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장거리를 가더라도 진정한 목적지는 잊지 말아야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오늘까지 오면서 사부님께서는 이미 수차례 정법이 마무리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연장하고 계신 이유는, 아직 많은 생명이 구원되지 못한 것 외에도 우리 스스로 아직도 법의 요구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명확히 알려주셨다.

아래에 최근 생각한 일부 문제를 여러분과 교류하려 한다. 수련생들은 최후의 시간에 우리에 대한 사부님의 기대에 도달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최후일수록 더욱 정진하자”[1]. 진정으로 참답게 수련해 제고하자.

수련은 사업이 아니지만 사업 중 곳곳이 수련이다

지금 수련인으로 말하면 가장 중요하고도 또한 가장 심각한 일이 바로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인 지금, 아마 어떤 수련인은 당장의 일에 조급하다 보니 한 가지 문제를 홀시하고 있는데 바로 수련과 사업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사존께서는 여러 차례 설법에서 모두 이 문제에 대해 말씀하셨다. “수련은 사업이 아니지만 당신의 수련은 사업 가운데 반영될 것이다.”[2] 속인의 사업 외에도 수련인은 또 수많은 법 실증, 중생 구도의 사업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실제적이고 실제적인 업무 자체는 수련이 아니다. 예를 들면 매체를 하는데, 우리 모두 알다시피 우리 자신의 주류 매체는 밍후이 말고도 대기원, 신당인이 있다. 밍후이는 자신의 특수성이 있어 다른 매체와는 크게 다르다. 대기원, 신당인은 대중 매체이므로 많은 항목이 있을 것인데 우리 수련인이 각각의 항목에 가서 관련 사업에 종사해야 한다. 이런 사업 자체는 수련이 아니다. 하지만 그 속에 몸을 담고 있는 수련인은 오히려 모두 이런 사업 환경 속에서 자신을 참답게 수련할 수 있고 제고할 수 있으며 법에 원만 동화할 수 있으므로 이 또한 우리 수련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어떤 때는 사업과 수련의 관계를 분명히 가르지 못해 실제 사업에 번거로움을 가져오게 된다.

이전에 한 가지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대체로 “여러분은 모두 수련인이니 무슨 일을 하든지 법으로 가늠하고 자신을 닦으면 그만이므로 모두가 다 같기를 요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 말은 아주 이치가 있는 것 같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사업을 하려면 여러 사람이 함께 협력해 한 가지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데 이 중에는 필연적으로 관리와 비관리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협조인이 있을 것이다. 비록 “우리 매 개인은 사실 모두 협조인”이라고 말하고 이 말도 괜찮은 것이지만 필경 우리 모두는 수련인이다. 하지만 흔히 실제로는 모두 일 가운데서 각자 자기 의견을 고집하게 되는데, 남에게는 ‘협조’하기를 바라지만 자신이 남에게 ‘협조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일단 관점상 이견이 있게 되면 위의 말과 유사한 말로 우회하는데 실은 자신을 위한 핑계다.

실은 흔히 우리가 일할 때 하는 일과 수련을 갈라놓을 수 없다. 예를 들어 TV방송국을 설립하려면 국장, 부국장, 각색, 편집, 기자, 외근, 내무 등등 각종 직무가 있어야 하고, 매 사람은 모두 자신의 본업을 잘해야만 비로소 일을 성사시킬 수 있고 일사불란하게 할 수 있다. 만약 사람마다 모두 “아무튼 모두 수련인이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모두들 법으로 가늠하면서 각자 대조하면 된다”라고 생각한다면 아마 한 가지 일도 해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모두 취재만 하려 하거나, 취재해 가져온 뉴스를 정리 편집하는 사람이 없거나, 모두 현장 일만 하려 하고 무대 뒤는 관리하는 사람이 없으며, 모두 국장이 되려 하지만 그 직급은 한 사람만 필요한 등등인데,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위치에서 우리는 확실히 자신을 수련할 수 있으며 실제 업무 중에는 여러 방면의 협조와 협력이 필요하다. 배역에는 자연스럽게 주역과 조역이 있기 마련이고 일을 함에 자연히 쉽고 힘든 것이 있다. 하지만 모두들 자신의 배역을 잘 연기하면 한 가지 일을 비로소 완수하거나 심지어 아주 잘할 수 있다.

