취했을 때면 속으로 기뻐하며 과시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우스운 일입니다. 때로는 겉으로 보기에 자신이 노력해서 쟁취한 것 같지만 사실은 운명에 정해진 것이고, 만약 그게 아니라 진짜로 본래 남에게 속한 것을 빼앗아 왔다면 타인에게 빚을 진 것이므로 장래에 갚아야 합니다. 무엇을 과시할 게 있겠습니까? 어디 기뻐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 얕고 무지하며 독단적인 ‘자아’가 표현된 것에 불과했습니다.
4) 얻은 것이 적어 분노하고 원망하다
일찍이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그에 상응하는 성과를 얻지 못해 억울해하고 크게 낙담한 적이 있었습니다. 타인을 위해 힘들게 헌신했음에도 동등한 보답은커녕 오히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을 당해 깊은 상처를 받고 마음에 원망이 생기기도 했으며, 때로는 제 관념만으로 남에게 함부로 꼬리표를 붙이기도 했습니다. ‘자아’의 각도에서만 문제를 보았기에 타인이 제게 불공평하게 대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상대방의 고충을 헤아릴 수 있고 선의로 타인을 이해하고 포용하게 됩니다. 사람 속에서는 누구도 완벽하지 않고 누구나 실수를 범하며 저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수련인으로서 사람의 이치에 국한해 옳고 그름을 따져서는 안 되며, 생생세세 빚진 업채(業債)도 갚아야 하므로 대법으로 가늠해보니 그 모든 응어리가 눈 녹듯 풀렸습니다.
법공부를 통해 질투심에 대해서도 더 깊은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우주 대궁 속의 모든 생명은 대법이 만든 것으로, 모든 생명은 독립적인 개체이자 무량한 대궁을 구성하는 하나의 입자입니다. 모든 생명이 공동으로 전체 대궁을 구성해 전 우주를 번영시켰으니 어느 한 입자라도 빠지면 완전한 대궁이 아닙니다. 대궁 전체의 각도에서 보면 생명은 모두 평등합니다. 동시에 천체 우주에도 무량한 층차가 있어 각각의 개체 생명은 각기 다른 층차 속에 처해 각기 다른 특징을 구비하고 있으니, 개체 생명의 각도에서 보면 생명은 등급이 나뉩니다. 한 생명이 어떤 층차에 처하고 무엇을 가지게 될지는 애초에 자신이 선택할 권리가 없으며 그것은 사부님의 선택이자 우주의 선택입니다.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는 모든 생명이 각자 층차의 행복과 아름다움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모든 생명은 그 층차의 법이 조성한 것이고 소속 층차의 법의 기준과 요구에 부합하는 것이기에 가지게 된 일체의 아름다움 역시 그 층차의 법이 체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생명은 자신이 처한 층차와 걸맞은 것이며 오직 자신의 층차에 머물러 있어야만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질투심은 구우주 생명의 이기적인 속성이 집중적으로 체현된 것으로, 이 점은 구세력의 몸에서 남김없이 표현됐습니다. 신이라도 자신이 처한 층차와 그 이하의 일체는 모두 꿰뚫어 보지만 자신보다 높은 층차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구세력은 오만방자하게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분수를 모르고 정법을 교란하다 자신을 망쳤고 무수한 중생도 훼멸시켰습니다. 제 몸에 표현돼 나온 질투심은 구세력이 강요한 것으로, 각기 다른 층차의 구우주 생명이 지닌 질투심이 제 공간장(空間場) 속에 반영된 것입니다. 자신을 잘 수련해 질투심을 제거하는 이 과정은 동시에 제 공간장 속의 생명들을 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3. 일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방식(초조함) 해체
제게는 완고한 관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일을 할 때 결과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완벽을 추구하며 결과의 완벽함을 고집하는 관념도 있었습니다. 매번 어떤 일에 부딪힐 때마다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늘 나쁜 결과가 나타날까 걱정했고,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설령 아주 작은 일이라도 지나치게 몰두하며 항상 긴장하고 초조해했습니다.
깊이 분석해보니 결과의 완벽함을 추구하는 관념이 이미 제 안에서 일종의 일 처리 방식으로 굳어졌음을 발견했습니다. 우선 일을 하기 전에 목표와 계획을 짜는 것은 바로 완벽한 결과를 미리 설정해 둔 것으로서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이후 이 결과를 최대한 빨리 얻기 위해 분투하는데, 목적을 완전히 달성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니 이는 ‘조급한 마음’이며, 만약 경쟁과 관련되면 ‘쟁투심’이 불쑥 솟아났습니다. 중간 과정에서는 결과가 이상적이지 않을까 봐 걱정하기에 심정이 줄곧 긴장되고 초조했는데 이는 ‘두려운 마음’이었습니다. 마지막에 만약 목표를 실현하지 못하면 낙담하고 상실감을 느끼는데 이는 ‘득실을 따지는 마음’이었습니다. 반대로 목표를 실현하면 기뻐하며 들뜨고 뽐냈는데 이는 ‘환희심’과 ‘과시심’이었습니다. 전체 과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속 깊이 평온하지 못했고, 단계마다 각기 다른 집착심이 수반됐던 것입니다. 수련인은 세간의 득실을 구하지 않고 순리에 따르는 법입니다. 그러나 결과를 중시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이 관념에 이끌려 얼마나 많고 강렬한 집착심을 빚어냈던 것입니까!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를 중시하는 것은 밖으로 추구하는 것이자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일반인은 당연히 속세의 행복과 아름다움을 동경하고 추구하며 이를 위해 분투해 노력하고 심지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사에는 모두 인연이 있기에, 인생의 행복을 거머쥘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전생에 쌓은 복덕으로 맞바꾼 것일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 진짜로 애써 노력해서 억지로 쟁취한 것이라면 이후에 이를 위해 지은 업보를 고스란히 갚아야 합니다. 한 명의 일반인이 자신이 동경하는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얻고자 한다면 오직 선행을 베풀고 덕을 쌓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 추구할수록, 아등바등 노력할수록 결과는 정반대가 됩니다.
수련인으로서 마땅히 ‘원인’에 공을 들여야 하고, 일을 하는 과정에서 안으로 찾으며 자신의 마음 씀씀이에서 찾는 것이 비로소 근본입니다. 결과에 대해서는 행하되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사람이 대법 속에서 수련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늘만큼 큰 기쁜 일입니다. 이 과정에서 부딪힌 시련을 사람의 마음으로 가늠하면 고통을 느끼고 나쁜 일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법으로 가늠하면 고생을 겪고 재난을 당하는 것은 마침 제고할 좋은 기회이므로 아주 훌륭한 일입니다. 이른바 ‘좋고’ ‘나쁨’은 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달려 있습니다. 관념이 바뀌자 일에 어떤 결과가 나타나든 더는 걱정하지 않게 됐고, 서서히 초조함이 즐겁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변했습니다. 대법 속에서 수련한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30년의 수련 여정이 이번 생에서 보면 무척 길겠지만 전체 생명 과정에서는 단지 한순간에 불과할 것입니다. 문득 뒤돌아보니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으며, 수확도 있고, 아쉬움도 남습니다…….
정법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을 각별히 소중히 여기며 신의 길에서 분발해 힘껏 뒤쫓는 것입니다!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부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6년 7월 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7/7/510304.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6/7/7/510304.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