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가슴 저미는 수련 여정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올해 일흔 살 된 여자 대법제자입니다. 대법을 얻어 수련한 지 이제 30년이 됐습니다. 이 30년 동안 대법을 얻었을 때의 행복과 기쁨이 있었고, 고비를 넘지 못할 때는 뼈를 깎는 듯한 아픔이 있었으며, 사람의 마음을 내려놓았을 때는 가볍고 자유로운 느낌이 있었습니다. 박해가 발생한 후 사부님의 보호 속에서 피비린내 나는 폭풍우를 헤쳐 나오며 사부님의 자비와 위대함을 목격했고, 대법의 신기함을 체험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환경이 상대적으로 느슨해진 상황에서 제 수련은 예전만 못합니다. 박해가 막 시작됐을 때는 대법을 수호하기 위해 정말로 생사를 내려놓고 모든 것을 버렸는데, 지금은 아무리 해도 그때의 기세를 되찾을 수 없습니다. 비록 세 가지 일을 매일 차근차근 하고 있지만, 자신도 모르게 해이해지고 무감각해진 것을 느낍니다. 중생 구도에 대한 긴박감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도대체 문제가 어디에 있을까요? 저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수련생들의 교류 글에서 근본 집착 문제를 논하는 것을 보고 저도 자주 이 문제를 생각해봤지만 정확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질병 때문에 대법을 얻은 것도 아니고, 속인의 명리정에 대해서도 비교적 담담하며, 세상일에 별로 흥미가 없고, 모든 것에 무관심한 듯했습니다. 그래서 대법을 만나자마자 ‘드디어 찾았다’는 놀라운 기쁨을 느꼈고, 다른 생각 없이 끝까지 수련하고 싶었습니다! 여러 차례 구금과 노동수용소 박해를 받으면서도 한 번도 타협하지 않았고, 세상 그 무엇도 대법에 대한 제 확고한 마음을 흔들 수 없었기에 제 근본 집착은 정말 찾기 어려웠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자비롭게도 제가 향상하려는 마음이 있음을 보시고 신묘한 안배를 하셔서, 제가 거의 정신이 무너질 지경에서 가슴이 찢어지는 그 순간, 갑자기 제 근본 집착을 발견하게 해주셨습니다.

처음으로 안으로 찾다

7월 25일 그날, 갑자기 왼쪽 다리가 아파서 서거나 걷지 못했습니다. 화장실에 가거나 부엌에서 밥을 하려면 허리를 60~70도나 구부려야 겨우 발을 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다음 날 바로 연공과 법공부, 발정념을 더 열심히 했습니다. 당시 36~37도의 무더위 속에서 다리는 서지도 못하고 아파서 몸이 덜덜 떨렸으며, 머리카락은 흠뻑 젖고 땀이 얼굴을 타고 줄줄 흘렀습니다. 이를 악물고 연공을 끝까지 마쳤지만, 예상외로 다리가 더 아파져 한 발짝도 뗄 수 없게 됐습니다. 그 순간 마음이 급해져 사부님 법상 앞에서 말했습니다. “사부님, 제자는 걸어야 하고 밖에 나가야 합니다. 제게 허점이 있어도 사악이 이렇게 박해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말하며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습니다. 이렇게 조급해하니 잠시 후 입술에 큰 물집이 생기고 목이 붓기 시작했으며 이도 은은히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즉시 경각심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다 사람의 마음 아닌가?’ 급히 사부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조급해하지 않겠습니다. 안으로 찾아서 제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잘 찾아보겠습니다.”

