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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써서 하는 수련과 그렇지 못한 수련

글/ 베이징 대법제자

[밍후이왕] 한동안 나는 한 수련생 집에 갔었다. 밤에도 그곳에 있었고 아침에 일어나서 함께 연공했다. 그런데 정공을 할 때 이 수련생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끝까지 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나도 정공할 때 큰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됐다. 연공을 하다 보면 항상 흐리멍덩해졌는데 인식하지 못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너무 놀랐다. 나는 입정하는 것이 잠자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고 여겼는데 결과는 내가 생각하던 것과 달랐다.

집에 돌아온 후 자신의 연공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휴대폰으로 정공을 연마하는 모습을 전부 촬영했다. 확인해 보니 정말 수련생의 말과 같았다. 나는 각성한 상태에서 연공하지 못했고 혼수상태와 다름없었다. 정말 바람직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이런 상태에서 아주 오랫동안 연공을 해왔다. 예전에는 정공할 때 다리가 아파서 입정하지 못했고, 항상 정공 음악이 전부 몇 마디인지 분명히 셀 수 있었다. 매 구간은 몇 마디이고, 몇 분 걸리고, 그래서 한 시간이 아주 빨리 지나갔다. 나중에는 다리가 별로 아프지 않았고 심지어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래서 정공이 몇 소절이 더 남았는지 세지 않았고, 지금까지 몇 소절을 연공했는지 알지 못했다. 어쨌든 자신이 연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이 입정을 무척 잘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내 수련 상태에 큰 문제가 있고 정말로 바꿔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사실 수련인의 잘못된 상태는 연공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법공부할 때도 집중하지 못한다. 항상 나타나는 상태는 입으로는 법공부하면서 마음은 그 속에 있지 않다. 생활이나 직장 문제를 생각하고, 법공부를 건성으로 하고, 임무를 완성하듯 법공부하므로 전혀 법공부의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다. 항상 이런 것은 아니지만 생활이나 직장에서 뭔가 성가신 일이 생기면 확실히 법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위에서 말한 대로 ‘마음이 날아가는’ 상태가 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진상을 말할 때도 늘 이런 상태였다. 인연 있는 사람에게 진상을 알릴 때도 같았다. 상대방이 내가 말한 내용을 실제로 받아들이든 안 받아들이든 간에 어쨌든 나는 그에게 진상을 말한다. 그가 받아들이지 않아도 다만 그뿐이었다. 내가 말하는 내용이 상대방에게 쉽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어떻게 말해야 상대의 마음을 더 쉽게 움직일 수 있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정말 임무를 완성하기 위한 것 같았다.

