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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념이 있어야만 비로소 정행이 있고 비로소 바른 환경이 있다

글 /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9년 2월 19일] 우리는 하나의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사악한 노동교양소에서 마찬가지로 모두 “파룬따파 하오.”라고 외쳤는데, 어떤 수련생은 얼마 되지 않아 석방되었고, 어떤 동수들은 도리어 더욱 엄중하게 박해를 받았다. 마찬가지로 모두 단식하였는데, 어떤 수련생은 정념으로 뛰쳐나왔고, 어떤 수련생은 도리어 여러 차례 음식물을 주입당하는 참혹한 박해를 받았으며 심지어 박해받아 세상을 떠났다. 병마의 박해 하에 마찬가지로 병원에 가지 않아도 어떤 동수들은 신속히 회복될 수 있었지만 어떤 수련생은 갈수록 엄중해졌다······. 행위는 같지만 결과는 매우 같지 않다. 그리하여 어떤 동수들은 어리둥절해 한다. 본 지역에 한 수련생은 불법 노동교양을 하고 돌아온 후에 줄곧 그리 정진하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남을 탓하면서 말했다. “구치소에서 사악에게 매우 엄중하게 맞아 나는 사부님을 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또 어떤 수련생은 병마의 박해 하에서 고통 속에서 억울해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나는 적지 않은 것을 감당했어요. 어찌하여 사부님께서 나를 관계하지 않은가요?”

대법은 변하지 않고 파괴되지 않는데, 매 생명에 대해 모두 마찬 가지이다. 복잡한 표면 현상은 눈의 한층 먼지만 기만 할 수 있지만 우리들이 이 한 층의 먼지를 털어 버리면 곧 문제의 근본 소재(所在)를 발견할 수 있는데, 씬씽이다. 외재적인 행위는 다만 사람에게 보일뿐인 것으로, 그 마음의 전변이야말로 실재적이고 실재적인 것이다. 행위의 개변은 매우 쉽고 역시 매우 간단한 것이다. 하지만 마음의 변화야말로 가장 어렵고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수련은 왁자지껄 크게 떠들어 대는 것이 아니며, 조롱박을 본떠서 바가지를 그리는 것도 아니고 모양을 본뜨는 것도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줄곧 강조하셨다. “당신은 진정 그 마음을 착실하게 수련 하여야 된다.”, “진정으로 수련하는 목적은 그 마음을 수련 하는 것이다.”(《전법륜》) 비록 우리는 안을 향해 찾아야 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지만 문제에 부딪치면 우리는 얼마만한 정도에서 행위를 개변하는 것을 중시하였는가? 심지어는 주위 사람의 행위를 개변하려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라고 요구하며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고 “자신의 수련을 교란하지 못한다.”라고 하면서 수련의 근본을 소홀히 하고 자신의 그 마음을 제고하는 것을 소홀히 한다.

더욱이 박해를 받고 있는 동수들은 급히 사악을 해체하고 박해를 결속해야겠다는 조급한 마음으로 하여 더욱 쉽게 “특효약을 찾는다”라는 일종 생각이 쉽게 나타나므로 행위를 개변하는 데로 더욱 쉽게 주의력을 돌리곤 한다. 동수와 교류할 때에 제기하는 문제는 흔히 “나는 응당 어떻게 하는가.”이지 “나는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가.”가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각지 설법3》의 《대뉴욕 지구 법회 설법》에서 말씀 하셨다. “당신이 누가 정행하지 않았음을 보았을 때 사실 바로 그는 정념이 부족하였다 .사상이 사람의 행동을 지도하기 때문이며 당신의 정념이 충족할 때 당신의 행위는 긍정하고 단정한 것으로써 정념이 부족하다고 말할 때 행위는 단정하지 않다.” 행위상의 개변은 필수적인 것이지만 우선은 심성의 제고 이다. 심성을 제고하지 않고 억지로 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하고 있는 것이지 신이 하는 것이 아니기에 위력이 없고 효과도 좋을 수 없다. 그러나 심성을 제고하려고 생각한다면, 다른 더욱 좋은 방법이 없이 다만 마음을 고요히 하고 앉아 법공부를 많이 하고 안을 향해 찾는 것이다.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본보기가 없으며 개개인이 걷고 있는 길이 모두 다르다. 왜냐하면 개인의 기초가 같지 않고 각종 집착심의 대소가 같지 않고 생명의 특징이 같지 않고 속인 중에서의 하는 일이 같지 않으며 가정환경이 같지 않은 등등의 요소가 개개인의 수련의 길이 같지 않고, 집착심을 버리는 상태가 같지 않고, 관을 넘기는 크고 작음이 같지 않음을 결정하였다. 그러므로 표면상에서 다른 사람이 닦아 놓은 길을 찾기가 어려우며 편차에 편승하기란 더욱 불가능 하다. 만약 정말로 닦아놓은 길과 순풍차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 또한 결코 수련이 아니다.” “마난 앞에서 어떻게 하는가는 모두 자신이 깨달아야 한다. 매 차례의 제고가 바로 자신이 증오한 과위가 승화하고 있는 것이다.” (《정진 요지2》〈길〉) 수련인의 정행은 씬씽이 제고된 후의 자연적인 체현이지 다른 사람의 작법을 배우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난 중에 있는 동수와 교류 할 때에 우리들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동수로 하여금 법을 많이 학습하고 정념을 가강하여 되도록 빨리 법리상에서 제고되어 올라오게끔 깨우쳐 주는 것이다. 만약 다만 행동 상에서 어떻게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기만 한다면, 그 수련생은 흔히 자신의 실제 상황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며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비록 요구대로 하였지만 다만 사람의 일면이 억지로 한 것이며 심지어 좋지 않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된다.

