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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외우며 착실히 수련하고 법에서 승화

글/ 해외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3월부터 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착실히 수련했으면 대법의 내포가 거기까지 펼쳐주었고 몸도 변화가 일어났다. 사부님께서 나를 제자로 이끄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매번 제고는 모두 사부님의 세심한 배치다. 아래는 내가 3개월 동안 법을 외우면서 수련한 과정과 개인의 체득이다.

사부님께서 법만 외우면 안 된다고 점화해 주시다

나는 98년에 법을 얻었다. 계속 해외에서 문장 편집 일을 했다. 20여 년 동안 법 공부를 중시했지만, 감히 법을 외우지 못한 것은 큰 장애였다. 올해 3월에 대법을 통독하는 데 정신이 집중되지 않았다. 한 강의를 배운 후 법 공부가 마음에 닿지 않는 심각한 문제가 나타났다. 게다가 두 명의 수련생이 끊임없이 권해 마지 못해 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겨우 하루에 한두 단락을 외웠다. 처음 20페이지까지는 임무를 완성하듯 법을 외웠다. 속으로는 정말 싫었다. 왜냐하면 나는 해외에서 계속 대법 항목의 편집 일로 바쁘고 아이들도 돌봐야 했다. 한 강의를 통독하고 각지 설법을 배우기도 쉽지 않은데 또 법을 외운다면 정말로 시간이 촉박했다. 매일 나는 생각했다. ‘그만두자. 너무 느리다. 이렇게 외운다면 언제 다 외울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다.

내가 깨닫지 못하자 어느 날 갑자기 단번에 네 단락을 외웠다. 평소의 몇 배였다. 나는 깜짝 놀라 내 머리가 왜 이렇게 잘 돌아가지? 막 좋아하려 할 때 초등학생 딸이 다가와 엄숙한 표정으로 나에게 경고했다. “엄마에게 알려드릴게요. 법만 외우면 안 되고 실제로 해내야 하고 착실히 수련하지 않으면 제고할 수 없어요.” 사부님의 점화였다.

나는 딸의 말에 놀랐다. 이것은 애가 말한 것이 아니고 사부님께서 아이 입을 빌려 나에게 분명히 점화해 주신 것이라고 느꼈다. 이는 착실히 수련해야 하고 반드시 안으로 잘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험하다.

처음으로 착실히 수련하고 법을 외워 신기함이 펼쳐지다

시간이 촉박해 자주 밍후이왕의 교류를 소홀히 하고 법 공부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중국 대륙 상황과 해외는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며 극단으로 갔다. 하지만 어떤 수련생은 밍후이왕 문장을 보고 자주 나에게 보내줬는데 나는 아주 귀찮았다. 마치 나를 강요하는 것 같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좋아하지 않았다. 단지 예의상으로 감사하다고만 했다.

나중에 나는 크게 깨달았다. 이 수련생은 바로 사부님의 세심한 배치셨다. 그녀를 통해 내가 말을 듣게 하고 강렬한 자아를 내려놓고 빨리 제고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단체 법 공부 교류 환경이 없었다. 혼자 매일 집에서 바삐 일하고 일하는 것을 수련이라고 생각했다. 가정의 모순이 끊이지 않았고 대법의 위력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나에게 준 문장은 사실 사부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안으로 찾으면서 착실히 수련한 후 곧 깨닫게 되었다. 늦게 깨달은 것이 후회되었다.

수련생이 계속 나에게 밍후이왕 문장을 보라고 권하면 먼저 그녀에 대한 반감을 내려놓고 나의 수련 상태가 그녀와 다르다는 자아 관념을 내려놓고 그녀가 추천한 문장을 잘 읽어보자. 그날 그녀는 마침 법을 외우는 몇 편의 문장을 보내 왔다. 본 후 나는 생각했다. 그러면 실천하자. 내가 한 단락을 더 외워도 추천 수련생을 저버리지 않는다. 나는 정말로 진지하게 한 단락을 더 외웠다. 그때 나는 이미 자신에게 만족하고 이것이 바로 착실한 수련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착실한 수련은 보기에는 너무나 작고 둔하지만, 진심으로 개변하려고 생각하자 그날 밤 정공 할 때 20여 년 동안 매일 다리가 아프고 괴롭던 상태가 사라졌다.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다리는 편안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튿날 아침, 전날 외운 제1강 ‘왜 연공해도 공이 자라지 않는가’[1] 이 부분 내용에서 첫마디가 “당신의 心性(씬씽)이 제고되어 올라오면 당신의 신체에 곧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당신의 心性(씬씽)이 제고되어 올라오면 당신의 신체상 물질에 보증코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1] 나는 단번에 멍해졌다. 마치 사부님과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 어제 연공할 때 거대한 변화의 근본 원인을 해답해 주시는 것 같았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나를 지도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격동되어 다시 집을 찾은 느낌이었다. 그 후부터 법을 외우는 마음가짐이 기꺼이 스스로 행동하는 것으로 변했다. 안으로 찾고 착실한 수련의 중요성을 의식했다.

