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확고한 정념으로 겹겹의 험난을 뚫고 나가다

글/ 중국 대법제자 구술, 수련생 정리

[명혜망] 저는 1998년 말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하기 시작했고 올해 67세입니다. 소고기를 파는 장사를 하고 있는데, 수련 전에는 건강이 나빠 매일 고통에 시달리며 삶이 죽음만 못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병이 있으니 닥치는 대로 치료를 받으러 다녔고, 제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시도해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무거운 병든 몸을 이끌고 공원에 갔는데, 사람들이 포륜(抱輪) 동작을 하고 있는 걸 보게 됐습니다. 이 공법과 인연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 그중 한 사람에게 무슨 공법이냐고 물어봤더니 “파룬궁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날 저녁 그 수련생 댁을 찾아가 연공 동작을 배웠습니다. 동작을 배우고 집에 돌아오니 몸이 매우 가벼워졌고, 이튿날에는 뭐든지 먹을 수 있게 됐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모든 한약과 양약을 다 버렸고 병력 기록까지 찢어버렸습니다. 그때부터 파룬따파 수련의 길을 걷게 됐고, 온종일 수련의 기쁨에 잠겨 지냈습니다.

지금까지 대법을 수련하면서 병 없이 몸이 가벼워졌고, 대법의 위엄과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체험했습니다. 사부님께 드리는 감사의 마음은 인간 세상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1999년 7월, 장쩌민(江澤民)이 전국에 걸쳐 하늘을 뒤덮을 듯한 파룬따파 박해를 일으켰는데, 정말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저희 지역 수련생들은 베이징으로 가서 호법(護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래에 제가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하고 진상을 알리는 과정에서 겪은 몇 가지 경험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한 경험

첫 번째로 네 명의 수련생과 함께 천안문 광장을 한 바퀴 돌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대법을 실증하지 못했기에 우리 몇 사람은 다시 가기로 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 몇 사람이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남편이 이를 알고는 못 가게 막으며 기차역에서 제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기차가 이미 도착했는데도 제가 꼭 가겠다고 고집하자 남편은 할 수 없이 손을 놓고 아쉬운 눈빛으로 제가 기차에 오르는 걸 바라봤습니다.

우리는 순수한 마음을 품고 다시 천안문 광장에 도착했습니다. 광장에는 대법제자가 많았고, 경찰들은 모두 선글라스를 끼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당신들, 파룬궁 연마하는 사람들이야?”고 물었습니다. 저는 되물었습니다. “파룬궁이면 천안문 광장에 올 수 없나요? 천안문에 ‘파룬궁’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지도 않잖아요. 당신들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으니 마치 조폭 두목 같네요.”

이튿날 우리가 다시 천안문 광장에 갔을 때 경찰들은 하나같이 선글라스를 끼지 않았습니다. 경찰이 우리가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저는 말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대답했고, 어떤 수련생은 체포됐습니다. 경찰이 수련생을 때리는 걸 보고 저는 큰 소리로 제지했습니다. “때리면 안 돼!” 그들은 즉시 제게 수갑을 채웠습니다. 한 젊은 경찰이 제 머리카락을 움켜잡으며 악독하게 말했습니다. “너 참 용감하구나!” 그들이 제 가방을 뒤져 기차표를 찾아낸 후 곧바로 저희 지역 베이징 주재 사무소에 연락해 우리를 그곳으로 보냈고, 이어서 저희 지역 파출소에서 우리를 데리러 오게 했습니다. 현지 파출소에 도착해 등록을 하라고 하며 아직도 연마하느냐, 베이징에 또 갈 거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철저히 부인했고 서명도 하지 않자 그들은 곧 저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앞의 두 번 모두 법을 실증하지 못했기에 우리는 천안문 광장에 다시 가기로 했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시간을 정했습니다. 저는 몇천 위안을 가지고 남편 몰래 살짝 집을 나섰습니다. 우리는 대형버스를 한 대 빌려 모두 20여 명이 떠났습니다. 도중에 경찰이 검문하며 차에 올라와 살펴봤는데, 우리 차 안에 노인과 아이들이 앉아 있는 걸 보고 “뭐 하러 가는 건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운전기사가 “여행 가는 겁니다”라고 대답하자 경찰은 “아, 여행 가시는구나, 그럼 가세요”라고 했습니다.

