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어려운 세월 속의 잊을 수 없는 경험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1999년 정월에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수련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2001년 3월, 직장에서 일하던 중 강제로 끌려가 시 세뇌학교에 5개월 넘게 감금됐습니다. 어느 날 기자가 저를 인터뷰하러 왔기에 제가 갇혀 있던 독방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이 문은 늘 잠겨 있고 문에 달린 작은 유리창 밖에는 천막이 쳐져 있어 밖에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전향하지 않고 그들 요구를 듣지 않으면 이 방에서 먹고 자고 모든 걸 해결해야 하며, 수시로 구타와 욕설, 체벌을 당하고 잠을 재우지 않으며 전기충격, 수갑, 강제 주입, 독방 감금 등을 당합니다. 이곳이 학교입니까? 이건 학교가 아닙니다! 마굴(魔窟)입니다! 제가 이 사실을 알려드리는데, 감히 전 세계에 폭로할 수 있습니까?” 기자와 촬영기사는 한마디도 없이 나갔습니다.

불법 감금 5개월 후 직장에서 저를 데려갔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직장에서 세뇌학교에 1만 위안을 지불했고 그 돈을 제 월급에서 공제했다는 것입니다. 매달 생활비로 197위안만 주며 13개월 동안 1만 위안을 모두 공제할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2003년 사스가 유행했을 때 일부 직원들과 재택근무를 했는데, 사스가 끝난 후 직장에서는 제가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다며 저의 복귀를 거부했습니다.

2005년 12월, 진상자료를 배포하다 발각돼 파출소로 끌려갔습니다. 집 주소와 직장을 파악한 후 직장으로 인계됐고, 경찰이 남편에게 1500위안의 보증금을 강요했는데 영수증도 주지 않았고 아직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또한 남편에게 저를 잘 감시하겠다는 보증서를 쓰게 했습니다.

2006년 이른바 ‘엄중 타격’ 시기에 경찰이 우리집 근처에서 잠복하다가 제가 집에 도착할 무렵 다시 파출소로 끌고 갔습니다. 소식을 들은 형님이 아들과 함께 40리(20km) 밖에서 달려와 “우리 시누이는 좋은 사람입니다! 친척과 친구들 모두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는데 좋은 사람을 잡으면 안 됩니다. 풀어주지 않으면 저도 안 갑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날 형님과 조카들, 딸이 파출소에서 하루 종일 지켰고, 저녁에야 제가 풀려나 집으로 돌아갔는데 밥도 못 먹었습니다. 이후 경찰은 2005년 진상자료 배포를 구실로 저를 1년 노동교양에 처했으나 신체검사 부적합으로 집행유예됐습니다. 2007년 노동교양 기간이 끝나자 직장에서는 이를 빌미로 신문에 공고를 내고 저를 해고했습니다.

2015년 12월, 대면으로 진상을 알리다 또 경찰에 발각돼 15일간 불법 구금됐습니다. 구류소에서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니며 국가 법률을 위반하지 않았습니다”라며 모든 감옥 규정을 거부했습니다. 그곳에서 매일 연공을 견지하다 나왔습니다.

2022년 7월, 시장에서 진상을 알리다 또 경찰에 납치됐습니다. 딸과 외손녀가 보는 앞에서 저를 차에 밀어 넣고 뒷좌석 가운데 끼워 넣었습니다. 왼쪽의 젊은 공안국 대장이 저를 노려보기에 “그렇게 보지 마세요, 저는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하자 그가 태도를 바꿨습니다. 오른쪽 경찰에게 “신앙 자유는 법률로 보호받습니다. 당신들이 지금 알면서도 법을 어기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국가신문출판총서 50호령이 99항과 100항을 폐지했다고 말하며 휴대폰으로 50호령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가는 길 내내 진상을 알려줬습니다. “14개 사교(邪敎, 사이비 종교) 중에 파룬궁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법률 조항도 파룬궁을 사교라 규정한 적 없습니다. 장쩌민이 함부로 파룬궁을 사교라 했지만 그가 법률을 대표할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져야 합니다. 현행법은 10년, 20년, 30년을 소급 적용한다고 규정하니 자신을 위한 퇴로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때 5일간 불법 구류됐습니다. 구류소에 들어가 모든 절차를 거부하자 직원이 소장을 불렀습니다. 소장이 흉악하게 “여기 오면 여기 규정을 따라야 해”라며 제 옷을 잡아당기기에 힘껏 뿌리치자 그가 바닥에 넘어졌습니다. 순간 그는 다른 사람처럼 변해 “낯이 익은데, 전에 온 적 있지?”라고 물었습니다. “네, 왔었습니다!”라고 하자 “좋아, 당신은 예외로 하겠소. 상부에 보고해서 당신은 이곳 규정을 따르지 않아도 되니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했습니다. 사부님께서 매 순간 제자를 보호해 주심에 마음속으로 한없이 감사드렸습니다.

