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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며느리

글/ 중국 대법제자 자오르(昭日)

[밍후이왕] 고부간에 함께 지내는 것은 천고의 난제였다. 다투지 않고 싸우지 않으면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운 좋게도 시어머니가 파룬따파를 수련하였기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며느리가 될 수 있었다.

1. 대법을 수련하여 성스러운 인연을 맺다

나는 1999년 3월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했다. 그해 7월 20일, 중공(중국공산당)은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였는바, 파룬따파를 모함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온종일 내보냈다. 지능이 높지 않은 사람도 바로 알아챌 수 있는 거짓말과 모함이었다. 나는 엄숙하게 사고(思考)한 후 파룬따파를 위해 공정한 말을 하기로 했다.

나는 문화대혁명을 겪지는 않았지만, 파룬따파를 수호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늘땅을 뒤덮을 듯한 탄압 기세도 물론 두려웠다. 그때 직장에서는 사람마다 태도 표시를 강요했고, 연공하지 않는다는 보증서를 쓰는 것도 모자라 비판하는 글까지 써야 했으며, 끝이 없었다. 하지만 결심을 내린 나는 ‘파룬따파, 천고의 억울함(法輪大法,千古奇冤)’이라는 여덟 자를 쓰고는 걸어 나가 대법을 수호했다.

어느새 10여 년이 지났다. 파룬궁의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5년 이상 불법 감금당했고 모든 것을 잃었으며, 혼인 관계도 해체됐다. 진정한 심성 수련을 거치지 않고 박해 속에서 극단으로 나아가다 보니 몸과 마음에 아주 큰 상처를 입었다. ‘왜 나는 자비로운 마음과 상서로운 심태(心態)를 수련해내지 못할까?’라고 스스로 의문을 품었다.

어느 날 한 수련생을 만났는데 그의 어머니도 대법제자였다. 그 아주머니는 늘 명랑했다. 나는 그녀를 본 후부터 무엇이 상서로움인가를 처음으로 체험하게 되었고, 온몸이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박해 때문에 수련생들과 늘 헤어지게 되었기에 실제 접촉한 예전 수련생은 많지 않았다. 주변에 안정적이고 착실히 수련하는 환경이 부족했으며, 몸도 좋지 않았고 얼굴색은 항상 누르스름했다.

아주머니는 내 상황에 관심을 많이 기울여주었다. 아주머니의 아들은 미혼으로, 나와는 성격상 서로 보완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신중한 고려 끝에, 가정을 이루어 새로운 수련환경을 조성하는 것에 모두가 동의하였다. 이렇게 하여 아주머니는 내 시어머니가 되었다. 친척과 친구들 사이에서 ‘파룬따파를 수련하여 두 가족이 좋은 인연을 맺었다’는 소식이 널리 퍼져나갔다.

2. 대법의 순선(純善)함에 상처가 치유되다

나는 부모님의 눈에는 순둥이이고 고학력자이며, 안정된 직장과 장래가 밝은 사람이었다. 나는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정직, 임금 지급 정지, 연금, 납치, 불법적인 노동교화와 징역형, 협박에 의한 이혼 등 중공의 탄압을 받았다. 어머니는 눈물샘이 마를 정도로 많이 울었고 아버지는 강한 압박 앞에서 성격이 괴팍해졌다. 처음에 그들은 중공의 거짓말에 속아 대법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의 수련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나의 견정한 선택을 보고는 폭력으로 신앙을 버리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10여 년 동안 부모님은 크나큰 고통을 겪었다.

나는 감옥에서 돌아온 후 성격이 점점 예민해져 화를 잘 냈으며, 때로는 화약고처럼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했다. 아버지에게 삼퇴(중공의 당·단·대 조직에서 탈퇴)를 권했을 때 아버지가 탈퇴하기는커녕 사악한 당을 수호하자 나는 화가 나서 자주 말다툼했다. 나는 내 잘못을 알면서도 통제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싸우는 소리를 듣기만 하면 정신없이 고함을 질렀다. 온 가족은 온종일 수심에 찬 얼굴이었다.

