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사부님의 크나큰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글/ 뉴질랜드 대법제자

[명혜망]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1998년에 법을 얻은 대법제자입니다. 수련 이래 때때로 넘어지고 비틀거렸지만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살핌하에 법의 위력과 신기함을 자주 체험했고, 크고 작은 심성 고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과정을 글로 써 여러분과 공유하고 교류하려 합니다.

사부님과 법을 믿어 다시 기적을 얻다

그날 단체 법공부 교류 후, 제가 강단에서 자리로 걸어갈 때 갑자기 오른쪽 다리에 감각이 없어지면서 몸의 균형을 잃었습니다. 옆에 있던 수련생이 황급히 저를 부축해 자리로 돌아갔지만, 저는 아직 일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잠시 후, 한 수련생이 내야 할 대법서적 대금을 건네주었습니다. 제가 오른손으로 받으려 했지만 그 얇은 지폐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 마음은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마음이 조금 불안해졌습니다.

수련은 엄숙한 것입니다. 고비 속에서 사람과 신의 일념(一念) 차이는 다른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저는 이전에 2013년 연말에 뇌출혈로 응급치료를 받고 살아났을 때 당시 몸 오른쪽이 반신불수였습니다.

대법을 수련한 후 모든 것이 정상으로 변했습니다. 저는 법에서 진수제자는 병이 없으며, 이번 병업 가상은 구세력이 제가 평소 잘 닦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하고, 진수하지 못한 허점을 파고든 것이며, 사부님에 대한 저의 바른 믿음과 수련 의지를 무너뜨려 제 육신을 망치려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절대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매우 조급해져 서둘러 안으로 자신을 찾았습니다. 최근 제가 맡았던 몇 가지 대법 항목이 모두 순조로웠고, 또 다른 사람들이 늘 제가 수련을 잘한다고 말해 환희심이 일어 저 자신이 조금 들떠 있었습니다.

법에서 저는 현재 상태에서는 제3장 공법을 많이 연공해야 함을 깨닫고 3장 공법을 연공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오른손에 힘이 없어 가슴 앞으로 들어 올리기도 전에 미끄러져 내려왔지만, 저는 속인의 이치에 따라 자리에 누워 쉬지 않고 제 힘을 다해 연공했습니다. 저는 사부님과 법을 굳게 믿기만 하면 넘지 못할 고비가 없음을 체험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정진하려는 저의 이 마음을 보시고 수련생을 안배해 저를 돕고 저와 교류하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수련생은 제게 한 수련생이 몸에 뇌졸중의 병업 가상이 나타났는데, 1시간씩 포륜(抱輪)을 두 번 연공하고 나은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사부님께서 수련생을 통해 저를 일깨워주시는 것임을 깨닫고, 옷장에 등을 기댄 채 포륜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좀 힘들었지만 안고 있다 보니 점차 몸에 힘이 강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머리 위에서 포륜할 때가 되자 제 오른손이 뜻밖에도 미끄러져 내려오지 않았고, 거의 1시간 동안 계속 견지했습니다. 포륜을 마치자 저의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저는 이로부터 더욱 사부님을 굳게 믿고 법을 굳게 믿게 됐으며, 매일 5장 공법을 한 번에 다 하고 동시에 발정념을 강화했습니다. 저는 발정념이 사부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라고 요구하신 세 가지 일 중 하나임을 깨달았기에 시시각각 발정념을 중시해 자신의 모든 바르지 않은 상태를 최대한 빨리 바로잡았습니다. 이렇게 사부님의 가지(加持)와 보호하에 단 6일 만에 완전히 치유됐습니다! 이것은 대법이 창조한 기적입니다!

몇 차례 병업 고비를 넘기면서 저는 많은 집착을 찾았고, 수련의 엄숙함도 체험했습니다. 제가 이것을 써내는 것은, 같은 상황에 있는 수련생이 제 교훈을 거울삼고, 동시에 어떤 때라도 정념을 지키고 무조건 사부님을 믿으면 반드시 고비를 돌파할 수 있음을 바라서입니다. 정념정행(正念正行)으로 따라잡아 손실을 만회하고 대법의 아름다움을 실증해야 합니다.