원수같이 증오하는 마음을 발견

본래 나는 원수같이 증오는 것이 선악이 분명하고 정의감이 넘치는 것으로 생각했다. 원수같이 증오하는 마음은 사람의 부족한 면만 보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할 수 없고 수련인으로 하여금 늘 밖으로 보게 한다. 이것은 나의 질투심을 덮어 감추고 보호한 것이다.

한 수련생은 희망지성 프로그램 녹음을 책임졌다. 내가 문장을 녹음하는데 그녀가 나에게 지적해 주었다. “문장이 너무 통속적이고 문학적인 색채가 없어요. 그전엔 이런 스타일이 아니었는데 좀 다듬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자 나는 즉시 마음이 불편해 그녀를 반격했다. ”나의 목적은 문화수준이 낮은 시골 할머니도 들을 수 있게 한 거예요. 나는 문장 표면의 문체가 화려한 것을 닦아버리려고 노력한 겁니다. 이것은 바로 나의 수련과정입니다.“ 나는 심지어 이 수련생이 표면 문체를 중요시하고 문장의 실질적인 내용을 소홀히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이 지난 후 나는 이상했다. 누가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화가 났다. 모순에서 나는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틀렸나?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자신의 소박한 스타일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문장이 매끄럽고 소박하고 알기 쉬우면 독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도 잘못된 것이 없다. 그러나 괴로운 배후에는 반드시 집착심이 있다. 신은 사람에게 끌려가지 않는다. 찾고 찾다가 자아를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기 싫어해 화가 난 것이다.

나의 마음속에는 마치 돌이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수련생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했다. 자아가 너무 강하다고 말하고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수련해 왔다는 것을 마음을 열고 그녀와 교류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나의 말을 끊고 말했다. “당신 말을 들으니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는데 내가 잊을까 봐 두려워 빨리 당신에게 알려주려고요. 원수같이 증오한다.”

나는 원수같이 증오한다는 말을 듣고 깨어났다. 바로 그거다. 사부님께서 수련생을 통해 점화해 주신 것이다. 그 순간 마음속에 누르고 있던 답답한 ‘돌덩이’가 갑자기 사라진 것 같았다. 나는 수련생에게 내 문장에 의견을 준 것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것은 사부님의 배치다. 나의 관념을 떨쳐버리게 해주신 것이다.

원수처럼 증오하는 마음은 아주 기만성이 있다. 그것은 나와 다른 사람, 내가 좋지 않다고 하는 사람과 일을 용납하지 못하고, 심지어 남을 얕보고, 스스로 고상하다고 여기고, 타인의 견해를 용납하지 못한다. 나는 아주 정의롭고 정확하여 고상하게 악을 저지하고 수련생의 잘못을 자주 지적해 준 것이다. 나는 강렬한 질책과 증오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스스로는 모르고 있었다. 증오하는 마음은 아주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그리 큰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밖으로 찾는 것이었다.

이 관을 넘기고 나는 한 가지 이치를 깨달았다. 정속에 머물러 너무 자신을 편애했다. 안으로 찾으면 모순을 유발한 진정한 원인, 뿌리박힌 관념, 혹은 집착심을 덮어 감춘다. 이 관념은 계속 우리를 좌우지 하고 우리 자신이 생각한다고 한다. 사실 진짜 자아는 괴로워한다.

모순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불편하거나, 기쁘지 않고 마음이 편안하지 않는 모순과 번거로움은 모두 좋은 일로서 사람 마음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며 층자를 제고하는 좋은 기회이다. 우리에게 모순을 만들어주고 번거롭게 해준 사람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

구하는 마음과 사람이 되는 관념

얼마 되지 않아 내가 하는 프로그램 협조인은 나와 먼저 상의하지 않는 상황에서, 인터넷 회의 중 갑자기 내가 원래 하던 일 외에 뉴스편집 일을 담당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일 년 내내 밖에 있고 나 홀로 몇 명의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엄마인데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화가 나서 즉시 거절했다. 가정환경의 제한으로 시간이 촉박한 뉴스 원고는 따라가지 못한다. 마음이 있어 할 수 있다고 해도 집은 엉망이 된다. 그래서 주로 교육, 건강, 공상업 등 원고 마감이 비교적 자유로운 부 편집을 했고 그들과 오랫동안 협조했다. 그들은 마땅히 나의 처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 갑자기 이런 결정을 했는지 모르겠다. 이런 협조가 어디 있는가?