이런 상태를 자각하지 못하면 사실 연공은 체조하는 것과 다름없고 심지어 체조만도 못하다. 효과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신체의 노화에서 분명하게 보이는데 새치가 생기고,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고, 눈도 노화되어 작은 글자를 보려면 안경을 벗고 봐야 하는 등이다. 이런 상태가 길어지면서 만약 자신을 찾지 않으면 수련의 신심(信心)에 영향을 줄 수 있고, 주위에서 진상을 알리는 사람에게 당혹감을 줄 수 있다. 이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수련하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아주 엄숙한 일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속인을 벗어난 것으로서, 속인 중의 어떤 일보다도 더 어렵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초상(超常)적인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속인 중의 어떤 일보다도 당신에 대한 요구가 더 높아야 한다.”[1] 따라서 수련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심성이 제고되지 않고, 법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하지 않고, 자신을 개변하지 않으면 정말 사람이 사람의 일을 하는 것이고, 배후에 내포가 없고, 신의 가지와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수련생인 부모님을 생각해 보면 수련의 길에서 사람의 관념을 내려놓지 못했다. 매일 최대한 법공부와 연공을 하고, 나가서 진상자료를 배포하고 진상을 알리기도 했지만 사실 그들은 어떻게 수련의 길을 걸어야 하는지 진정으로 몰랐고 여전히 사람의 관념에 영향을 받으면서 생활했다. 게다가 나도 사악의 박해를 받았고, 주변 친지들도 대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인식이 없었다. 그들은 신체에 바르지 않은 상태가 생겼을 때 발정념을 할 줄 알았지만 효과가 없으면 속인의 수단에 의지해 문제를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수련할수록 신심이 없어졌고, 두 분은 세상을 떠나셨다. 당시에 나는 그들이 사람의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만 아쉬워했다. 지금은 자신의 수련 상태를 연관해 생각하고 있다. 만약 법의 표준에 따라 진정으로 자신을 개변하지 않으면 나 자신도 아주 두려운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수련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처럼, 나아가지 않으면 뒷걸음치게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수련 중의 일을 속인 중의 일로 여기는 것이다. 수련의 일로 삼아 하면 곧바로 수련하는 사람이다. 사실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특히 법공부와 연공 문제에서 공들이지 않으면 한 것과 하지 않는 것은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속인도 법공부와 연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속인이 법공부를 하는 것과 수련인이 법공부를 하는 것의 차이는, 속인은 그것을 지식으로 삼아 배우고 법공부를 마치면 지나가 버리고 자신의 관념에 따라 생활한다(사실 수련인이 공들이지 않고 법공부를 하는 것도 그렇다. 법을 자신에 비춰 보지 못하고 자신을 개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들여 수련하는 사람은 법공부를 하는 한편 자신의 말과 행동을 대조해 자신이 한 것이 법에 맞는지 아닌지를 확인한다. 이로써 끊임없이 자신을 개변하고 제고시키며 더욱더 깊은 법의 내포를 깨닫는다. 연공도 마찬가지다. 속인은 연공을 체조처럼 한다(공들여 수련하지 않는 수련인이 연공할 때 정신을 딴 데 팔고, 동작을 연마해도 생각은 자신이 집착하는 일에 가 있다. 심지어 정공을 할 때도 모호하게 한다. 이런 상태는 신의 가지를 받을 수 없다). 공을 들이는 수련인은 비록 동작에서는 특별한 것이 없지만 사실 내부의 변화는 완전히 다르다(왜냐하면 먼저 사상이 청정하고 똑똑하며 분명하다. 동작도 모양이 변하거나 망가지지 않는다. 마음은 수련에 있고 신의 가지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주 큰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수련인의 진상 알리는 일을 속인은 감히 할 수 없다. 하지만 하기 위해서 하거나, 임무를 완성하기 위해서 한다면 효과는 엉망이 될 수 있다. 사실 표면에서도 볼 수 있는데 공들여서 하는 것과 대충하는 것은 둘 다 일을 한 것 같지만, 사실 공들여서 하는 것은 시간이 필요하고 어떻게 일을 잘할지 골똘히 생각해야 하며 해낸 효과도 더 좋을 것이다. 동시에 여러 가지 어려움과 방해에 직면할 때 자신에게 이런저런 문제가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이것은 안으로 찾는 과정이고, 자신을 수련하는 과정이다. 법에 따라 자신을 개변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제고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충하는 것은 임무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고 일을 끝내면 그만이다. 곤란과 장애에 부딪혔을 때 하지 않거나 속인의 방법을 사용해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전혀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법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개변하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뼛속의 고정관념에 전혀 닿지 않는데 이것은 사람이 사람의 일을 하는 것이다. 다른 한 면에서 보면 마음이 법에 있을 때 당신이 하려는 일에 신의 도움이 있게 되고, 이렇게 한 일의 효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수련에서 마음을 써서 해야 할 것은 일사일념을 모두 법에 대조하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관념에 따라 해서는 안 된다. 해내는 것은 비교적 어렵지만 잘해야만 진정으로 수련에 수확이 있다. 하지만 대충하는 것은 정말 형식에 치우치고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는 신의 가지를 받을 수 없고 당연히 내용과 효과가 없다. 따라서 수련에서 자신을 책임지기 위해서 진정으로 수련의 모든 면에 마음을 써야만 자신이 대법이 널리 전해지는 이 천재일우의 시기에 사는 것에 부끄럽지 않고, 대법을 얻고 싶어 했던 생생세세의 소원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의 수련에서 이 부정적인 교훈이 나와 같은 상태에 처한 수련생에게 경각심을 일으킬 수 있기를 희망한다(사실 나는 이 교류 문장을 쓰는 과정에 더욱더 이 작용을 느끼게 됐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서: ‘전법륜’

 

원문발표: 202041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4/1/40317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