부모님은 사돈이 될 사람을 만나면서 따뜻한 보살핌을 느꼈고, 진정으로 자기 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보고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감동했다. 그렇지만 두 가족이 함께 모여 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시어머니는 자기 방에 사부님의 법상을 모시려 하였다. 처음에 어머니는 반대하다가 나중에는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시어머니는 놀라서 멍하니 서 있었다. 아들과 함께 십여 년간 당당하게 대법을 수련했고, 남편이 살아있을 때도 전적으로 지지받았으며, 직장에서도 최대한 대법제자를 보호한 시어머니가 이런 모습을 언제 보았겠는가? 시어머니는 이 환경이 간고함을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세심한 관심과 보살핌으로 이 집을 돌보았다.

결혼 후 나는 남편과 일하러 나갔다. 시어머니는 부모님을 친언니처럼 모시고 새 출발을 했다. 시어머니는 부지런하고 손발이 재빠르며 요리 솜씨도 좋았다. 튀김과 조림도 잘하고 제과와 제빵에도 능숙했다. 설 명절에는 청단 굴리기, 만두 요리, 생후라이와 양념장 만드는 일 등을 전문 요리사 못지않게 잘 해냈다. 여태까지 이런 유능한 사람을 본 적이 없던 우리 부모님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 노인이 싱글벙글 웃으며 함께 지내니 썰렁하던 집안이 시끌벅적해졌고, 이웃들도 하나둘씩 먹을 복을 누릴 수 있었다. 시어머니는 온종일 빙그레 웃는 것이 마치 즐거움의 샘물이 마음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것 같았고, 그 얼굴만 봐도 기분이 밝아졌다. 시어머니는 어디에 가서나 석 달을 넘기지 않고 이웃 사이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시어머니는 말도 정말 잘했다. 집 안팎에서 재미있는 일화(日話)를 생동감 있게 전하고 무엇이나 막힘없이 이야기했다. 이야기하다 보면 수련인의 식견과 경륜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시어머니는 나의 부모님에게 진상을 제대로 알렸다. 부모님은 파룬따파가 좋다는 진실과 대법제자들의 선량함을 알게 되었고, 중공이 파룬궁을 탄압하려고 천인공노할 거짓말을 날조한 사실도 알게 되었으며, 중공을 따르는 사람들의 가련함과 전 세계에서 많은 좋은 사람이 대법제자를 돕고 있다는 사실 등을 상세하게 알게 되었다.

점차 부모님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어머니는 파룬궁을 강력하게 반대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 여러 장소에서 진심으로 참회하면서, 중공의 거짓말을 믿은 것을 자책했으며, 인터넷에 접속하여 삼퇴를 하고 ‘정중성명(鄭重聲明)’을 썼다. 중공 관리들이 찾아와 소란을 피우면 직접 겪은 체험으로 장쩌민(江澤民)의 박해 정책이 국민에게 끼친 피해를 그들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했고, 심지어 우리와 함께 실명으로 박해 주범인 장쩌민을 고소했다.

아버지도 관념이 바뀌었다. 장쩌민의 파룬궁에 대한 박해가 얼마나 사악한지를 알게 되었고, 파룬따파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심신 건강을 가져다주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시어머니를 위해 손수 예쁜 액자를 만들어 사부님의 법상을 단정하게 모셨다. 엄마와 함께 지역 사무소에 찾아가 대법제자들의 가정을 괴롭히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렇게 하여 선량한 시어머니는 온 가족을 뒤덮었던 암울한 그늘을 말끔히 날려버린 것이다. 나는 가끔 편안해하고 기뻐하는 부모님과 언니 같은 시어머니를 보면, ‘대법을 진정으로 수련하면 이렇게 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감개무량해진다. 그 수정 같은 순선(純善)함과 금빛 찬란한 기쁨의 빛발은 정말 신기했다. 이런 인연을 만났으니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3. 위대한 법이 사심 없는 수련자를 만들어내다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전의 시어머니는 수련 후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시어머니는 생활의 고달픔과 시련으로 승리욕이 강한 성격을 형성하게 되었다. 유년 시절에는 행복했으나, 공산당이 오면서 가산을 모두 빼앗겼다. 장녀로서 집에 힘을 보태기 위해 일찍 학교를 그만두고 일하러 갔다. 잡화를 팔고, 고용되어 일했으며, 공장에 들어가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손발이 재빠르고 부지런하며 총명하였기에 모두 시어머니를 좋아했다. 하지만 누구도 시어머니에게서 이득을 보기란 쉽지 않았다.

