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북미 대법제자
[명혜망] 수련 과정에서 최근 몇 년간 사부님께서 저를 일깨워주시는 방식 중 하나는, 머릿속에서 사부님의 어떤 설법 단락이 저절로 암송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법을 외운 뒤 기억하는 법이 많아져서인지 이러한 일깨움 방식이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어느 날 연공을 하는데, 머릿속에서 갑자기 사부님께서 《전법륜(轉法輪)》 제4강에서 하신 말씀이 자동으로 떠올랐습니다. “수련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전적으로 당신 자신이 견뎌낼 수 있는지 없는지, 대가를 치를 수 있는지 없는지, 고생을 겪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달렸다.” 그런데 당시 이 말씀 중 “대가를 치를 수 있는지”(전법륜)라는 구절에서 ‘대가(付出)’라는 단어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원래 매우 익숙하게 외우던 문장이었는데 말입니다. 연공을 마친 뒤 급히 책을 찾아보았습니다. ‘사부님께서 내가 대가를 치르는 것이 부족하다고 일깨워주시는 것인가? 션윈(神韻) 홍보를 충분히 하지 않았다는 뜻인가?’ 많은 수련생과 비교하면 확실히 부족하지만, 이미 제가 활용할 수 있는 시간 안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추수감사절 연휴에 일주일을 쉬었고 그 전후로 두 번의 주말이 이어져 총 9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션윈 일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방식이 너무 단조로운 것일까요?(시간 문제로 주로 포스터를 붙였습니다) 그때는 사부님께서 무엇을 일깨우신 것인지 완전히 깨닫지 못했지만, 이어진 주말에 일어난 한 가지 일로 사부님의 일깨움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됐습니다.
토요일에 비교적 번화한 거리로 포스터를 붙이러 갔다가 마무리할 즈음 한 치과 진료소를 보게 됐습니다. 당시 제 손에는 포스터와 전단만 있었고 달력은 없었습니다. 사실 달력은 진료소 같은 곳에 더 적합한데, 1년 내내 걸려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망설임이 생겼습니다. ‘그냥 들어가 전단만 둘 것인가, 아니면 차로 돌아가 달력을 가져올 것인가?’ 차는 멀지 않았지만 왕복 10분이 걸리고, 진료소도 이 한 곳뿐이었습니다. 사람의 효율로 따지며 돌아갈 가치가 있는지를 재고 있었는데, 문득 그날 사부님의 일깨움, 즉 ‘대가’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중생을 위해 조금 더 대가를 치르고 베풀 의지가 있는지를 보시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효율 원칙이 사람을 구하는 일에 적용될 수 있는가? 중생을 위한 일인데 무엇을 망설일 필요가 있는가?’ 결국 차로 돌아가 달력을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접수대의 두 직원이 보였는데, 모두 선량해 보여 더욱 주저 없이 차로 가서 달력을 가져왔습니다.
진료소로 돌아왔을 때 마침 의사도 데스크로 나왔습니다. 평소에는 의사가 대부분 안쪽에 있어 좀처럼 만날 수 없습니다. 그는 저를 보자 친절하게 무엇을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션윈 달력 한 부를 전달하러 왔으며, 이 아름다운 달력이 1년 동안 함께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션윈 광고는 자주 보지만 ‘션윈’이라는 두 글자가 정확히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포스터를 붙이는 과정에서 이런 질문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곧바로 션윈 공연에서 사회자가 설명하는 말, 즉 ‘션윈은 신이 춤을 추는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Shen Yun means: the beauty of divine beings dancing(션윈은 신이 춤을 추는 아름다움을 의미합니다).” 제가 ‘beauty(아름다움)’라는 단어를 말하자마자 그는 과장되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 the beauty(미녀)!”라고 했습니다. 영어의 ‘beauty’가 ‘아름다움’ 외에 ‘미녀’라는 이중 의미가 있음을 깨닫고, 그가 션윈을 미녀들의 춤으로 오해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얼른 뒤이어 “of divine beings dancing(신이 추는 춤)”이라고 말을 맺었습니다. 제가 뒤이어 몇 단어를 더 말하자 그의 표정은 즉시 극적으로 바뀌어, 농담하던 모습에서 매우 진지하고 존중하는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공연에서 늘 듣던 이 한 문장이 이렇게 큰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니.’
