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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스승으로 삼고 끝까지 확고하게 수련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미조(美兆)

[밍후이왕] 1996년 11월 말, 저는 수련생 집에서 사부님의 지난(濟南) 설법 비디오를 보고 대법 수련에 들어왔습니다.

수련 전, 저는 10여 가지의 급성 및 만성 질병을 앓고 있는 중년 환자였습니다. 예를 들면 두통, 인두염, 만성 기관지염, 폐병, 늑간 신경염, 십이지장염, 위염, 소장염, 관절염, 고혈압(200 이상), 혈소판 감소증, 류머티즘성 관절염, 두드러기, 감기, 족 냉증 등 일 년 내내 약을 먹으면서 몹시 괴로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저는 대법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에 따라 마음을 닦았고 ‘대원만법’의 요구에 따라 연공했습니다. 1개월 수련한 후, 이런 질병은 치료받지 않고 저절로 나았고 심성은 다소 제고됐으며 체중도 늘기 시작했고 성격도 좋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아내와 딸도 수련하게 됐습니다. 다섯 살 된 어린 딸도 ‘홍음’을 외우고 ‘전법륜’을 배웠습니다. 가정도 화목해져 부러움을 사는 가정이 됐고 저의 이 층차에서 법을 실증하는 작용도 일으켰습니다.

1. 단체 법공부를 견지하고 일에 부딪히면 안으로 찾음을 수련하다

법을 얻었을 때 저는 이미 49세였습니다. 10여 년 동안의 병마가 단번에 제거된 이것은 어떤 심정이었겠습니까! 그래서 개인 수련 단계에서 저는 곳곳에 가서 홍법에 참가하고 자원봉사하며 즐겁게 뛰어다녔습니다. 우리 집은 공장 내 기숙사 건물에 있었습니다. 소매점을 열면 저는 소매점 위에 고음 스피커를 설치해 홍법했습니다. 공장 내에서 반드시 거쳐 가게 되는 길에는 농구장이 있었고 단지 안에서 ‘파룬따파(法輪大法)’의 간략한 소개와 홍법 이미지를 걸어두었습니다. 옆 대학 캠퍼스에서 홍법하고 법공부하며 연공했습니다. 우리 집은 법공부를 하고 연공하는 장소가 됐으며 1년 365일 끊긴 적이 없었습니다. 참가자 가운데 대학교수, 엔지니어, 경리, 선생님, 대학생, 가족, 초등학생, 노동자, 농민, 소상인 등이 있습니다.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은 70대였고 가장 어린 사람은 5세였습니다.

한 청년은 얼굴, 손, 발에 모두 마른버짐이 가득 생겨 매우 끔찍했습니다. 그는 아침에 40여 분 동안의 산길을 걸어서 아침 연공을 했고 지각하거나 일찍 간 적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아 마른버짐이 사라져 그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한 농촌 부녀는 그해 70세였습니다. 원래는 글을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매일 오전에 짐을 지고 거리에 나가 노점을 차려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오후면 우리 집에 와서 사부님 설법을 들었고, 밤이면 단체 법공부에 참가했습니다. 반년 후, 그녀는 ‘전법륜’을 통독할 수 있었고 지금 그녀는 90대이며 여전히 수련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이 법공부 장소는 1999년 7월 22일까지 견지하다가 경찰관에 의해 대량의 대법 서적을 빼앗기고 나서야 멈추게 됐고, 개인별로 법공부하는 수련으로 바뀌었습니다.

2004년 10월 24일, 4년 동안의 억울한 감옥살이에서 돌아와 한동안의 법 공부와 연공을 거쳐서 자신을 바로잡고 법에서 수련한 후, 다시 단체 법공부를 회복했습니다. 다만 다른 수련생의 집을 이용하면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면서 단체 법공부를 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수년간 지속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머무는 집을 옮기면서 저는 다시 법공부 장소를 만들었습니다. 비록 법공부를 견지하는 사람의 수는 서너 명이었지만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단체 법공부를 했습니다. 먼저 발정념을 하고 법공부를 하며 서로 의견을 나누고 안으로 찾으면서 체득을 이야기했고, ‘7.20’ 이전의 그런 법공부 형식과 같았습니다. 다만 발정념을 하고 안으로 찾는 것이 더 추가됐습니다. 수련생 간의 논쟁과 높은 언성, 그리고 안색이 변하는 현상 등은 안으로 찾는 과정에서 안개가 걷혔고 갈등 속에서 모두 제고됐고 승화됐습니다.