실제적으로 일을 할 때 구체적으로 아주 명확한 일이라면 지도자가 있으면 피지도자가 있고, 관리하는 사람이 있으면 관리를 당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가 일할 때 시시각각 자신이 수련인임을 일깨워 줄 수 있고, 언제나 수련인의 표준으로 자신을 대조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일하는 과정 역시 수련인 것이다. 만약 수련인마다 모두 이렇게 자신을 요구할 수 있다면 한 가지 일을 쉽게 해낼 수 있고 잘 할 수 있다.

열심히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전문성도 필요해

여기에서 말하는 전문성이란 반드시 ‘정규’ 출신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많은 수련인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모두 자신의 전공은 아니지만 아주 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규범화, 표준화, 전문화해야만 비로소 더욱 큰 흡인력과 설득력이 있을 수 있고 각 항목에서 사람을 구하는 효력을 더욱 크게 발휘할 수 있다.

많은 경우 모두 비교적 적극적으로 각개 항목에 투신하는데 원래는 좋은 일이다. 하지만 어떤 때는 일을 한다는 것이 죄다 상상에 의거하는데 오직 열심히, 한바탕 맹렬히 하면 된다고 여기지만 실은 정말 그렇지 않다.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을 예를 들어보자. 관련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관련 코드를 알아야 하고 또 일정한 디자인 지식이 필요하다. 간단히 말해서 만들어 낸 홈페이지가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어 보는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격정과 열심히 함에만 의거해서 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뉴스를 만드는 데는 글을 쓸 줄 알고 국어를 말할 줄 알고, 또 일정한 시사 분석 능력이 있어야 하고, 또 관련 보도팀을 이끄는 능력이 있어야 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직업 도덕과 수양 등 여러 방면이 포함되는데 간단히 말해서 만들어 낸 뉴스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고 서로 소통하는 긍정적 효과를 일으켜 그로부터 진상을 전파하고 박해를 폭로하는 목적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매 한 가지 업종에는 규범과 표준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업종이 다르면 산이 가로 막힌 것이나 다름없다”는 속담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수련인의 지혜와 능력은 모두 법에서 오고 모두 사존께서 주신 것이기에 만약 정말로 어느 분야에서 특별히 강렬한 염원과 끝까지 견지할 결심이 있고, ‘문외한’으로부터 ‘전문가’가 된다면 해내지 못할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수련인 자신에 대한 요구도 높은 것으로 진정하고 착실한 수련 중에서 경지가 승화된 후에야 나타나는 능력이지 입으로만 말하는 “법으로 각자 대조하면 그만이다”는 일이 아닌 것이다.

숨어있는 변이된 사람 마음의 교란을 경계해야

‘사람 마음’에 대해 수련인은 모두 안으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은 어떤 때 아주 교활해서 그것이 일단 발각되기만 하면 제거된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을 은폐한다. 어떤 때는 한 가지 마음으로 다른 하나의 마음을 보호한다.

예를 들면 수련과 실제적인 구체적인 업무를 똑같이 취급하면 흔히 우리 자신의 마음이 답답하고 꼬일 수 있다. 자신의 사람 마음에 직면하고 싶지 않을 때는 쉽게 구실을 찾는다. 이렇게 하면 일할 때 불만을 지니기 쉽고 결국에는 작업 효과도 좋지 않을 수 있다.

명리심에 대해 더 예를 들어보겠다. 여러분은 모두 이 부분을 비교적 명석하고 쉽게 인식할 것이다. 더욱이 속인사회의 공명과 이익에 대해 비교적 쉽게 확실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련인 가운데는 한 가지 변이된 ‘영예를 추구하는 마음’이 있는데 사실 본질상에서는 역시 명리심이 작용한 것이다. ‘영예’란 속인사회에서는 아주 적극적인 물건인 것 같다. 영문 중의 ‘honor’란 단어나 한국어인 ‘자존심(自尊心)’도 마찬가지인데 이런 것들은 원래 신이 사람에게 남겨준 것으로, 인류의 바른 행위의 가치관을 격려해준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인류사회의 도덕성은 보편적으로 미끄러져 원래는 바르던 것이 침체되고 몰락했으며 심지어 심각한 변이가 생겼다. 수련인으로서 우리는 이런 것을 행위의 유도와 표준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오직 대법만 있을 뿐이다.