그 일 이후 저는 줄곧 평온하게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남편은 제가 신앙을 포기하지 않자 파출소, 직장, 공안국의 계속된 괴롭힘과 협박으로 정신적으로 막대한 압박을 받았습니다. 비록 제가 파룬따파 수련을 견지하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수련 후 제 신체와 사상의 변화를 보고 수련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임을 알았고, 집안일을 능동적으로 맡아 했습니다. 그는 제 수련을 반대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안전에 주의하고 밖에 나가 진상자료 배포하지 말고 집에서만 연공해”라고 했습니다. 저는 “장쩌민이 파룬궁을 박해하고 모함하며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을 조작해 수많은 무고한 세상 사람들을 속여 대법을 적대시하게 만들어 도태될 위험에 처하게 했어요. 저는 저만 생각할 수 없고 사람들이 진상을 알게 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가 받는 압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가 여러 번 납치되고 괴롭힘 당할 때 그는 분주히 뛰어다니며 집의 진상자료와 물품을 제때 옮겨 손실을 크게 줄였습니다. 2005년 그의 몸에서 종양이 발견돼 그달에 수술했고 한 달 후 직장에 복귀했는데, 의사는 제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무거웠지만 매일 새벽 그가 잠든 사이 파룬궁 다섯 가지 공법을 연마했고, 연공에서 발산되는 바른 에너지가 그의 체내 음성적인 나쁜 것들을 상쇄시켰습니다. 10년째 되자 의사는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2014년 12월, 그는 우리를 떠났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딸과 저만 남았습니다.

딸은 대법이 박해받은 20여 년 동안 공포와 걱정, 진상을 모르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과 차별을 견디며 묵묵히 저를 지지했습니다. 1999년 ‘7·20’에 제가 수련생들과 베이징에 청원 가려 할 때 딸에게 베이징에 간다고 하자 딸은 담담하게 “엄마, 다녀오세요”라고 했습니다. 당시 너무 감동받았는데 그때 딸은 중2였습니다. 2001년 제가 세뇌학교에 감금됐을 때 딸은 매주 면회 와서 맛있는 것을 많이 사다 줬고, 어머니날에는 “사랑하는 엄마, 영원히 사랑해요!”라고 쓴 카드를 줬습니다. 카드의 글씨를 보며 눈물이 멈추지 않았고 그 카드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딸은 실제 행동으로 제 수련을 지지했고, 대학 졸업 후 직장 다니면서도 자주 돈을 내어 대법 진상 알리기를 지원했습니다. 제 신앙 때문에 딸은 결혼 문제에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엄마가 파룬궁 수련한다고 하면 상대나 상대 부모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딸은 이 문제에서 매우 확고했고 원망 없이 저를 위로하며 “진선인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저도 받아들이지 않겠어요!”라고 했습니다. 나중에는 소개받을 때 먼저 상대에게 알리고 이의가 있으면 만나지 않았습니다. 2022년 7월 제가 다시 공안국에 납치됐을 때 사악한 자들이 감금 장소를 숨겼는데, 딸의 강력한 요구로 장소를 알려줬습니다. 그 과정에서 공안국 우두머리는 딸이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에 감동받아 강경한 태도를 온화하게 바꾸고 딸에게 휴대폰 번호를 주며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최근 몇 년간 딸도 법공부와 연공을 시작했고, 사위도 한동안 수련에 정진하며 중생을 많이 구했습니다. 현재 사회 환경 오염의 영향인지 사위는 현실의 흐름에 빠져 2년간 수련을 떠났었는데, 제가 이 글을 쓸 때 다시 법공부를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천만 년의 윤회와 기다림을 놓쳐 후회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시어머니는 제가 공직에서 해고된 후에도 제가 신앙을 견지하는 것을 한 번도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제가 자주 어르신을 찾아뵙고 목욕시켜 드리고 머리와 손톱을 깎아드리자 시어머니는 늘 제게 엄지를 치켜세우셨고, 식사 때는 맛있는 반찬을 제 그릇에 담아주셨습니다. 저는 시어머니께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자주 외우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2017년 음력 12월 22일 시어머니는 97세로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동안 고통받지 않으셨고 제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떠나셨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저를 기다리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둘째 오빠는 수련에 들어서지는 않았지만 대법을 매우 지지합니다. 2002년 둘째 올케언니가 구치소에 반년간 감금됐을 때 오빠는 엄청난 압력을 견디며 석방을 요구하러 갔고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자주 돈을 내어 우리가 사람 구하는 항목을 지원하며 여러 번 “여동생, 대법 일에 돈이 필요하면 말해. 오빠가 지지할게!”라고 했습니다. 제가 공직에서 해고된 후에도 오빠는 자주 제게 돈을 줬고, 정식으로 수련에 들어서지는 않았지만 나중에는 우리와 함께 자주 연공했습니다. 오빠의 아들딸 모두 엄마와 고모의 수련을 매우 지지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20여 년간의 파룬궁 박해를 통해 정(正)과 사(邪)를 분별하고 선과 악을 알아 중공을 버리고 삼퇴로 평안을 지켜, 곧 닥칠 대재난 앞에서 자신에게 아름다운 미래를 선택하기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5년 9월 1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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