2. 진상 자료 배포를 견지하다

1999년 7월 20일부터 장쩌민(江澤民) 사악한 깡패집단은 광적으로 파룬궁과 파룬궁 수련자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절 수련생들은 모두 밍후이왕에서 진상 자료를 받았고 인쇄소에 가서 인쇄해 배포했습니다. 저는 진상 자료, 호신부를 우편으로 부치다가 불법으로 구속됐고 나중에 4년 형을 선고당했습니다. 2004년 10월 24일이 돼서야 억울한 옥살이에서 되돌아왔습니다. 돌아온 후, 집이 없고 직업이 없었으며 수입이 없는 ‘3무인(三無人)’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련생들이 저에게 준 생활비를 모두 그들 명의로 감옥에서 돌보는 사람이 없는, 불법으로 중형을 선고당한 수련생들에게 우편으로 보내줬습니다. 여기에서 수련생 여러분의 관심과 지지에 감사드립니다.

진상 자료 문제, 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옛 수련생을 찾는 과정에서 저에게 법을 얻도록 소개해줬던 사람은 이미 수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그에게 사부님 경문을 가져다줬지만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마음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한동안의 진정성 있는 교류와 홍법을 거쳐 그는 수련으로 돌아왔고 법에서 수련하게 됐습니다.

저는 그와 진상 자료를 만드는 일에 관해 의견을 나눴습니다. 그는 컴퓨터를 잘 다루고 인쇄 등 기술이 있었기에 그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의견을 나누자 그는 진상 자료 제작에 동의했습니다. 우리는 출자해 프린터를 사 왔고 그가 장소를 정해 이렇게 작은 꽃이 피어났습니다. 한 번 피어나기 시작하자 2005년부터 2015년까지 10년이 됐습니다. 그동안 그는 여러 장소를 바꾸어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매주 제시간에 진상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와 단독으로만 연락하며 어떤 때에는 소매점에 가서 그를 찾고 중대한 일이 있어야만 갑니다. 모두 수련의 일로서 저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료를 배포하고 있고 그가 얼마만큼 인쇄하는지 여태껏 물은 적이 없습니다. 다만 한동안 지나서 그에게 일부 돈을 주었습니다. 그는 보통 받았지만 어떤 때에는 주더라도 돈이 있다며 받지 않았습니다.

2015년, 사업 부서에서 무보수 휴직을 허용하지 않아 그는 회사로 출근했습니다. 출근지와 거처는 100여 리(약 40km)나 떨어져 있고 각각 다른 지역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시골로 내려가야 하는 등의 일이 생겨서 이렇게 진상 자료는 제때 제작할 수 없었고, 기타 안전하지 않은 상황이 생겨났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그와 의견을 나누고 다른 수련생을 찾아 진상 자료를 만들게 했고 안전을 위해 그는 다른 수련생이 만드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다른 수련생도 남성이었습니다. 그는 불법으로 1년 갇혔었고 검은 소굴에서 정념으로 돌파해 나왔습니다. 그는 기꺼이 일을 맡았고, 일하면서 업무상 편의를 이용해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동안 하다가 저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사장이 모르게 사무용품을 이용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둘은 돈을 모아 수백 위안(약 몇만 원)어치 토너를 구매해 사장에게 돌려줬으며 이후에는 스스로 비용을 지급해서 재료를 구매했습니다. 그는 제때 표준에 맞는 진상 자료를 만들 수 있었고 지금은 갈수록 좋아지고 있습니다. 다만 배포하는 사람이 너무 적었습니다. 한동안은 한두 사람만이 자료를 배포했습니다.

우리 자료점은 시작해서부터 지금까지 14년이 됐으며 14년 동안 평온하게 지나왔습니다. 자료를 받아 가는 사람이 사고가 났지만(사악한 공산당에 의해 박해당함) 자료점의 안전에 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자료는 담당자 한 사람만 이송한다. 둘, 자료점은 법공부 장소로 하지 않는다. 셋, 법공부 장소에 자료를 보관하지 않는다. 넷, 자료가 만들어져 나오면 자료 담당자가 다른 곳으로 배송해 분배해준다. 다섯, 자료 담당자는 스스로 소모품 재료를 해결한다. 여섯, 오직 밍후이왕 자료만 진상 자료로 만들 수 있다. 일곱, 기타 웹사이트의 자료를 보지 않는다. 여덟, 단독으로 자료를 받고 단독으로 연락하며 자료를 받는 것은 자료 담당자가 안배한다. 아홉, 전화상으로 사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자료점의 자료 중 저는 총 6~7만 부를 배포했고 현지 수련생이 우리에게 안배해준 기타 진상 자료(그들은 우리가 만들고 있는지 몰랐으며 다른 자료도 배포하도록 안배해줌)를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2008년, 그들이 외지에서 운반해온 ‘9평 공산당’은 배포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료 담당자는 저를 찾아와 상황을 이야기했고(설을 보내야 했기에 그의 가족 중에 ‘9평 공산당’을 보관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저는 작은 오토바이로 전부 우리 집으로 운반해 놓고 혼자서 배포했습니다.

