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다른 수련생의 사람 마음과 집착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해야 할까?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제 마음속에는 늘 버리지 못한 한 가지 집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주 접하는 A 수련생에 대한 반감이었습니다. 저는 항상 그의 과시, 안일, 식탐, 과장된 말, 거짓말, 수구(修口)하지 않는 점, 이익에 대한 집착, 타인의 충고를 듣지 않는 점, 원한, 질투, 급한 성격, 의심, 체면 중시, 보복심 등과 같은 사람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오랫동안 병업(病業) 상태에 놓여 있었고 이를 돌파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병업의 상당 부분은 그 자신의 언행으로 인해 초래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수련인이 이런 집착을 갖고 있다면 구세력(舊勢力)에게 틈을 주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 차례 직접 그에게 문제를 지적한 적이 있었지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저에게 원망을 품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마음속으로 그를 사부님께 맡기고 그의 표현을 통해 저 자신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속에는 그 수련생과 소통하거나 접촉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 아주 강하게 저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이것이 법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없애기 위해 노력도 했습니다. 법공부하고, 발정념을 하면서 한동안은 평온해졌지만 나중에는 또 반복됐습니다. 최근에 A 수련생이 저에게 크게 화를 내며 저보고 자기를 무시한다고 했습니다. 저도 그것이 사실임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람을 구하는 일이 매우 절박한 시기이고, 자신을 잘 수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습니다. 자비심이 없다면 어떻게 사람을 잘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집착을 도대체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요?

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일반인들에게 진상을 알릴 때, 그들이 욕하거나 반감을 드러내거나, 듣지 않으려 하는 어떤 반응을 보이든 저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미혹 속에 있고, 거짓말에 속았으며, 게다가 전 사회의 도덕이 타락한 상황에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정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주나 생명의 존재 가치에 대해 무지한 상태이지만, 결코 평범한 생명이 아닙니다. 모두가 법을 얻고 구원받기 위해 이 세상에 온 존재들이기 때문에 저는 그들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가장 낮은 기준으로 이해하고 포용하며, 언제나 온화한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치에 맞지 않는 반응을 보일 때에도 저는 저의 집착을 찾아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왜 같은 수련생에게는 이렇게 자비롭게 대하지 못하는 걸까요?

1. 수련생과 일반인의 공통점과 차이점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반인이 사람 마음과 집착을 드러낼 때는 저는 평온하게 포용할 수 있었지만, 수련생을 대할 때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수련생과 일반인은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을까요? 공통점은, 모두가 대법을 위해 온 생명이며, 모두가 미혹 속에 있다는 점입니다. 모두가 구(舊)우주에서 온 존재들이며, 구우주의 ‘나를 위한’ 이기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고, 인간의 칠정육욕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불성(佛性)과 마성(魔性)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말법 시기의 사람 마음과 도덕의 타락 속에 있으며, 같은 사회라는 큰 염색 항아리 안에서 함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에서는 모두가 공산당 당문화의 거짓, 사악함, 투쟁이라는 요소로 세뇌당해 왔습니다. 수련인의 집착이 드러날 때, 그 모습은 일반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일반인이든 수련인이든, 모든 사람 마음과 집착의 이면에는 일정한 사악한 생명이 통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차이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수련생은 사부님께서 선택하신 존재로 사부님의 관리를 받고 있으며, 각자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수련생이 수련을 통해 닦아낸 부분은 법에 의해 분리되어 보호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법을 배우고 연공하고 발정념을 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법은 계속해서 그들을 깨끗이 씻어주고 있고, 우주와 생명에 대한 진상이 점차 수련생들에게 열리고 있으며, 그들의 집착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일반인과 다른 점입니다.

2. 똑같이 사람 마음과 집착이 있는데, 왜 저는 수련생과 일반인의 집착을 대할 때 태도가 달라질까요?

그 이유는 제가 적용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수련생에게는 법의 기준으로 판단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구우주에서 온 존재이고 ‘자신을 위하는’ 구우주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인간의 칠정육욕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생활하는 수련생들은 특히 당문화의 거짓, 사악함, 투쟁이라는 요소에 의해 세뇌되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련생이 드러내는 각종 집착은 어찌 보면 정상적인 것입니다. 수련생도 여전히 미혹 속에 있으며, 사람 마음과 집착의 이면에는 일정한 사악한 생명이 통제하고 있습니다. 이는 저 자신을 포함해서 대부분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다가 수련을 통해 닦아낸 부분은 법에 의해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수련생의 사람 마음과 집착일 수밖에 없습니다. 수련생이 사람 마음에 의해 통제될 때는, 그것은 바로 사람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상황에서도 수련생을 법의 표준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을 무시한 채, 너무 자아중심적인 태도가 아닐까요? 그렇기에 수련생의 사람 마음과 집착을 대할 때에도 마치 미혹된 일반인을 대할 때처럼 선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수련생의 수많은 사람 마음과 집착들이 왜 저에게 보이는 걸까요?