사부님의 크나큰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정(情)이 많은 사람으로 가정에서 특히 큰딸에 대한 정이 더욱 무겁습니다. 그녀는 대법이 널리 전해지기 시작한 1992년에 태어난 첫째 딸입니다. 당시 저는 젊었고 아이를 교육한 경험이 없었으며,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취미를 즐기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친구들과 채팅하고 오락하는 데 쓰며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6년 후 둘째 딸이 태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가족은 다른 도시로 이사했습니다. 가정의 변화, 환경의 변화, 특히 큰딸이 반항기에 접어들면서 그녀는 성격이 난폭해지고, 자신을 폐쇄하고, 학교를 빼먹고, 자신을 괴상하게 꾸미고, 방을 악취가 진동하고 더럽게 만들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게 했습니다. 제 마음속으로도 적잖이 갈등하고 억울했으며 친척과 친구들의 온갖 비난을 받으며, ‘어쩌다 이런 딸을 낳았나’ 하고 저 자신을 원망했습니다. 제 눈에는 온통 원망과 질책뿐이었습니다.

저희는 끊임없이 다투기 시작했고 ‘내 아이니까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여기며, 그녀에게 제 관점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끊임없이 제 생각을 주입하며 그녀의 감정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점차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잃어갔습니다.

제가 대법 수련을 시작한 이후, 저는 점차 모든 것을 명백히 알게 됐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모두 인연 관계이며 아무런 이유 없는 것은 없다는 것, 좋은 인연이든 나쁜 인연이든 모두 자신이 만든 것임을 알게 됐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제게 진선인(眞·善·忍)의 법리에 따라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기에 저는 누구에게나 잘해줘야 했고, 하물며 저의 가족 아닙니까. 저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불교 중에서는 말한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바로 업력윤보(業力輪報)다.” 당신이 그에게 빚을 졌으면 그는 당신을 찾아와서 빚을 받아 갈 것이며, 더 많이 받아 가면 다음번에 그가 다시 당신에게 갚아준다. 아들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다음번에 거꾸로 되는데, 바로 이렇게 돌아오고 돌아간다.”(전법륜)

저는 이 단락 법을 읽을 때마다 늘 자애로우셨던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저는 중국공산당(중공)의 사악한 ‘당(黨)문화’ 교육하에, 어려서부터 매우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어서 부모님 말씀을 늘 ‘귓등’으로 들었고, 직장에 다닐 때도 돈을 모두 제 자신을 위해 썼으며 부모님께 효도할 생각을 전혀 못 했습니다. 아버지는 건설은행 관리 부서의 간부로 손에 어느 정도 권력이 있으셨지만, 공적인 일로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셨고 탐오하거나 차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거듭된 운동 속에서 중공 악당의 탄압을 받아 노동개조를 하러 지방으로 내려가셨고 온몸이 병들게 됐습니다.

1989년 저는 유학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6·4 학생운동 탄압’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중공 악당이 학생들을 대학살한 것은 전 세계를 격노케 했고 여러 서방 국가들은 유학생들에게 원조를 제공했습니다. 저도 정치 난민 신분으로 호주에 남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 기간에 저는 당당하게 귀국해 부모님을 찾아뵐 수 없었습니다. 저는 늘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딸이었는데 자애로우신 아버지는 멀리 해외에 있는 이 딸을 너무나 그리워한 나머지 예순도 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고, 저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조차 뵐 수 없었습니다. 제 마음속의 그 회한은 줄곧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수련이 계속 깊어짐에 따라 사람에게는 각자의 운명이 있다는 이치를 깨닫게 됐고 딸에 대한 저의 원망도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동안은 딸을 볼 때마다 늘 ‘그녀는 아버지의 환생이다’라는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저는 수련인으로서 이 한 세대의 가족 관계만 봐서는 안 되며, 사실은 모두 윤회 속에서 자신이 빚진 업력으로 인해 이번 생의 인연이 이루어진 것임을 명확히 인식하게 됐고, 점차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저는 늘 딸에게 대법이 제 인생에 가져다준 거대한 변화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딸도 제 몸이 특별히 건강하고 근래 몇 년간 제가 주사를 맞거나 약을 먹는 것을 본 적이 없으며, 몸이 아주 좋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중공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 박해를 발동한 후, 그녀도 방과 후에 아빠와 함께 근처 거리의 우편함에 진상 자료를 나눠주러 가곤 했습니다.

