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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념의 차이

– 약간의 생각

글/ 대륙대법제자

[밍후이왕] 파룬궁(法輪功) 제2장 공법 포륜을 할 때 가슴뼈가 한동안 고통스러웠다.(전에이런 적이 없었음) ‘또 한 층의 천체가 정화됐다.’고 생각했다. 2~3초 사이에 고통이 사라졌다. 당시 생각하기를 ‘만약 생각을 바꾸기만 하면 이런 결과가 아니다.’ “정말로 좋고 나쁨은 사람의 일념(一念)에서 나온다.”[1]

만약 우리가 외부에서 진상을 알릴 때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큰 비가 내리려고 하면(해외 수련생은 현수막을 걸고 전시판을 들고 있을 때는 비에 젖는 것을 걱정한다) 그때 ‘대법제자가 사람을 구하고 있으니 모든 정신(正神)은 모두 협조하기를 바란다. 번개신과 우신(雨神)이 부득이 비를 내리려고 한다면 우리가 일을 마치고 돌아간 후 내려주세요.’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모두 가장 좋은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정말로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그러나 다시 생각을 바꿔 그것이 구세력의 교란이라고 여기면서 발정념으로 ‘대법제자가 사람을 구하고 있으므로 모든 사악의 요소와 교란을 해체한다.’고 생각한다면 역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비록 우리가 기대한 결과를 같이 얻게 되지만 서로 각기 다른 염은 각기 감수가 판이하게 다르다. 전자는 수승하고, 후자는 압력적인 것이다.

다시 가정해서 말해보자. 만약 우리가 순정한 마음으로 사람을 구하는 중에 갑자기 다리가아파 정상적으로 걷지 못하게 됐을 때 ‘사부님께서 나에게 고무격려해주시는 것이다. 또 나를 정화해주시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수련 정진하여 제고하라는 것이다. 마치 일방적으로챙기려는 것 같이 생각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단지 당신들대법제자들이 잘하지 못했을 때에 그것이 감히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그때는 그것이 당신의 약점을 잡았기 때문이며 정상적인 경우에는 그것이 감히 하지 못한다.”[2] 순정한 마음으로 가장 순정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좋은 ’인(因)‘은 좋은 ’결과(果)‘를 얻는다. 구세력은 무슨 일을 해도 구실이 있어야 한다. 결과는 잠깐 있으면 괜찮아진다.

만약 그것을 ‘가상으로 여기며 인정하지 않고, 사악의 박해를 해체한다.’고 생각하면 아마결과는 잠깐 뿐이겠지만 역시 괜찮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염은 결과는 비슷하지만 우리의상태와 감수는 전혀 다르다. 전자는 지난 후 사부님에 대한 감사가 생각나서 “사부님 감사합니다.”이고 후자는 지난 후에도 수시로 틈을 타게 되는 압력이 있게 되므로 사람을 구하는 길이 어렵다. 그리고 전자는 마음은 유쾌하고, 후자 마음이 힘들다. 그것은 기점의 문제가 아닌가? 전자는 ‘나는 대법제자이므로 사부님께서 나를 관할해주신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후자는 자신을 ‘박해당하는’ 위치에 놓이게 했으므로앞으로도 가는 길마다 박해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다. 수련생이 한 차례 마난을 경험한 후 쓴 교류 문장에서, 수련생의 제1념은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하는’[2] 것을 보았다(그렇다. 구세력은 대법제자의 수련을 좌우지할 자격이 없다). 다시 안으로 찾고 많은 집착심을 찾고 동시에 사부님께 가지를 청한다. 마지막에 증상이 사라지고 제자가 정념으로 관을 넘기는 것이다.

하지만 극의 대본이 과연 그런 것인가? 구세력은 자신의 배치가 우리로 하여금 ‘안으로 찾는 것’을 촉진해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사부님께 공을 추구한다. “보세요. 내가배치한 것이 맞지요. 내가 배치했으므로 당신의 제자가 수련하게 됐으며, 제고하게 됐어요.”라고 한다. 그러면 그것은 당신의 다음 ‘제고’를 위해 또 한 차례 배치를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은 정말로 당신의 수련을 좌우지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우리의 누락(평소 안으로 찾지 않고 집착심을 제거하지 않았다)이 그들에게 무대를 펼쳐준 것이 아닌가? 입으로는 ‘부정’하지만 사실 구세력이 배치한 길을 걷는 것이다. 그러므로 ‘발정념은 늘 하는데 번거로움은 왜 끊이지 않는가?’라는 느낌이 든다.

수련인에게 집착심이 있는 것(집착심이 없으면 수련할 필요가 없다)은 집착심을 폭로하는것이다(집착심이 드러나게 해서 알게 하고 제거하게 한다). 그럼 구세력은 박해하는 이유가되지 않는다. 집착심이 폭로되면 우리는 안으로 찾을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어떤 관념이 법에 부합되지 않는가를 보게 되어,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에서 구세력은 틈을 탈 수 없다. 우리는 사부님의 보호와 지도에 따라 위로 수련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집착심을 안고 내려놓지 않으면 “당신들이 무엇에 집착하면 사악은 그것을 강화한다.”[3] 우리의 집착심은 구세력에게 자신이 존재하는 가치를 제공해 주는 기회가 아닌가?! 만약 우리가 평소 착실하게 수련하지 않고 단지 밀어내고 막고 배척하기만 할 때, 만약 ‘교란’이 하나나 둘이 오면 대응할 수 있겠지만, 8개, 10개가 한꺼번에 온다면 감당할 수있겠는가? 우리는 마음을 대법에 고정해 놓아야 하고(눈은 늘 ‘구세력’만 지켜보지 말아야 한다. 당신이 그를 생각할 때 그는 당신마당에 ‘존재감’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법을 잘 배워야 한다(법 공부하는 것을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시간을 내 법 공부를 할 때착실히 보지 않거나, 수시로 법리로 자신을 대조하지 않으면 단지 책을 보는 것이다. 그럼 진정으로 법은 얻지 못할 것이다).

한 가지 일이 생각난다. 한 수련생이(수련 시간이 짧지 않다) 법공부와 연공시간은 정확히실천했다. 하지만 자신과 가족에게 어떤 큰일이 발생하면 사람을 찾아가서 점을 본다. 그 수련생에게 말하고 싶다(만약 본 문장이 발표되면 수련생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다시 ‘전법륜(216쪽)을 착실히 배우면 자신이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안으로 찾아 착실히 수련하고, 사부님이 하라고 당부하신 ‘세 가지 일’을 하면 우리의 제고는 그 속에 있다. 이때 우리가 구세력의 ‘교란’을 배척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건드릴 수 없기 때문에 교란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바른 것)을 붙잡고 법 공부를 하며, 마음을 닦고 ‘세 가지 일’을 잘 하면 된다. 간단하고 명확하다. 필요로하지 않는 것(부정적인 것)을 적게 생각해야 한다.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는 것이 많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하나의 부동함(不動)이 만(萬) 가지 움직임을 제약하는 것이다!”[4]가 생각난다. 그 속에 이 층차의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상은 나의 작은 생각이고 인식이니, 치우치는 점은 수련생이 시정해 주시기를 바란다. 우리가 모두 수련의 길에서 바르고 안정하게 걷고, 조사정법과 중생구도를 더욱 잘 하고, 대법제자로서의 신성한 사명을 저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2003년 정월대보름설법’

[3]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각지 설법4-2004년 시카고법회 설법’

[4]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미국중부법회설법’

문장발표 : 2016년 4월 29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4/29/32728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