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초등학교 교사이며, 1999년 ‘7·20’ 이전에 법을 얻은 대법제자입니다. 20여 년의 수련 길에서 험난한 여정을 겪으며 고통과 즐거움, 기쁨과 슬픔을 모두 경험했습니다. 수련 중에 저는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 시시각각 제 곁을 지켜주시며 저를 이끌어 정념정행을 가르쳐 주셔서 오늘에 이를 수 있었음을 깊이 느꼈습니다. 이 글을 쓰는 것은 대법의 아름다움과 신기함을 증명하고, 사부님의 위대함, 자비로움, 전능하심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이로써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저의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제가 법을 얻은 지 1년 후인 1999년 7월, 중공 악의 우두머리 장쩌민이 파룬궁 박해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수련을 견지하고 진상 편지를 발송했다는 이유로 불법 구금, 구류, 금전 갈취, 급여 압류 등의 박해를 받았고, 교육국에 의해 현(縣) 초등학교에서 외딴 산간 학교로 여러 차례 전근당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저는 대법 수련에 대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굳건히 수련했습니다.
1. 외딴 학교로 전근되다
2000년 8월, 대법 수련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교육국은 저를 시내 초등학교에서 집에서 15~16킬로미터 떨어진 산간 초등학교(이하 A학교)로 전근시켰습니다. 매일 왕복 30여 킬로미터를 자전거로 4시간가량 걸려 다녔고, 비바람이 불어도 매일 그렇게 했습니다.
이 학교의 교장, 서기, 모든 교사들과 해당 진(鎭) 지도부와 진 파출소 사람들까지 모두 제가 대법을 굳게 믿어서 전근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학교 3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반에는 18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성적이 양극화되어 있었고, 문제 파악이나 사물을 받아들이는 능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 맞춰 저는 남다른 교수법을 채택했고 효과가 매우 좋았습니다. 또한 수업 과정에서 학생이 조금이라도 진보하면 즉시 칭찬하고 격려했으며, 절대 어떤 학생도 비꼬거나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대법 수련을 통해 얻은 선(善)으로 모든 학생을 대했습니다. 저는 또한 늘 ‘진선인(眞·善·忍)’의 기준에 따라 사람답게 살고 일하도록 자신을 일깨우며 언행을 엄격히 요구했습니다. 왜냐하면 제 표현을 통해 대법의 아름다움을 직접 학생들에게, 그리고 제가 대법제자라는 것을 주목하는 이곳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계한 교수법을 시행한 지 2주 후, 학생들의 상태가 기적처럼 바뀌었습니다. 학생들의 학습 흥미가 높아졌고, 우수 학생들은 더 탄탄해졌으며, 뒤처진 학생들의 성적도 꾸준히 올랐습니다. 또한 반 전체가 서로 돕고 배우며 단결하고 우애하는 좋은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학생들의 각 방면 변화에 학부모들이 매우 기뻐하며 저를 높이 평가했고, 모두 “학교에 좋은 선생님이 오셨다!”고 말했습니다. 교장과 교육 담당 진장도 TV의 거짓 선전으로 인한 대법제자에 대한 편견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수업 중일 때 진장(鎭長)이 직접 차를 몰고 학교에 와서 저를 보며 물었습니다. “여기서 어떠세요?” 제가 “아주 좋습니다”라고 답하자, 그는 반 전체 아이들을 보며 말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선생님께 배우는 것은 너희들의 복이구나!”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미소 지으며 저를 바라봤습니다. 제 눈가가 촉촉해졌습니다. 저는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았고, 더욱이 사부님께서 속인의 입을 빌려 저를 격려하신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2. 정념으로 마굴에서 벗어나다
2001년은 수괴 장쩌민 집단이 대법과 대법제자를 박해한 가장 사악하고 광란적인 시기였습니다. 기억하기로 그해 새해 전날 밤, 우리 지역 파출소 경찰이 대법제자들을 대대적으로 수색하고 납치했습니다. 당시 저와 남편은 한 수련생 집에 있다가 함께 파출소로 납치되어 불법 심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협조하지 않고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아 진술이 전무했습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두 명의 젊은 경찰이 저를 벽 구석에 몰아넣고 지키게 하며 다음날 아침 구치소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실내 문 위쪽에 시계가 있었는데, 시계 바늘이 자정을 가리킬 때 한 경찰이 전화를 받고 급히 나갔고, 이어서 나이가 좀 있는 경찰 세 명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저로부터 2미터도 안 되는 거리의 책상 앞에 둘러앉아 장기를 두며 저를 감시하면서 진 판을 어떻게 만회할지 토론했습니다. 그때 또 다른 젊은 경찰도 전화를 받고 급히 나갔습니다. 그가 나갈 때 방문을 꽉 닫지 않아 작은 틈이 있었습니다. 저는 열린 문틈을 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나가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해.’ 문틈이 작아 지나갈 수 없는데 어떻게 하지? 그때 사부님이 생각나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사부님, 문을 조금 더 열어주세요.” 과연 문틈이 조금 열렸지만 여전히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다시 사부님께 청했습니다. “사부님, 조금만 더 열어주세요.” 그러자 문이 천천히, 살며시 더 열렸고, 저는 기뻐하며 “사부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일어나 살며시 세 경찰 옆을 지나 문밖으로 나갔습니다. 이렇게 사부님의 도움과 보호 아래 저는 세 경찰의 눈앞에서 마굴을 벗어나 박해를 면했습니다.