비록 시어머니는 똑똑하고 일을 잘했으나, 마흔 조금 넘은 나이에 건강이 악화하여 일찍 퇴사해야 했다. 아들은 불행하게도 희귀한 간 질환을 앓아서 곳곳을 다니며 치료했으나, 나아지지 않았다. 몇 년을 끌다가 겨우 숨만 붙어 있을 정도였기에 온 가족은 지쳐 절망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시어머니의 아들은 1996년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하여 겨우 석 달 만에 병이 완쾌되었다. 이 좋은 소식은 모든 친인척과 친구 및 직장 동료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파룬궁의 신기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남편은 추억을 더듬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때는 ‘전법륜(轉法輪)’이 출판되기 전이라 동작만 연마했다. 오래도록 약을 먹었던 터라 입에는 쓴맛뿐이었고 식욕이 전혀 없었다. 연공한 지 하루 만에 식욕이 살아났다. 점점 몸에 힘이 생겼고 나날이 좋아졌다. 체내의 독소가 끊임없이 빠져나왔다. 손에 낀 은반지가 모두 검게 변했을 정도였다. 3개월 후에 어머니는 내게 밀가루 포대를 아래층에서 날라오라고 했다. 전에는 계단을 오를 때 헐떡거리면서 서너 걸음을 걷고는 쉬다가 가야 했다. 그러나 그날은 25㎏의 밀가루 세 포대를 메고 단숨에 올라갔다. 어머니는 나를 안고 ‘좋아! 나았어! 내 아들 다 나았어!’라며 기뻐했다.”

시어머니도 아들이 완쾌된 후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했고 모든 지병이 빨리 사라졌다. 한번은 시어머니가 온몸이 괴로워서 토하고 싶었다. 토하자 선혈이 땅바닥에 쏟아졌다. 화장실에 가서 더 토했다. 계속 토할 것 같아 아예 큰 세숫대야를 들고나왔다. 세숫대야 절반 이상이 선혈로 채워졌고, 안에는 계란 만한 시커먼 핏덩어리도 있었다.

시어머니는 두렵지 않았으며, 온몸이 달아오르고 머리가 맑았다. 사부님께서 신체를 정화해주시는 것임을 알았다. 토하고 난 후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갔더니 설사했다. 석탄처럼 시꺼먼 변을 잔뜩 보았다. 온종일 이러다가 밤이 되자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굴이 금색 종이처럼 노랗게 되었다. 이웃들은 시어머니가 당장 죽을 것 같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온 가족의 이해와 성원에 힘입어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사부님의 설법 녹음과 대법 음악 ‘보도’와 ‘제세’를 들었다. 연공은 할 수 있는 만큼 견지했다. 끓인 물을 서서히 마시다가 죽을 먹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밥도 먹을 수 있었다. 반년 후에는 완전히 회복되어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길쭉한 얼굴과 앙상한 몸은 동그란 얼굴과 통통한 몸으로 바뀌었고, 수심에 찬 얼굴도 항상 미소 짓는 얼굴로 변했으며, 얼굴색은 희고 발그스레해졌다.

고질병에서 벗어난 시어머니는 마음이 홀가분하고 상쾌해졌다. 총명하고 강인했던 사람이 쾌활하고 즐겁고 친절하며 자상한 사람으로 바뀌었다. 시어머니는 사부님께서 자기의 모든 것을 새것으로 바꿔주셨다고 하며 마음에서 우러나 감사했다. 온 가족이 새로운 삶을 맞이하고 진선인(真·善·忍)의 불광에 젖어 사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1999년 중공이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자 시어머니와 수련생들은 대법을 수호하고 실증하며 중생을 구도하는 길을 걸었다. 시어머니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여러 번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 가서 플래카드를 펼치고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사부님의 결백을 돌려달라!’라고 외치고는 안전하게 귀가했다. 대법 서적과 수련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찾으면서 거대한 압박을 감당했다. 구호를 붙이고 진상 전단과 자료를 나눠주며, 플래카드를 거는 등 수련생들과 함께 파룬궁 진상을 현지와 외지에 전했다. 어디를 가든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남편이 박해받아 세상을 떠나고 자신도 불법 감금당하며, 아들이 탄압으로 집을 떠나 외지에 떨어져 있어도, 하루도 태만하지 않고 10여 년을 하루같이 대법제자가 해야 할 일들을 견지했다.