어떤 때, 수련인이 하는 일을 일정 정도까지 했을 때 쉽사리 무의식 중 ‘허세’를 부리는데 누가 하는 일이 사람을 많이 구하고, 강도가 크며, 효과가 좋은지 비긴다. 얼핏 보기에는 이것도 괜찮다고 여기며 마치 여전히 ‘배움을 비기고 수련을 비기는 것’[3] 같다. 하지만 조금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면 이런 현상 배후에는 적지 않은 사람 마음이 작용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비기기만 하면 곧 승부가 존재하게 되고 결과를 추구하게 되며, 곧 누가 일을 얼마나 했느냐에 관련되고, 곧 남몰래 비기게 되는데 심지어 겨루게 된다. 어떤 때 공동 협조 협력이 필요한 일에서도 슬그머니 겨루면서 남이 자기를 초과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마치 모두들 사람을 구하는 ‘공로’를 다투는 것 같다. 심지어 ‘정법이 종결될 때면 자격이 당당하다고 한바탕 뽐내는 심리’마저 잠재해 있다.

우리는 마땅히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의 본질적인 어려운 부분은 모두 사존께서 해결하고 계신다. 우리가 ‘정법시기 대법제자’로 될 수 있는 이 자체가 우주 중에서 가장 영광스럽기 비할 데 없는데 아직도 무슨 다른 ‘영예’를 다투는가? 무엇도 이것과 비길 수 없다.

우리가 각자 각종 일이나 항목 중에서 정말로 자신을 법 중의 한 입자로 간주할 때, 자발적으로 가서 원용하고 일을 잘하는 이 자체가 영예 속에 있는 게 아닌가? 도대체 누가 더욱 많이 하고 누가 한 일이 더욱 크고, 누가 사람을 얼마나 구했는가 등 이런 것을 다투어서 무슨 의의가 있는가?

여기에는 승부욕, 일하는 마음, 허영심, 체면을 차리는 마음, 명리심, 질투심, 그리고 ‘당(黨) 문화’의 어떤 것이 섞여 있다. 이런 사람 마음은 표면에는 ‘사람을 구하고 법을 실증하기 위한 일’이라는 이런 겉모양이 그럴듯한 핑계에 막혀 버렸다.

어떤 협조인은 ‘번거로움이 두렵고’ 혹은 ‘복잡한 인간관계’에 직면하기 싫어 협조 사업을 할 때 쉽사리 소극적이고 회피하는 방식으로 처리하고 자기 일만 지체시키지 않으려 하며, ‘기타 사람은 아무튼 법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한다. 소극적 심태로 협조 사업을 하면 시간이 길어지기만 하면 문제가 생긴다.

사실 매 수련인으로서 우리가 만약 진정으로 중생을 품은 흉금이 크고 넓지 않다면 실제 일속에서 ‘자아’에 빠지기 쉽다. 실은 역시 ‘사(私)’이고 ‘사’ 역시 각종 사람 마음의 근원이기도 하다.

‘사’를 닦는다고 하면 여러분은 하루 아침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평소에 더 많이 법으로 자신을 대조해 보자. 사존께서는 진작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당신이 늘 자비롭고 선(善)으로 남을 대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다른 사람을 고려하여 매번 문제와 마주칠 때마다 이 일을 다른 사람이 감당해 낼 수 있는가 없는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가 안 되는가를 우선 생각한다면 문제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4]

정법이 오늘까지 걸어오면서 사실 사존께서는 이미 끊임없이 우리에게 알려주셨고 무엇이든 다 가장 좋은 것, 가장 영광스러운 것, 가장 수승(殊勝)한 것을 주셨다. 관건은 우리 자신이 그러한 표준과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렸다.

24년이라, 인간세상에서는 그리 긴 것도 아니고 한 순간이라고도 할 수 없다. 줄곧 걸어오면서 우리가 정말로 ‘수련을 처음처럼’하는 마음을 고수하기는 참으로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나 멀리 걷고 오래였던지 막론하고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자신 수련의 초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3-최후일수록 더 정진하자’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2005년 샌프란시스코 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의 시: ‘홍음-실수(實修)’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5]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 설법9-2009년 대뉴욕국제법회 설법’

문장발표: 2016년 6월 2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6/2/32936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