글을 여기까지 쓰자 당시의 신기한 장면이 다시 눈앞에 떠올라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습니다. 두 손을 합장하고 다시 한번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3. 어쩔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다
파출소를 나와서 당분간 집에 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밤중에 어디로 가야 하지?’ 하지만 어디를 가든 대법 책이 없으면 안 되니, 15km 밖 시골 친척 집으로 가기로 했는데 마침 한 수련생 집을 지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큰길로는 갈 수 없었습니다. 한밤중이라 다른 사람의 의심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큰길로 갈 수 없고 샛길도 없는데 어떻게 하지?’ 산기슭 강둑을 따라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듬어 산 아래로 내려갔는데, 산 위의 무성한 관목 숲은 칠흑같이 어둡고 음침했습니다. 산기슭에는 얼어붙은 강이 있었고, 둑 오른쪽 아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옥수수밭이었는데 밭에는 수확 후 남은 옥수수 그루터기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둑에 올라가 깊고 얕게 발을 디디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다행히 그날 밤은 희미한 달빛이 있었고, 저는 걸으면서 쉬지 않고 사부님의 《논어》를 외웠습니다. 둑길이 점점 좁아지고 잡목과 그루터기도 있어 걷기 어려워지자 둑 아래 옥수수밭으로 내려가 걸었습니다. 밭두렁 위에는 뾰족한 옥수수 그루터기가 있었고, 그날 저는 하이힐을 신고 있었는데 특히 오른쪽 굽이 이틀 전부터 단단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으로 ‘굽이 떨어지면 안 돼’라고 생각하며 밭고랑을 따라 걸었는데 정말 굽은 문제없었습니다.
깊은 밤, 저 혼자 야외 깊은 산기슭을 걸으면서도 전혀 무섭지 않았고 고되거나 피곤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흥분감이 있었는데, 사부님께서 제 곁에서 함께 동행하신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약 두 시간 넘게 걸어 수련생 집을 찾았습니다. 집 대문이 굳게 잠겨 있어 어쩔 수 없이 담을 넘어야 했습니다. 올려다보니 담이 1.8미터는 족히 되어 너무 높았습니다. 어떻게 하지? 그때 담 옆에 큰 볏짚 더미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힘겹게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담 위에서 땅까지가 너무 높았습니다. 이렇게 높이에서 뛰어내리면 위험할 것 같았습니다. 저는 사부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사부님, 저는 아직 갈 길이 멀어요. 다리나 발이 다치면 안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며 뛰어내렸는데, 몸이 가뿐하게 땅에 닿는 느낌이었습니다. 정말 신기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저를 내려놓아 주신 것을 알았습니다.