한번은 시어머니가 파룬궁 진상 자료를 나눠주러 갔다. 아파트 맨 위층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자료를 배포했다. 3층까지 내려왔는데 4층에서 한 남자가 큰 소리로 “누구야? 거기 서지 못해?”라고 외치고는 쿵쿵 발걸음 소리를 내며 계단으로 달려 내려왔다. 시어머니는 다급히 내려오면서 ‘사부님, 이 사람을 고정해 주십시오’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머리를 돌려보니 그 남자는 바보처럼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어머니는 그곳을 벗어났다.

또 한번은 진상 자료를 다 배포한 후의 늦은 밤이었다. 가까운 길로 귀가하려고 농로로 걸어가다가 갑자기 미끄러지면서 큰 물웅덩이에 빠져 아주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 날은 어두워 손을 내밀어도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물속에 푹 빠져 정수리까지 물에 잠겼다. 뚱뚱한 몸에 수영할 줄도 몰라 곧 목숨을 잃을 것 같았다. 시어머니는 마음속으로 ‘사부님 구해주세요!’라고 외쳤다. 찰나 한줄기 힘이 그녀를 위로 떠밀었고 머리가 수면 위로 나왔다. 발이 땅에 닿았다. 시어머니는 조금씩 기어 올라왔다. 감격한 나머지 목숨을 구해준 사부님께 바로 무릎 꿇고 절했다.

시어머니는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대선대인(大善大忍)의 대법제자로 성장했다. 또한, 난을 겪고 있는 수련생도 도왔다. 한 여자 수련생은 중공의 박해로 불구가 되어 침대에 누워 있었고,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를 돕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법학습과 연공 및 사람을 구도하는 일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그 수련생을 돌보는 일을 맡았다. 매일 일찍 수련생 집에 가서 밥과 반찬을 해주고, 몸을 닦아주고 빨래도 해주었으며, 그녀를 격려하면서 함께 법공부했다. 마비된 환자를 돌보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지만, 시어머니는 몇 년 동안 선한 마음으로 돌보아 주었다. 비록 그 수련생은 세상을 떠났으나, 그녀의 가족들은 대법제자들이 모두 진정한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마침내 알게 되었다.

4. 영원한 어머니

나를 친딸처럼 보살펴 주는 시어머니가 있었기에 나는 너무나 행운이었다. 막 결혼했을 때 소업(消業)이 너무 심해 여러 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시어머니는 이불을 여며주고 죽도 끓여 주는 등 늘 정성을 다해 나를 보살펴 주었다. 또한, 수련의 길에서 내가 정도(正道)를 걷도록 도와주었다.

지식인은 법공부할 때 항상 복잡한 사상에 갇혀 있는 큰 장애가 있다. ‘안을 향해 찾기’에 대해 나는 자신을 되돌아보고, 일이 생기면 자신을 분석하여 과감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개선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심성을 잘 닦고 있다고 여겼다. 시어머니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으로 안을 향해 찾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시어머니는 나보다 생각이 많지 않고 심태가 순정했으며, 해내야 수련이라고 생각했다. 시어머니는 규칙적으로 매일 3시 30분에 일어나 연공했고, 연공을 마치면 법학습했으며, 온종일 상쾌한 기분이었다. 모순과 난관에 부딪히면 나처럼 고심하고 눈을 찡그리지 않았으며, 문제를 차분하게 대하고 평화롭게 풀어나갔다.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생각은 많지만, 가장 기본적인 몇 가지를 어떻게 하고 있었는가? 일찍 일어나지 못해 새벽 연공은 하지 않았고 결가부좌도 틀지 못했으며, 법공부는 규칙적이지 못했다. 날마다 항상 긴장하고 심태도 불안했다. 오랫동안 비슷한 난관에 빠져 늘 넘어가지 못하고 감정 조절도 잘하지 못했다. 결혼 후에야 자신이 전혀 수련인의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존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수련하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아주 엄숙한 일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속인을 벗어난 것으로서, 속인 중의 어떤 일보다도 더 어렵다고 나는 말한다.”[1]

