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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졌으면 빨리 일어나라

글/ 해외 대법제자

[밍후이왕] 몇 년 전 귀국했을 때 국가보안대의 소란을 받아 매우 많은 사람의 마음이 폭로됐다. 특히 혈육의 정에 대한 집착으로 생긴 여러 가지 두려움으로 매일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에게 물었다. ‘이후에 어떻게 하겠는가? 의기소침 하겠는가 아니면 넘어졌지만 빨리 일어나겠는가?’ 3개월 동안 고통을 겪고 나서 정체로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신념을 확고히 하고 다시 정체에 용해되다

대륙에서 돌아온 후 처음에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가족이 당한 고통에 스스로를 자책했고, 본의 아니게 ‘다시는 해외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쓴 보증 때문에 고통스러웠으며, 수련생의 이름을 고자질한 자신이 죄인 같았다. 이것은 인생과 수련의 길에서 큰 오점이었다. 나는 거의 매일 눈물을 흘렸다. 매일 눈물을 흘리면서 잠이 들었고 눈물을 흘리면서 깨어났다. 마치 영혼의 껍데기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법공부는 해야 한다. 사부님께서 “법은 정념(正念)을 확고히 할 수 있다”[1]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사악에게 좌절당해서는 안 되고 넘어졌으면 빨리 일어나자.’ 점차 이런 정념이 생겼다. “두려운 마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릇된 일을 할 수 있게 하며, 두려운 마음은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기연을 잃게 하며, 두려운 마음은 사람이 신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 생사의 고비이다.”[2]의 사부님의 법을 외우면서 시시각각 자신을 일깨웠고 사람 마음이 표현되어 나올 때는 반복적으로 외웠다. ‘나는 이미 틀렸다’라는 두려움 때문에 수련의 기연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사람에서 신으로 되는 생사고비를 꼭 뚫고 지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잘못했지만 사존의 무량한 자비를 의심한 적이 없고 사존께서 나를 싫어하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법은 자비와 위엄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여기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2개월 후에 법공부하러 가려고 하는데 식구들이 막았다. 남편은 “당신이 집에서 어떻게 배워도 상관 없지만 나가서 배우려거든 집에 들어오지 마시오”라고 했다. 나는 영어도 잘 하지 못하는데 나가면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 상상할 수 없고 덜컥 겁이 나서 나가지 않았다. 3개월 동안 법공부를 한 후에 정념이 강해졌다. ‘나보다 나이도 많고 영어도 잘 모르는 사람들도 해외에서 잘 살아가는데 설마 내가 살아가지 못 하겠어? 꼭 단체 법공부를 해야지.’ 남편이 나에게 나가면 돌아오지 말라고 했을 때 나는 “충분히 생각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내가 돌아오자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가정관을 넘겼다.

나는 대륙에서 돌아온 후 아주 오랫동안 심하게 자책했고 국내에 있는 친척에게 전화도 적게 했다. 뭘 말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통화할 때마다 친척은 나가지 말고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사부님께서는 “친척이나 친한 친구가 고통을 겪을 때 당신이 마음을 움직이는가 움직이지 않는가, 당신이 어떻게 가늠하는가 하는 것인데, 한 연공인(煉功人)으로서는 바로 이처럼 어렵다!”[3]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가족을 위하는 것인가?’ 그들의 말대로 다시 나가지 않아서는 안 되고 마땅히 사람의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을 바로잡아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걸어야 한다고 깨달았다. 내가 원만하면 금생에 친척들이 감당한 고통은 이후에 백 배 천 배로 복을 받을 것이고, 혈육의 정에 집착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제거하지 않아서 수련의 기연을 망쳐버리면 그들도 망쳐버리는 것과 같다.

관념을 바꾸자 마음이 가뿐해졌다. 다시는 고통스럽지 않았고 친척들도 예전처럼 나를 걱정하고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대법에 대한 태도도 바뀌기 시작했다.