수련생이 준 보배로운 책 《전법륜(轉法輪)》을 챙겨서 큰길로 올라가 계속 갔습니다. 또 한 시간 넘게 걸어 친척 집에 도착했는데,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너무 이른 시간에 문을 두드리면 두 어르신을 방해할까 봐, 담 옆에 쌓인 옥수수 대를 발견하고 그 속으로 들어가 날이 밝기를 기다렸습니다. 겨울 새벽은 유난히 추워 몸이 떨렸지만, 계속 법을 외우니 그리 춥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날이 희미하게 밝아오자 옥수수 대 더미에서 나와 몸의 잡초를 털고 옷을 정리한 후 친척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이틀 후, 저는 친척 집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외지에 있는 언니 집으로 갔는데, 언니는 딸 집에 밥하러 가서 집에는 저 혼자였습니다. 저는 이 환경을 이용해 대량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법공부, 연공, 발정념을 했습니다. 이 기간에 법을 많이 배워서 제 공간장이 매우 맑아지고 머릿속이 텅 비어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없어진 것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사부님께서 정성껏 마련하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법을 많이 배우고, 법을 잘 배우고, 마음속에 법을 간직하여 정념을 강화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두 달 후, 언니 집을 떠나 집에서 50여 km 떨어진 작은 도시로 가서 두 차례 가사도우미 일을 구해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하나는 병원에 입원한 노인을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더러운 것을 가장 무서워했지만, 노인을 돌보면서 더럽다는 마음을 없앴습니다. 노인의 가래를 빼주고, 소변을 받아내고, 얼굴을 씻기고, 밥을 먹여주는 등 제 어머니처럼 정성을 다해 돌봤습니다. 같은 병실 환자 가족이 “따님이 정말 효녀시네요. 이렇게 잘 돌보시니”라고 하자, 노인은 “제 딸이 아니라 방금 고용한 도우미예요”라고 했습니다. 병실 사람들이 모두 존경의 눈빛으로 저를 바라봤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3일만 하고 그만둘 수밖에 없었는데, 정상적인 법공부와 연공 시간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가사도우미 일은 초등학교 2학년인 열 살 남자아이를 전적으로 맡아 돌보는 일이었는데, 아이의 부모는 모두 외지에서 약품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간에 저는 어머니처럼 최대한의 선심과 사심 없는 사랑으로 아이를 보살피고, 보호하고, 배려하고, 교육했습니다. 아이 엄마가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알려주면 저는 그것을 사주었고, 제가 좋아하는 것을 사려는 마음은 전혀 내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이가 남은 음식을 먹지 않도록 매끼 많이 하지 않고, 아이가 다 먹은 후 남은 것을 제가 조금 먹고, 다음 끼니에는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이 엄마가 사둔 수박이 냉장고에 있었는데, 아이에게 줄 때 보니 한쪽이 물러 상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엄마가 밖에서 돈 버시는 게 정말 힘들고 쉽지 않단다. 이 수박은 겉이 상했으니 속의 좋은 부분은 잘라서 네가 먹고, 겉 부분도 낭비하면 안 되니 내가 먹을게.” 아이 엄마가 돌아왔을 때 아이가 엄마에게 다 이야기했습니다.
아이 엄마는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언니, 우리 아이한테 엄마인 저보다 더 잘해주시네요. 정말 감사해요.” 그렇습니다. 저는 수련인이기에 마음속에 진선인이 있고,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고, 늘 남을 위해 생각하며,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 행동으로 법을 실증하고, 제 행동으로 대법의 아름다움을 펼쳐 보이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4. 직장으로 복귀하여 법을 실증하다
떠돌이 생활 6개월 후인 2002년 7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는 여름방학 기간이었는데, 현지 공안국, 교육국, 학교가 저에 대한 박해를 가중시켜 이미 8개월째 급여가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 후, 교육국은 저를 집에서 더 멀고 더 외진 산간 초등학교(이하 B학교)로 출근하게 했습니다. 길이 멀 뿐 아니라 전 구간이 산길이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기 매우 어려워 오르막길에서는 자전거를 끌고 가야 했고, 내리막길이 너무 가파른 곳도 탈 수 없어 역시 끌고 가야 했습니다. 아침 5시 30분에 집을 나서야 2시간 넘게 걸려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면 더욱 어려웠습니다. 정말 고생스러웠습니다.