예를 들면, 모 수련생은 병마의 박해가 몹시 엄중한 상황 하에서 의연히 나가서 자료를 배포하고 진상을 알리는 것을 견지하였지만, 그의 그 마음이 제고되지 못하였고 근본적인 집착을 내려놓지 못했다. 마치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았다. “내가 오늘 좀 잘했으니 마땅히 좀 좋아야 하는데, 내가 내일 좀더 잘 하면 마땅히 좀더 좋아야 하는데! 그는 언제나 이 일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데 보기엔 그래도 마치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을 당신이 보라고 하면서 놓는 것 같다. 당신이 잘 하고 있는 것은 당신이 그것을 위해 잘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결코 진정한 대법제자로서 마땅히 가서 해야 할 것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각지 설법》〈대뉴욕 지구 법회설법〉)이와 같은 동수들은 그의 신체가 매우 빨리 나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대법 일을 하는 그 본신이 틈인 것으로 사악은 허를 타고 들어오게 된다. 이로 인해 일은 더욱 복잡하게 변하게 된다.

정법 수련 중에서 우리들은 오랫동안 사악한 환경에 처해 있음으로 해서 박해를 부정해야 하는 것에 관한 중요성을 줄곧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매우 쉽게 ‘밖을 향해 찾는’ 사상 이탈을 형성하게 된다. 사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정법 수련은 역시 자신의 그 마음을 수련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수련 하는 것이 아니다. 바르게 하는 것은 자신이고 자비하는 것은 중생이다. 일체 교란의 형성은 모두 좋지 않는 사상이 있는 속인이 사악에게 통제되어 비로소 우리 이 공간에서 표현되는 것이지만 그들의 사람 일면은 명백하지 못하다. 만약 우리들이 교란 앞에서 급히 저애력을 밀어버리려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한다면, 외적인 행위상에서 격렬하게 표현되어 속인과 모순 충돌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이 본신은 곧 인정(人情), 쟁투심, 두려워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 등 사람 마음의 혼합적인 표현으로서, 기점은 자신이 하려는 일을 집착 하는 것인데, 자신을 실증하기 위한 것이지 사악을 깨끗이 제거하고 중생을 구도하고 법을 실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직 우리들이 법공부를 많이 하고 안을 향해 찾아 집착을 닦아 버리며 발정념을 많이 하고 사악을 깨끗이 제거한 후, 이용당한 사람들에게 다시 상냥하고 자비롭게 진상을 알려야만 비로소 이 사람을 구할 수 있어 교란과 박해를 철저히 결속 지을 수 있다. 이 과정은 가능하게 순식간일 수 있고 하루, 한 주, 혹은 시간이 더욱 길수도 있다. 관건은 사람 마음이 제고가 빠른가 늦은가에 있고, 정념이 나오는 것이 빠른가 늦은가에 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 하셨다. “조용히 생각해 보니 집착한 일 얼마이더냐 사람 마음을 덜면 악은 스스로 패하리라” ( 《홍음》〈슬퍼하지 마라〉)

개인의 소견이므로 법에 부합되지 않는 곳이 있다면 동수들의 자비한 지적이 있기를 희망합니다.

발표 : 2009년 2월 19일
갱신 : 2009년 2월 18일 20 :37:00
분류 : 수련마당
원문 :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9/2/19/19569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