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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은 반드시 법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사부님의 신경문 ‘다시 방할(棒喝)하노라’에 관한 약간의 체득

글/ 후베이 대법제자 징밍(淨明)

[밍후이왕] 2020년 7월 5일, 밍후이왕에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신경문 ‘다시 방할(棒喝)하노라’가 실렸다. 자세히 읽은 후 제자는 양심의 가책과 슬픔을 깊이 느꼈다. 수련생들이 이지적이지 못하고 정진하지 않아 사부님께서 다시 한차례 우리를 위해 천기(天機)를 알려주셨다.

천기를 알려주실 때마다 대법제자는 항상 이 방면에서 수련에 큰 편차가 생겨 정법노정에 아주 큰 장애와 교란이 발생했다. 사부님께서는 매 한 대법제자를 빠뜨리고 싶어 하지 않으신다. 대법제자를 조속히 바로잡기 위해 사부님께서는 제자를 위해, 중생을 위해 일체 고난을 감당하신다.

옛말에 ‘천기는 누설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제자가 사부님의 경문 ‘다시 방할(棒喝)하노라’를 읽으면서 이 단락의 법 “사람의 표면은 아주 복잡하고, 부동한 공간의 정황은 아주 많은데, 당신들이 이 난에서 걸어 나올 수 있게 하려고, 나는 부득불 또 하나의 천기를 말했다. 그러나 당신들은 후과를 알고 있는가? 아주 깊이 참여한 수련생, 당신을 구세력이 그냥 둘 수 있겠는가?”[1] 현재 수련 층차에서 나는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수련은 미혹 속에서 깨닫고, 미혹 속에서 수련해야만 외부(주로 구세력)의 교란을 적게 받을 수 있고, 더욱 빨리 제고할 수 있으며, 더욱 착실하다. 둘째, 천기를 누설한 각자(覺者: 대법 사부님)는 이로 인해 전 우주중생을 위해 이 면의 무수한 공간의 무량무계한 압력을 감당하셔야 한다. 이것은 사부님의 중생에 대한 자비이고 또 한 차례 불은호탕(佛恩浩蕩)의 체현이다.

‘연설 난법’에 참여한 수련생들은 보통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아에 집착하고 밖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연설한 사람은 자신의 층차에서 다른 공간을 본 것에 집착하는데 아주 국한된 것이다.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아 수련생 사이에서 선전하고,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데 사용하며, 수련생들의 부러움을 사려 한다. 연설을 듣는 것은 자신의 개인 수련에서 장기간 개변할 수 없는 상태를 벗어나 연설하는 자에게서 ‘편법’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고, 자신의 신체를 좀 좋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혹은 연설자가 자신의 수련의 ‘맥을 짚어’ 주기를 바라고, 어느 층차, 어느 단계까지 수련했는지 봐주기 바란다. 심지어 이 기간에 수련의 변화가 나타나면 상대방의 공로라고 서로 추켜세우고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물론,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修在自己)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功在師父). 수련인의 공의 전반 연화(演化) 과정은, 다른 공간에서는 아주 복잡한 과정으로서, 또 다른 한 공간뿐이 아닌 모든 공간, 각개 공간 중의 신체가 모두 변화를 일으킨다. 당신 자신이 해낼 수 있는가? 해내지 못한다. 이런 일들은 사부가 안배한 것이며, 사부가 한다. 그러므로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고 한다. 당신 자신은 다만 이런 소원만 있고 이렇게 생각할 뿐, 진정 그 일은 사부가 해준다.”[2]

일체의 일체는 모두 사부님께서 하고 계신다. 이런 수련생들은 적어도 수련 중의 두 가지 큰 금기를 범했다. 첫째는 ‘법을 스승으로 모시는 것’[3]을 하지 않고 ‘사람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남의 공적을 훔쳐 자기의 공적으로 삼았다. 둘째는 법을 훔쳐 불법적인 방법으로 자신이 이용하고, 법을 어지럽게 한 혐의가 있다.

내가 있던 A 도시를 기억해 보면, 한때 한 외지 수련생이 왔다(여기서 여러분들은 주의해야 한다. 강연 난법자는 대부분 ‘외지 수련생’이거나 이전에 외지에 머물렀던 현지 수련생들임). 그는 사부님의 점화를 받았다고 자칭하면서 천체에서 함께 내려온 수련생을 찾으러 왔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공능과 신통을 듣고 많은 수련생이 그를 철석같이 믿고 거의 맹목적으로 숭배했다. A 지역에서는 점점 많은 수련생이 이 ‘연설’의 이상기류에 말려들었다. 심지어 협조인 수련생의 일깨움과 안배도 들은 체 만 체했다.