자료를 배포할 때 먼 곳은 250km 떨어진 큰 산과 오지였고, 약 50km 떨어진 시골 마을도 있었으며 대부분 반경 5km 내의 5개의 현 소재지와 현지 도시, 진, 향, 촌에서 반복적으로 배포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다녀왔습니다.

저는 진상 자료를 처음 배포할 때 마음이 두근거리고 손발이 떨렸으며 땀을 흘리면서 당황한 안색이었고, 사람을 만나면 숨을 곳이 없는 것이 한스러웠습니다. 지금은 마음이 평온하며 미소를 띤 얼굴로 만납니다. 태연하게 행동하며 당황하지 않고 놀라지 않으며 진상을 알리고 그에게 한 부를 주면서 천천히 보라고 합니다. 받지 않아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며 마지막까지 견지하면 신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사부님의 분부대로 합니다. “무슨 불(佛), 무슨 도(道), 무슨 신(神), 무슨 마(魔)이든, 모두 나의 마음을 움직일 생각을 하지 말라. 이렇게 하면 꼭 성공할 것이다.”[1]

3. 대면해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유하며 세인을 구하는 것을 견지하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대법제자로 말하자면, 수련과 오늘날의 법을 실증함을 첫 자리에 놓아야 한다. 대법제자는 반드시 법을 실증해야 한다. 당신들은 진상을 똑똑히 알리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 제1위이다.”[2]

저는 1999년 7월 20일 이후부터 진상 자료와 호신부를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진상을 알림에 있어서 사람의 마음이 무겁고 이지적이지 못했으며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 사악한 요소로부터 틈을 타서 여러 차례 불법 구속을 당한 후, 다시 억울한 4년 형을 선고당했습니다.

유치장, 구치소, 감옥에서 저는 모두 진상을 알리고 삼퇴(중국공산당, 공청단, 소선대 탈퇴)를 권하는 것을 견지했습니다. 접촉한 경찰관 대다수는 모두 파룬궁이 좋은 공법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유치장의 14명 경찰관 중 처음으로 진상을 알려 11명을 탈퇴시켰습니다. 감옥 경찰관은 감옥 책임자에서 일반 경찰관에 이르기까지, 예를 들면 제2 감구(監區), 제5 감구, 제4 감구, 교육과 감옥 행정 감구장, 감옥경찰, 과장과 일반 경찰관 대부분에게 모두 여러 차례 진상을 알렸습니다.

왜 저는 이렇게 많은 경찰관과 최고 책임자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걸까요? 저에게는 속인 중 화초를 잘 다루는 뛰어난 재주가 있었습니다. 제4 감구는 저에게 전문적으로 화초를 재배하게 했습니다. 꽃을 감상하러 오는 최고 책임자는 일반적으로 화초에 대한 지식을 묻곤 했습니다. 저는 곧 이 기회에 대법 진상을 알렸습니다. 저는 또 혼자서 다른 감구로 가거나 감옥의 공공용지에 가서 화초를 관리할 수 있었으며, 활동 범위가 비교적 넓어져 접촉할 수 있는 사람도 더 많아졌습니다. 꽃을 원하거나 기술을 물어보는 경찰관이 있으면 그녀들에게 사무실로 꽃을 가져다주는데, 모두 진상을 알리기 좋은 기회입니다. 제2 감구 감옥 경찰이 진상을 다 들은 후면 저는 그에게 좋은지 나쁜지는 마음속으로 알면 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어떤 경찰관은 말합니다. “여기는 감옥입니다. 당신은 조심해야 해요.” 경찰관에게 단독으로 이야기만 해 준다면 듣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중요한 것은 방법과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교통의 중요한 길목에서 제가 재배한 맥문동을 50도 정도 경사진 땅에 ‘오늘을 소중히 여기면 아름다운 내일이 있다(珍惜今天, 美好明天)’ 8글자로 식재했으며 매 글자는 가로세로 1.8m의 규모로 심었습니다. 예서체로 다듬었는데 감옥 사람들이 모두 감동했습니다. 그중 경찰관도 지나가다가도 발걸음을 늦추며 감상했습니다. 평가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고 모두 원예사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감옥 소장, 부소장은 저와 모두 이 현장에서 만났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기본적인 상황을 물어봐서 진상을 알렸던 것입니다. 그런 최고 책임자 중, 오늘은 이 사람이 오고 내일은 저 사람이 와서 이것저것 물어봤으며 기본적으로 모두 이런 상황에서 진상을 알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부님께서 배치해주셔서 온 것이 아닐까요?