첫째는, 그것이 거울이 되어 제 자신의 집착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는 먼저 저 자신이 어떤 집착을 갖고 있는지, 어떤 종류의 집착인지 알아야 제거할 수 있습니다. 모든 수련생의 뒤에는 사부님의 법신(法身)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각 수련생의 집착을 사부님께서 모르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특히 제가 자신의 집착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사부님께서는 그에 상응하는 사람과 일을 배치해 저에게 거울처럼 비춰주시어, 제가 어떤 집착을 갖고 있는지 분명히 알아차리고 빠르게 제거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예를 들어 제가 반복적으로 A의 수많은 집착을 보게 되는 것은, 저 자신을 돌아보라는 뜻입니다. 저에게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안일함, 식탐, 가끔 거짓말을 하거나 수구하지 못하는 것, 이익에 대한 집착,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마음, 원망, 질투, 성급함, 의심, 체면을 중시하는 마음, 다투려는 마음 등 여러 사람 마음이 저에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전통문화에서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많은 집착이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저를 포용해 주길 바랄까요, 아니면 저를 싫어해 주길 바랄까요? 물론 포용 받길 바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수련생의 집착을 보았을 때, 그들을 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A에게 품게 된 그 반감이라는 감정, 그것은 아주 심각한 ‘정’이 아니겠습니까? 정은 사람의 것입니다. 저는 그 ‘정’을 수련을 통해 제거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체하고자 합니다.

둘째는, 수련생의 표현은 하나의 가상이며, 그것은 저 자신이 수련생을 포용하고 도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법을 배우면서 저는, 수련생이 법에 부합하지 않는 모습을 보일 때, 그것은 하나의 가상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것은 사악한 생명에게 조종당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 아이와 함께 본 애니메이션 ‘천정소자 소건곤(天庭小子小乾坤)’에서 더우더우(豆豆)가 록 여우에게 빙의됐을 때의 언행과 치킨을 먹는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더우더우 자신은 그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빙의된 더우더우의 행동을 그의 본래 모습이라고 인정하고 그를 원망하거나 미워했다면, 대사형(大師兄)이나 소건곤처럼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의협심으로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면, 더우더우는 영원히 그 록 여우에게 통제당했을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제가 집착에 빠진 수련생을 대하던 태도를 떠올렸습니다. 저는 수련생의 법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바로 그 수련생 자신으로 여긴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그를 원망하고 싫어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순간, 저는 수련생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사부님께도 너무나 송구스러웠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저를 그 가상에서 벗어나, 미혹과 난(難) 속에 있는 수련생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게 하시려는 것인데, 저는 오히려 정반대의 태도를 취했던 것입니다. 저는 수련생에게도, 사부님께도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모든 것은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것이고 제가 그것을 겪게 된 것 역시, 저 자신이 수련해야 할 바가 있기 때문이며 법에 부합하게 해야 할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련생의 집착은 하나의 가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지금, 저는 그를 위하는 마음을 갖게 됐습니다. 수련생이 난이나 집착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하면 수련생을 도울 수 있을까요?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그를 도와 법에서 인식하고 제고하게끔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여러분이 함께 발정념을 하며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인 중생구도를 많이 하는 것이다.”(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사부님의 이 법을 읽고 저는, 난 속에 있는 수련생을 돕기 위해서는 수련생과 함께 법을 배우고, 수련생을 위해 발정념을 하며, 평온한 마음으로 법의 원칙에 따라 적절한 교류를 해야 한다는 것을 체득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난이나 집착 속에 있는 수련생은 사악한 생명에게 조종당하고 있어 대부분은 깨닫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반드시 자비로운 마음과 자비로운 장(場)을 가져야 하며, 가상에 미혹되지 말고 정념으로 수련생이 사악함을 제거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사부님께서는 한 명의 제자도 떨어뜨리지 않으십니다. 우리 또한 사악이 수련생을 박해하는 것을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굳건한 정념을 지닐 때, 법이 부여한 능력으로 우리는 사악을 제거할 수 있고, 사부님과 정신(正神)들께서도 직접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해냈을 때, 이렇게 자비롭고 평화로운 장(場)을 수련해 낸다면, 어떤 바르지 못한 생명이나 요소가 감히 나와 수련생의 이 장 안에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수련하는 과정에서 자주 느끼는 점은, 법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곧바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건드리는 일을 맞닥뜨렸을 때, 저는 먼저 평온함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마음가짐을 평화롭게 하고 말투도 온화하게 유지하며, 그렇게 조금씩, 한 걸음 한 걸음 집착을 수련 속에서 제거해 나가고 있습니다.

셋째는, 법을 수호하고 사람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어느 수련생이든, 수련 상태가 어떻든 간에 자신이 대법 수련생임을 공개한 순간부터, 그들의 언행은 곧 법의 이미지로 비춰집니다. 대법 수련생은 하나의 정체(整體)입니다. 수련생에게 책임감을 갖는다는 것은, 곧 법에 대해 책임지는 것입니다.

맺음말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속에 사사로움이 없으면, 하늘과 땅도 넓어진다.(心底無私天地寬)” 수련인이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막힘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반드시 진선인(眞·善·忍)과 어긋나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럴 때는 남을 탓할 것이 아니라 즉시 법에 비추어 저 자신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저 자신을 바로잡아야만 수련생을 더 잘 도울 수 있고, 사람을 구하는 데 더 잘 협력할 수 있으며, 법을 더 잘 수호하고 법을 실증할 수 있습니다.

수련생의 집착에 집착하는 것(이 역시 수련생들 사이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은 가상에 미혹되는 것이며, 법에서 깨닫지 못하고 자신을 수련하는 데 집중하지 않으면 구세력에게 틈을 주게 됩니다. 그 결과, 수련생이 법을 실증하고 사람을 구하고 법을 수호하는 과정에서 수련생들 간에 간격이 생기고 어떤 수련생은 심각한 병업이 나타나거나, 사악에게 납치되어 박해받거나, 심지어 생명을 잃는 일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하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며, 이 모든 문제는 개인적인 누락일 뿐만 아니라 정체 속에 존재하는 누락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저 자신을 수련하는 것에 진지하게 임하고 수련생들 간에 서로를 포용하며, 서로 돕고 배려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상은 제 개인적인 심성 층차에서의 약간의 체득입니다. 부족한 점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5년 6월 2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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