잘못을 깨닫고 고쳐 나쁜 일을 좋은 일로 만들다

돌아온 후 첫 번째로 한 일은 바로 내가 일러바친 수련생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한 것이다. 잘못했으면 용감하게 잘못을 승인해야 한다. 감추고 숨기면 잘못에 잘못을 더한 것이고 더욱 많은 사람의 마음을 증가시킨다. 수련생은 나를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괜찮아요, 이해할 수 있어요”라고 위로해 주었다. 수련생의 너그러움은 날 감동시켰다. 또한 외지 수련생은 늘 내게 전화해서 힘내라고 격려해 주었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그녀들의 관심은 큰 격려가 되었다. 약 3개월 후 심성이 제고되어 전에 쓴 보증서를 폐기하고 사부님께서 배치한 길만 걷겠다는 엄정성명을 밍후이왕에 발표했다.

막 돌아왔을 때 잘못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 날 매체 일을 하는 수련생이 내게 전화해서 매체 일을 해보겠는지 물었다. 나는 고려하지도 않고 동의했다. 그러나 며칠 후 이 매체 협조인은 내가 매체 일을 하는 것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나는 마음이 매우 복잡했다. 단체 이메일 가입신청도 통과하지 못했고, 수련생도 나를 의심하고 멀리 했다. 여러 가지 고험 앞에서 압력은 대단히 컸고 마음은 괴로웠다. 나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어떻게 고비를 넘고, 어떻게 법의 요구대로 할 것인지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수련생으로 말하면, 만약 다른 수련생들이 당신을 신임하지 않을 때에는 맞서지 마라. 잠시 회피하는 것도 좋지 않을 것이 없다. 이렇게 하면 쌍방 각자의 심리 압력은 모두 낮아지게 된다.”[4] “이런 일들을 하지 못하게 한다면 거리에 나가서 자료를 배포할 수도 있는데 마찬가지로 중생을 구도할 수 있지 않은가. 영사관에 가서 발정념하거나, 기타 방면의 것을 하는 것은 다 되지 않는가. 무엇 때문에 꼭 이런 면에 집착하려고 하는가? 당신이 집착할수록 다른 수련생들은 당신에 대하여 생각이 더 많아지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4]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수련생을 이해해야 하고 절대 수련생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수련생이 이렇게 나를 대하는 것은 법을 위한 것이고 항목을 위해 책임지는 것이다. 그들은 나와 개인적이 원한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설령 있을지라도 따져서는 안 된다. 실천으로 다시 수련생들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 맞서 싸우면 수련생들에게 심리적인 압력을 줄 뿐이다.’ 그래서 참여하려고 했던 매체 항목에서 탈퇴하겠다고 했지만 항목 책임자는 계속 하라고 말했다. 나는 무엇을 하겠다는 것에 집착해서는 안 되고 마음만 있으면 사람을 구하는 일은 많다고 생각했다. 수련생의 추천으로 전세계 전화팀 플랫폼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 일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게 되었다. 법의 요구대로 했기 때문에 얼마 되지 않아 수련생들은 다시 날 받아들였다. 한번 또 한번의 고험을 통해 표면적으로는 아주 큰 고비와 어려움으로 보일지라도 법의 요구에 따라 하고 조건 없이 자신을 찾기만 하면 꼭 넘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부님께서는 “수련 중에서 당신들이 부딪힌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모두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들이 수련하기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5]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나쁜 일을 좋은 일로 만들겠는가? 내가 겪은 일을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는데 많은 중국 친구들은 나의 말에 공감했다. 중국에서 이민 온 친구가 “중국공산당의 관원들을 자주 접촉하는데 공산당이 아주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너의 말을 듣고 보니 더욱 실망스러워”라고 했다. 또 다른 한 친구는 “중공은 살인하고 방화하는 것은 상관하지 않고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을 죽도록 괴롭히는 것을 보니 끝장이야”라고 가족들과 이야기 했다고 했다. 또 한 친구는 영사관에 가서 항의해야 한다고 했다.