어떤 때에는 화초를 어떻게 꾸며야 할지 모를 때 잠시 후면 머릿속에 답이 떠올랐으며 한번 시도해보면 효과가 좋았습니다. 들풀로 도안을 만들어 식재를 하려는데, 해본 적 없지만 한 번만 생각하면 도안이 곧 나왔으며 만들어보면 모두 보기 좋았습니다. 이것은 대법이 지혜를 개발해줘서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휴식할 때, 죄수 몇 명 또는 열 몇 명이 앉아서 함께 제가 진상 알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경찰관이 다가와서 한번 들어보면 제가 화초를 가꾸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렸고, 저는 모두 이런 방법으로 죄수들에게 진상을 알렸습니다. 열 몇 명의 사람들은 모두 ‘홍음’을 외울 수 있게 됐고 세 사람은 집으로 가져가기도 했습니다. 한 사형수는 ‘논어’와 ‘홍음’의 10여 편의 시를 외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불법으로 제3 감구에 갇혔고, 제2 감구에서는 혼자서 수개월 수감 됐으며 제4, 5 감구는 바오자(包夾: 감옥의 사주로 파룬궁 수련생을 밀착 감시하는 죄수)가 따라다녔고 어떤 때에는 3명의 바오자가 있었으며 적을 때는 1명이었고 보름마다 한 번씩 교체됐습니다. 어떤 바오자는 파룬궁을 듣고 믿었으며 일부 사람들은 듣지도 않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매주 두 편의 체득을 쓰는 기회를 이용해 ‘4.25‘ 청원의 진실은 평화적인 청원이며 포위 공격이 아니고,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은 파룬궁에 죄를 뒤집어씌운 것으로 세인들이 파룬궁을 적대시하도록 도발한 것이며, ‘1400 사례’ 병례는 정상적인 사망률에 0.006%에 불과하다는 등등의 진상 내용을 썼습니다. 저는 또 ‘논어’를 썼고 ‘홍음’을 암기해서 썼으며 1년 동안 내내 썼습니다.

감옥 610 우두머리가 말했습니다. “(나를 가리키며) 그가 이것을 모두 썼습니다. 1년 동안 3만 자의 진상 자료를 썼습니다. 4~5백 자에서 시작해 가장 많게는 6천 자까지 썼습니다.” 그는 저를 데리고 제2 감구에 다시 가뒀습니다. 저는 수백 미터 떨어져서 그에게 경문의 일부분인 ‘정진요지 2-건의’를 외워 들려주면서 그에게 자신의 위치를 잘 놓아야 한다고 권했으며, 그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제2 감구에 도착해 그는 한 여성 경찰관에게 저를 언급할 때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모두 타인을 위해 생각했어요.” 그 여성 감옥 경찰은 눈빛으로 저를 칭찬해주었고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듣지 않고 믿지 않으며 보지 않는 바오자에게 대법 진상을 믿게 하고 장래에 구원받게 하려고, 저는 그들을 자극해 법을 말해줬습니다. “여러분 제가 무엇을 썼는지 보지 않으면 경찰관이 여러분께 질문했을 때 어떻게 대답할 건가요? 대대장님, 어떻게 공정하게 처리할 거예요? 저는 지식수준이 낮아요. 틀린 글자도 많이 썼는데 여러분이 저를 도와 수정하지 않고 제출하면 윗분들이 여러분을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겠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점수를 받아 감형받을 수 있겠어요?” 그들은 생각해보더니 자신들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열심히 보기 시작했습니다. 한동안 지나서 저에게 쓰라고 재촉했으며 좀 많이 쓰라고 하면서 자신들이 보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잇달아 수십 명의 바오자가 바뀌었고 두 사람만 믿지 않고 듣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나오기 하루 이틀 전, 그 무렵 감옥 소장이 저를 따로 찾아와 말했습니다. “당신은 돌아가게 됐어요. 당신은 돌아가서 저를 대신해 당신 가족에게 안부 인사를 전해주세요! 우리를 위해 남겨준 귀한 자원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돌아온 후, 2005년 1월 29일에 그에게 두 번째 5페이지 분량의 선을 권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고, 해학 시 한 편을 첨부해서 보냈습니다. ‘대법 구도 십 년을 보내고도, 잘못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누구를 탓하랴, 유생지문 무생지문 스스로 들어가나니, 신선이 분명히 말하지 않은 것이라 탓하지 마라(大法救度十年多,執迷不悟怪誰個,有生無生門自進,莫怪神仙沒說淸)’

4. 세뇌반에서 진상을 알려 마의 무리를 무너뜨리고 고향에 돌아가다

2012년 5월 4일, 구(현급) 610 최고 책임자, 국안(국가 안전기구) 대대, 파출소, 진장, 사법, 지역사회, 공장을 지키는 요원이 한 패를 이루어 20여 명이 저를 도시 세뇌반으로 납치했습니다. 저는 또 불법으로 4개월 넘게 갇혔습니다. 이것은 제가 감옥에서 돌아와서 세 번째로 납치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수입원이 끊겨 가정은 심각하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마음을 움직이는가 움직이지 않는가? 정말 “백 가지 고생 한꺼번에 내리거니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겠노라”[3]와 같았습니다.

