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캐나다 대법제자
[명혜망] 얼마 전 문득 ‘100리를 가려는 사람은 90리를 절반으로 간주한다(行百里者半於九十)’는 고사가 혹시 2천여 년 전에 신께서 오늘날 대법제자들을 위해 연출해 놓은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에 따르면 한 노인이 백 리 밖에서 천하 통일을 앞둔 진왕(秦王)을 찾아가 한 가지 이치를 알려 주려 했다. 백 리 길 중 90리는 열흘 만에 걸었지만, 마지막 10리는 갈수록 험난해 또 열흘이 걸렸다. 그는 진왕에게 “일이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성공에 다다를수록 더욱 어려워져 느슨해지고 태만해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욱 어려워지고 심지어 중간에 포기하게 됩니다”라고 일깨워주었다. 이 이야기는 대법제자들에게도 마지막 단계일수록 느슨해져서는 안 되고, 더욱 정진해야 함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이 기회에 지난 1년여 동안의 수련, 특히 ‘인내(忍)’에 대한 체득을 수련생들과 함께 나누려 한다. 동시에 나의 수련 경험을 통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참음(忍)은 心性(씬씽)을 제고하는 관건이다”(정진요지-무엇이 참음인가)와 “해내어야 수련이로다”(홍음-착실한 수련)가 얼마나 진실한지 증명하려 한다.
나는 곧 50세가 되는 남성으로 식당에서 일을 한다. 이 식당에 처음 왔을 때부터 동료 H가 나를 자주 나무라곤 했다. 그렇게 1년 넘게 정말 한 번도 좋은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한 번도 미워하지 않았다. 그녀가 나보다 나이가 많았기에 한결같이 존경하는 마음을 유지했다. 나는 또한 법의 요구에 따라 근면 성실하게 일했고, 적극적으로 더 많이 일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어떻게 일하든 H는 늘 흠을 잡아 한마디 했다. 어느 날 곧 영업을 시작할 때였는데, 참깨가 없는 것을 보고 다른 동료들은 갈 생각도 안 하고 가려 하지도 않아 내가 가지러 갔다. 그런데 H는 내가 가야 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며 가지러 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나무랐다. 또 한번은 냉장고에 물건을 가지러 갔다가 채소 2개를 들고 나왔는데, 그 역시 잘못된 일이라며 또 나를 탓했다. 한마디로 H와 같은 근무조가 되면 꾸지람을 피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다 내 심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처음 혼날 때는 자신의 쟁투심과 원망심을 제거해야 함을 알고 있어서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겉으로는 참았지만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릴 때는 정말로 뼈에 사무치고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분노와 괴로움이 밀려왔고, 끝도 없이 이어져 언제 끝날지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한동안은 근무 중에, 특히 퇴근길에 나는 계속 법을 외웠다. 하루는 퇴근길에 오늘 들은 꾸지람을 떠올리며 분하고 괴로워서 또다시 법을 한 구절 한 구절 외웠다. 그렇게 외우다 문득 깨달았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입으로만 다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다투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 마음이 마치 두 짝의 문이 활짝 열린 듯 시원해졌고, 그동안의 분노와 괴로움이 단번에 사라졌다.
그 뒤, 나는 다시 외우기 시작했다. “참음(忍)은 心性(씬씽)을 제고하는 관건이다. 화가 나 원망하고, 억울해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참는 것은 속인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참음이다. 화를 내거나 원망함이 전혀 생기지 않으며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련자의 참음이다.”(정진요지-무엇이 참음인가) 그녀가 날 꾸짖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법을 외웠고, 외우다 보면 마음속의 분노가 자연히 사라졌다.
그 후 다시 꾸지람을 들을 때 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당신이 당신의 적을 사랑할 수 없다면 당신은 원만(圓滿)을 이룰 수 없다.”(오스트레일리아법회 설법)라는 법을 떠올렸다. 나는 이 기준에 따라 실천했고, 그녀가 나를 꾸짖을 때 내 마음에는 오히려 그녀에 대한 자비가 생겨났다.
이 시기에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닥쳐왔고, 강도가 높고 밀도도 높아 정말 살아 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고통 속의 고통이 무엇인지 체득했다. 너무 괴로워 입에서 쓴맛이 날 정도였다. 나는 “공(功)을 수련하는 길은 마음이 지름길이라 대법은 끝없나니 고생을 배(舟)로 삼을지니라”[홍음-法輪大法(파룬따파)]를 외웠다. 외우고 또 외우다 보니 그렇게 괴롭지 않게 되었다. 동시에 수련은 반드시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통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자신의 심성이 조금씩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진정으로 참음(忍)을 해낼 때마다 법리를 깨닫게 되었는데, 매번 참음을 해내는 것이지만 깨닫는 법리는 매번 달랐다. 어떤 때는 ‘진(眞)’을, 어떤 때는 ‘선(善)’을, 또 어떤 때는 ‘인(忍)’을 깨달았다. 둘 혹은 세 가지를 모두 깨달을 때도 있었다. 때로는 마음으로 분명히 알겠는데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한번은 ‘확고함’의 법리를 깨달은 적도 있다. 이렇게 깨달은 법리는 단 한 번도 반복된 적이 없었다. 몇 번인가 이런 경험도 있었다. 오늘은 잘했다고 생각하며 내일도 오늘 깨달은 법리로 대처하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고 고비를 넘지 못했다. 다시 새롭게 깨달아야만 했다. 나중에서야 자신의 심성이 이미 제고됐기 때문에 오늘 깨달은 법리로 내일의 수련을 이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음’을 수련한다는 것은 단지 참는 것만 수련하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매번 참음을 수련하지만 심성 제고는 여러 방면에서 향상되는 것이다. 오늘의 참음은 이 마음을 버리기 위한 것이고, 그 속에서 이런 법리를 깨닫는다. 내일의 참음은 또 다른 마음을 버리기 위한 것이며, 그 속에서 또 다른 법리를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작은 개인적 체득이다.
또 깨달은 것은, 자신이 진정으로 ‘참음’을 실천하고 심성이 진정으로 제고됐을 때, 자연스럽게 자신이 있는 층차에서 알아야 할 법리를 알게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신이 도달한 그 층차의 신께서 일깨워주시는 것이며 그 후에야 자신이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천하지 못하면 결코 자신의 층차보다 높은 법리나 알아서는 안 되는 법리를 알 수 없다. 다시 말해 해내야만 깨달을 수 있다.
또 깨달은 것은, 어떤 일이든 누가 옳고 그른지를 보지 말고 오직 자신의 마음만 봐야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다른 사람이 잘못했을 때야 비로소 자신의 집착심을 제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잘못했을 때는 스스로 인정하므로 마음이 자극받지 않아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사람이 잘못했을 때는 자신의 마음을 자극해 심성을 높이는 작용을 하게 된다. 이럴 때는 절대로 누구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반드시 자신의 마음을 봐야 한다. 자신의 마음이 고비를 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 집착이다. 그것이 어떤 집착인지, 명칭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사라진다. 물론 집착심과 그 뒤의 물질은 스스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부님께서 제거해 주신다. 나는 이를 실제로 깊이 체득했으며 정말로 그것이 곧바로 내 마음을 겨냥한 것임을 깨달았다.
이상은 나의 현재 층차에서의 수련 체득으로 적절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의 자비로운 지적을 부탁드립니다.
원문발표: 2025년 11월 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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