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후베이 대법제자
[밍후이왕] 저는(65세) 원래 어느 시의 시 정부 직속 기관의 관리였습니다. 1995년 여름 어느 날 밤, 저는 ‘파룬궁(수정본)’을 읽은 후, 파룬궁 수련생의 연공장에 가서 3일 동안 아침마다 동공을 연마했을 뿐인데 저를 30년 동안 괴롭혀왔던 질병이 전부 나았습니다. 그날부터 시작해 25년간 저는 더는 약을 먹지 않았고 주사를 맞지 않았으며 병원에 가지 않아 나라를 위해 수십만 위안(약 몇천만 원)의 의료비를 절약해줬으며 점점 더 젊어졌습니다. 가족, 동료, 친지와 친구들, 저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대법의 신기함을 목격했습니다.
1999년 7월 20일, 중공 사당 깡패집단은 잔혹한 파룬궁 탄압을 발동했습니다. 저는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과 진상 알리기를 견지했다는 이유로 두 번이나 불법으로 갇혔고 직무도 파직됐습니다. 매달 제게 월급의 10분 1 즉, 130위안(약 2만2000 원)만 지급했습니다. 시에서는 계층별로 저를 감시했습니다. 회사의 최고 책임자는 관직을 지키기 위해 속이고 거짓말을 꾸며내 회사에 사설 감옥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파견해 24시간 절 감시하게 했으며 20여 일이나 불법으로 가뒀습니다.
제 전남편은 정부에서 10여 년간 근무한 부국 급 간부입니다. 사악한 공산당은 남편이 저를 적대시하고 미워하게 하려고 일부러 저를 처벌하는 전 시 국 급 통보대회에서 제 남편을 맨 앞줄에 앉히고 클로즈업해 TV 뉴스에 내보냈습니다. 동시에, 제가 파출소에서 불법으로 심문을 당하는 장면도 며칠 동안 반복해 방송했습니다.
전남편은 체면을 매우 중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거대한 정신적 압력을 견디지 못했고 사악한 공산당이 저와 가정에 저지른 갖가지 박해를 견디지 못했으며, 또 부패와 질서가 없는 혼란한 사회상태에 따라 제게 이혼을 강요했습니다. 게다가 제게 돈 한 푼도 주지 않았고 아들을 상관하지 않았으며 집을 버리고 문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그해 아들은 대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한순간에 정치적 압력과 경제적인 박해, 그리고 전남편의 배반과 사회적인 압력으로, 정말 ‘백 가지 고생 한꺼번에 내리거니’(홍음)였습니다.
그 고통스럽던 시기에 저는 매일 사부님 법상 앞에 꿇어앉아 울면서 사부님께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룰 때면 저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법공부를 했습니다. 어느 날, 사부님의 말씀 “참기 어려운 것도 참을 수 있고, 행하기 어려운 것도 행할 수 있다(難忍能忍, 難行能行).”[1]를 읽었습니다. 저는 제게 사부님이 계시고 대법이 있으므로 건너지 못할 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사부님의 말씀을 듣고 ‘진선인(真·善·忍)’을 수련해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려 했습니다.
이후 저는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면서 다른 한 파룬궁 수련생과 매일 자진해서 사무실 건물과 화장실을 청소했습니다. 원래는 각 부서 사무실이 당번을 정해 청소했었지만, 우리 두 사람이 모두 끝냈으므로 나중에 그들은 모두 할 필요가 없게 됐습니다. 다른 시간에 저는 각 부서 사무실에 가서 진상을 알렸고 더 이후에는 거리에 나가서 진상을 알리며 자료를 배포했습니다. 저는 법공부를 하며 법을 필사하고 연공하면서 진정하게 법에 녹아드는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을 체득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진상 알리기를 이유로 경찰이 저를 납치하려 해서 살 곳을 찾아 헤매며 돌아다녔습니다. 10년간 저와 아들은 끊임없이 셋방살이하면서 일자리를 찾아다녔고 매우 궁핍하게 살았습니다. 또 전남편이 저의 집을 비밀리에 팔고 옛집이 철거되는 분쟁도 겪었습니다. 저는 시종 마음속에 진선인을 품고 개인의 득실을 따지지 않았으며 선하게 타인을 대하고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것을 견지했습니다. 이렇게 제 앞길은 갈수록 넓어졌고 갈수록 순조로웠습니다.