일이 지난 후 나는 크게 깨달았다. 본래 나에게 문제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나의 상황을 이해해, 나의 협조가 상대방의 인정과 이해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사람이 생각하는 이 층차의 좋은 사람이 되는 표준이다. 그동안 나는 오랫동안 좋은 사람이 되는 표준에 머물러 신의 표준을 생각지 못했다. 자신과 남의 심성을 가늠하는 이 과정에서 폭로돼 나왔다.

반드시 나의 표준을 바꿔 신의 표준으로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은 사람의 마음이 없고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이것은 나의 근본적인 집착심을 재차 제거하는 것이 아닌가? 나로 하여금 사람에게 걸어 나오라는 것이 아닌가? 늘 이런 표준으로 가늠한다면 당신은 사람이고 영원히 신으로 될 수 없다.

생각 후 나의 마음은 확 트이고 홀가분해졌다. 이번 모순으로 구하는 마음을 찾았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나를 가로막았던 좋은 사람만 되려는 관념을 찾았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일마다 그 표준으로 하게 했는데 이는 마땅히 제고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관을 넘긴 후 나는 이어 법을 외웠다. 제4강에 이런 한 단락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한 사람이 있었다. 출근하자마자 두 사람이 그에 대해 험담하는 것을 들었는데, 아주 듣기 거북한 말에 화가 발끈 치밀었다. 그러나 우리는 연공인(煉功人)으로서,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으며, 높은 표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스승님께서 알려주시기를 우리 연공인은 다른 사람과 같지 않아야 하며 높은 자태여야 한다고 하셨다.’ 그는 그 두 사람과 다투지 않았다. 그러나 흔히 모순이 생길 때, 사람의 심령(心靈)을 자극하지 않으면 소용없고 쓸모없으며 제고하지 못한다.”[1]

나는 크게 깨달았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한 층의 법리를 나에게 점화해 주신 것이다. 처음에 높은 자세로 협조인을 용서했는데 아직 부족하다. 반드시 내 마음을 자극해야 한다. 나의 구하는 마음은 비로소 진정으로 제고할 수 있었다. 정속에 머물러 수련생들을 대하면 구체적인 사람 마음과 자신을 장애하는 관념을 뿌리째 뽑을 수 없고 정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사람을 좌우지 하는지 진정으로 인식할 수 없다. 집착심을 깊이 파헤치면 정을 갈수록 똑똑히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번 착실한 수련으로 신체는 확실히 변화가 나타났다. 내가 밥하고 법을 외우고 문장을 써도 사부님께서 나에게 관정을 해주시는 것을 느낀다. 몸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열이 났다. 발정념을 할 때 에너지장도 아주 크고 몸은 계속 뜨겁고 몇 번 몸에서 진동을 느꼈다. 나는 지진이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을 떠보니 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것은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다.

사실 폭로된 관은 다른 사람이 나를 불공평하게 대한다는 마음과 협조인을 얕잡아보는 마음으로 바로 질투심이었다.

사부님께서 빨리 그 일보까지 수련하게 해주실 것이다.

질투심을 제거

어느 하루 판매 수련생(나는 그녀에게 선입견이 있고 그녀는 비교적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이 갑자기 전염병이 지난 후 처음으로 고객의 광고 계약을 받았다. 즉시 단체방에 알렸다. 모두 축하했다. 나의 반응은 오히려 이상했다. 회사 수입이 늘었는데 기쁘지 않았다. 듣자마자 떠오르는 생각은 ‘어떻게 그녀 같은 사람이 이렇게 쉽게 계약을 따냈는가? 이제 광고를 수주했으니 얼마나 잘난 체할 것인가? 모두 이렇게 축하한다면 그녀를 해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스스로 정확하고 확실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데는 회사의 상황이나 개인의 문제를 예감하면 그대로 들어맞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나는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 ‘그녀를 칭찬해 주는 것은 그녀를 해치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그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어떤 반응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결국 마음속에서 한마디가 나왔다. ‘겨우 광고 하나 따낸 거 가지고 그렇게 떠들썩하게 호들갑 떨게 뭐 있냐?’