밤에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찾았습니다. 질투심, 쟁투심, 과시심, 안일심, 말조심 못함, 타인의 집착에 집착함,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등등. 그리고 시누이에 대한 원망심도 깨끗이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그녀에게 그렇게 잘해줬는데, 그녀는 남편이 입원하고 세상을 떠날 때 저를 온갖 방법으로 괴롭혔습니다. 저는 참고 또 참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한바탕 맞받아쳤습니다. 나중에 제가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화해했지만, 마음속엔 여전히 약간의 불평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들(수련생)도 저와 교류하며 근본 집착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찾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제 수련이 예전만 못하고, 말이 겉치레뿐이며, 안으로 찾는 것이 표면적이고, 남의 부족함만 지적하며, 자비심이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어머니의 명리심이 분명 제거되지 않았기에 자비심이 생기지 않는 겁니다.” 아들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법을 배운 후 저는 대법에 먹칠을 할 수 없으니 사부님 요구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주변 가족들이 모두 대법을 인정하고 대법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에게 베푼 호의가 완전히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법리의 구속으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박해 발생 후 정념으로 걸어왔다고 하지만 사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한 것이었고, 사부님의 보호가 없었다면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수련생들 사이에서 제 평판은 꽤 좋았고 칭찬이 비판보다 많았습니다. 어느새 대법 안에서 명예를 구하는 마음이 생겼고,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고 이른바 ‘번듯한’ 겉모습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니 자비심이 생길 리 없었습니다. 또한 때로 수련생이 법에 있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이 많을 때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더 깊이 파고들어 보니 최근 몇 년간 마음속에서 수시로 타인의 따뜻함과 관심에 대한 갈망이 솟아올랐습니다. 제 인생에서 주변 가족들이 모두 비교적 냉담했고, 남편은 성격이 급하고 타인을 배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이 있었기에 다른 공간의 마가 분명히 보았고, 그래서 세뇌반에 구금됐을 때 세뇌반 직원들이 저에게 유별나게 ‘관심’을 보이며 “집에서도 아무도 당신에게 이렇게 잘해주지 않지요?”라고 덧붙였습니다. 저는 이 마음을 보긴 했지만 평소에 진지하게 대하고 수련으로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남편을 7~8년간 간호했습니다. 혼수, 입원, 응급치료 등 모든 과정을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 속에서 무사히 넘겼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환자의 가족들이 곁에 둘러서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보살피는 것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위아래층을 오르내리며 모든 일을 혼자 걱정해야 하니,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시큰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외국에서 아이를 더 낳아 후일을 대비하길 바라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제 근본 집착일까요?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설령 아니더라도 매우 강한 집착입니다. 지금까지 수련했는데도 여전히 속인의 것을 구하고 있으니, 이 마음이 왜 아직도 사람 여기에 있을까요? 혹시 이 마음 때문에 사악에게 빈틈을 준 것은 아닐까요?