이전에 유치장, 구치소, 감옥, 이 방면에서의 시험과 시련을 깨끗하게 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반드시 잘 넘겨야 했습니다. ‘정념정행 해야 한다.’ 한 교육 담당자가 저를 숙소로 데리고 가는 길에서 말했습니다. “여기에 왔으니 ‘전향’하지 않으면 나가지 못합니다.” 잠시 후, 저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서 정념으로 나간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그가 말했습니다. “진수(眞修)하는 사람은 그래도 나갈 수 있어요.” 저는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사부님께서 그의 입을 빌려서 점화해 주신 것에 감사드렸습니다. 잠시 후, 세뇌반 주임 뤄(羅)모 씨가 와서 말했습니다. “여기에 왔으니 말로 나를 이기면 나갈 수 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대법으로 마음껏 사악한 마를 싸움에서 쓰러뜨리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쟁투심이 아니며, 이것은 정과 사의 대결이 인간 세상에서 펼쳐지는 진실한 전장이었습니다.

이튿날, 그들은 4명의 사오(邪悟)한 사람들에게 ‘천안문 분신 거짓 사건’ 영상을 보도록 했습니다. 처음에 한 사오자가 말했습니다. “저는 진실인 걸 한눈에 알아봤어요. 대법제자가 한 일이군요.” 그들은 모두 진짜라고 말하면서 저에게 태도 표명을 하라고 했으나 저는 거짓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2001년 1월 30일, 구치소에서 본 파룬궁에 죄를 뒤집어씌운 부분에 대해 한 번 설명했고, 또 2002년 감옥의 3가지 다른 버전도 설명했습니다. 동시에 또 그들의 현재 버전만으로도 일부 사람을 속일 수는 있겠지만, 저는 수십 번을 봤기 때문에 저를 속이려면 어려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뇌반 주임 뤄모 씨는 밖에서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방으로 문을 박차고 들어와 저에게 진실 여부를 물었습니다. 저는 또다시 구치소, 감옥에서 봤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결단성 있고 단호하게 거짓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풀이 죽어 나갔습니다. 처음으로 패배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저를 만나지 않았고 더는 저에게 무엇을 보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 교육 담당자가 억지와 그릇된 주장을 말했고 또 ‘전법륜’을 읽을 때 어떻게 읽으면 그릇된 이치를 읽어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모두 반박했습니다. 동시에 말했습니다. “당신은 ‘전법륜’을 제가 읽게 줘봐요. 제가 무슨 이치인지 한동안 읽어볼게요.” 그는 정말 ‘전법륜’을 가져왔는데 ‘7.20’국안 대대에서 압수한 책이었으며 수정되지 않은 진짜 책이었습니다. 저는 한 달 가까이 읽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읽어보니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읽어보니 제가 밖에서 읽어봤던 것과 같다고 했고 효과는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듣고 ‘전법륜’을 빼앗았으며 우리 두 사람은 논쟁을 시작했습니다. 수련생들은 교육 담당자가 저를 때리는 줄 알고 모두 고함을 질렀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학생인 세뇌반 주임은 수시로 저를 찾아와 회의실에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바오자도 함께 있었음) 저는 곧 그에게 진상을 알렸고 거의 90% 이상의 시간은 제가 진상을 알렸으며 그들은 들었습니다. 어떤 때는 질문하면 저는 답해줬습니다. 교육 담당자가 ‘전법륜’을 가져간 후, 세뇌반 주임은 또 저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사부님이 신경문을 발표했는데 볼래요?” 저는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내려받아 프린트한 것을 저에게 보여줬고 제가 떠나기 이틀 전, 그가 수거해갔습니다. 그는 갖고 나가면 그에게 좋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이런 표현은 이미 대법에서 그 자신의 위치를 바로 놓은 것입니다.