이 생각을 하자 갑자기 마음이 움직였다. 이상하다. ‘호들갑 떨다’라는 단어가 어딘지 익숙했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질투심을 말씀할 때 한 말이 아닌가? 나는 멍해졌다. 이것은 내가 아닌가? 원래 수련생의 눈에 차지 않는 반응은 질투심이 아닌가? 그녀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 그녀를 위해 기뻐하지 않고 반대로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더욱 두려운 것은 이 질투심이 끊임없이 그녀의 단점을 찾고 각종 경험과 교훈으로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 나는 회사를 위하고 직원들을 위하고 그녀의 공리심을 방종하지 않게 하려고 이성적으로 수련생을 대해야 한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거만한가? 몇 년 동안 나는 안으로 찾지 않아 질투심이 깊이 숨겨져 폭로되지 않았다.

나는 한 가지 이치를 알게 되었다. 모순에 부딪힐 때 괴로워하면 모두 집착심이 괴로워하는 것이고 진정한 자신이 아니다. 몸에 있는 것은 거짓 자아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 있기에 발각되지 않고 계속 살려고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사람의 이치로 옳고 그릇됨을 판단하게 하고 각종 이유를 밖에서 찾게 한다. 상대방이 어떻게 좋지 않고 자신은 어떻게 옳다고 생각하게 한다. 질투심은 상대방의 말을 듣기 싫어하고 명예를 훼손시켰다고 생각하기에 분별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기타 집착심보다 더 발견하기 어렵고 쉽게 그를 보호하게 된다. 사람이 정이 있고 쟁투심, 명리심이 있다고 승인해도 자신이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질투심은 깊이 숨겨져 있다.

이후 나는 옳고 그름을 분별할 때 자신에게 묻는다. 너는 또 그 속에 빠져 옳고 그름을 말하는구나! 너는 자신의 그 마음을 숨기기 위해 자신이 맞다는 증거를 찾는구나! 그 속임수에 빠져 그를 보호하고 있구나! 너는 그 집착심을 보호하려 하는가? 그는 나 자신을 대체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질투심이 발각된 후 사부님께서 나에게 이 부분을 제거해 주셨다. 그러나 스스로 이 마음의 심각성과 완고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고 층층이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 이어 또 한 가지 일이 발생했다.

그날 수련생이 나에게 보내 준 밍후이 문장을 보았다. 작가는 전편에서 남만 지적해 주는 느낌이었다. 그가 높은 곳에서 너무 잘난 체하는 모습에 나는 안달이 났다. 내가 느낀 것이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자 위가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빨리 안으로 찾아 단번에 알게 됐다. 수련생은 바로 나의 거울이다. 그가 잘난 체하는 것은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 나는 항상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수련생을 얕잡아보고 습관적으로 흠을 잡는 것이 아닌가? 나는 왜 수련생의 장점을 보지 못하는가? 남의 단점을 보는 것이 습관이 됐다. 이것이 바로 질투심의 체현이다. 속으로 사부님께 말했다. ‘제가 틀렸습니다. 저의 질투심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또 나왔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질투심이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처와 모순을 일으킬 수도 있다.”[1] 단번에 나는 놀라 깨어났다. 질투심은 수련생 사이에 각종 모순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다. 그는 강해 “부처와 모순을 일으킨다” 너무 두렵다. 그러나 대다수 상황에서 모순 중의 표면의 옳고 그름, 남을 위해 부족한 점을 찾아주기 위해, 항목을 위해, 사람을 구하기 위해 책임진다는 등의 이유로 덮어 감춘다.

이제야 나는 길을 잘 찾은 것 같았지만 마음속엔 아직도 뭔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수련생의 부족한 면을 본 것도 사실이다. 사실 감히 이 작은 일을 믿지 못한다. 정말로 사부님께서 배치해 주신 것이다. 정말로 나의 제고를 위해 나타난 일이다.

신기한 것은 내가 깨닫고 의심하고 있을 때 수련생이 나에게 또 문장을 보냈다. 나는 제목을 보고 놀랐다. 제목은 ‘층층이 질투심을 제거하다’이다. 본 후 나는 깨달았다. 이 문장은 나를 위한 것이다. 나를 겨냥해 말한 것이다. 나는 사부님께서 곁에 계신 것을 느꼈다. 시시각각 나를 위해 걱정하고 나의 일사일념을 사부님께서는 모두 알고 계신다. 나의 제고를 위해 끊임없이 각종 기연을 배치해 주신 것이다.

