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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의 박해를 폭로할 때 심태를 잘 장악해야 한다

글 / 헤이룽쟝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11월 20일】 사당은 소위 올림픽을 보위한다는 구실로 대법제자를 박해하였다. 선후로 만 명이 넘는 대법제자들이 납치되었다. 어떤 대법제자는 심지어 보귀한 육신까지 잃었다. 어떤 이는 그 어떤 법률적 절차도 없이 바로 불법(不法)적인 판결 혹은 노동교양을 받았고, 또 어떤 동수의 가족은 거대한 돈을 협박으로 갈취당한 후에야 수련생을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박해의 양에 비교하면 명혜망에 올라온 박해진상 폭로 문장은 너무나 적다.

나는 이 문제를 반복하여 사고하였다. 이러한 거대한 난 중에서 무엇 때문에 사악을 폭로하지 못하는가? 일부 동수들은 가능하게 아직도 사람의 마음의 방해가 있어 폭로한 후 다시 박해를 받을까봐 두려운 마음이 있는 것이다. 몇 년 동안 나는 감옥에 있는 동수들을 구하기 위하여 일찍이 현지의 사악을 폭로하는 문장을 썼었다. 문장이 발표된 후 정말로 악인에 의해 소란을 받았으며, 구하고자 했던 대상 동수도 악경에 의해 엄중한 박해을 받게 되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될 수 있었는지?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사악을 폭로하는 것은 박해를 감소시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람들이 진상을 알게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악이지 대법제자가 아니다.” (《정진요지2》〈건의〉)라고 하셨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사악을 폭로한 후 우리는 도리어 박해를 당하게 되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모두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일부 경찰들은 그 악행이 노출된 후 진정으로 회개하고는 다시는 악행을 하지 않았다.

나는 부단히 법공부하면서 법을 깨달았다. 어느 날 설법 중 일부 단락을 보게 되었다.

“당신의 그 선량한 마음이 생길 때 당신이 하는 일은 아주 착하게 된다. 당신의 내심에서 외면에 이르기까지 표현은 언뜻 보아도 아주 선량하게 보이는데, 그때에 누구도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가서 누가 정말 당신을 업신여기더라도, 당신의 그 크나큰 자비심이 작용하여 당신은 되받아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힘으로서 그것 역시 당신으로 하여금 속인과 같지 않도록 한다.”, “당신이 겁난에 부딪쳤을 때, 그 자비심이 당신을 도와 난관을 넘게 하며, 동시에 나의 법신(法身)이 당신을 지켜주고 당신의 생명을 보호해 준다. 하지만 난(難)은 당신이 꼭 넘도록 한다.” (《파룬궁》〈제3강 심신수련〉)

나는 이 단락의 법을 공부하고 나서, 예를 들면 방할(棒喝)과 같이 전신의 세포가 모두 진동하면서 진정으로 선(善)의 힘을 느꼈다. 사악을 폭로하면 박해를 감소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주요한 것은 우리들이 사악을 폭로할 때의 기점과 심태이다. 우리들에게서 자비심이 나올 때에는 중생이 모두 고생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사부님께서 일정하게 우리를 도와준 것이다. 우리들이 경찰의 악행을 보았을때, 그들은 무의식 중에 업을 진 것이다.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생명은 무생지문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생명은 가련하지 않는가? 우리가 능히 가서 구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러므로 사악을 폭로하고 박해를 제지하는 중에서 진상을 알림으로써 그들을 이해시켜 다시는 악행을 범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를 구한 것이 아닌가? 동시에 역시 중생을 구도한 것이다. 그런데 박해를 폭로하는 진상문장을 쓸때 능히 속인과 마찬가지로 원한의 심태로 글을 쓸 수 있는가? 바로 완전이 선(善)의 심태로, 일체 중생을 구도한다는 심태로 써야만 완전히 그를 위한 것이다. 이것이 그래 이런 생명에 대해 책임지고 구도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심태로 글을 쓴다면 그가 능히 받아들이지 않고 반성(反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내가 쟁투심과 원한의 마음으로 글을 썼다면 효과가 일정하게 좋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악이 악을 처단하기 때문에 “쩐(眞), 싼(善), 런(忍)”의 우주 특성을 어기게 된다. 여기에서 나는 두 가지를 체득하였다.

1. 안에서 찾다

자신이 사악을 폭로할 때에는 그 기점과 심태가 정확한가를 보아야 한다. 만약 중생구도의 기점에 섰다면 그것은 틀림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선(善)을 수련하기에 무슨 일을 하던지를 막론하고 우선 다른 사람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경찰도 사람이다. 그도 생존을 위하여 사당의 도구가 되었다. 사실 그들의 삶도 아주 힘들다. 그들도 어떤 이는 사당의 무신론의 독해를 너무 깊이 받았기 때문에 진상을 모르고 무의식 중에 갚을 수 없는 큰 업을 짓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어떤 극히 개별적인 사악한 악경은 남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하면서 눈앞의 이익을 위하여 사당이 무엇을 하라고 하면 무엇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법을 파괴하고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일체 죄악은 모두 사당과 대마두가 받아야 한다. 당연히 이러한 사악의 박해중에서 매개 생명은 모두 새롭게 자기의 위치를 정하게 된다. 누가 어떤 나쁜 일를 했으면 모두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 그러므로 전반 중생구도의 원칙에 입각하여 문장을 써야만 비로소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법공부하는 중에서 나는 하나의 좋지 않은 마음, 쟁투심 또 원망하는 마음을 찾았다. 사실 쟁투심이 일어나면 바로 선(善)이 없는 것이므로 쓰면 쓸수록 쟁투심이 강해진다. 그러면 사악에게 공간을 줄 수 있는데, 바로 빠뜨림이 생긴다. 왜냐하면 사악에게 부합되기에 사악은 박해의 구실을 만든다. 쟁투심은 악(惡)으로서 우주의 “쩐(眞), 싼(善), 런(忍)” 특성과 이탈된다.