제가 납치당해 세뇌반에 갔던 당일 점심, 저는 단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단식한 지 4~5끼니밖에 되지 않았을 무렵 610, 공안, 정부, 지역사회, 세뇌반의 바오자를 포함해 두려워하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와서 식사를 권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저는 모두 진상을 알렸고 전 이곳을 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세뇌반 주임 뤄모 씨는 회의에서 사람들 앞에서 말했습니다. “○(나의 성) 씨만 자유롭게 밥을 퍼서 먹을 수 있고 물을 데워서 마실 수 있다. 당신은 우리가 무엇을 먹는지 보고 그것을 먹을 수 있다(그들이 독을 넣는지 확인하라는 뜻, 나머지 사람들은 바오자가 가져다주므로 밖으로 나갈 수 없음).” 저는 당시에 마음속으로 자유롭게 활동하다 보면 수련생을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며, 그(그녀)와 ‘신사신법(信師信法)해 정념으로 시련을 넘자’는 의견을 나눠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저는 4~5명의 수련생을 만났고 이 몇 글자로 격려해 주거나 오른쪽 손으로 주먹을 쥔 다음 힘껏 아래로 향하게 해서 이 몇 글자의 의미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5월 4일에 세뇌반에 들어갔지만 9월 13일에 정념으로 나왔습니다. 저는 5명 수련생 중, 류(劉)씨 성을 가진 수련생이 나중에 다른 수련생에게 그 몇 글자로 교류해준 후 확실히 정념을 강화할 수 있었으며, 제 몸에서도 작용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세뇌반 주임 뤄모 씨를 여러 번 찾아가서야 그녀는 저와의 면담에 동의했습니다. 그날 오후 2시부터 저녁 식사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는 ‘4.25’ 평화 재청원부터 시작해 제가 세뇌반에 납치당한 것까지 이야기했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어디에 잘못이 있을까요? 전부 저만 이야기했습니다. 그녀는 몇 가지 질문을 했고 저는 대답했습니다. 그 후부터 그녀는 더는 저를 찾지 않았습니다. 저를 만나면 급히 떠났으며 그녀는 철저히 패배했습니다. 그녀는 610 최고 책임자에게 보고서를 올리면서 제가 완고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저를 성 세뇌반으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지역의 기존 610 최고 책임자는 제 조카사위와 이미 사돈이 됐고 그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세뇌반에 있는 저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610 최고 책임자에게 제가 시력이 좋지 않다고 했고, 시의 610 최고 책임자는 병원에 가서 검사 결과를 가져오라고 했고 이렇게 저는 9월 13일에 세뇌반을 나왔습니다.

세뇌반 주임 뤄모 씨와 교육 담당자는 제 앞에서 말했습니다. “당신을 전향시키지 못했네요. 우리 체면이 말이 아니에요. 일터도 잃게 됐어요.” 사부님께서 점화해 주신 것이고 사부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이며 사부님께서 보호해주신 덕분에 저는 비로소 그들을 이겨낼 수 있었으며 사악을 전장에서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5. 법의 위력은 크며 경제적인 시련은 아무것도 아니다

저는 수련을 시작하면서부터 극단적인 길을 걸었습니다. 장사도 열심히 하고 싶지 않았는데 덕을 잃을까 봐 두려워 입에 풀칠할 정도의 생활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는 또 정을 대법 수련에 섞어 들어가게 했습니다. 진상 자료를 우편으로 부칠 때는 조카사위(글을 가르침)를 찾아 편지 봉투에 적어 달라고 했고, 청두에서 출근하는 조카딸에게 부탁해 진상 자료를 최고 검찰원, 법원, 중앙, 성 책임자에게 우편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가 구세력의 통제하는 사악에 틈을 타 붙잡혔으며 집착을 키워 무고하게 4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2004년 10월에 나왔지만 할 수 있는 일을 찾지 못했고, 일을 찾아보려고 하면 공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어서 노동 교양을 받고 돌아왔어요.”라고 말하면 상대방은 저를 고용하지 않았습니다. 일당 80위안(약 13600원)에 가서 일하기로 약속하고 가서 일하면 강제로 20위안(약 3400원)을 공제 당해 60위안(약 10200원)만 받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에게 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아니면 공안에 의해 구류 당하게 되어 상대방이 저를 원하지 않게 됐습니다. 이후 현의 회계감사 기관에서 꽃나무를 관리했는데, 회계감사 기관에서 회의를 열어 99%가 동의해 저는 꽃나무를 관리하러 가게 됐습니다. 국장, 부국장, 과장, 사무직원이 모두 동의했고 사무실의 문서 담당 비서만 태도 표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여러 번 진상을 알렸으니 믿지 않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삼퇴했습니다.