나는 기뻐하며 전화를 걸어 수련생에게 좋은 문장을 보내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녀가 자료를 검색하다 열어 보니 좋아 나에게 보내 줬다고 했다. 전에 나는 그녀에게 반감을 가졌었는데 연분이 크다는 것을 느꼈다. 사부님께서 소중한 연분을 배치하셨다.

이어 더욱 신기한 것은 그날 밤, 내가 밥을 하고 발정념을 하든, 연공을 하든 법을 통독하든 내 몸에서 열이 났다. 가장 명확한 것은 발정념을 하고 법 공부 한 강의를 마칠 때까지 2시간 넘게 몸에서 끊임없이 열이 났다.

이튿날 아침 나는 계속 법을 외웠다. 그때 이미 제4강 ‘현관설위’[1]까지 외웠다. 이 단락에서 “사람의 명문(命門)은 극히 관건적인 주요한 대규(大竅)로서, 도가에서는 규(竅)라 하고 우리는 관(關)이라 한다. 주요한 큰 관으로서 그것은 정말로 철문이며 무수한 층의 철문이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신체는 층층으로서 우리 현재 육체세포는 한 층이고, 그 속의 분자도 한 층이며, 원자, 양성자, 전자, 무한히 작고, 무한히 작고, 무한히 작은, 극히 작은 미립자까지 매 한 면에 모두 한 층의 문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므로 많고 많은 공능과 많고 많은 술류(術類)의 것이 모두 각 층의 문 안에 잠겨 있다. 기타 연단(煉丹)하는 공법은 단(丹)이 폭발할 때 우선 명문을 진동하여 열어야 하는데, 만약 그것이 진동하여 열리지 않으면 공능은 방출되어 나올 수 없다.”[1]를 보고 나는 모두 알게 됐다. 왜 매번 착실하게 수련한 후엔 몸에서 진동이 일어나고 열이 나는지 사부님께서 한층 새로운 내포를 열어주셨다.

이전에 나는 모순에 부딪히면 늘 수련생이 관을 넘고 있다고 하고 혹은 자신이 관을 넘고 있다고 했다. 관을 넘는 것이 단지 형식적인 것이라고 여기고 난과 모순을 관이라고 하며 일종의 비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사부님께서는 내가 있는 층차를 보게 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세상에서 매번 관을 넘을 때, 우리 몸에서의 명문은 사실 하늘의 문으로 통하는 하나하나의 문이고, 자연히 그 한 층의 법리를 보게 된다. 이렇게 끊임없이 하늘로 올라가는 길을 깔아놓은 것이다. 우리가 사람 속에서 편안하려 하고 시련과 모순을 피하려 하고 정념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바로 하늘로 올라가는 기회를 밀어내고 제고하는 기회를 밀어낸 것이다.

3개월 동안 법을 외우고 착실한 수련에서 모순에 부딪히면 안으로 찾고 자신의 집착심을 깊이 파헤쳤다. 그럴 때마다 몸에서 변화가 생겼다. 특히 질투심을 감히 대면해 그것을 찾아 제거한 후 거대한 변화가 나타났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질투심을 버리지 못하면 사람이 수련한 모든 마음이 모두 아주 취약하게 변해 버린다. 여기에 한 가지 규정이 있다. ‘사람이 수련 중에서 질투심을 제거하지 못하면 정과(正果)를 얻지 못하는데, 절대로 정과를 얻지 못한다.’ 여러분은 아마 과거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대업왕생(帶業往生)을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겠지만, 질투심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방면에서는 좀 부족하더라도 조그마한 것은 대업왕생하여 다시 수련하는, 그것은 될 수 있지만, 질투심을 제거하지 않고는 절대 안 된다. 오늘 내가 연공인(煉功人)에게 말한다. 당신은 이렇게 잘못을 고집하여 깨닫지 못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도달하려고 하는 목적은 더욱 높은 층차의 수련으로서, 질투심은 반드시 제거해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단독으로 내놓고 말한다.”[1] 이 마음의 심각성을 보아 낼 수 있다.

이상은 내가 3개월 동안 법을 외운 과정으로 아주 평범하다. 매일 외우는 것이 많지 않고 한 페이지 또는 두 페이지이다. 시간이 많으면 많이 외우고 시간이 없으면 적게 외운다. 때로 한 단락밖에 외우지 못한다. 많을 때는 4페이지나 외울 수 있었다. 나는 양을 구하지 않고 매일 견지하고 착실한 수련을 하려 한다. 비록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이 있지만, 자신이 진보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사부님의 은덕이다. 사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법에 있지 않은 점은 수련생들이 자비롭게 지적해 주시기를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20년 7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7/14/40886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