다른 하나는 두려운 마음, 사악을 노출시키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심태가 온정되지 못하여 또 쓰려고 생각했다가 또 감히 쓰지 못한다. 또 박해 받을까봐 두려워 머리를 저으며 이랬다 저랬다 하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사실 바로 사람의 마음이 중하여 파고 드는데, 아직도 자사자리(自私自利)로 인해 정념이 바르지 않고 마음이 견결하지 못함으로 인해 사악을 불러오게 된다. 이러한 박해는 자신의 마음이 바르지 않은데서 구한 것이다. 만약 견결히 사악을 폭로하고 중생을 구도하겠다는, 이러한 견결한 일념을 보존한다면 사악은 감히 박해하지 못한다.

중생구도는 주요하게 진상을 알리는 것이다. 우리는 진상을 그들에게 말할 때 완전히 순정한 심태여야 하고 그들에게 대법을 파괴하고 대법제자를 박해하면 정말로 악보를 받는다는 인과의 관계를 알려줘야 한다. 어떤 이는 자신이 직접 보응받게 되고, 어떤 이는 가족이 보응을 받으며 특히 자녀들이 보응을 받는 사례를 그들에게 말해주면 그들이 능히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완전히 그를 좋게 하기 위해서이기에 그들은 일정하게 원래의 악념(惡念)으로부터 전변된다. 당연히 구할 수 없는 것도 있다. 그것은 그외의 다른 일이다.

2. 사악을 폭로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수련

한 단락의 시간에 나는 사존께서 말씀하신 사악을 폭로하는 것에 관한 법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박해를 감소해야 한다는 방면의 법리를 완전히 사람의 일면으로 이해했다. 그 결과 사악을 노출시키는 문장이 발표되자 사악들이 곧바로 찾아와서 소란을 피웠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비록 아주 긴 시간 나도 진정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사존과 대법을 견결히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7.20” 이후 나는 일찍이 여러 번 사악에게 납치되었다. 그러나 나는 견정한 정념으로 “오직 사부님과 대법만이 나를 능히 구할 수 있고, 능히 구도할 수 있다.” 라고 생각했다. 나의 굳은 의지는 움직이지 않았고, 이 일념으로 정착되었다. 그리하여 몇 번의 박해로부터 모두 탈출하였다. 몇 번 모두 놀란 일이 있었지만 모두 위험은 없었다. 그런데 사악을 폭로하고는 반대로 교란을 받는 것은 또한 무엇 때문인가? 깊이 파고 들면서 그 근원을 찾게 되었다. 바로 나의 법공부가 깊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마음이 많으면 법에서 법을 인식하지 못하고 신의 일면이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여 사람의 일면이 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하나는 두려운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쟁투심, 원망하는 마음에서 불법(佛法)을 이탈한 것이다.

신의 자비는 영원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련인으로서 선한 마음 역시 마땅히 영원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대법을 파괴하는 생명에 대하여,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므로 악인의 악행을 제지하는 것 역시 선행(善行)이다. 사악에게 독해된 중생을 제지하여 능히 더욱 많은 중생을 구도하는 이것이 모두 진정한 선(善)이다. 나는 점차적으로 선악의 본질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우리는 반드시 선(善)을 수련해야 하여, 자신을 철저히 청리하면서 각종 집착을 버리고, 법리로서 자신을 깨끗이 씻고, 자신을 바로 잡아 가장 순정한 상태에 도달하여 신(神)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 오직 신만이 능히 일체 사악을 소멸할 수 있으며 사람은 그러한 능력이 없는 것이다.

불법(佛法)은 끝이 없다. 그런데 끝이 없는 위대한 법리를 우리는 얼마나 깨달았으며, 신념을 얼마나 수련했으며, 위대한 불법을 얼마나 얻었으며, 동화는 얼마나 되었는가? 위대한 불법은 또 한 차례의 점화로 나를 깨우쳤다. 나는 신의 길을 가는 수련인이다. 만약 완전히 신념(神念)으로 사악을 폭로한다면 사악은 자멸하게 된다.

우리들은 오래지 않아 새로운 우주의 신이 된다. 새 우주의 생명은 모두 공적인 것을 위하고 다른 사람을 위한다. 사악을 폭로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과정에서 부단히 자신의 “사(私)”를 폭로하고 해체해야만 그 아름다운 천국으로 갈 수 있다. 하나의 낡은 세포는 모두 가지고 갈 수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법공부를 많이 하고 자신을 잘 수련하여, 더욱 많은 중생을 구도한다면 사악은 감히 박해하지 못할 것이다.

층차의 제한으로 만약 법에 부합되지 않은 곳이 있다면 자비로 지적해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08년 11월 20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8/11/20/190103p.html