내게 수련은 정말 다른 어떤 일보다도 어렵고 오묘했다. 나는 속인의 책을 적지 않게 읽었고 이론도 많이 알았다. 그러나 대법을 수련하면서 매일 전법륜(轉法輪)을 읽었지만, 뜻밖에도 진정으로 법을 얻지 못했다. 사고하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세 가지 일이었으나, 이 사유 자체가 바로 문제였다. 사안에 빠져 그 속에서 맴돌며, 움직이는 매 일념 배후에 숨겨진 집착을 찾아내지 못했기에 대법의 끝없는 내포를 체험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시어머니를 거울삼으니 복잡한 내 생각이야말로 수련의 가장 큰 장애물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했다. 규칙적인 새벽 연공과 법공부 그리고 발정념을 하기로 했으며, 해내야 수련이었다. 내게는 새벽 연공이 줄곧 아주 어려웠다. 어렵게 4시 30분에 일어나면 이튿날에는 꼭 잠을 보충해야 했다. 나는 일이 바쁘다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찾았다. 시어머니는 내게 설명하지 않고 내가 하는 집안일을 최선을 다해 줄여주면서, 내가 일찍 일을 마치도록 더 많은 시간을 내어 도와주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너무 교활했다. 잘못했을 때 발뺌했으며, 시어머니에 대한 의존심이 아주 컸다. 나는 이토록 정진하는 노 수련생과 함께 수련하고 대법에 대해 이토록 견정하므로, 합격한 대법제자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잘못해도 점점 스스로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시어머니를 본보기로 삼고 의지하는 것을 본 시어머니는 자녀에 대한 정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수련의 각도에서 깨달았다. 우리 생활이 여러 방면에서 안정된 것을 본 시어머니는 간헐적으로 두세 달씩 외지로 나가 친척과 친구 집에 놀러 가 있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 나는 의존심이 많이 줄었다.

2년 뒤 시어머니는 더는 우리와 함께 살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비록 너무 아쉬웠지만, 우리는 그 뜻을 존중했다. 아쉬운 작별 인사 후 시어머니는 떠났다. 우리는 시어머니의 모습이 햇빛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보았다.

시어머니가 떠난 후 나는 놀랍게도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났다. 알람이 울리자 바로 일어났는데 의외로 아주 가뿐했다. 연공한 후 온종일 졸리지도 않았고 이튿날에도 어김없이 제시간에 일어났으나, 피곤하지도 않았다. 나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새벽 연공을 견지한 후부터 활력이 넘쳤고 가부좌하여 점차 입정할 수 있었으며, 법 공부도 마음에 와닿았다.

사존께서 말씀하셨다. “고요하되 생각지 않으니 현묘함을 알 수 있도다”[2]

나는 다시 한번 내 사고방식을 돌아보았다. 과거에 마음이 움직이고 생각이 움직인 것은 모두 유위(有爲)이자 집착이었다. 진정한 지혜는 스스로 머리를 짜내서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법에서 나오는 것이며 사존께서 점화해 주신 것으로서, 그 현묘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지금까지 남편과 함께 매일 3시 30분에 일어나 새벽 연공을 했다. 한 시간의 포륜 연공 음악이 나온 후 우리는 포륜 시간을 1시간 연장하고 새벽에 법공부했으며, ‘전법륜(轉法輪)’을 적어도 하루에 한 강씩은 읽었는데 이미 3년이나 견지했다. 좋은 수련기초가 있으니 법을 실증하는 수련의 길은 갈수록 넓어졌다.

시어머니가 고향으로 내려간 지 벌써 3년이 되었다. 돌아보면 한 어머니로서 시어머니가 우리를 위해 바친 것은 가장 위대하고 사심 없는 모성애였고, 한 수련생으로서는 파룬따파에서 수련해낸 순정함과 자비를 우리에게 펼쳐 보인 것이다. 우리는 함께 사존의 불은호탕(佛恩浩荡) 속에서 수련하며 사존의 자비로운 구도를 절대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서: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 사부님 시사: ‘홍음-도(道) 중에서’

 

원문발표: 2021년 5월 2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5/25/42607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