B학교에서 저는 1학년 담임을 맡았습니다. 이 학교 교장, 서기, 모든 교사들과 해당 진 지도부와 진 파출소 사람들까지 모두 제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잘하든 못하든 그것은 저 개인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대법제자이기에 대법의 형상을 수호해야 하고, 행동으로 파룬따파의 아름다움과 초범성을 실증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늘 대법의 기준으로 제 언행을 엄격히 바로잡았습니다.
수업에서 저는 7~8세 갓 입학한 아이들의 활발하고, 호기심 많고, 놀기 좋아하는 특성에 맞춰 완전히 새롭고 독특한 교수 방식과 방법을 만들어 학생들의 농후한 학습 흥미를 자극했습니다.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즐겁게, 편안하게, 탄탄하게 배울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반에는 선천적으로 지능이 일반 아이보다 낮은 학생이 있어 학습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마침 제가 출근하는 도로가 공사 중이어서 학교에 머물렀습니다. 방과 후 이 학생의 학부모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아이의 숙제를 도와주고 보충 수업을 해주고 싶은데, 비용은 받지 않겠습니다. 단지 농사일을 마치신 후 학교에 와서 아이를 데려가 주시면 될까요?” 학부모는 기쁘게 동의했습니다. 저는 최대한의 선으로 아이를 대했습니다.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이 아이의 학습 성적이 빠르게 따라잡았고, 반 전체 14명 학생 중 낙제생이 없었습니다. 1학년 1학기 말 전 진 통합시험에서 전 학년 1위를 했고, 2학기에도 여전히 1위였습니다. 게다가 반 전체 14명 중 11명이 수학 만점을 받았고, 최저점도 92점이었습니다. 국어, 수학 평균 총점은 98.7점으로, 2위 학교와는 큰 격차로 앞섰습니다. 이것은 전 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92점 학생의 학부모는 저를 찾아와 거듭 감사하며 말했습니다. “우리 아이 상황으로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92점을 받을 줄은 몰랐어요. 이렇게 좋은 선생님을 만나 우리 집은 정말 큰 복을 받았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학습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대법 법리로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되고, 어떻게 더 좋은 사람이 되는지를 교육했습니다. 학생들이 학습 성적뿐 아니라 인품도 좋아지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자주 학부모의 칭찬, 교사들의 격려, 지도부의 표창을 들었습니다.
2003년 2학기, 저는 다시 A학교로 전근되었습니다. 이유는 제가 박해로 떠돌며 이 반을 떠난 기간에 한 젊은 여교사가 담임을 맡았는데, 1년 반 후 자리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 교사는 교육 경력이 짧아 학생들이 말을 듣지 않고 수업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자리를 이탈하고, 떠들고, 장난치고, 수업을 듣지 않고, 숙제를 하지 않았으며, 일부 개구쟁이 남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선생님을 곤란하게 만들어 반 전체가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이 교사는 화가 나서 자주 결근했습니다. 반 성적이 급속히 떨어졌습니다. 제가 담임일 때 이 반은 전 진 통합시험에서 상·하반기 모두 1위를 유지했는데, 지금은 통합시험 성적이 뒤쪽으로 밀려났습니다.
학부모들은 아이들의 변화를 보고 매우 걱정하며, 여러 차례 교장을 찾아가 저를 다시 학교로 전근시켜 달라고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학교 교장도 여러 차례 상급에 요청해서 저를 다시 전근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2003년 2학기에 다시 A학교로 전근되었습니다.
저는 한때 천진하고, 활발하고, 사랑스럽고, 학습에 적극적이고, 품행이 좋았던 아이들이 이제는 5학년이 되어 키도 크고 많이 자란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것은 그들의 버릇없음이었습니다.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시리고 아팠으며, 눈물이 저도 모르게 흘러내렸습니다. 저는 학부모 회의를 열 필요가 있다고 결정했습니다.