제가 아이를 교육하는 능력이 부족했던 탓에 그녀는 외톨이 같은 성격이 됐고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20대가 됐는데도 일해 본 적이 없고, 정상적인 사회생활도 없으며,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능력이 심각하게 부족해 온종일 자신을 방에 가두고 ‘집순이’로 지냈습니다. 저는 그녀를 무시하거나 싫어하지 않았고, 되도록 그녀의 특성에 맞춰 돕고 이끌어 주되, 결과는 강요하지 않고 바른길을 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심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사부님께 맡겼습니다.

2020년 초, 딸은 호주로 가서 여동생과 함께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듬해 저는 그녀들을 보러 갔고 시드니에서 열린 파룬따파의 성대한 퍼레이드에 참가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같이 보러 가겠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저녁에 그녀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주 기뻐하며 제게 말했습니다. “엄마, 그거 아세요? 제가 차이나타운에서 파룬궁 하시는 아주머니를 만났는데, 저보고 서명해 달라고 해서 서명했어요!” 그 순간 저는 정말 그녀를 위해 기뻤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딸은 한 일본 식당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습니다.

올해 초, 외할머니 생신 때 우리 모녀는 다시 함께 모였습니다. 그녀는 매우 기쁘고 자랑스럽게 우리에게 사진과 친구를 공유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다양한 민족의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고, 그들은 공통의 취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자기 방은 ‘동화 세계’처럼 꾸며놓고, 여러 차례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 모임을 가졌습니다. 얼마 후 그녀는 매월 모임을 조직하는 책임자로 선정됐고 그녀의 교제 범위는 백 명이 넘었습니다. 그녀의 친구들은 모두 매우 다정하고 그녀를 좋아했으며, 그녀가 다른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찾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이는 그녀가 매우 좋아하는 일로, 부유한 동네 술집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돼 주말마다 술집에서 파티를 여는 손님들에게 화장을 해주는 일이었습니다. 외할머니는 이 말을 듣고 놀랍고 감격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지금 환골탈태했구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아이에게 이렇게 큰 변화가 생긴 것은 대법의 자비로운 제도이며 사부님의 무량한 은혜입니다.

둘째 딸은 멜버른의 모나시 대학교 IT 학부를 졸업했는데, 3학년 때 뉴질랜드 파위안(法源)서점 웹사이트, 뉴질랜드 션윈 기념품 웹사이트, 그리고 션윈 댄서(Shen Yun Dancer) 웹사이트를 구축했고, 여러 해 동안 줄곧 자원봉사로 웹사이트를 유지·보수하고 업데이트해왔습니다. 졸업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호주 최대의 기업 퇴직연금 기금에 채용됐습니다. 그녀가 일한 지 얼마 안 돼 이 회사가 다른 거대 연기금과 합병·통합되면서 회사에 인사 변동과 감원 바람이 불었지만, 그녀는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고 오히려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됐으며 3%의 임금 인상도 받았습니다.

두 딸의 변화와 그녀들이 이룬 성과는 사부님께서 제자에게 주신 보호와 격려입니다. 저는 “한 사람이 연공하면 온 식구가 혜택을 본다”(오스트레일리아법회 설법)는 것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사부님의 크나큰 자비는 실로 언어로 일일이 다 서술할 수 없습니다! 제자는 오직 마지막 수련의 길에서 정진하고 또 정진함으로써,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보답할 따름입니다.

층차가 유한해 법에 부합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의 자비로운 지적을 바랍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2025년 뉴질랜드 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5년 11월 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11/6/50219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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