그는 션윈 달력과 전단을 받아든 뒤, 맨 위에 적힌 문구인 ‘공산주의 이전의 중국’을 곧바로 주목했습니다. 그는 문화대혁명을 다룬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시기에는 아이들조차 부모를 고발할 수 있었다고 적혀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실제로 그렇다며, 친척·부부·사제 사이에서도 서로 등을 돌릴 수 있었지만, 그것은 본래의 뜻이 아니라 중공(중국공산당)의 강압 때문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너무 무섭다며 미국은 공산주의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중공이 지금도 미국에서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는 매우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마침 가방 안에 중공의 초국가적 탄압(국경을 넘은 탄압)을 다룬 전단이 몇 장 있어, 자연스럽게 그와 데스크의 두 직원에게 건넸습니다. 의사는 전단을 보고 “당신이 말한 것을 전적으로 믿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하자 그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물론 저는 그와 데스크 직원에게 션윈 티켓 구매를 당부했고, 마지막에 우리는 기분 좋게 작별했습니다.
진료소를 나서자마자 즉시 깨달았습니다. 오늘 의사에게 이렇게 충분히 진상을 알릴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중생을 위해 조금 더 기꺼이 대가를 치르겠다’는 그 한 생각을 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때 전단만 들고 바로 들어갔다면, 의사는 전혀 데스크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부님께서는 이번 경험을 통해 저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심성이 조금만 제고되고 자비심이 조금만 더 많아져도, 사람을 구하는 효과는 즉시 달라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효과가 뚜렷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션윈을 홍보할 때 행동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중생을 위해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비심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전에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을까요? 자세히 반성해 보니, 션윈 일을 할 때의 제 마음가짐은 많은 경우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대법제자이기에 이렇게 해야 한다고, 혹은 반드시 해야 한다고 여겼고, 그것이 사부님의 요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진정한 소중함과 연민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자각적으로 중생을 위해 감당하고 베풀고자 하는 마음가짐도 아니었습니다. 일하는 것과 수련은 다른 것임을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사람을 구하는 일을 많이 하는 것과 중생을 구하려는 염원이 강한 것은 사실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게 됐습니다. 물론 중생을 구하려는 염원이 강한 수련인은 반드시 많은 구인(救人) 활동을 하게 되지만 그 반대가 반드시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저로 하여금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와 중생을 위해 조금 더 베풀지 못하게 했을까요? 그것은 구(舊)우주 생명 깊숙이 존재하는 매우 차가운 것이었음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다른 생명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 스스로는 수련이 잘 된 것이라고 여겼지만 사실은 냉담함이었습니다. 생명이 파괴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긴박함을 느끼지 못하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구우주에서 비롯된 ‘사(私)’의 속성입니다. 우리는 모두 압니다. 생명이 육신을 잃더라도 윤회 속에서 다시 태어나 구원의 기회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법 속에서 도태된다면 그것은 형신전멸(形神全滅)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들 역시 한때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높은 층에서 내려온 중생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고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전법륜》 제3강에서 사부님께서 언급하신 구우주의 그 몇몇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대각자, 대도(大道)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들은 차갑게 앉아 사부님께서 사람을 구하시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 며칠 동안 나는 정말 마음속으로 아주 괴로운, 그런 기분을 느꼈다.”(전법륜)
자신의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매우 부끄러웠습니다. 매년 션윈 홍보에 힘써 참여해 왔지만 마음속에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했던 냉담함 때문에 세인에게 진상을 명확히 알릴 많은 기회를 잃었습니다. 때로는 상점 주인 대부분이 평소 가게에 없었고 의사도 데스크에 없으니 주류사회 사람들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진정으로 자비로운 정념의 장을 지니고 있었다면, 인연 있는 가게 주인과 의사는 앞의 사례처럼 제 앞에 나타났을지도 모릅니다. 션윈을 보고 싶다고 말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저는 그저 빨리 표를 사라고 당부했을 뿐, 그 가게를 기록해 두었다가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찾아가 이야기해 볼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중생을 그 정도까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그런 일들을 떠올리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냉담함은 대법제자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 본질은 이미 사부님에 의해 재창조됐고 신우주는 ‘타인을 위한[爲他]’ 것이며,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히 ‘타인을 위한’ 생명이 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절대 인정해서는 안 되며 분명히 인식했다면 버려야 합니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머릿속에 다시 사부님의 한 구절 법이 울려 퍼졌습니다. “창세주 새 천체를 다시 만듦은 중생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네”(홍음 6-실패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사부님께서 사랑하시는 중생을 우리 또한 사랑해야 하며, 냉담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사부님의 사랑은 자비이십니다.
이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우리가 션윈을 힘써 홍보하는 동시에 자신의 일을 하는 마음가짐에도 주의를 기울여 더 많은 자비를 수련해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그래야만 중생을 션윈 공연장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도 우리가 제고해야 할 부분에서 반드시 일깨워주실 것입니다.
개인적인 체득이니 적절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자비로운 지적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6년 1월 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1/8/50408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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