두 번째로 안으로 찾다

밤새 자신을 찾아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찾아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다리가 조금 나아졌습니다. 저는 스쿠터를 타고 수련생 집에 가서 법공부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수련생 집 현관문에 도착했을 때 몸의 균형을 잃고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어서 결국 다섯 계단에서 굴러떨어졌습니다. 사부님의 보호로 큰 부상은 없었지만, 오른쪽 무릎 연조직이 다쳐서 걸을 때 무릎을 구부릴 수 없었고, 오른쪽 옆구리도 다쳐서 찌릿한 통증이 있었습니다. 기침도 할 수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분명 아직 찾지 못한 문제가 있어서 또 사악에게 빈틈을 준 것 같았습니다. 며칠간 인터넷을 하지 않았는데, 수련생들의 교류 글을 보고 싶어 명혜망을 열자마자 ‘본질적인 변화만이 사악을 타파할 수 있다’는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자세히 읽어보니 글에서 지적한 여러 문제가 제 상황과 일치했습니다. ‘아, 원래 네가 본질적으로 자신을 바꾸지 못했구나!’ 아들 수련생도 이 글을 보고 저와 교류하며 수련생이 제기한 몇 가지 문제가 제 상황과 비슷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왜 남편과의 고비(그는 성격이 급하고 사소한 일에도 화를 냈음)를 늘 잘 넘기지 못했는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완전히 넘지 못했는지 알게 됐습니다. 저 자신도 매우 괴로웠고, 참음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느꼈으며, 평소 자비롭고 평화로운 마음 상태를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수련생이 법에 있지 못한 일이나 사실이 아닌 것을 억지로 사실인 양 말할 때(여기에는 속인도 포함됨), 저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격하게 반응했으며, 선의와 이성으로 차분히 설명하며 수련인의 마음가짐을 유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얼굴이 일그러지며 격렬하게 반박했습니다. 정말 당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비록 자주는 아니지만 이런 일을 만나면 늘 이런 상태가 됐고, 순간 자신을 수련생 위에 놓고 마치 교사가 강단에서 강의하는 것 같았습니다(교사 직업병). 나중에 매우 후회하며 급히 수련생에게 사과했지만, 일이 닥치면 여전히 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말조심, 과시심, 자아 증명도 모두 비슷한 문제가 있어 매우 괴로웠습니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 수련생이 오면 그가 늘 저를 일깨웠습니다. “당신 혼자만 떠들지 말고, 끝없이 말하지 마.” 이런 문제들을 고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고치려 해도 고칠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문제가 어디에 있을까요? 수련생의 이 교류 글이 저를 일깨워줬습니다. 원래 본질적으로 자신을 바꾸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가 이 점을 인식하자 갑자기 사부님께서 ‘창춘보도원법회 설법’에서 하신 법이 떠올랐습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들이 개변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당신의 깊은 곳, 본질에서부터 당신 자신을 개변해야만 진정으로 승화되고 진정으로 개변된다. 心性(씬씽)의 본질을 개변하지 않으면 모순에 부딪혔을 때, 그것은 돌발적으로 튀어나와 팽창될 것이고 표현되어 나올 것이다. 그 부처가 만약 그렇다면 그래도 되겠는가? 그것은 모두 본질적인 개변이기에 나는 수련은 엄숙하다고 말하는데, 당신들이 진정 본질에서 자신을 개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저는 완전히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오래 수련했는데도 왜 어떤 집착심이 제거되지 않고 때가 되면 튀어나오는지, 원래 본질 깊은 곳에서 자신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과 그의 가족에게 겉으로는 모두 잘했지만, 제 내심 깊은 곳에는 늘 그들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었고, 그들이 너무 이기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고마워하지 않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제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기에, 사람은 누구나 명백한 그 일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안으로 찾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집을 제 명의로 이전해야 했습니다. 거의 2년이 지나서야 겨우 차례가 됐지만 여전히 안 됐습니다. 아들이 해외에 있어 돌아올 수 없었기에 그의 재산포기 성명이 필요했고, 국제 헤이그 공증도 받아야 했으며, 해외 서류를 모두 중국어로 번역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번역회사와 연락을 마치고 서류를 들고 막 나가려는데 폐품수집상이 왔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복도와 베란다의 폐지상자와 병들을 정리하려고 했었습니다. 폐품수집상이 떠난 후 서류를 찾아보니 없어졌습니다! 두 침실과 거실에도 없었습니다. 그 순간 멍해졌습니다. ‘큰일 났다, 부주의해서 폐품수집상에게 같이 줘버린 건 아닐까?’ 다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가 스쿠터를 타고 급히 쫓아갔습니다. 단지 안에 없어서 밖으로 나가 근처 단지, 큰길 작은 길, 폐품수집소를 찾아다녔지만 한 시간 넘게 찾아도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그동안 제 심정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낙담해서 집에 돌아와 참지 못하고 사부님 법상 앞에 엎드려 흐느껴 울었습니다. ‘사부님, 제자가 도대체 무슨 큰 허점이 있어서 사악이 계속 빈틈을 타는 겁니까? 최근 이렇게 많은 문제가 생기는데! 저 같은 사람이 사부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있습니까? 제가 아직 수련할 수 있습니까? 저는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후회와 원망이 교차하고 자책이 극에 달해 거의 정신이 무너질 지경이었고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습니다. 그때 저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더 이상 수련인답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제 상태가 잘못됐음을 발견하고 억지로 감정을 다스리며 차분히 생각했습니다. ‘나는 왜 이럴까? 집에 집착하나? 재물에 집착하나?’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근본 문제는 여기에 있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집을 이전하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인데, 이 일 자체가 너무 번거롭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증명서를 떼고, 얼마나 많은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는지, 얼마나 마음을 썼는지, 어렵게 마지막까지 왔는데 제 부주의로 또 이런 일이 생기니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을 바꿔 ‘그래, 이렇게 된 거 집은 이전하지 말고 그냥 두자’고 생각하니 마음이 많이 평온해졌습니다. 부엌에 가서 휴대폰을 들고 번역회사에 전화해 못 간다고 알리려 했습니다.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돌아서는데 서류가 부엌 의자에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무심코 거기 놓았는데 전혀 기억이 없었던 것입니다! 서류를 찾았지만 저는 더욱 자책했습니다. ‘이게 어찌 신의 길을 가는 사람이란 말인가? 이렇게 덤벙대고 보통 사람만도 못하니.’ 저도 모르게 저 자신을 조롱했습니다.