매월 800위안(약 13만 원)의 보수를 받았고 매주 반나절씩 두 번 나갔습니다. 또 다른 회사에서 청소하여 500위안(약 8만5천 원)의 임금을 받았습니다. 또 한 아파트 단지 화초 관리를 맡았으며 1500위안(약 25만 원)의 임금을 받았습니다. 기본적으로 다섯 식구의 기본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일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아 세뇌반으로 납치됐고 한 번 갇히니 4개월 이상이었습니다. 살길은 전부 끊겼습니다. 직장에서 세뇌반으로 전화해도 세뇌반에서는 저를 놓아주지 않았고 직장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을 고용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2012년 9월, 세뇌반에서 돌아온 후, 지역사회 서기가 소개해준 이 회사에서 화초를 관리하게 됐고 일하는 것을 보여주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사장은 여성이었고 사람됨이 충직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교통경찰 중대장이었으며 온 가족이 대법을 믿었으며 모두 삼퇴했습니다. 지금 이사장은 물류 관리기업 부사장이 됐는데 전국 100대 물류 관리기업 중 한 기업입니다. 남편은 50대 가까이 됐으며 전 시(市)에서 전례 없는 교통경찰 부대대장으로 파격 진급했습니다.

제가 일한 지 2개월이 채 안 되어 이사장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아주세요.” 저는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부 총괄 매니저를 맡아주실래요?” 저는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또 시 정치협상 회의 주석의 비서와 이사장이 저를 데리고 가서 택지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땅은 안 된다고 말하자 그녀는 제가 받을 돈이 적어서 그러는 줄 알고 저에게 기술 주식에 투자해서 돈을 내지 말고 주주가 되라고 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저에게 어떻게 해야 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1. 제 위에는 사장님만 있습니다. 2. 일하면서 시간적인 제한을 받지 않겠습니다. 3. 출근 카드 기록을 하지 않겠습니다. 4. 사장님은 결과만 봐주세요. 5.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보수를 지급해주세요.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저를 내보내시면 됩니다. (저는 주로 수련에 영향을 주지 않고 밥만 좀 먹을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일단 직책을 맡고 주식을 사면 정력을 전부 쏟게 된다고 생각했음)” 이런 조건을 그녀는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일을 시작한 지 7년이 넘었고, 지금 저는 73세가 됐습니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3번 강제 퇴직을 당했고 매번 3개월 동안 일하지 못했지만 모두 이사장님이 저에게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제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저처럼 이렇게 열심히 책임지고 사심이 없으며 기술이 훌륭한 좋은 사람은 찾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일한 지 5개월이 됐을 때, 그녀는 저에게 화원을 리모델링을 하는 자그마한 프로젝트 하나를 진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짠 예산은 1만여 위안(약 170만 원)이었습니다. 이사장과 사장은 착공에서부터 검수에 이르기까지 전체 권한을 저에게 위임했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리모델링할 사람을 찾으라고 요구해 저는 사람을 찾아 잘 협의했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제가 7천 위안(약 120만 원)을 드릴게요. 3가지를 무료로 해드릴게요. 하나는 할인받지 않겠어요. 다른 하나는 접대비가 없으며 마지막으로 찻값이 없어요. 이 세 가지 비용을 받지 않을 거예요. 동의하세요?” 그들은 이 프로젝트를 하기를 원했고 합의가 잘되어 7천 위안을 받고 갔습니다. 저는 회사를 위해 몇천 위안(수십만 원)을 절약해주었고, 저는 조금도 이득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맡게 된 7개의 녹화 프로젝트에서 저는 공구 구매를 책임지면서 몇 년 동안 몇만 위안(수백만 원)의 지출을 하면서 한 푼도 더 많이 지출하지 않았습니다. 사장은 언제나 단골손님을 생각해 매번 얼마나 지출했는지 묻곤 합니다. 저는 입버릇처럼 얼마이고 얼마를 지출했다고 말합니다. 어떤 때에 사장은 일부러 몇 위안(몇백 원), 십몇 위안(몇천 원)을 더 많이 기재하지만 저는 모두 바르게 수정해서 계산합니다.

대략 2012년, 사무실에서는 바닥 타일을 붙이려 했습니다. 톱밥이 필요해 경리는 저에게 가서 구매하라고 했고, 저는 8위안(약 1300원)짜리 톱밥을 4포대 구매했습니다. 그녀는 30위안(약 5100원)을 받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저에게 영수증을 끊어줬고 저는 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받아서 옷 주머니에 넣었고 오토바이를 타고 몇 리의 길을 달려갔습니다. 가다가 녹색 신호등을 대기하면서 영수증이 스스로 꺼내져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제가 펼쳐 보니 32위안(약 5400원)이라고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차를 되돌려서 갔고 영수증을 수정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저에게 한바탕 호통치면서 “귀찮게 하지 마세요. 일부로 더 많이 끊어줘도 적게 끊어달라니까요. 저는 당신 같은 사람 본 적이 없네요.” 저는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그녀에게 부탁했고 또 진상도 알렸습니다. 그녀는 아주 진지하게 듣고 영수증을 수정해줬습니다. 그리고 저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길은 헛걸음하지 않았고 대법을 실증했으며 또 한 사람을 삼퇴하도록 권유했으니 수지가 맞은 셈입니다.