이 몇 년 동안 중국공산당은 파룬궁수련생에 대해내부적으로는 극심하게 박해했지만 외부적으로는 느슨한 것처럼 했기 때문에 국내외의 중국인들은 박해가 이미 없어졌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진실성을 의심하던 사람들도 주변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보면서 청성해졌다. 내가 외국인에게 진상을 말했을 때 그들은 더욱 놀라워하며 이 시대에 아직도 그런 무서운 일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조차 어렵다고 말했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제거하다

수련인에게 두려움은 생사관과도 같다. 처음 돌아와서 나는 무척 두려웠고 어떻게 이 마음을 없앨 것인지 걱정했다. 나는 영사관과 차이나타운에 가서 진상을 알리기로 결정했다. 매주 하루를 정해 오전에는 영사관에 갔고 오후에는 차이나타운에 갔다.

처음 영사관에 가서 큰길 맞은편에 섰을 때 너무 긴장이 되어 온몸이 뻣뻣해졌다. 나는 항상 어느 층에 CCTV가 있는지 관찰했고, 중국인만 보면 긴장해서 중국영사관에 근무하는 사람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 때는 정말로 매분 매초 시달렸다. 나는 A 수련생과 두려움에 대해서 교류했다. A 수련생은 내게 “두려워하지 마세요, 함께 같이 가요”라고 했다. 수련생이 몇 번 함께 간 후 나는 수련생의 시간을 뺏지 않기 위해 혼자 있을 수 있다고 했고 점차 두려움은 적어졌다. 한번은 멀리 떨어진 차에서 내린 중국인이 다가와서 양쪽에 있는 진상전시판을 찍었다. 나는 그에게 파룬궁에 대해 아는지 물었고 그는 나보다 아는 것이 많다고 대답했다. 내가 “절대로 박해에 참여하지 마세요”라고 말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고 떠났다.

오후에 A수련생과 함께 차이나타운에 가서 진상을 알렸다. 그녀와 같이 있을 때는 별로 두렵지 않았다. 한번은 내가 먼저 도착했고 A 수련생은 차가 막혀서 좀 늦었다. 혼자서 전시판을 세워놓고 ‘9평공산당’ 신문을 배포했다. 이때 근처 음식점에서 7,8명이 나왔다. 그 중에는 공산당과 가까운 화교가 있었고 다른 몇 명은 짙은 양복을 입었으며 한 사람은 고급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나는 중국공산당원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무서웠지만 당황하지 말고 진정하자고 생각했다. 나는 핸드폰으로 그들을 찍었고 그들의 신분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잠시 후 카메라를 든 사람이 내게 걸어왔다. 나는 그에게 신문 한 장을 주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신문을 겨드랑에 낀 채 걸어갔다. 이어서 또 다른 사람이 걸어왔다. 나는 그에게 신문을 건네주면서 “당신이 특수요원이란 것을 알아요. 그렇지만 진상을 알기 바래요”라고 말했다. 그는 신문을 받고 떠났다. 그리고 그들은 5,6미터 떨어진 곳에서 사진을 찍는 척 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시각 나는 혼자였고 수련생이 빨리 와서 정념을 보태주길 바랬다. 그들이 떠난 후 A 수련생이 도착했다. 나는 그녀에게 방금 전에 겪은 일을 말했다. 그녀는 “그럼 먼저 나오지 말고, 조절해서 나오세요”라고 위로해주었다. 나는 “아니에요. 두려움이 나왔으면 대면하고 그것을 없애야 해요. 집에 숨어있으면 두려움을 숨겨놓는 거와 마찬가지예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견지해 냈다.