나중에 아들은 성도(省都)에서 집을 사고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또 나는 선전(深圳)에서 집을 사고 차를 샀으며 저는 손자도 생겼습니다. 저는 사당이 제게 지급을 중지했던 연금과 퇴직금 등도 돌려받았습니다. 저는 의도적으로 물질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이런 것에 집착하지도 않았지만, 사부님께서 모두 제게 잘 안배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곁에서 저를 점화해주셨고 저를 보호해주고 계셨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어떻게 법공부를 하고 발정념을 하며 자신을 잘 수련하는 세 가지 일을 잘해서 시간을 다그쳐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가만 생각했습니다.
전남편은 집에서 장남입니다. 이혼 후, 저는 홀로 아들을 키우며 일흔 살이 된 그의 부모님을 모시면서 전남편의 외삼촌, 남동생, 여동생과 왕래하는 것을 유지했습니다. 전남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매년 청명절이면 저는 모두 전남편의 남동생에게 돈을 보내 제사를 대신 지내게 했습니다. 그들 가족은 모두 제가 효도한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전남편과 이혼한 지 10년이 되던 어느 날 밤, 아들이 외지에서 전화를 걸어 고모가 제 전남편이 병이 위중해 고향의 시병원에 입원해있다고 알려줬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자기를 대신해서 제가 전남편을 보러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이튿날, 저는 성도에서 고향으로 서둘러 갔습니다. 차를 타고 가는 4시간 동안 지난 일들이 눈에 선했습니다. 그해, 사악한 공산당의 박해를 받을 때, 그는 다른 여자를 만났고 그녀에게 집을 사줬습니다. 아들은 사리를 알고도 그를 책망하지 않았지만, 그는 오히려 욕심이 한도 끝도 없었습니다. 제게 돈을 주지 않았고 아들도 상관하지 않았으며 집도 버렸고, 심지어 자신의 일흔이 넘는 어머니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전남편의 외삼촌조차 제게 “너무 바보라서 소용없다!”라고 말하면서 제 아들과 그들 집안 사촌 몇 명을 보내 전남편이 사는 곳에 가서 싸우자고 했습니다. 외삼촌은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법적 책임을 질 것이라고 말했지만 저에 의해 제지당했습니다.
갓 이혼한 그해, 전남편에게 정신적인 피해보상, 배상금 등 법률이 규정한 것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15년간 살았던 낡은 집만 가져서 어떤 사람들은 제가 파룬궁을 수련하더니 바보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제가 살 곳을 찾아 헤매 돌아다니던 기간, 그는 또 저의 낡은 집을 모두 팔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어머니를 모셔야 했습니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원망스러웠으며 억울해서 불평했고 마음이 슬프고 고통스러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니 그를 만나 한바탕 욕해도 한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문득 제가 자신을 속인으로 여기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부님께서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어떠한 환경에서든, 어떠한 상황에서든 사람과 모순에 직면했을 때, 모두 선량한 마음, 자비로운 마음으로 일체를 대해야 한다. 당신이 당신의 적을 사랑할 수 없다면 당신은 원만(圓滿)을 이룰 수 없다.”[2]
그래서 다시 생각했습니다. 그해 제가 박해를 당할 때, 전남편도 간접적인 박해를 당했고 정신적인 압력이 있었으며 체면이 깎이고 사회적으로 유언비어가 떠돌았으며 친지와 친구들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보통 사람이었고 수련하지 않았기에 버텨내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사회도덕이 미끄러져 내려가고 세상 기풍이 나빠짐에 따라 그는 만년을 잘 보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이혼할 때, 저는 다투지 않았고 소란을 피우지 않았으며 한 푼도 얻지 않았고 스스로 아들을 데리고 그의 어머니를 모시면서 참고 양보하며 그와 가정의 관계를 너그럽게 잘 처리했습니다. 파룬따파 수련이 아니었고 사부님의 자비로우신 보호가 없으셨다면 저는 걸어 지나올 수 없었습니다!
이 만고에도 만나기 어려운 대법이 널리 전해지는 시대에 제가 그와 22년간 부부로 맺어질 수 있었던 것은 얼마나 큰 인연인가요! 이때, 저는 얼굴 가득 눈물을 흘렸고 그가 오염되고 갈수록 깊이 빠져들어 그도 피해자라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한 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그가 저를 등지고 수렁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갈수록 깊이 빠졌습니다. 저는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습니다. 깨어난 후, 저는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고 그가 가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저는 전남편의 병실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심근경색에 걸렸고 병이 재발하면 말을 하지 못했으며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친구는 그가 다른 여자가 생겨 저와 이혼한 후부터 그 여자는 그의 예금과 월급을 전부 받아 가서 그는 아침 식사할 돈도 없었고 그 여자의 옷 주머니의 잔돈을 몰래 썼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외삼촌은 그의 남동생과 여동생이 그와 왕래하지 못하게 했고 저하고만 연락하고 지내게 했습니다. 그 여자는 그에게 분양주택을 사달라고 했고 실내장식을 비롯한 모든 비용을 그의 장부에 적었으며 그가 돈을 다 갚을 때가 돼서 그를 차버렸습니다!