저는 한 담배 노점에서 담배를 팔기 위해 상품을 들여왔습니다. 한 번은 그가 90위안(한화 약 1만5천 원)의 담배 한 갑을 더 보내왔습니다. 돌아가서 상품을 세어보다가 발견하게 돼서 이 일을 그에게 전화로 이야기했으나 그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화를 내며 농담하지 말라며 자신은 여태껏 실수한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튿날, 저는 들여온 담배를 다 가져가서 다시 한번 세어보게 했고 그는 세어 본 후, 얼굴이 빨개져 몇몇 경찰관에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그의 집은 교통경찰 휴게소에 있음).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그는 또 경찰관에게 제가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담배를 더 많이 주면 돈을 되돌려 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장사를 수십 년 동안 하면서 처음 겪어본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전에 제가 그에게 진상을 알리면 그는 듣지 않고 믿지 않았으며, 또 다른 일련의 말들을 했습니다. 그 후부터 그는 듣게 됐고 믿게 됐습니다. 게다가 그는 사악한 공산당 당원이었지만 삼퇴했습니다. 그 교통경찰관들도 나중에 삼퇴했습니다.

저는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4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2017년, 공장의 서기와 보위과 사람들이 공업국 주요 책임자들과 결탁해 우리 집을 강제로 뺏으려 했습니다. 제가 주민등록상 공장 내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을 지켜내기 위해 저는 가족 명의로 바꾸었습니다. 저는 저층을 소매점으로 개조했고 이 소매점에 의존해 우리 다섯 식구는 여러 해 동안 살아갈 수 있게 됐습니다.

그들이 철거하러 와서 보니 한 가구는 허가증이 있는 소매점인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여러 번 소매점이라고 인정했고 또 지도제작국 측량팀도 모두 틀림없이 소매점이라고 말했습니다. 정작 보상금을 계산할 때가 되니, 모두 소매점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부부 두 사람은 직업이 없어 소매점 부분도 보상금으로 받아야 했지만 결국 인정되지 않고 집과 화원 그리고 거실만 선정해 60여만 위안(약 1억 2백만 원)을 배상받았습니다. 기존의 기준대로라면 1백여만 위안(약 1억 7천만 원)을 배상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 저는 ‘전법륜’에서 “그러나 우리는 연공인(煉功人)으로서 이치상 스승의 법신이 책임지고 있기에 다른 사람이 당신의 것을 가져가려 해도 가져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따름을 중시한다. 때로는 당신이 보기에 그 물건이 당신의 것이며 남도 당신에게 이 물건은 당신의 것이라고 알려주지만, 사실 그것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당신은 바로 당신의 것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최후에 이르러서는 그것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그 가운데서 당신이 이 일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본다. 내려놓지 못한다면 바로 집착심으로서, 곧 이런 방법으로 당신에게 이 이익에 대한 마음을 제거해 주어야 하는데, 바로 이 문제다.”[1]라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 단락의 법은 줄곧 제 머릿속에서 맴돌았으므로 우리는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회사에서 출근하면서 화초를 관리한 지 7년이 됐고 물건을 구매할 때 모두 제 오토바이로 운반하고 비용을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사장에게 제 급여 문제를 정식으로 언급한 적이 없었습니다. 회사에 가서 처음에는 1,800위안(약 30만 원)이었고 나중에는 올라서 2,000위안(약 34만 원)이었으며 다시 2,300위안(약 39만 원)이었고 그 후에는 1,000여 위안(약 17만 원)을 보조해줬습니다. 이렇게 많이 주고 적게 주는 것은 사장이 결정했습니다. 다른 38명의 노동자는 몇 차례 임금 때문에 다퉜고 지금에서야 2,000여 위안으로 올랐습니다.

2012년, 세뇌반에서 나와서 지금까지 평온한 편이었습니다. 막내아들은 올해 직장을 얻었습니다. 저는 다시 사장을 찾아 사직할 예정이며 강행해야만 합니다. 우리 부부 두 사람은 각각 사회보험에 들었고 매월 1,000여 위안(약 17만 원)을 받을 수 있으며 배부르게 먹기에는 충분합니다. 지금 온 가족은 모두 대법 속에 잠겨 있으며 화기애애하게 불광이 비추는 가운데 대법의 안내로 사부님께서 배치해주신 수련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서: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서: ‘각 지역 설법 4-2003년 애틀랜타 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시: ‘홍음-마음고생’

 

원문발표: 2020121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1/21/39852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