이번에 우리는 천안문 광장 근처에 도착해 방을 빌려 머물기로 했습니다. 베이징에서 먼저 진상자료를 배포하기로 한 것입니다. 집주인은 기독교 신자였고 그녀의 남편은 차를 몰며 손님을 태워주는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돈을 아끼려고 매일 채소 껍질을 주워 먹었는데, 사실 그때는 먹는 것에 정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집주인이 우리가 매일 채소 껍질을 줍는 걸 보고 말했습니다. “왜 그렇게 아끼세요? 너무 고생스럽잖아요…” 저는 그에게 우리가 가져온 돈이 많지 않아서 다음 차례 수련생들이 편하게 올 수 있도록 돈을 아껴 그들에게 남겨주려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알게 된 그는 “여러분은 너무 착해요. 파룬궁은 정말 대단하고 여러분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에요!”라고 했습니다. 경찰이 집집마다 세입자의 신분증을 확인할 때 그는 이전 세입자의 신분증을 꺼내 경찰에게 보여줬습니다. 우리는 남은 돈과 수련생들이 지니고 있던 장신구를 모두 그들에게 남겨주며 말했습니다. “만약 대법제자를 만나면 도울 수 있으면 받아주세요.”

우리는 베이징에서 한동안 지냈습니다. 한 수련생이 “우리는 구경만 할 수 없어요. 우리가 베이징에 온 건 바로 대법을 실증하기 위해서예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명씩 조를 짜서 진상자료를 배포하기로 했습니다. 때로 자료를 배포하다 숙소로 돌아오지 못하면 아무 허름한 집에서나 잠을 잤고, 다음 날 일어나면 입안이 온통 모래투성이였습니다. 하루에 만두 두 개만 먹어도 배고프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비록 매우 고생스러웠지만 정신은 충만했고 몸도 가벼웠습니다. 우리는 밤에도 법공부하고 연공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이런 심성을 높이는 기회를 주시고, 이런 환경에서도 법공부와 연공을 할 수 있게 해주신 것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것은 제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입니다.

현지 수련생이 이제 천안문 광장에서 법을 실증할 때가 됐다며 제게 자료와 현수막을 줬습니다. 우리가 천안문 광장에 도착하니 누군가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많은 수련생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 저는 곧바로 앞으로 뛰어나가 물러서지 않고 큰 소리로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외치며 품에서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 현수막을 꺼냈습니다. 경찰이 저를 발견하고 달려와 붙잡았습니다. 몸에 지니고 있던 진상자료를 한 움큼 뿌리자 경찰들이 깜짝 놀라 저를 때리려 했지만 때리지 못했습니다. 자비로운 사부님께서 저를 보호해주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노동수용소에서 박해에 맞서다

그 후 저는 2년 8개월의 불법 노동교양 판결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베이징 차오양(朝陽) 구치소에 불법 구금됐는데, 체포된 사람이 너무 많아 수용할 수 없어서 20여 일 후 친황다오(秦皇島) 구치소로 이송됐습니다. 현지 구치소에서 한 달을 보낸 후 현지 노동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수용소에서 우리는 전원 단식으로 저항했했습니다. 저는 체조를 포함한 모든 활동에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경찰이 체벌로 저를 계단 입구에 세워놨는데, 모기에 물려 온몸이 부어올랐지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노동수용소에서 저는 줄곧 장쩌민이 이 박해를 일으켰고, 장쩌민이 나라와 국민을 해치며 우리 대법제자들을 가족과 생이별하게 만들고 가정을 파탄 내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매일 이런 말을 했고 그들이 저를 건드리기만 하면 이 말을 했더니 수용소 경찰들이 저를 욕했습니다.

밤에 잠자기 전 점호 때 쪼그려 앉으라고 했지만 저는 앉지 않았고 협조하지 않았으며, 절대 소극적으로 참지 않았습니다. 비판대회를 열 때도 가지 않자 그들은 저를 들쳐 메고 들어갔습니다. 누군가 사부님을 욕하면 저는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외쳤습니다. 마약중독자와 매춘부 바오자(包夾: 수련생을 24시간 감시하는 재소자)가 제 입을 막아 숨을 쉴 수 없게 하자 저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습니다. 나중에 경찰은 저를 더 이상 참가시키지 않았습니다.