그때 아들이 전화해서 일이 어떻게 됐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또 흐느끼며 아들에게 또 실수해서 서류를 잃어버릴 뻔했다고 말했습니다. 아들이 말했습니다. “그게 뭐 대수예요? 잃어버리면 다시 만들면 되지, 좀 더 기다리면 되잖아요?” 제가 말했습니다. “너는 이런 것들을 처리하는 게 얼마나 번거로운지 몰라.” 아들이 말했습니다. “빨리 안으로 찾아보세요. 어머니는 늘 번거로운 걸 싫어하잖아요. 무엇을 하든 번거로운 걸 싫어하는데, 제가 보기엔 바로 그 번거로운 걸 싫어하는 마음이 번거로움을 만든 거예요! 아마 사부님께서 이 일을 이용해 어머니의 그 번거로운 걸 싫어하는 마음을 제거하시려는 걸 거예요!” 아들의 말을 듣자 갑자기 마음이 진동했고, 온몸의 세포가 진동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놀라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찾았다, 바로 그거야, ‘번거로운 걸 싫어함’! 이게 바로 나의 근본 집착이야! 나는 평소 무엇을 하든 번거로운 걸 싫어해! 무엇이든 간단하면 좋고, 마음 편하면 좋고, 신경 쓰기 싫고, 마음 쓰기 싫어.”

아들이 말했습니다. “만약 이게 어머니의 근본 집착이라면, 깊이 파고들어 보세요. 번거로운 걸 싫어하는 뒤에는 뭐가 있나요? 고생하기 싫어하는 거예요. 고생하기 싫어하는 뒤에는 사(私)가 있어요! 사부님께서 정법으로 대궁(大穹)을 구하시고 중생을 구하시는데, 매분마다 얼마나 많은 번거로움을 만나실지 모릅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그래,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불은호탕(佛恩浩蕩)’ 그 단락의 법을 볼 때마다 무한히 감동하는데, 그것은 얼마나 거대하면서도 세밀한 공정일까!”

하지만 수련인인 제가 고생하기 싫어하고 귀찮아하는 마음을 지닌다면, 그 업력(業力)을 어떻게 소멸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수련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우리는 단순히 개인 수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구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는데, 그 사명을 어떻게 완수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저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는 정말 수련했느냐? 네가 지금까지 대법 속에 머무른 이유가 무엇이냐? 대법의 아름다움을 얻어 네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냐? 그렇다면 그것은 대법을 이용하고 대법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얼마나 더럽고 이기적인 마음인가! 대법의 요구와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이 생각이 떠오르자 저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고, 눈물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습니다.

이때 저는 대법을 처음 얻었을 때의 정경을 떠올렸습니다. 처음에는 비교적 단순해서 잡다한 생각이 없었고, 그저 ‘대법은 좋다, 끝까지 수련해야 한다’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법을 일정 기간 배우고 나서야 사부님께서 제 몸을 정화해 주셨음을 알았고, 그 뒤로 병이 사라져 다시는 병원에 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가!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가!’ 또 ‘한 사람이 연공(煉功)하면 온 가족이 이익을 얻는다’라는 이치를 알게 됐습니다. 가족들을 과도하게 챙기지 않아도 사부님께서 보살펴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름이니 이익이니 하는 것도, 내 것이라면 잃지 않을 것이니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마음은 가볍고 자유로웠습니다. 마음속으로는 ‘대법을 배운 덕분에 보통 사람의 번거로운 일들을 얼마나 많이 덜었는가! 게다가 귀속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천국 세계다! 이 대법은 너무도 좋다. 누가 수련하지 않아도 나는 반드시 수련하겠다’라며 은근히 기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수련을 이렇게 오래 해오면서도 이러한 생각들을 중시하지 않았고 마치 모두 잊은 듯했습니다. 그래서 ‘귀찮아하는 이 마음’은 줄곧 깊이 숨어 있었고 제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가 수련하고 향상하며, 중생을 구하는 데 큰 장애가 됐습니다. 그것은 저를 나태하게 하고 무감각하게 하며 안일하게 하고 더는 박해받고 싶지 않게 만들었으며, 더는 고생하고 싶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그저 평탄하게 걸어가 법이 인간 세상을 바로잡는 그때까지 가고 싶다는 마음만 갖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이 ‘귀찮아하는 마음’은 이미 마(魔)에게 이용돼 제가 수련하는 많은 방면에서 교란 작용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전법륜’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암송하는 것은 제게는 언감생심 같은 일이었지만, 얼마나 많은 수련생들이 이미 해냈습니까. 자료를 만드는 것도, 오늘은 소모품을 사고 내일은 기계를 고쳐야 하니 너무 번거로워 선뜻 나서지 못했습니다. 진상 지폐를 만드는 일도 씻고, 다리고, 눌러야 하니 그렇게 세심한 일은 저는 못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수련생들과는 웬만하면 부딪히거나 갈등을 만들지 않으려 했습니다. 마음이 지칠까 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박해가 시작되기 전에는 제가 지역의 보도원이었고, 박해 이후로도 사부님의 정법 노정을 따라 지금까지 걸어왔기에 수련생들에게도 나름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은 더 이상 많은 것을 맡거나 더 큰 헌신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은 수련생들이 찾아와서 부탁하거나 스스로 맞닥뜨리면 그냥 했지만, 누군가 제 앞에서 “여러분 협조인이 어떻다더라”라고 말하기라도 하면 저는 듣기 싫어 곧바로 “사부님께서 모든 사람이 협조인이라고 하셨어요”라고 맞받아쳤습니다. 이렇듯 바로 이 ‘귀찮아하는 마음’이 저를 정체하게 했고, 예전처럼 용맹정진하지 못하게 가로막았습니다.