그는 저를 보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정말 당신에게 미안하오!” 그는 또 병원에 입원한 지 20일이 다 됐지만 더운 날 목욕을 하지 못했으며 움직일 수 없었고 그를 돌봐주는 사람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당시에 매우 평온했습니다. 화가 나지 않았고 원한이 없었으며 그가 너무 가련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병원에서 나와 저는 바로 자전거를 타고 몇 킬로미터 떨어진 시골에 사는 그의 여동생을 찾아갔습니다. 그의 큰 여동생은 친절하게 저를 맞아주었고 제게 수없이 감사의 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녀의 오빠 상황을 그녀에게 말해주면서 병원에 가서 전남편에게 밥을 전해주고 목욕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이틀 동안 저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간병인을 불러 그의 아버지를 돌봐주는 일을 논의했습니다. 그리고 또 제 남동생 집에서 밥과 반찬, 그리고 고깃국을 만들어 병원에 갖고 가서 그를 돌봐줬습니다.
몇 년 전, 저는 이미 그에게 사악한 공산당을 탈퇴하게 했습니다. 이번에 또 그에게 인과응보의 이치를 말해줬습니다. 그가 저와 헤어진 후 이 10년 동안 양측의 상황을 비교하면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저와 아들에게는 무엇이든 다 있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내가 파룬따파를 수련하고 나서야 인생의 참뜻을 알게 됐어요. 선을 향해 마음을 닦고 원망과 미움 없이 사부님께서 자비롭게 제게 이 모든 것을 주셨으며, 저는 비로소 온갖 시련 속에서도 여전히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는 거예요.”라고 알려줬습니다.
저는 그에게 파룬따파 수련만이 비로소 아름답고 훌륭한 미래가 있게 된다고 권유했습니다. 그는 매우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플레이어를 하나 사다가 대법 사부님의 설법 녹음과 대법 음악 ‘보도(普度)’, ‘제세(濟世)’를 다운해 넣었고 밍후이왕에서 세계 파룬따파의 날을 맞이해 선정된 글을 인쇄해 그에게 갖다 줬습니다. 그는 “눈이 침침해서 안 보여.”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또 가서 안경을 사고 이어폰과 호신부를 가져와 그에게 플레이어 작동법을 알려줬습니다.
셋째 날, 저는 또 그의 외삼촌을 찾아가 전남편이 성도의 큰 병원에 가서 심장이식 수술을 받고 싶어 한다고 알려줬습니다. 돈이 그리 많지 않아서 결국 가지 못했습니다. 그의 외삼촌은 그의 남동생과 여동생 다섯 집에 알려 일주일 내에 5만 위안(약 8백61만 원)을 빌려달라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결국, 빌려주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으며, 모두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전남편의 외삼촌은 자신도 방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또 끊임없이 동창들을 찾아가 그가 수술하도록 돈을 빌려달라고 했지만, 동창들도 그에게 빌려주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수중에는 2만 위안(약 3백44만 원)의 저금밖에 없어서 아들에게 그의 아버지의 수술비를 모으는 상황을 말했습니다. 아들은 부족한 돈은 자신이 방법을 생각해 해결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넷째 날에 저는 다시 전남편을 보러 병원에 갔습니다.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기뻐하며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어젯밤에 잠을 푹 잤어. 깨어나 보니 플레이어의 전원을 다 썼네. 정말 좋아. 너무 홀가분해!” 저는 그에게 알려줬습니다. “대법만이 당신을 구할 수 있어요. 당신은 계속 견지해서 들어봐요. 배워보세요.”
어느 날, 저는 또 그를 보러 병원에 갔다가 길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그는 “나는 다 나았어. 수술할 필요 없이 퇴원했어.”라고 말하면서 2만 위안을 제게 돌려줬습니다. 저는 그에게 “대법 사부님이 당신을 구해주셨어요. 당신이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성심껏 외우면 평안을 보장받을 수 있고 좋은 미래가 있게 돼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여보, 고마워.”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대법 사부님께 감사드리세요! 대법 사부님께서 제게 이렇게 하라고 하셨어요. 대법 수련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렇게 당신을 대하지 않았을 거고 당신도 오늘이 없었을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몇 년간 저는 그의 가문의 4대 열일곱 집안의 서른세 명의 식구들을 사악한 공산당의 공산당, 공청단, 소선대 조직에서 탈퇴시켰습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오스트레일리아 법회 설법’
원문발표: 2020년 7월 1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7/10/40858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