텔레비전을 볼 때도 저는 늘 등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저를 ‘전향’시킬 수 없자 마약중독자와 매춘부들에게 저를 감시하게 했습니다. 경찰들이 제가 선하지 않다고 하자 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 저는 절대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절대 ‘전향’하지 않겠습니다. ‘전향’은 잘못된 것입니다’라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또 나중에 온 수련생들에게 ‘전향’하지 말라고 격려했습니다. 우리 조에는 네 명의 수련생이 있었는데 모두 매우 확고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우리를 뿔뿔이 흩어놓았습니다.

저는 육체적 고통을 겪지 않았는데 이는 위대한 사부님께서 계속 제자를 보호해주셨기 때문임을 압니다. 사부님께 드리는 감사의 마음을 어떤 언어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시의 일념(一念)은 오직 사부를 믿고 법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악랄한 환경에서도 저는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온갖 방법으로 제 혈압을 재려 했지만 저는 필사적으로 저항해 혈압이 정확히 측정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의사에게 “당신들은 의덕(醫德)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협조하지도 서명하지도 않았습니다.

노동수용소에서 저는 모든 것에 협조하지 않자 그들은 제게 두 번 형을 가중시켰는데, 한 번은 4개월, 두 번째는 8개월로 최대 1년까지 늘릴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더 이상 늘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29일간 버티자 그들은 저를 엄관조(嚴管組)로 보냈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더 이상 저를 관리하지 않았습니다.

노동수용소에서 돌아온 어느 날, 610사무실 사람들이 차 여러 대를 몰고 우리집에 와서 저를 강제로 세뇌반에 데려가려 했습니다. 남동생, 남편, 어머니가 모두 집에 있었는데, 남동생이 “이번에 당신들이 데려가려는 건 언니 한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 가족 네 명이 모두 함께 갈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파출소 지도원이 계속 610 사람들과 연락했지만 저를 데려갈 방법이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돌아온 지 10개월째 되던 때, 제가 외지 수련생과 전화로 진상자료 관련 연락을 하다가 도청돼 그 수련생이 납치됐습니다. 당시 시장에서 장사하고 있던 저에게 성(省) 610과 네 명의 경찰이 와서 제가 막 산 장사용 새 휴대폰을 빼앗고 돈까지 빼앗으려 했습니다. 현지 파출소 사람이 “그 집은 작은 장사를 한다”며 막아서 돈은 남겨뒀습니다.

그들이 시장에서 제게 수갑을 채워 저는 또다시 박해를 받았습니다. 저는 협조하지 않았고 네 사람이 저를 들어 차에 태워 곧바로 성 구치소로 보냈습니다. 그들이 불법 심문을 했지만 저는 아무것도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진선인은 좋습니다’는 틀리지 않았어요. 당신들이 저를 잡는 것이 위법이에요. 저는 죄가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저를 구치소로 보냈습니다.

구치소에서 저는 노동에 협조하지 않았더니 그들은 한 농아와 한 매춘부에게 신발 바닥으로 저를 때리게 했습니다. 저는 “사람을 때리면 안 돼요. 사람을 때리는 건 위법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농아는 듣지 못해 여전히 저를 때렸고, 그 어린 매춘부는 때리지 못하고 겁에 질려 울었습니다. 저는 바닥에 누워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하룻밤을 잤습니다. 이튿날 경찰이 제가 바닥에서 잔 것을 알고는 제 노동 할당량을 면제해줬습니다. 그들이 저를 ‘전향’시키지 못해 저는 다시 2년간 박해를 받았고, 노동수용소에서 저는 아무것도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후 저는 계속 법을 실증하고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했습니다. 집에서도 법공부 팀을 만들었는데 당시 교란도 있었지만 우리는 정념으로 돌파했습니다. 2015년 장쩌민 고발 물결이 시작되자 저희 지역 수련생들이 전체적으로 장쩌민을 고발하기 시작했고, 저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법 노정을 따라가려 했습니다. 다른 수련생들도 장쩌민 고발 물결에 참여하도록 격려했고, 우리는 짧은 시간 내에 양고(兩高, 최고법원과 최고검찰원)의 회신을 받았습니다.