만약 사부님께서 이렇게 절묘한 안배를 해주시지 않았다면, 마음이 저미는 그 순간이 아니었다면, 저는 아마 제 근본 집착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이렇게 뼈에 새겨질 듯한 기억이 없었다면, 제 부족함과 존재하는 문제들을 아마도 엄정하게 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저는 이미 매우 위험한 경계에 이르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는 제자가 굳건히 수련하려는 이 마음을 보시고 저를 이렇게 일깨워주셔서, 제가 이 만고의 기회와 인연을 잃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몇 번이나 목이 메고, 몇 번이나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사존께서 제자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주신 그 은혜를 말로는 이루 표현할 수 없습니다!

종합해 보면, 오늘날까지 수련해 오는 과정에서 제가 여전히 부족함을 지니고 있고, 정진하지 못하는 상태가 나타난 이유는 제게 한 가지 큰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수련을 엄숙하게 대하지 않은 것입니다. 수련하기 전 속인 생활을 대할 때 ‘무엇이든 상관없다’라는 태도를 그대로 수련 속으로 끌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온몸에 업력을 짊어진 사람이 부처로 수련해 나가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엄숙하고 얼마나 성스러운 것입니까! 그런데 저는 자주 그만한 마음으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이와 관련해 여러 차례 설법하셨고, 저 또한 이 문제를 두고 이전에 꽤 깊이 있는 체득을 글로 쓴 적도 있었습니다. 수련생들의 교류 글을 볼 때도 제 부족한 점들을 발견했고, 반드시 그것을 수련으로 없애겠다고 결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다시 소홀히 하거나 심지어 잊어버리고, 또다시 습관적인 사고와 성격 탓으로 돌리곤 했습니다. 그러니 사부님께서 꿈속에서 여러 차례 저를 일깨워 주셨던 것도 당연합니다. 꿈에서 제가 학생들에게 수업하러 가는데, 예습도 하지 않았거나 책을 가져가는 것을 잊었거나, 아니면 시간표를 확인하지 않아 어느 반에 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책임감이 없고, 수련을 엄숙하게 대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저에게 일깨워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기간 잇따른 경험은 마치 사부님께서 ‘방할(棒喝)’해 주신 것과 같아 저를 번쩍 깨우쳐 주었습니다! 저는 법이 인간 세상을 바로잡기 전 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 속에서 분발해 뒤따라가겠습니다! 저는 결심도 있고 자신감도 있습니다. 저는 사부님을 믿고 대법을 믿습니다. 제가 아무리 부족함이 많다 해도, 굳건히 수련을 이어가기만 한다면 사부님께서 반드시 저를 집으로 데려가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한 달 남짓한 이 기간 저는 마치 한 차례 세례를 받은 듯했습니다. 제 마음이 변했음을 발견했습니다. 들떠 있던 마음이 차분해졌고, 밖에 나가 일을 볼 때도 더는 허둥대지 않았습니다. 귀찮다는 생각도 사라졌고,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마음속에 전혀 조급함이 없었습니다. 저 자신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이 놀라웠습니다. 저는 반드시 사부님께서 제자에게 좋지 않은 것들을 걷어내 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최근에 겪은 수련의 과정이며, 가슴 저미는 한 차례의 체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글로 써낸 것은 언제나 자신을 경계하기 위함입니다. 수련을 엄숙하게 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히 요구하며, 이 만고의 기연을 잃지 말고, 사부님과 간절히 구원받기를 기다리는 중생들을 실망하게 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법에 있지 않은 부분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바로 잡아주시길 바랍니다.

사존의 자비로우신 제도에 감사드립니다!

허스(合十)

 

원문발표: 2025년 9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9/14/498947.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5/9/14/49894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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