부임 첫날, 학부모들이 모두 참석해 아이들 옆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제가 교실에 들어가 전체 학생과 학부모를 잠시 바라보자,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깊이 숙였고, 마치 무슨 잘못을 한 것처럼 저를 똑바로 보지 못했습니다. 학부모들은 미소 지으며 얼굴을 들고 저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했습니다. 전체 학부모들에게 인사를 한 후 말했습니다. “오늘 바쁘신 중에도 학부모 회의에 참석해 주신 것은 제 업무에 대한 지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어서 말했습니다. “먼저 제가 왜 중간에 이 학교와 아이들을 떠났는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때 아이들이 모두 얼굴을 들었고, 학부모들도 웃음을 거두고 조용히 제 다음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파룬궁을 수련합니다. 파룬궁은 진선인을 기준으로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칩니다. 저는 바로 진선인을 수련하고 더 좋은 사람이 되려다가 박해를 받아 불법적으로 체포되었고, 어쩔 수 없이 떠돌며 집에도 돌아갈 수 없었고, 정상적으로 일할 수도, 아이들을 가르칠 수도 없었습니다. 저도 아이가 있지만 집에 돌아가 아이와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잘못일까요?” 여기까지 말하자 저는 울었고, 일부 아이들과 학부모들도 울었습니다.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여러분이 가장 잘 아십니다. 만약 파룬궁을 배우지 않았다면, 저는 이렇게 혼란스러운 반을 다시 맡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심하세요. 제가 맡은 이상, 반드시 아이들을 잘 가르칠 자신이 있습니다.” 학생과 학부모들이 모두 만족스럽게 웃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제시하고, 학부모들의 협조를 부탁했습니다.
제가 반을 맡은 후, 빨리 원래의 정상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당시 학생들의 실제 상황에 맞춰 반 관리 방법을 제정하고, 교수법을 조정하고, 교사·학생·학부모 삼자 결합의 교육 의식을 강화했습니다. 일련의 효과적인 조치를 통해 반 학생들이 빠르게 예전의 좋은 상태를 회복했고, 매번 전 진 통합시험에서 또다시 매우 좋은 성적을 거두어 사회의 광범위한 인정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A학교가 중심초등학교로 통합되자, 교장은 저를 다른 학교 5학년 담임으로 배치했습니다. 이 반의 상황은 이러했습니다. 학부모들이 반 업무에 매우 비협조적이고, 이기적이며, 아이를 감싸고, 자기 아이가 잘못을 저질러도 엄하게 비판할 수 없어서 원래 담임과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담임을 맡은 후, 수련인의 처세 방식으로 늘 남을 생각하고, 모든 곳에서 선을 나타냈습니다. 이런 방식이 학생과 학부모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들도 변했고, 교사·학생·학부모 관계가 화목해졌으며, 학생 성적이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전 진 통합시험에서 연속 두 학기 모두 1위를 차지하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교육 담당 진장이 이 소식을 듣고 저에게 전화해서 기쁘게 말했습니다. “OO 선생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가는 곳마다 1위를 하시니!”
1년 후, 저는 중심학교로 돌아와 수학 팀장으로 배치되었습니다. 반년 일한 후, 저는 교장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저도 곧 은퇴할 나이인데, 기회를 젊은 교사들에게 양보하고, 저에게는 할 수 있는 일을 배치해 주세요.”
교장은 저를 급식실에 배치했는데, 저는 여전히 진선인의 수련 기준에 따라 자신을 엄격히 요구했습니다. 일을 가리지 않고, 이 일을 내려놓으면 저 일을 하고,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묵묵히 일했습니다. 하루는 급식실 팀장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오기 전, 교장 선생님이 저에게 좋은 분을 한 명 보낸다고 하셨어요. 당신이 온 후 저는 당신을 관찰했는데, 도대체 어떤 좋은 사람인지 보려고요. 시간이 지나고 보니 당신은 자기 일이든 아니든 다 하고, 사람됨도 좋고, 이기적이지 않더군요. 당신은 확실히 좋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급식실에서의 당신 모습을 교장에게 보고했어요. 그러자 교장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음, 좋은 사람은 어디에 있든 좋은 사람이군요!’”
맺음말
교육에서 거둔 성과는 모두 대법과 사부님께서 주신 지혜와 능력이며, 저에게 법을 실증할 수 있게 해주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걸어온 수련의 길을 돌이켜보면, 제 지혜, 제 능력, 제 주변의 모든 변화가 모두 대법에서 비롯되었음을 깊이 느낍니다. 사부님은 너무나 위대하십니다! 대법은 너무나 신기합니다. 저는 더욱 굳건히 대법 속에서 끝까지 수련하여 사부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원문발표: 2025년 8월 2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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