당시에, 우리 몇 명의 젊은 수련생이 이 외지 수련생들과 교류할 것을 적극 추천했다. 당시 밍후이왕에는 ‘연설 난법’에 관한 문장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수련생들이 사람을 배우고 법을 배우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녀의 타지 수련생에 대한 개인숭배는 이미 수련인의 행위가 아니었다. 일이 발생하기 전에 우리 몇몇 수련생이 함께 토론했다. 첫째, 수련생 사이의 교류는 ‘법을 스승으로 모시고’, 둘째, 상대방의 법에 있지 않은 어떠한 언행을 끌어내지 않으며, 셋째, 상대방에게 법에 있지 않은 언행이 있으면 이성적으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리로 제거해야 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발정념하고, 사부님께 제자를 가지(加持)해 달라고 청했으며, 외지 수련생 배후에서 언행을 조종하는 일체 사악한 생명과 요소를 제거했다. 사부님께 제자들이 있는 장소에 덮개를 씌워달라고 청하고, 사악이 수련생 사이에 법에 입각한 정상적인 교류를 교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정말 신기하게도 외지에서 온 수련생들의 나쁜 일면이 완전히 억제된 것처럼 공능과 신통을 말하는 것이 사라졌다. 모두 수련 중의 심성제고에 관해서 교류했고, 경사경법(敬師敬法)에 관한 내용을 교류했다. 게다가 그가 말을 마칠 때마다 우리는 모두 선의로 그를 일깨워줬다. 이런 것은 모두 그가 대법 속에서 깨달은 부동한 층차의 법리에 불과하고,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은 가없이 넓고 층층의 중생을 지도한다. 오늘 사부님의 설법을 읽었다. “나는 당신들이 그 사람을 멀리하고, 그에게 시장을 주지 말 것을 건의한다.”[1] 제자는 깨달았다. 지난번 교류에서 우리는 확고하게 신사신법하고 법을 스승으로 모셨기에 그 외지 수련생에게 시장을 주지 않았고 연설 난법 교란의 가상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밍후이편집부가 ‘연설하는 것은 난법이다’라는 문장을 발표한 후, A 시의 많은 수련생도 수련생이 법을 배우지 못한 위험성을 인식했고, 외지 수련생의 연설 난법을 멀리했으며, 제때 자신의 수련 노정을 바로잡았다. 하지만 일부 수련생들은 마음속의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고 계속해서 외지 수련생을 추종해서 결과적으로 구세력에 의해 꼬투리를 잡혀 외지 수련생과 그를 따르는 일부 수련생과 함께 경찰에 의해 불법적으로 미행당하고, 체포되어 판결받았다. 개인 수련에 거대한 난을 초래하고 동시에 현지 정체(整體) 수련에 거대한 손실을 초래했다.

우리 협조인 수련생은, 종종 주의하지 않아 ‘연설 난법’이 발생하는 것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 역시 사람의 마음이 조성한 것이다. 예를 들어 협조인 수련생은 자신을 높이 두는 마음이 있고, 다른 수련생들은 협조인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있다. 이 두 가지 집착심은 흔히 서로 대응해서 토론하고 교류할 때 ‘환자’와 ‘의사’의 대화처럼 표현된다. 어떤 수련생은 협조인에게 자신의 신체 어디가 불편하고, 어디에 통증이 생겼는지 말한다. 하지만 협조인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리로 수련생이 안으로 찾아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층차에서 이해한 대로 직접 수련생에게 어떻게 하라고 가르친다. 시간이 길어지면 연설 난법의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런 ‘연설’ 교류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수련교류 중에 고려하기를 건의한다. 첫째, 교류할 때 ‘법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리로 일체 바르지 않은 요소를 제거한다. 둘째, 대법제자의 세 가지 일을 교류의 기본으로 삼고 주로 어떻게 수련의 정체협조와 제고할지 교류한다. 셋째, 개별 수련생의 개인 수련문제를 함부로 결론 내리지 말고, 교류 중에 법리로 수련생이 안으로 찾도록 해주고, 수련생이 집착심을 찾아 제거하게 돕는다. 착실히 수련해서 자신의 상태를 개변시키면 당연히 주위 수련생들도 안으로 자신을 찾아 수련한다. 결국 수련인이 부딪히고 본 일들은 모두 우연이 아니다.

사실 사부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상이 연공(煉功)해도 공이 자라지 않는 두 가지 원인이다. ‘고층차 중의 법을 모르고서는 수련할 수 없으며, 안으로 수련하지 않아 心性(씬씽)이 수련되지 않으면 공이 자라지 않는다.’ 바로 이 두 가지 원인이다.”[2] 대법제자가 수련의 길에서 넘지 못하는 관이 있을 때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그동안 착실하게 수련했는지, 법을 스승으로 모셨는지, 확고하게 신사신법(信師信法) 했는지, 사부님께서 주신 법보(法寶)를 사용했는지, 법에서 안으로 찾았는지다. 이렇게 해야만 우리는 비로소 난을 넘고, 법에서 제고하며, 자신의 수련환경도 좋게 변할 수 있다. 외부 요인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수련의 엄밀함은, 한 고리 한 고리 연결되어 있으며, 설사 매 시각, 매 일보마저 교란을 받아서는 안 된다.”[1] 진심으로 그런 연설 난법에 참여하는 수련생이 빨리 각성하고, 다시는 자신이 이지적이지 못하여 사부님께서 대신 감당하시게 하지 말고, 이로 인해 만고의 수련 기연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대법 수련의 길에서 지름길은 없고 오로지 법을 스승으로 모시고, 안정되고 확고하게 매 일보를 걸어야만 수련의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경문: ‘다시 방할(棒喝)하노라’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시드니 법회 설법’

 

원문발표: 2020년 7월 1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7/13/40888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