세 가지 일을 잘하기 위해 노력하다

저는 20여 년 수련하며 중년에서 노년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저는 시종일관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세 가지 일을 잘하라고 하셨으니 저는 반드시 잘해야 합니다. 저는 진상 알리기 항목에 참여해 음성전화를 걸어 적지 않은 중생에게 삼퇴(중국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를 권했습니다.

한번은 제 가게에서 소고기를 팔고 있는데 한 여자가 사러 왔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소고기 한 조각을 줘서 먹게 한 다음 대법 진상을 알려주고 삼퇴하게 했습니다. 그녀가 돌아가서 남편에게 얘기했는데, 그녀의 남편은 교통경찰이었습니다.

이튿날 그 교통경찰이 화가 나서 제 가게에 왔습니다. 저는 역시 소고기 한 조각을 잘라 그에게 주었지만 그는 사납게 “안 먹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당신 담이 크네! 지금 도처에서 파룬궁을 잡고 있는데 우리 마누라한테 공산당 조직을 탈퇴하라고 하다니, 내가 신고할 수도 있어!”라고 외쳤습니다. 그가 이렇게 소리치자 주위 상인들이 모두 저를 쳐다봤습니다. 저는 웃으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당신은 이렇게 착하니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제 가게에서 소고기를 좀 샀습니다.

기차역에서 610 우두머리가 저를 미행하며 사진을 찍었는데 제가 발견하자 즉시 현장을 떠났습니다. 작년에 공원에서 두 젊은 여성을 만났는데, 제가 그들에게 대법 진상을 알려주자 그중 한 여성이 휴대폰을 저에게 향했습니다. 저는 즉시 제지하며 “사진을 찍지 마세요. 당신들에게 좋지 않아요. 나쁜 일을 하면 안 돼요”라고 말했습니다.

20년 동안 대면해 진상을 알리며 수없이 많은 일을 겪었지만 모두 아슬아슬하면서도 무사했는데, 자비롭고 위대한 사부님께서 몇 번이고 제자를 보호해주셨기 때문임을 압니다.

올해 정월대보름에 호적경찰이 제게 전화해서 우리집에 와서 파출소로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사람을 구한다는 생각을 품고 두려운 마음 없이 ‘사부님이 계시고 법이 있으니 무엇도 두려워할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록 장치(바디캠)를 봐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장쩌민이 질투심으로 이 사상 초유의 박해를 일으켰고 그는 소인배라고 알려줬습니다.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진선인은 좋습니다’는 보편적 가치이니 당신들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저를 돌려보냈습니다.

4월에 지역사회 민경이 또 제게 전화했는데 당시 저는 받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현지 전화여서 제가 다시 걸었습니다. “저는 수련인이라 사람을 존중해야 해요. 방금 전화를 못 받았는데 지금 다시 거는 거예요. 무슨 일이 있나요?” 저는 그들이 진상을 들으러 온다는 걸 알고 당당하게 우리집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들이 우리집에 와서 기록 장치를 켜놓자 저는 말했습니다. “천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안 돼요. 파룬궁은 장쩌민이 박해한 거예요. 예로부터 불법(佛法)을 박해하면 모두 보응을 받았어요. 파룬따파는 고덕대법(高德大法)으로 우주의 진선인(眞善忍) 표준을 지침으로 삼고 있고, 전 세계 100여 개국 사람들이 모두 수련하고 있어요. 국가에 수많은 이로움만 있고 한 가지 해로움도 없으니 절대 박해하면 안 돼요.” 그들이 서둘러 “아니에요, 아니에요.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서명하라고 하자 저는 “당신들이 대법에 죄를 짓게 할 수 없어요. 이건 역사적인 증거를 남기게 될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진선인은 좋습니다’를 기억했어요”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갔고 저에게 서명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맺음말

제가 수련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저는 확고하게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었기에 반석같이 견고하게 오늘까지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사부님의 가지(加持) 아래 저는 층층의 안개 장벽을 돌파했습니다. 한길을 걸어오면서 겪은 고난을 통해 대법의 위대함과 수련의 엄숙함을 서서히 깨달았습니다. 앞으로의 수련 길에서 저는 더욱 안정되게 걷고 절대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어긋나지 않으며 원만하여 사부님을 따라 돌아가겠습니다.

 

원문발표: 2025년 9월 1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9/16/49809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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