평소에 나는 전 세계 전화팀 플랫폼 진상전화를 했다. 사부님께서 또 한번 두려움을 없애는 기회를 배치해 주셨다. 타이완 수련생이 국가보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국가보안은 타이완 수련생의 언어가 표준어가 아니라며 책임자를 바꿔달라고 했다. 책임자가 없다고 하자 국가보안은 몇 번이나 전화를 끊었다. 표준어를 알기 때문에 내가 한번 해보겠다고 했다. 전화를 걸어 7,8분 동안 파룬궁이 국내외에 널리 전해진 것으로부터 장쩌민의 질투로 박해를 발동했고 ‘천안문 분신자살’은 꾸며낸 것이며, 장쩌민 등 몇 십 명의 고급관리가 박해에 참여해 국제법정에 고소당한 사실까지 말했다. 마지막에 공산당은 항상 가루를 다 빻고 나서 당나귀를 죽이는데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800여 명의 경찰을 총살했다고 말했다. 결과가 아주 무서우니 박해에 참여하지 말라고 권하고 마지막에 알아들었는지 묻자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때 상대방 쪽에서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자 전화가 끊겼고 잠시 후에 우리 집에 전화가 와서 받았는데 말이 없었고 ‘뚜뚜’ 하는 소리만 들렸다. 단번에 두려움이 올라왔다. 방금 통화한 녹음을 들어보았더니 말투가 지도자 같은 사람이 전화를 받는 국가보안에게 “파룬궁의 전화를 왜 자꾸 받는가?”라고 하는 말이 들렸다. 나는 무서웠고 허튼 생각이 들었다. ‘국가보안이 IP 주소를 통해 전화번호를 알아낸 것이 아닐까? 어떻게 하지?’ 순간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나를 고험하러 온 것이라고 의식했다. 플랫폼에서 수련생들과 이 일을 교류하자 두려움은 해체된 것 같았다.

몇 년 동안 사부님께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많은 기회를 배치해 주셨다. 사람의 마음이 나올 때마다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은 질서가 있고 우연히 발생한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고비마다 반드시 넘어야 하는데”[6]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항상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피해서는 안 된다.

끊이지 않는 악몽, 안을 향해 찾다

법의 요구대로 신속히 자신을 바로 잡았다고 기뻐할 때 나도 모르게 환희심이 생겼다. 이때 한 수련생의 말은 나를 깊이 생각하게 했고 비록 용감하게 걸어 나왔지만 자신이 신사신법 하는데서 크게 소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1년 전 수련생 언니와 통화하는데 언니는 나에게 두려움이 많이 적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나는 속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영사관에도 갔고 차이나타운도 갔고 무슨 활동이나 다 참가했는데 아직도 내게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고?’ 그렇지만 겉으로는 겸손한 척 “언니,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어요?”라고 물었다. 언니는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냥 느낌이라고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언니가 왜 이런 느낌이 들었는지,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 며칠 동안 자신에게 물었다. 사부님께서는 나의 진심을 보시고 신사신법의 문제에서 크게 소홀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국가보안에게 교란을 당한 후부터 늘 같은 꿈을 꿨다. 꿈 속에서 나는 중국에 있었고 국가보안 경찰이 내 행방을 쫓고 있었으며 해외로 돌아가야 하는 기한은 가까워졌다. 나는 당황스러워했고 사악은 물샐틈없는 수사망을 펼쳐서 벗어날 구멍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머리를 쥐어짜며 어떻게 중국에서 도망쳐 나올 것인지 생각했다. 늘 놀라서 깨어났고 도대체 나는 어디에 있는지 자신에게 물었다. 깨어난 후 해외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꿈을 3년 넘게 꾸면서 단지 돌파해야 할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직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부님께서는 “당신들은 대법을 배우는 과정 중에서 항상 일부 고험이 있을 것이다. 당신들이 수면 중에서 꿈속의 고험이든지, 실제적인 일 중에서 관을 넘든지, 실제 생활 중에서 관을 넘든지를 포함하여, 마치 작은 시험처럼 한 기간 배운 후 좀 시험을 치는데, 당신이 확실한지 확실하지 않은지, 잘 배웠는지 잘 배우지 못했는지를 본다.”[7]라고 말씀하셨다. 몇 년 동안 악몽을 꾸면서 언제나 혼자서 발악했고 사부님이 계시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자유롭고 편안한 외국이지만 걸어 나와 차이나타운에 가서 당당하게 진상을 알리고 공개적인 활동에 참가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두려움이 없고 정념이 매우 족해 보인다. 이것은 완전한 신사신법이 아니라 자유로운 환경을 믿는 것이고 이곳에서 사악은 나를 어쩌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매일 입에 사부님을 달고 다니지만 이는 하나의 호칭일 뿐이고 마음속으로 확고하게 사부님께서 시시각각 나를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고 자유로운 환경을 보호우산으로 생각했다. 이치를 깨달은 후 악몽을 적게 꾸었다.

장쩌민 고소 과정 중에 두려움을 제거하다

법리적으로는 장쩌민 고소의 중요성을 알았지만 두려움으로 인해 망설였고 오랫동안 참여하지 못했다. 수련생과 교류하면서 몇 명의 수련생이 장쩌민 고소에 대해 전혀 망설이지 않는 것을 보고 수련생과의 격차를 알게 됐다. 정념을 증가시키기 위해 사부님의 법을 외웠다. “나의 뿌리는 모두 우주에 박혀 있으므로 누가 당신을 움직일 수 있다면 곧 나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곧 이 우주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3] 장쩌민 고소는 사부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므로 사악은 감히 박해하지 못한다. 고소장을 쓸 때 자신에게 물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써야 하는가? 장쩌민 고소를 통해 어떤 목적에 도달하려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장쩌민 고소는 천상변화이므로 천상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고소라는 형식을 이용해 모든 피해자의 비참한 이야기로 공안, 검찰, 법원 공무원의 양심과 선념을 불러일으켜야 하며, 그들에게 사악한 중국공산당의 본질을 똑똑히 알도록 하여 장쩌민이 범한 수많은 범죄를 통해 자신에게 경종을 울리게 해야 한다. 장쩌민 고소의 큰 물결은 민중들에게 심사숙고 하게 하고 청성하게 할 수 있다.

편지는 매우 빨리 완성했다. 그렇지만 신분증도 제출해야 했는데 두려움이 나왔다. 이 정보를 중국공산당이 전부 알게 되면 어떻게 할까? 나는 정념을 확고히 했다. ‘두려워하지 말자, 편지도 다 썼는데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하지만 편지를 보낼 때 보내는 사람을 한자병음만 쓰고 중문으로 쓰지 말까?’라는 두려움이 또 나왔다. 두려움을 제거하고 자신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은 내가 아니다. 정정당당하게 중문으로 쓰자’라고 생각했다. 편지를 부친 후 일주일 정도 지나야 결과를 알 수 있는데 그동안 두려워하는 마음은 끊임없이 밖으로 나왔다. 편지가 배달되든 안되든 상관없이 보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런 생각도 두려움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편지가 배달되지 않기를 원했고 어쨌든 편지를 보냈다고 자신을 속이고 사부님을 속였다. 나는 이 교활한 마음을 발견했다. 후에 마음속으로 우러나와 편지가 순조롭게 도달되기를 기원했고 내 편지를 읽는 사람이 각성하기를 바랐다. 결국 편지는 순조롭게 배달됐다.

이상은 몇 년 동안의 체득이다. 두려워하는 마음들은 다 정(情)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17년 수련의 길을 돌이켜 보면 정은 내 수련 중의 생사고비와 같았다. 초기 수련의 문에 들어섰을 때 남편과의 정의 고비를 넘었고, 해외에 온 후 국내 친척에 집착해 곤두박질했고, 아이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정념이 전혀 없었고, 혈육 정에서 나온 정은 더욱더 나를 괴롭혔다. 사부님께서는 “육친정(親情)에 집착함은, 기필코 그로 인해 지치고 얽매이며 마에 사로잡히게 됨이라, 그 정사(情絲)를 잡아 쥐어 일생토록 방해받으니, 나이가 들면 후회해도 이미 늦은 것이다.”[8]라고 말씀하셨다. 사부님의 가르침을 새겨두고 정의 그물을 돌파하고 돌아가는 길에서 더욱 용맹정진 해야 한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경문: ‘정진요지2-교란을 배제하자(排除干擾)’

[2]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정진요지3-생사의 고비(死關)에서 벗어나라’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4]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각 지역 설법6-아태지역 수련생회의 설법’

[5]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정진요지3-시카고 법회’

[6] 리훙쯔 사부님의 시가: ‘홍음-마음 고생’

[7]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뉴질랜드법회설법’

[8]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정진요지-수련자 금기(修者忌)’

문장발표: 2016년 8월 5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8/5/33241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